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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보고 살자

마가복음 정강길............... 조회 수 3040 추천 수 0 2005.05.17 1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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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17-22 
설교자 : 정강길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저는 오늘의 설교 제목을 “손해보고 살자”라고 정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손해보고 살고 싶으신가요? 아마도 오늘날에 이런 얘길 하면 어떤 이에게는 거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미친놈이 아닌 이상 도대체 각박한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 손해보고 살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들 경제가 중요하다고 외치는 이 시대에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가장 비경제적으로 사는 것을 누가 받아들이겠냐는 거죠.

   그런데 성서를 가만히 보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해를 보는 삶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비경제적인 삶인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생판 모르는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일부러 자신의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퍼주고 사랑하고 이들과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손해 보는 삶에 있어서도 세 가지 등급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장 첫 번째가 “까짓것 내가 좀 손해 보지”의 단계입니다. 어떤 사람이 겨우 취직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첫 출근을 합니다. 그래서 바쁘게 집밖을 나서는데 마침 어떤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리어카에 큰 짐을 싣고서 약간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언덕길이라 고생을 합니다. 이 모습을 목격한 이 사람은 도와드리고 싶지만 출근 시간이 좀 빡빡하기 때문에 자기가 도와드리면 분명하게 회사에 지각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취직되자마자 첫 출근부터 지각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분명하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고민을 합니다. 그런 뒤에 나지막히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습니다.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마음이 바다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은혜스런 말입니다. “까짓것 내가 좀 손해 보지.” 사실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경우는 실제로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주변사람들을 위해, 자기보다 못한 남을 위해 조금만 더 시간을 내고 자기가 조금만 양보하고 조금만 더 힘을 보태는 경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만큼은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까짓것 손해 좀 보고 살지.” 손해보고 사는 삶의 단계 중에서 가장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까짓것 손해 보고 살지”라는 그러한 삶이라면,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손해를 봐야 할 것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까지 손해를 봐야 할까요? 성경은 뭐라고 하고 있나요?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죽기까지 손해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죽기까지 충성하라.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르라.

   유명한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하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날 위해서 죽어달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너 나 믿어?” “그래? 그럼 좀 죽어줘.” “걍 좀 죽어줘야겠어.”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하나님 말씀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난 살고 싶은데 죽어달라니. 하지만 어쩌겠어요. 너희가 죽기까지 손해 보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손해 보는 삶의 단계에 있어서 첫 번째 보다 높은 두 번째 단계입니다.

   물론 이것은 곧바로 죽어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향기를 발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서 그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각자가 받은 달란트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체험하는 각자의 삶의 현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적 가치를 위해 죽기까지 손해보고 살라는 얘기입니다. 혹시 죽기까지 손해보고 살긴 싫으시다구요? 아직은 내키지 않으시다구요? 그런데 어쩌렵니까? 성경에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사실 그래서 제가 좀 전에, 첫 번째 단계인 “까짓것 내가 좀 손해 보고 살지.” 그 정도 단계만이라도 최소한 해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가 있는데 이 사람은 말하길 “인생은 의자뺏기 게임”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의자뺏기 게임을 잘 아실 겁니다. 사람은 열명인데 의자는 아홉 개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필연적으로 한 명은 의자에 앉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서로 의자에 앉으려고 하는 그러한 게임 말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의자를 다른 사람이 앉도록 해주라”는 것입니다. “너가 좀 잃어주라.” 그러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의자뺏기 게임과도 같습니다. 누구하나는 꼭 손해를 봐야 합니다. 누구하나는 꼭 잃어야 합니다. 결국 누구 하나가 손해를 봄으로써 그나마 세상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남들 다 앉으려고 하는 그 의자를 기꺼이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의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손해를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자, 이제 손해 보는 삶의 단계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세 번째 등급의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우와, 죽기까지 손해 봤으면 됐지 또 도대체 뭐가 남아 있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높은 그 세 번째 단계란 바로 <손해를 손해로 알지 않는 단계> 입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할 때, “내가 정말 내 시간과 내 노력과 내 삶을 주면서까지 손해를 보는 것이지만 어차피 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뭐 그런 생각 하셨던가요? 내가 이들을 위해 죽기까지 나의 목숨은 손해 보는 것이지만 기꺼이 하겠다”라는 뭐 그런 생각하셨을까요? 전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그렇게 사신 겁니다. 그냥 유유히 사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머리 속에는 ‘나는 이들을 위해 내 삶을 투신한다’라는 생각이나, 혹은 어떤 면에서 ‘나는 이들을 사랑하고 있다’라는 그런 생각조차도 없어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그 자체가 그 분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한번 떠올려봅시다.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선물을 사 줄때 “에이 돈 아깝지만 내가 좀 손해를 보지만 해 준다” 뭐 그런 생각 떠올리면서 해주나요?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나요? 그냥 뭘 해줘도 아깝다는 생각조차 안 들고, 그냥 뭘 퍼줘도 하나도 손해라는 생각조차도 안 들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맞아도 한 개도 안 아픈 경험, 매우 신기하고 놀라운 경우가 우리네 일상적 경험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은 나의 자아(에고)는 전혀 없고 오직 사랑으로만 충만한 단계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사랑 그 이상의 단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손해를 손해로 알지 않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가 앞의 두 단계보다 왜 높냐고 하면, 앞의 두 단계를 몽땅 아우르면서 넘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가 쓴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 책을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새로운 민중신학에서는 이러한 차원을 <만무>(滿無)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가득찬 무, full naught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집스런 자아는 전혀 없고 오직 <그리스도적 에고>로서만 충만한 상태, 영성의 가장 높은 단계이죠. 사랑을 실천하고픈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그럼 사랑 그 자체가 되십시오. 무엇을 위해? 바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들 다하는 거 하고, 남들 다 먹는 거 먹고, 우선 나부터 우리 가족부터 우리 친구들부터 잘 먹고 잘 살아야 남을 위해 돕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 본문을 잘 한 번 살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구하러 왔습니다. ‘랍비여,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계명을 지키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찾아 온 그 사람은 “자신은 지금까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키고서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부모도 공경하고, 도둑질도 안하고 거짓말도 안하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쭈욱 살아 왔다고 터놓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보면 이 정도도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 적어도 남한테 폐가 되고 손해를 끼치고 사는 그러한 삶을 살진 않았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성경 본문에 예수께 찾아온 이 사람은 참으로 착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자신들도 흔히 자기는 적어도 남들한테 폐나 손해는 안 끼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새길교회 교우님들 가운데는 여기 영생을 구하러 왔던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남한테 폐나 손해는 끼치지 않으면서 계명을 쭈욱 지키며 살아온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당연히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는 남한테 폐나 손해는 안 끼치고 살면서, 그러다가 자기도 여유가 있으면 남을 위해 베풀기도 하고, 적당히 남을 위해 살기도 하는, 혹시 그러한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진 않으신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을 보시고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고 말합니다. 이때 <가진 것>이라는 것 안에는 꼭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 물질만 가리키는 얘기는 아닙니다. 내게 속한 물질 뿐 아니라 내 몸, 내 인생, 내 미래까지 죄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속한 가장 아끼는 것을 기꺼이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을 구하는 길이요,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이 손해라는 생각조차도 초월해야 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손해 보는 삶의 세 가지 단계를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할까요? 물론 <하나님 나라와 그 의(義)>를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러분들 모두에겐 각자 받은 달란트가 있을 것이고 각자 나름대로의 삶의 현장이 있을 것입니다. 생활반경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가능한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현장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 사회적 왕따들을 위해 언제나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주십시오. 저는 이러한 사회적 왕따들을 <우선적 민중>Preferential Minjung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자신의 모든 생활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회적 왕따들을 더욱 우선시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모든 지평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분명하게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를, 일반인보다는 왕따들을, 건강한 사람보다는 병자들을, 남자보다는 여성들을,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더욱 우선시하셨습니다. 우리자신들도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념을 평생토록 이어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김규항이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뀐다.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운동하는 판사, 운동하는 국회의원, 운동하는 배우, 운동하는 코미디언, 운동하는 투수, 운동하는 장군, 운동하는 사장, 운동하는 교사, 등등 …. 세상의 모든 지점에 이러한 운동이 스며들 때 세상은 비로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전 생활의 영역에서부터 들풀처럼 일어나는 것이고, 정의가 강물처럼 일어나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전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잊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설마 자신에게는 이러한 삶을 사는 게 정말 벅차고 힘드시다구요? 그러면 제가 앞서 말씀드린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정도만이라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최소한 해주십사 부탁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능한 것부터, 아주 작은 것부터 함께 해보자구요. 그러면서 점점 내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면서, 나의 모든 것을, 내 인생의 목표 전체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바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것이 손해 보는 삶인 것 같지만 결코 <손해가 손해가 아니었음을 깨우치는 단계>에까지 이르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온전히 바침으로서, 다시 말해 이 땅에서 내 삶을 점점 더 크게 손해봄으로써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척박한 이 땅의 현실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손해를 보는 삶을 살아갈 때에, 놀랍게도 그와 동시에 장차 임할 저 하나님 나라에는 없어지지 않을 재화와 보물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국 따지고 보면 손해가 아니라 <영원한 이익>인 셈이죠. 하지만 그보다도 더! 우리가 손익을 계산하고 염려하는 그 생각과 자아마저도 초월해버릴 때,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 사람에겐 벌써 임하신 거라는 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선 바로 이 모든 것을 몸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어찌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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