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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0:1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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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명수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1970년에 리처드 바크는 그의 소설『갈매기의 꿈』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월남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냉전의 시기였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지성인 사이에서는 반전운동이 거세게 확산되면서,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띈 서구기독교 문화에 저항하는〈카운터 컬처〉운동이 퍼져나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반(反)문화 운동의 중심에는 히피들이 서 있는데, 그들은 서구적 가치 질서와 가부장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통기타를 메고 청바지를 입고 저자거리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슈퍼스타에게서 예수의 참 모습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비틀즈는 "let it be!"에서 성모 마리아의 입을 통하여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노래하게 함으로써 동서(東西)를 잇는 새로운 문화의 패러다임을 창출하였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박정희 군사정권 밑에서 당시 한국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56시간이라는 세계에서 최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으로 생존권 자체가 위협을 받던 시기였다. 1970년 11월 청계천 5가에서 피복 노동자로 일하던 전태일씨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분신(焚身)했다. 이 사건은 그 동안 개인영혼 구원과 교회성장주의에 안주(安住)해있던 한국교회를 긴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었고, KNCC 소속 교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민중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서남동, 안병무, 한완상을 중심으로 민중신학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 민중의 절망과 희망을 송창식, 양희은 등이 노랫말로 형상화하여 젊은이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당시 민중의 저항과 희망을 주제로 한 시대정신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와 같이 서구 기독교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저항이 세계의 젊은 지성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에『갈매기의 꿈』이 쓰여졌다. 이 책의 저자는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높이 나는 갈매기가 멀리 본다"는 식의 도덕적인 교훈을 넘어서, 지금까지 서구적 문화의 옷을 걸친 서구 기독교의 예수상을 해체(解體)하고,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새로운 예수상을 제시한다:
아침이 되어, 태양이 황금빛으로 바다를 물들이며 떠오르기 시작하자, 수천 마리의 갈매기들이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공중을 나르며 먹이를 찾기 위해 서로 아귀다툼을 한다. 헌데, 이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곳에서 한 어린 갈매기가 혼자 열심히 비행연습을 한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그는 백 피트 상공에서 부리를 치켜들고 공중선회를 해보았다. 잘 안 되었다. 곤두박질하기도 하고, 바닷가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바람에 밀려가 바닷물 속으로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나단은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 번, 열 번, 백 번, 조나단은 높게 그리고 빠르게 날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비행 연습을 반복하였다.
이와 달리 동료 갈매기들은 단지 부둣가에서 먹이를 찾기에 필요한 만큼 비행 연습을 하는데 그친다. 그들은 먹이를 얻기 위하여, 부둣가에 나갔다가 썩은 고기 한 마리를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나단은 달랐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보다 싱싱한 먹이를 구하고,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비전이 마음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조나단은 홀로 피나는 노력을 다 했다. "더 높이, 더 빨리!"
그런 사이에 조나단은 점차적으로 동료 사회로부터 외톨이가 되어갔다. 그러한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가 어느 날 조나단을 불렀다: "얘야, 높이 날기 위하여 연습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수 없는 거야. 친구들과 사귀는 것도 중요하단다." 현실과 타협하면서, 적당하게 어울리며 살아가는 처세술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조나단은 다른 동료들과 어울려 보려고 부둣가로 나가보았다. 그는 어선 주위를 맴돌며, 어부들이 버리고 간 죽은 물고기들을 향해 내리 날아갔다. 그는 다른 동료를 제치고 한 마리를 낚아챘다. 그러나 조나단은 친구들과 경쟁하는 것이 싫었다. 그는 잡은 고기를 늙은 갈매기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다시 혼자 바닷가로 나갔다. 그는 쉬지 않고 높고 빠르게 비행하는 수행정진을 계속하였다. 결국 조나단은 갈매기 사회의 규범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료 갈매기로부터 추방당한다. 그러나 조나단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밤낮으로, 홀로 수행정진을 계속했던 것이다. 독일 속담에 " bung macht den Meister"라는 말이 있다. 피나는 수련을 통해서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피나는 수행정진 끝에 드디어 조나단은 5천피트 상공에서 시속 250킬로미터로 날수 있게 되었다.
5천피트 상공을 날면서 조나단은 부둣가의 어선 주위를 맴도는 동료 갈매기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작은 티끌처럼 보였다. 그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진리를 터득한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볼 수 있다." 리처드 바크는 여기에서 주석을 달고 있다. "가장 높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비행하는 것은 갈매기의 권리이다. 이와 같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에 해당한다고..."
조나단은 새로운 세계에서 비행을 하다가 동양의 갈매기 치앙(壯子)을 만나 친구가 된다. 치앙이 조나단에게 말한다. 몸으로 비행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마음으로 비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마이스터가 될 수 있다. 이 말을 듣고 조나단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유는 곧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그러나 조나단은 여전히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 보고 치앙이 소리친다. "너는 이미 최고인데도, 왜 최고가 되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혀있는가? 그 집착을 버려라. 너는 이미 마이스터이다."
치앙은 조나단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당부하고 사라진다. "이웃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라." 조나단은 치앙의 당부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자기를 추방한 갈매기 사회로 다시 돌아간다. 자기를 미워한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기 위해서다. 조나단은 자기가 터득한 진리로 이웃에게 끝없이 사랑을 베푼다. 제자들을 모으고, 그가 체득한 비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어느 날 수제자 플레처가 비행연습을 하다가 그만 추락하여 죽고 만다. 그러자 조나단은 그를 날개 끝으로 가볍게 건드려 다시 살린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목격한 갈매기들이 조나단을 신(神)으로 떠받들려고 한다. 그들은 조나단을 신처럼 떠받들며 그에게 의존하려고 한다. 조나단은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수제자 플레처를 불러 유언을 한다: "나에 관해서 엉뚱한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 나를 신으로 떠받들지 않도록 해라. 나는 단지 한 마리의 갈매기에 불과하다. 네 눈이 너에게 속삭이는 것을 믿지 말라.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한계가 있다. 자유는 본래 네 속에 있다. 그것을 깨달아 알고, 갈고 닦으면 너도 명실공히 자유자재한 마이스터가 될 것이다." 말을 마친 뒤 조나단은 홀연히 사라진다.
서구 기독교가 추구한 도그마의 예수는 누구인가? 땅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이다. 천상에 앉아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두루 갖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모든 인간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며, 그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요,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오실 분이다. 예수는 예배와 제사의 대상이 대상이다. 기독교인을 특별히 편애(偏愛)하셔서 그를 믿는 자에게 삼박자 복을 주시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처드 바크가 추구한 예수의 모습은 이와 다르다. 한 갈매기의 삶을 통해서 그가 그리고자 했던 예수상(像)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의 본성을 '자유'(自由)에서 찾고, 자기 향상을 위하여 끝없이 수행 정진하는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예수 모습이다. 결국 자기가 속한 사회로부터 질시와 천대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제 길'(my way)을 가는 예수의 모습이다. 스스로 메시아라는 자의식(自意識)을 갖지 않았던 예수, 하나님으로 추앙되는 것을 거부했던 예수, 철저하게 '사람의 아들'로써 구도자(求道者)의 삶을 살았던 예수이다. 그러나 그 예수는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에서 민중과 부대끼며 살았던 분이다.
둘째로 리처드 바크가 그리고자 했던 예수는 이웃을 향하여 항상 열려진 삶을 사는 '민중의 동반자(同伴者)'이다. 이는 복음서가 전해주는 역사적 예수의 삶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오천명의 군중의 허기를 채워준다. 그에게 오는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다. 예수는 수많은 병자를 무상으로 치료해주면서 그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를 고친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있는)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네 안에 있는)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pistis)은 물론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내면에 잠재해있는 생명 에너지, 치유 능력을 지칭한다. 인간의 몸 속에는 모든 질병을 치유하여 회복할 수 있는 '생명과 치유의 빛'을 하나님은 태생적으로 인간에게 주셨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의사는 단지 도움을 줄뿐, 몸 속에 들어있는 치유능력이 스스로 고치는 것이다. 예수는 단순히 병자의 내면에 잠재해있는 치유회복 능력을 일깨워주는 도우미 역할을 할 뿐이다. 이것이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의미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손에 잡히는 세계가 세계의 전부인 줄 착각하며, 거기에 코를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릇 형상을 지닌 모든 것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凡所有相皆是虛妄)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설파하신 예수,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서 지탱된다는 진리를 설파하신 예수, 믿음의 세계, 진리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생명의 세계는 밖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네 마음의 세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친 예수를 리처드 바크는 제시한다.
『갈매기의 꿈』에서 그가 새롭게 그리려고 했던 대안(代案)은 한 마디로 동양적 지혜의 예수이다. 한편으로 자기향상을 위하여 끊임없이 수행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이웃을 향하여 항상 베푸는 삶을 사는 예수이다. 위로는 자유와 진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민중과 자기를 일치시켜나가는 예수이다. 노자의 언어를 빌리며, 위로는 빛과 조화를 이루고 아래로는 먼지와 같이 되는 삶으로 일관했던 "화기광동기진(和其光同其塵)"의 예수상이요, 대승불교의 언어를 빌리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뭇 생명과 하나됨을 추구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예수상이다. 그런데 예수에게 상구보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화중생으로 가는 길목이요 방편일 뿐이다. 예수에게서 상구보리는 하화중생에서 완성된다. 예수가 생전에 벌인 하나님 나라 선교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인가? 배고픈 사람과 밥 나눠먹는 운동이요, 가난한 병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운동이다. 곧 동기진(同其塵) 운동이요, 하화중생(下化衆生) 운동이다.
인간은 어떻게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모든 종교에게 던져진 화두(話頭)가 아닐 수 없다. 마가가 섬긴 초대교회 신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본문에서 마가가 제시하고 있는 영생(永生)을 얻는 길은 무엇인가? 계명을 지키는 일, 곧 수행정진을 해야 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했다고 해서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는가? 그렇지 않다. 깨달은 사람에게도 수행은 필요한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예수의 삶이나 계명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의 문제를 떠나서, 예수의 가르침을 지키고 그의 삶을 따르는 것은 크리스천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향상을 위한 수행의 삶이 이웃에게 베푸는 삶으로 이어질 때,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
예수의 마이웨이(my way)는 이웃을 섬기는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다. 예수는 그 마이웨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그 길을 가라고 촉구한다. 그 마이웨이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이웨이'라는 팝송이 있다. 이 팝송은 본래 불란서 샹송이었는데, 폴 앵커가 편곡하고,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렀다. 이 팝송은 인생의 성공이나 실패를 떠나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마지막까지 마이웨이를 걸어갔던 예수의 삶을 우리에게 회상(回想)시켜준다. 새길교회가 추구하는 뉴웨이(new way)가 예수께서 걸어가신 마이웨이가 되길 빈다.
And now the end is near, So I face the final curtain. My friends,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I've lived a life that's full, I've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Regrets, I've had a few,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I did what I had to do,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I planned each charted course,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Oh,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Yes, there were times, I'm sure you know. When I bit off more than I could chew. But through it all when there was doubt. I ate it up and spit it out.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And did it my way. I've loved, I've laughed and cried, I've had my fills, my share of losing. And now as tears subside. I find it all so amusing, To think I did all that, And may I say, not in a shy way, Oh, no, no not me, I did it my way. For what is a man, what has he got, If not himself, then he has not, To say the things he truly feels, And not the words of what he would reveal,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And did it my way. Yes, it was my way.
(이제 내 인생의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군. 그래 이제 마지막 커튼이 보이는군. 친구들이여, 분명하게 말하지, 내가 확신하는 내 인생의 부분만을 얘기하겠어, 나는 풍요롭게 인생을 살았지, 모든 길을 다 걸었어, 저 높은 곳까지 말야, 그런데, 그런데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식으로' 살았다는 거야, 후회라구? 그런 것은 별로 없었어, 아, 그렇지, 후회라고 말할 것은 별로 없군.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만을 한 거야, 그리고 예외 없이 다 성취해냈어, 계획된 길을 걸어왔지, 매우 조심스럽게, 매우 조심스럽게, 내 인생의 뒤안길에서, 그런데 말야, 더 중요한 것은, '내 식으로' 살았다는 거야. 네가 잘 알듯이, 어려울 때도 많았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분에 넘치는 일에 부딪힌 때도 있었지, 그리고 회의가 물밀듯이 밀려왔어, 그런 땐 난 회의를 다 씹어버렸지, 그리고 내 뱉어버렸어, 그리고 용감하게 그것에 마주섰지. 그리고 거인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리고, '내 식으로' 해냈어, 사랑도 했지, 웃기도, 울기도 했어, 얻을 때도 있었고, 잃을 때도 있었지, 눈물이 가라앉은 지금 생각해보니, 그 주마등 같이 지나간 일들이, 너무도 즐겁기만 하군. 생각하면, 그 모든 일을 내가 했다는 거야. 부끄럽기도 했냐구? 그렇지 않았어, 아냐! 아냐! 결코 부끄럽지 않았어, '내 식으로' 해냈으니까, 사람이 무엇인가? 진정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소신 없이 살았다면, 그에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거야, 자기가 정말 체험한 것을 말해야 된다구,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해서는 안 되지, 내 인생을 훑어보라구, 난 정말 세게 한방 먹였지. 그리고 내 식으로 해 냈어. 그래, 그것이 내가 살아온 길이야)
당시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박정희 군사정권 밑에서 당시 한국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56시간이라는 세계에서 최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으로 생존권 자체가 위협을 받던 시기였다. 1970년 11월 청계천 5가에서 피복 노동자로 일하던 전태일씨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분신(焚身)했다. 이 사건은 그 동안 개인영혼 구원과 교회성장주의에 안주(安住)해있던 한국교회를 긴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었고, KNCC 소속 교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민중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서남동, 안병무, 한완상을 중심으로 민중신학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 민중의 절망과 희망을 송창식, 양희은 등이 노랫말로 형상화하여 젊은이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당시 민중의 저항과 희망을 주제로 한 시대정신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와 같이 서구 기독교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저항이 세계의 젊은 지성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에『갈매기의 꿈』이 쓰여졌다. 이 책의 저자는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높이 나는 갈매기가 멀리 본다"는 식의 도덕적인 교훈을 넘어서, 지금까지 서구적 문화의 옷을 걸친 서구 기독교의 예수상을 해체(解體)하고,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새로운 예수상을 제시한다:
아침이 되어, 태양이 황금빛으로 바다를 물들이며 떠오르기 시작하자, 수천 마리의 갈매기들이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공중을 나르며 먹이를 찾기 위해 서로 아귀다툼을 한다. 헌데, 이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곳에서 한 어린 갈매기가 혼자 열심히 비행연습을 한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그는 백 피트 상공에서 부리를 치켜들고 공중선회를 해보았다. 잘 안 되었다. 곤두박질하기도 하고, 바닷가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바람에 밀려가 바닷물 속으로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나단은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 번, 열 번, 백 번, 조나단은 높게 그리고 빠르게 날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비행 연습을 반복하였다.
이와 달리 동료 갈매기들은 단지 부둣가에서 먹이를 찾기에 필요한 만큼 비행 연습을 하는데 그친다. 그들은 먹이를 얻기 위하여, 부둣가에 나갔다가 썩은 고기 한 마리를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나단은 달랐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보다 싱싱한 먹이를 구하고,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비전이 마음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조나단은 홀로 피나는 노력을 다 했다. "더 높이, 더 빨리!"
그런 사이에 조나단은 점차적으로 동료 사회로부터 외톨이가 되어갔다. 그러한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가 어느 날 조나단을 불렀다: "얘야, 높이 날기 위하여 연습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수 없는 거야. 친구들과 사귀는 것도 중요하단다." 현실과 타협하면서, 적당하게 어울리며 살아가는 처세술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조나단은 다른 동료들과 어울려 보려고 부둣가로 나가보았다. 그는 어선 주위를 맴돌며, 어부들이 버리고 간 죽은 물고기들을 향해 내리 날아갔다. 그는 다른 동료를 제치고 한 마리를 낚아챘다. 그러나 조나단은 친구들과 경쟁하는 것이 싫었다. 그는 잡은 고기를 늙은 갈매기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다시 혼자 바닷가로 나갔다. 그는 쉬지 않고 높고 빠르게 비행하는 수행정진을 계속하였다. 결국 조나단은 갈매기 사회의 규범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료 갈매기로부터 추방당한다. 그러나 조나단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밤낮으로, 홀로 수행정진을 계속했던 것이다. 독일 속담에 " bung macht den Meister"라는 말이 있다. 피나는 수련을 통해서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피나는 수행정진 끝에 드디어 조나단은 5천피트 상공에서 시속 250킬로미터로 날수 있게 되었다.
5천피트 상공을 날면서 조나단은 부둣가의 어선 주위를 맴도는 동료 갈매기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작은 티끌처럼 보였다. 그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진리를 터득한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볼 수 있다." 리처드 바크는 여기에서 주석을 달고 있다. "가장 높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비행하는 것은 갈매기의 권리이다. 이와 같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에 해당한다고..."
조나단은 새로운 세계에서 비행을 하다가 동양의 갈매기 치앙(壯子)을 만나 친구가 된다. 치앙이 조나단에게 말한다. 몸으로 비행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마음으로 비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마이스터가 될 수 있다. 이 말을 듣고 조나단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유는 곧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그러나 조나단은 여전히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 보고 치앙이 소리친다. "너는 이미 최고인데도, 왜 최고가 되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혀있는가? 그 집착을 버려라. 너는 이미 마이스터이다."
치앙은 조나단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당부하고 사라진다. "이웃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라." 조나단은 치앙의 당부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자기를 추방한 갈매기 사회로 다시 돌아간다. 자기를 미워한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기 위해서다. 조나단은 자기가 터득한 진리로 이웃에게 끝없이 사랑을 베푼다. 제자들을 모으고, 그가 체득한 비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어느 날 수제자 플레처가 비행연습을 하다가 그만 추락하여 죽고 만다. 그러자 조나단은 그를 날개 끝으로 가볍게 건드려 다시 살린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목격한 갈매기들이 조나단을 신(神)으로 떠받들려고 한다. 그들은 조나단을 신처럼 떠받들며 그에게 의존하려고 한다. 조나단은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수제자 플레처를 불러 유언을 한다: "나에 관해서 엉뚱한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 나를 신으로 떠받들지 않도록 해라. 나는 단지 한 마리의 갈매기에 불과하다. 네 눈이 너에게 속삭이는 것을 믿지 말라.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한계가 있다. 자유는 본래 네 속에 있다. 그것을 깨달아 알고, 갈고 닦으면 너도 명실공히 자유자재한 마이스터가 될 것이다." 말을 마친 뒤 조나단은 홀연히 사라진다.
서구 기독교가 추구한 도그마의 예수는 누구인가? 땅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이다. 천상에 앉아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두루 갖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모든 인간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며, 그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요,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오실 분이다. 예수는 예배와 제사의 대상이 대상이다. 기독교인을 특별히 편애(偏愛)하셔서 그를 믿는 자에게 삼박자 복을 주시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처드 바크가 추구한 예수의 모습은 이와 다르다. 한 갈매기의 삶을 통해서 그가 그리고자 했던 예수상(像)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의 본성을 '자유'(自由)에서 찾고, 자기 향상을 위하여 끝없이 수행 정진하는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예수 모습이다. 결국 자기가 속한 사회로부터 질시와 천대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제 길'(my way)을 가는 예수의 모습이다. 스스로 메시아라는 자의식(自意識)을 갖지 않았던 예수, 하나님으로 추앙되는 것을 거부했던 예수, 철저하게 '사람의 아들'로써 구도자(求道者)의 삶을 살았던 예수이다. 그러나 그 예수는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에서 민중과 부대끼며 살았던 분이다.
둘째로 리처드 바크가 그리고자 했던 예수는 이웃을 향하여 항상 열려진 삶을 사는 '민중의 동반자(同伴者)'이다. 이는 복음서가 전해주는 역사적 예수의 삶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오천명의 군중의 허기를 채워준다. 그에게 오는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다. 예수는 수많은 병자를 무상으로 치료해주면서 그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를 고친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있는)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네 안에 있는)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pistis)은 물론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내면에 잠재해있는 생명 에너지, 치유 능력을 지칭한다. 인간의 몸 속에는 모든 질병을 치유하여 회복할 수 있는 '생명과 치유의 빛'을 하나님은 태생적으로 인간에게 주셨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의사는 단지 도움을 줄뿐, 몸 속에 들어있는 치유능력이 스스로 고치는 것이다. 예수는 단순히 병자의 내면에 잠재해있는 치유회복 능력을 일깨워주는 도우미 역할을 할 뿐이다. 이것이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의미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손에 잡히는 세계가 세계의 전부인 줄 착각하며, 거기에 코를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릇 형상을 지닌 모든 것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凡所有相皆是虛妄)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설파하신 예수,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서 지탱된다는 진리를 설파하신 예수, 믿음의 세계, 진리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생명의 세계는 밖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네 마음의 세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친 예수를 리처드 바크는 제시한다.
『갈매기의 꿈』에서 그가 새롭게 그리려고 했던 대안(代案)은 한 마디로 동양적 지혜의 예수이다. 한편으로 자기향상을 위하여 끊임없이 수행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이웃을 향하여 항상 베푸는 삶을 사는 예수이다. 위로는 자유와 진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민중과 자기를 일치시켜나가는 예수이다. 노자의 언어를 빌리며, 위로는 빛과 조화를 이루고 아래로는 먼지와 같이 되는 삶으로 일관했던 "화기광동기진(和其光同其塵)"의 예수상이요, 대승불교의 언어를 빌리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뭇 생명과 하나됨을 추구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예수상이다. 그런데 예수에게 상구보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화중생으로 가는 길목이요 방편일 뿐이다. 예수에게서 상구보리는 하화중생에서 완성된다. 예수가 생전에 벌인 하나님 나라 선교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인가? 배고픈 사람과 밥 나눠먹는 운동이요, 가난한 병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운동이다. 곧 동기진(同其塵) 운동이요, 하화중생(下化衆生) 운동이다.
인간은 어떻게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모든 종교에게 던져진 화두(話頭)가 아닐 수 없다. 마가가 섬긴 초대교회 신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본문에서 마가가 제시하고 있는 영생(永生)을 얻는 길은 무엇인가? 계명을 지키는 일, 곧 수행정진을 해야 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했다고 해서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는가? 그렇지 않다. 깨달은 사람에게도 수행은 필요한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예수의 삶이나 계명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의 문제를 떠나서, 예수의 가르침을 지키고 그의 삶을 따르는 것은 크리스천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향상을 위한 수행의 삶이 이웃에게 베푸는 삶으로 이어질 때,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
예수의 마이웨이(my way)는 이웃을 섬기는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다. 예수는 그 마이웨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그 길을 가라고 촉구한다. 그 마이웨이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이웨이'라는 팝송이 있다. 이 팝송은 본래 불란서 샹송이었는데, 폴 앵커가 편곡하고,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렀다. 이 팝송은 인생의 성공이나 실패를 떠나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마지막까지 마이웨이를 걸어갔던 예수의 삶을 우리에게 회상(回想)시켜준다. 새길교회가 추구하는 뉴웨이(new way)가 예수께서 걸어가신 마이웨이가 되길 빈다.
And now the end is near, So I face the final curtain. My friends,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I've lived a life that's full, I've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Regrets, I've had a few,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I did what I had to do,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I planned each charted course,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Oh,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Yes, there were times, I'm sure you know. When I bit off more than I could chew. But through it all when there was doubt. I ate it up and spit it out.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And did it my way. I've loved, I've laughed and cried, I've had my fills, my share of losing. And now as tears subside. I find it all so amusing, To think I did all that, And may I say, not in a shy way, Oh, no, no not me, I did it my way. For what is a man, what has he got, If not himself, then he has not, To say the things he truly feels, And not the words of what he would reveal,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And did it my way. Yes, it was my way.
(이제 내 인생의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군. 그래 이제 마지막 커튼이 보이는군. 친구들이여, 분명하게 말하지, 내가 확신하는 내 인생의 부분만을 얘기하겠어, 나는 풍요롭게 인생을 살았지, 모든 길을 다 걸었어, 저 높은 곳까지 말야, 그런데, 그런데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식으로' 살았다는 거야, 후회라구? 그런 것은 별로 없었어, 아, 그렇지, 후회라고 말할 것은 별로 없군.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만을 한 거야, 그리고 예외 없이 다 성취해냈어, 계획된 길을 걸어왔지, 매우 조심스럽게, 매우 조심스럽게, 내 인생의 뒤안길에서, 그런데 말야, 더 중요한 것은, '내 식으로' 살았다는 거야. 네가 잘 알듯이, 어려울 때도 많았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분에 넘치는 일에 부딪힌 때도 있었지, 그리고 회의가 물밀듯이 밀려왔어, 그런 땐 난 회의를 다 씹어버렸지, 그리고 내 뱉어버렸어, 그리고 용감하게 그것에 마주섰지. 그리고 거인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리고, '내 식으로' 해냈어, 사랑도 했지, 웃기도, 울기도 했어, 얻을 때도 있었고, 잃을 때도 있었지, 눈물이 가라앉은 지금 생각해보니, 그 주마등 같이 지나간 일들이, 너무도 즐겁기만 하군. 생각하면, 그 모든 일을 내가 했다는 거야. 부끄럽기도 했냐구? 그렇지 않았어, 아냐! 아냐! 결코 부끄럽지 않았어, '내 식으로' 해냈으니까, 사람이 무엇인가? 진정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소신 없이 살았다면, 그에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거야, 자기가 정말 체험한 것을 말해야 된다구,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해서는 안 되지, 내 인생을 훑어보라구, 난 정말 세게 한방 먹였지. 그리고 내 식으로 해 냈어. 그래, 그것이 내가 살아온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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