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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마가복음 정진우 목사............... 조회 수 3665 추천 수 0 2003.08.04 00: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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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4:3-9 
설교자 : 정진우 목사 
참고 : 새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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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신 말씀 가지고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하느님 말씀 증언하려 합니다. 세상의 재화란 무릇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왜 비싼 향유를 낭비하는가? 가난한 이들이 얼마인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주로 많이 듣는 이야기.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든지 또 신문에서 많이 듣는 이야기들 있지요. 지역감정을 타파해야한다든지. 정치는 썩었다든지. 병역비리나 미군범죄같은 것들이 근절되어야 한다든지. 미국은 불량국가라든지. 수구공안세력의 발호를 저지하고 개혁적이고 힘있는 민주정부를 세워야 한다든지. 그런 말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시급히 개혁되어야 한다든지 그런 말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런 말들, 대개 우리가 많이 쓰고 듣던 말들은 인류의 시초부터 있어왔지만 그런 세상은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리만 그런 말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다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렇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오늘 저는 이런 문제를 새길교회 교우들과 한번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왜 좋은 말 좋은 사상 좋은 종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렇게 변화하지 않느냐는 문제 말입니다. 아직 좋은 신학 좋은 사상 좋은 종교 좋은 언어가 부족해서, 그런 것들을 더 많이 펼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참 순진한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복음서 세 곳에 나옵니다. 마태와 마가에는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로 요한복음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와 결부하여 나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로 가신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즉 이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를 죽일 음모가 시사각각으로 예수 운동을 조여 오는 상황 속에서 문둥이 촌 베다니로 숨어든 것이 아닐까요? 요즘은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그런 일이 많지 않습니다만 제가 학교 다니던 70년대 말은 늘 도망자들이 주위에 있었습니다. 그때 수사당국으로부터 쫓기는 일을 '도바리 깐다' 라고 하는데 요즘은 그런 말 많이 안 쓰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후 문맥은 바로 이런 도바리 까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가 이 부분에서 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도망자 예수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든 문둥이 마을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오늘 우리는 만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여인. 공관복음서는 어떤 여인이라고 하고 요한은 마리아라고 하는 그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순간 방안에는 향유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문둥이집, 고름냄새 찌들어 진동하는 그 집안에 향기라니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까?

  세상을 진정 아름답게 하는 것, 더 이상 문둥이 마을이 더럽고 추한 곳이 아닌 향기나는 곳이되는 비밀이 이것입니다. 옥합을 깬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누가 이 대목에서 문둥이가 더럽다고 할 수 있습니까? 더러운 것은 문둥이가 아닙니다. 더러운 것은 한번도 자기를 깨어본 적이 없는 이기와 탐욕이지요. 문둥이 집안에 가득찬 향기의 진동 가슴이 벅차 오르지 않습니까? 아 문둥이 집의 향기라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일입니까?

  그런데 사람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 앞에서 이렇게 벅찬 감동의 순간에조차 그 향기를 맡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에서는 제자라고 하고 오늘 본문 마가에서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고 요한은 슬쩍 가롯 유다에게 돌리는 행동! 왜 요한은 여기서 가롯 유다를 등장시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 사건에 대한 가장 깊은 신학적 숙고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이런 행동이야말로 가롯 유다 같은 악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언동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사악한 행동! 예수를 팔아 넘긴 자에게나 어울리는 행동 !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 언행이 사악한 것이라 해서 그 주장이 틀렸다거나 거짓이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참으로 그럴듯한 이야기, 논리정연한 말!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주 자명한 진리. 그래서 아무도 쉽게 공박하지 못하는 이야기.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자.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예수는 오셨지요.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했지요. 그런 예수에게서 3년 동안 배웠으니 그런 말 하는 것 당연하지요. 제자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고 가롯 유다라고 하기도 하는 이 사람. 예수 신학교 성적 A+ 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건 말입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조금 거친 표현으로 하면 '구라 중의 왕구라'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런 왕구라에 속아 사는지 모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신학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서운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본문에서 전율할 공포 같은 것을 느낍니다. 사실 어쩌면 이천년 교회사에 던지는 화두일지도 모릅니다. 종종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무엇을 기대합니까? 우리는 무엇 하러 교회에 다닙니까? 도대체 왜 우리는 예수의 제자입니까? 좋은 말씀, 더 높고 고결한 윤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그런 것들을 기대하지 않았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그것도 오늘 본문에서 4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매우 분개하면서 말입니다.

  80대 20의 세계화의 시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 이 살벌한 무한 경쟁의 시대,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휩쓰는 광포한 자본의 시대, 거기 분노를 느끼지 않는 크리스챤이 있다면, 거기 분노할 줄 모르면 그게 예수의 제자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자. 그런 주장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신자유주의 반대, 그런 외침말입니다. 옳은 말이지요. 그래야지요. 마땅히 그래야지요. 다른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건 가롯 유다의 종교이지 예수의 진실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는 과연 누구 편입니까? 분개하여 나눔을 논하는 자와 향유를 부은 여인 사이에서 과연 예수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충돌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나눔을 논하는 자. 그리고 나누는 자.

  세상이 단 한 번이라도 나눔과 독점, 사랑과 미움, 진실과 거짓, 평화와 전쟁, 통일과 반통일로 나뉘어졌던 적이 있습니까? 모두가 나눔 사랑 통일이지요. 세상은 애당초 그런 이분법적 구분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겠습니다만 그런 이분법적 대결이 있다면 그건 나눔을 논하는 자와 나눔을 실천하는 자. 사랑을 외치는 자와 자기를 버려 온 몸을 사랑을 사는 자, 통일을 비는 자와 통일을 사는 사람의 구별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이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온 몸으로 진실하게 사랑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 대목에서 진실로 미워해야 하는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진보적 주장이 아닙니까? 가난한 자에 대한 신학, 가난한 자의 권리에 대한 관념적 옹호, 자기 헌신 없는 자기 손해 없는 주장, 그런 주장 하면 할수록 인기가 올라가고 그런 주장 하면 할수록 자기의 의가 드러나는 그런 간교한 주장 아닙니까?  

  진실은 자기 헌신입니다. 자기 손해입니다. 아니 자기 부정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 이것 없이 복음은 없습니다. 사랑은 없습니다. 구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입만 열면 나눔과 섬김의 구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주장 들을 때마다 울컥 짜증이 나곤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이런 말 함부로 하다간 저한테 실컷 욕 얻어 먹습니다. 나눔, 그게 좋은 말입니까? 나눔, 나누어본 사람은 잘 압니다. 나눔이라는 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건 좋은 말이기 이전에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위험한 말입니다. 나눔, 그것은 아름답고 좋은 말이기 훨씬 이전에 본질적으로 매우 위험한 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등한시합니다. 그리고 나눔을 논하지요.

  우리 역사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왜 우리는 그 순결한 여중생을 두 명이나 죽여놓은  자들을 무죄로 돌려보내야 합니까? 왜 우리는 핵전쟁의 위험 앞에서도 삼자 회담이니 하면서 회의장에도 못 들어가는 것입니까? 미국에서 잉여 농산물을 나누어 받아먹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미국에서 M1 소총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나눔이란 관념의 차원에서 아름다운 것이지만 현실에서 더럽고 추한 유혹입니다. 진정 나누어 본 사람만이 알수 있는 비밀! 나눔이란 나눔을 받는 자에게는 반드시 굴종의 유혹을 가져다 줍니다. 먹고 안 찍나. 똑같이 나눔이란 나눔을 베푸는 자에게는 반드시 지배에의 야욕이란 무서운 유혹을 일으키게 되어있는 것이 아닙니까? 굴종과 지배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운 나눔. 그게 가능하다고 자신 있다면 그때 나누어야지 그런 자신 없는 것들이 그런 짓들 하면 세상은 점점 더 어지러워 집니다..

  오늘 우리 시대 신앙한다는 것,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가난한 자들과 나누자. 그런 이야기나 풀어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던져 놓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꾸며져 있고, 그것이 아무리 완벽한 논리적 완결성을 가진 이론 일지라도 그건 또 하나의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신앙한다는 것 예수 믿는다는 것 그것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에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온 삶을 그리스도를 향해 던지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좋은 이론이나 좋은 생각이나 좋은 말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무슨 실천이니 운동이니 하는 것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아름답고 살아볼 만한 것은 누군가 자기를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럽고 추한 것은 무슨 무시무시한 질병이나 가난이나 악이 창궐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더럽고 추한 것은 무슨 문둥병이나 정신병 같은 질병 때문도 아니요 창녀나 세리 같은 인간들이 많기 때문도 아닙니다. 세상이 더럽고 추한 것은 모두가 목에 힘주고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구원의 드라마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드라마의 클라이막스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세상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 그게 성경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셨을 때 전지전능한 하느님조차도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과연 다 제쳐놓고 누가 끝까지 예수를 따랐을까? 똘망똘망, 어디서 많이 듣던 공자님 말씀 같은 옳은 이야기를 나불대는 인간들이었을까? 아니면 차마 부끄러워 얼굴한번 들지 못하고 옥합을 깬 이들이었을까?

  나눔을 논하는 자와 나눔을 실천하는 자. 과연 우리는 누구 편입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자. 이런 플랜카드가 어디서나 펄럭이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과연 지금 어디쯤 서 있는 것입니까? *

댓글 '2'

2011.04.02 15:26:13

왜 하느님이라고 하나용 하나님인데 다른 교단이나 이단은 아닌지요

chldyddn

2011.04.02 22:55:33

http://cyw.pe.kr/xe/37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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