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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1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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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얼마 전에 저희 학교 학생 하나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철학과 4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자기는 왜 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도무지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으며, 모든 일에 회의만 들며 의욕이 없다, 그래서 자살도 몇 번이고 기도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학생이라 생각이 들었고 대학생 시절의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깊은 동정심을 느꼈습니다. 또 그런 심각한 인생의 문제를 안고서 그래도 선생이라고 나를 찾아준 것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놓고서 상담을 해야 하는 선생의 입장은 매우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무슨 전문적인 학문에 관한 문제라면 아는 대로 대답하고 조언해 주면 그것으로 족하지만, 갑작스러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접하면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수들이 인생의 교사도 아니고, 자기 인생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결국 나는 약간 궤변 같은 회피성 충고로 그를 달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도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 그것이 학생 시절부터 나의 문제였고 지금도 나는 그 대답을 모색하고 있으며, 누구도 너를 위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무의미한 인생은 견딜 수 없으며, 계속해서 의미를 묻고 추구하며 사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그 해답을 얻지 못한다 해도 너무 초조하거나 다급해 하지말고 그것이 나의 앞으로의 과제라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그것을 찾아보면 될 것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면 스스로 자기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우리가 사람으로서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의미의 일부일는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왜 살고 있으며, 무엇을 추구하고 살며, 무엇을 인생의 의미로 삼고 살기에 저렇게 열심히 사는지 한 번 알아보자는 태도를 지녀라, 무엇이 과연 그들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며, 무엇을 참다운 보람과 가치로 여기기에 남들은 끝없는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인생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충고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부단히 의미를 묻는 존재이며,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중요한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무의미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며, 무슨 일에든지 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묻고 이해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각각의 행위에는 그때마다의 의미가 있지만, 정작 삶 전체, 산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추구할만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목적과 이유를 묻는다는 것이고, 추구하는 가치와 보람을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러한 목적과 이유를 알고 행동하며 삽니다. 왜 밥을 먹어야 하는지, 왜 학교에 가야 하는지, 왜 직장에 나가야 하는지, 모두 각각의 자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러한 당연시되던 일들이 갑자기 자명성을 상실하는 상황을 우리는 가끔 만납니다. 갑자기 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보이고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의미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찾아왔던 그 학생은 곧 이러한 의미의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일찍이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인의 삶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것은 죽음도 죄도 아니고 무의미성이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고대인들의 최대 관심은 인간의 유한성, 곧 죽음의 문제였고, 중세인들의 가장 큰 관심이 죄의 문제였다면, 현대인에게는 삶의 의미를 발견 못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정신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40대 중반이 되면서 남자나 여자 모두 인생의 의미의 위기를 맞는다고 흔히 얘기합니다. 남자들은 지금까지 애써 추구해온 것들이 어느 정도 성취되고 앞으로는 별다른 전망이 내다보이지 않을 때 답답함과 지루함,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가 생겨야 하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 다른 차원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실직을 했다든지, 일찍 은퇴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자녀와 남편을 돌보느라 정신 없이 지냈지만, 이제 막상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해서 독립하고 남편은 한참 자기 직장생활에 바빠 아내에게는 통 관심이 없고, 물질적으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몸은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되면, 갑자기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며, 나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심각하게 되묻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다 그런 고민을 남편에게 털어놓기라도 하면, 여편네가 한가하고 팔자가 편하니까 그따위 사치스러운 고민이나 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텅 빈 가슴을 새로운 의미와 보람으로 메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뒤늦게 직장도 가져보려 하고 자기의 사업도 해보려고 하고, 댄스 홀에 드나들어보기도 하며, 혹은 교회생활에 몰두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유가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행여 이러한 40대 후반의 의미의 위기를 잘 넘겼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극복하기 어려운 병마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며, 죽음의 그림자가 앞을 가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말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과 사별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다시피 했던 존재를 죽음으로 잃게 되었을 때 한 인간이 느끼는 인생의 허무감과 무의미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무너져 버리는 것 같은 의미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우리가 인생여정에서 불가피하게 만나는 온갖 의미의 위기에 대처해 나가면서 인생에 보다 깊고 넓은 의미와 보람을 제공해 주는 힘입니다. 그리하여 인생을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조명하고 이해하며 새로운 양식으로 살게 해주는 힘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 새로운 존재들이며, 앞으로 닥쳐오는 인생의 시련과 위기가 무엇이든지, 이 한 믿음으로 대처해 나갈 힘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를 만나서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매우 간결하게 서술된 만남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이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언뜻 보면 이해가 안가는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와 같이 일생 고기잡이로 생활을 하던 자가 예수의 한 마디에 금방 생업을 던져버리고 그를 좇을 수 있었으며, 또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사실, 전후좌우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다시 말해 베드로의 생활환경이나 심적 상태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기에 어째서 그가 그런 과감한 삶의 전환을 시도했는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또, 납득이 간다 해도,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다시 말해 생업을 계속하면서도 예수를 따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질문도 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예수를 따른다해서 하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모두 교회 일에 미치거나 모두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나 신부가 되어도 좋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이야기는 바로 그 간결성으로 인해 신앙이 과연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는 힘이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나 마태와 같은 제자들의 개인적인 상황이 어떠했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 모두 의미의 위기를 느끼고 있던 존재들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절망 가운데서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던 당시 갈릴리 민중의 모습을 발견하든, 혹은 당시의 기성 종교의 무력함을 절감하고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독선에 실망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의 출현을 기다리던 경건한 유태인들의 모습을 발견하든, 아니면 단순히 고기잡이라는 별로 의존할만한 생계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에 생계를 맡기고 살아야 했던 가난하고 불안한 인생의 소유자들의 모습을 발견하든, 혹은 그밖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개인적, 심리적 환경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해도, 여하튼 그들은 자기들 인생이 더 이상은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의미의 위기에 봉착해 있던 존재들이었으며, 따라서 예수의 부름에서 새로운 인생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고 삶의 전환을 시도했던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들의 삶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그들 자신의 결단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전에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의 권위 있고 확신에 찬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예수라는 존재, 그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를 따라 오라'는 말은 오직 예수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최대의 유혹, 모든 사이비 지도자들의 최대의 유혹이 신도들로 하여금 바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자기를 섬기게 하고, 자기를 우상화하게 하려는 유혹입니다. 그들은 온갖 감언이설과 허황한 말로 자기를 따르도록 해 놓고는 거대한 종교재벌이 되어 돈벌이를 일삼는가 하면, 추종자로 하여금 살인까지 저지르게 하고는 자기는 미국으로 줄행랑을 놓기도 하며, 심지어는 텍사스 왜코의 다윗파나 오대양 사건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수십 명을 집단자살로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나를 따라 오라"고 하는 말과 크고 작은 사이비 종교지도자들, 혹은 히틀러나 김일성과 같은 이른바 영도자들(Fuehrer)의 "나를 따르라"와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전하는 신앙의 세 번째 진리에 접합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자기 자신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서, 자기가 대접받고 대우받기 위해서,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기 위하여 제자들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부름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하나님나라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도록 제자들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대와 멸시, 실의와 좌절 속에서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고기잡이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갑자기 인생의 새로운 의미가 부상했고 새로운 사명이 부여됨과 동시에 삶에 새로운 의욕과 활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예수라는 자의 인격 하나만을 믿고 오직 하나님나라라는 목표에 자신의 전 인생을 거는 험난한 제자의 길을 지체 없이 따라나선 것입니다. 예수는 결코 제자들에게 허황한 약속으로 그들을 속이거나 유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면 출세를 한다든지, 종교 지도자가 된다든지, 사업이 잘된다든지,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든지, 방언을 하고 안수기도로 병을 고칠 수 있다든지, 혹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든지 하는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난에 찬 길인가를 예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진작 이것을 알았더라면 제자들은 그렇게 선뜻 따라나서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나 답답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 나머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새로운 삶의 모험을 감행하기로 따라나선 것입니다. 생의 의미의 위기를 맞던 차에 예수라는 존재를 만나 오직 그의 인격 하나만을 믿고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에 투신한 신앙의 고전적인 예를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의미한 삶 속에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나라라는 인생의 새로운 비전과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기로 결심한 존재들입니다. 실로 우리는 어리석은 존재들이기에 예수의 12제자들과 같이 그를 오해하기고 하고, 실로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이기에 그를 실망시키기도 하고, 배반하기도 하며, 회의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휘청거리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길이 옳을 길이라 여기기에 포기하지도 못하고 아직도 예수에 붙잡혀 제자의 길을 가기로 매 주일 모여 서로서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 이외의 그 어느 누구의 부름을 받고 그를 따라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가 좋기에 감히 못할 줄 알면서도 멀리서나마 그들 따르려고, 아니 흉내라도 내보려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탓하고 원망하려면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하며, 믿고 따르려면 오직 예수 한 분만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 길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제자의 길이 예수와 더불어 고난 받는 십자가의 가시밭길임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세상의 영광과 성공을 약속하는 이 땅의 수많은 교회의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조그마하고 보잘것없는 교회, 자기의 건물하나 마련 못하고도 고통받는 이웃에게 아낌없이 베풀려는 이 교회, 신자들이 죽어도 장지 하나 약속 못해주는 무력한 교회,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이 교회, 그리고 점점 다른 교회와 같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유혹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이 교회에 아직 몸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 제자의 길에 나선 것은 또한 맹목적인 예수 숭배를 위해 나선 것도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 이천 년에 지은 가장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예수 자신이 그토록 철저하게 지향했던 하나님과 그의 나라 대신 맹목적인 예수 숭배에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예수를 따라 나서는 제자의 길보다는 그를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주술적인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변혁할 힘을 잃어버리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사후에 천당 간다는 공짜 티켓을 남발하는 종교로 되어버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 이천 년의 역사와 전통은 별로 자랑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저는 종교학자로서 객관적으로 볼 때, 기독교 이천 년 역사의 기록이 유교 이천 오백 년, 불교 이천 오백 년, 힌두교 삼천 년, 이슬람교 천사백년의 역사 기록에 비해 볼 때 도덕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별로 나은 것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교회가 수없이 많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나라를 향해 예수가 걸은 나눔과 섬김, 희생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의 길은 온데간데없고 주여 주여 이름만 부르는 맹목적인 예수 숭배에 빠져버린 사람들로 꽉 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조직과 제도는 어마어마하게 짜이고 신도들은 들끓지만 고난의 종 예수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성업중인 교회는 얼마든지 있지만 예수의 길을 걷는 신자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근본 원인을 우리는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지 결코 자기를 믿고 자기를 섬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복종하여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하시다가 십자가 위에서 비극적 인생을 마감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일으켜 살리심으로 그와 함께 제자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다, 구세주다 , 메시아다, 주님이시다 등 여러 가지 칭호를 달리하여 고백하면서 그를 높이고 그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려는 제자의 길이 없이 그를 믿는다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사람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공짜로 주어질 리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걸으셨던 길인 것입니다. 예수는 결코 남더러 가라고 하고는 자기는 가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잘못된 삶의 자세와 가치관을 말끔히 떨어버리고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를 숭배하기 위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과 재능, 재산과 시간, 정력과 정성을 희생하여 하나님과 그의 뜻을 섬기며 그의 나라 사업에 투신하고자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의 부름을 받아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존재들입니다. 실로 현대인들은 생활은 풍족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까닭 없이 엄습해 오는 삶의 무의미성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러한 현대인의 모습을 마치 멋있는 자동차는 있는데 정작 몰고 갈 곳이 없는 사람과도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현대인이 느끼는 전반적인 무의미성과 목적상실성에는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아니면 하늘의 뜻, 천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늘에 의해 주어진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고 우주와 인생에 도덕적 의미가 내재해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중세인들에게 삶의 무의미성이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사건과 사물의 배후에 있는 의미(why)는 묻지 않고 어떻게(how)만을 묻는 기계론적 사고에 젖게 되다보니 의미의 차원은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목표를 상실하고 표류하는 인생이 되어 버린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뿐입니까? 현대인들은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뒤바뀌며, 의와 불의가 혼동되는 세상,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들과 무고한 생명들이 수없이 죽어 가는 세상에 과연 하나님은 계신 것이며 인생에 도덕적 의미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회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인생을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살수도 없습니다. 도피주의와 향락주의의 유혹에 굴할 수도 없으며, 회의만을 씹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중세인들이 지녔던 폐쇄적이고 경건한 목적론적, 도덕주의적 세계관으로 쉽게 되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아직도 열려 있다면, 현실의 안락과 안주를 버리고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안고서 인생의 온갖 고통과 부조리, 불의와 억압을 온 몸으로 부딪치며 살다가 제명도 다하지 못하고 단명한 예수라는 존재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길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에게 매료되고 그에게 붙들림 되어 그를 통해서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고, 그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보면서, 그가 간 길을 실천을 통해 흉내라도 내다가 행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비로 어여삐 보셔서 영원한 부활의 생명에 참여시켜 주시지나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믿음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은 어쩌면 제자들과 같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저지른 철모르는 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 했던 결단인지도 모릅니다. 공연히 색다른 교회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 근처를 어른거리다가 억지 십자가를 진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은 꼴이 되었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며, 회의가 들고 통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내킨 걸음을 되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가보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제자의 길이 결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고뇌와 번민을 안겨주며, 위선을 더해주고 독선을 조장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괴로움에 차라리 교회에 오느니 골프를 치던지 노래방이나 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유혹이 들 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일주일에 한번씩 아편이나 진정제 주사를 맞으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민중과 함께 하지 못하기에 미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무슨 넋두리나 자위행위를 하기 위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고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괴로워하는 일을 회피하지 않고, 부서지고 깨어지는 체험을 자청하여 이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은 깨어지고 부서지는 아픔이 없이는 주어지지 않으며 십자가의 고통 없이 부활의 영광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예수를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그리스도인의 상은 스스로 신앙이 좋다하고 스스로 잘 믿는다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양심에 괴로움을 품고 자괴하며 자책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을 외치고 말끝마다 주님을 끌어들이는 경건의 위장이 아니라, 교회가 무언지 모르고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나 예수만은 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 늘 부족한 줄 알면서도 괴로운 마음을 마다하지 않고 주의 전을 찾아 자복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일이라도 찾아서 말없이 행하는 영혼들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교회는 튼튼한 제도나 잘 짜여진 조직이 아니며, 권위 있는 교권과 위계질서도 아니며, 장엄한 성가대나 웅변적 설교도 아니며, 그 어떤 치장이나 허례허식도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교회공동체는 오직 예수가 가신 길에 매료되어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알고 있기에,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의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고민하고 자책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면서,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제자의 길을 걸어보겠다고 따라나선 사람들의 공동체일 뿐입니다. 이 공동체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오직 한 가지, 곧 예수가 가신 나눔과 섬김의 길, 선교와 봉사의 실천에 얼마만큼 앞장서느냐 일뿐이지, 주여 주여 불러대는 신앙도 아니며 유창한 기도나 아름다운 찬양, 안정된 체제나 잘 짜여진 교육프로그램이나 매끄럽게 진행되는 예배의식도 아니며, 화려한 성전이나 의례는 더욱더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에서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말없이 겸손하게 행하는 것만이 주님께서 우리의 공동체를 심판하실 기준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저의 말을 마치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사를 행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7:21-23)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렇습니다. 인간은 부단히 의미를 묻는 존재이며,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중요한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무의미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며, 무슨 일에든지 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묻고 이해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각각의 행위에는 그때마다의 의미가 있지만, 정작 삶 전체, 산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추구할만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목적과 이유를 묻는다는 것이고, 추구하는 가치와 보람을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러한 목적과 이유를 알고 행동하며 삽니다. 왜 밥을 먹어야 하는지, 왜 학교에 가야 하는지, 왜 직장에 나가야 하는지, 모두 각각의 자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러한 당연시되던 일들이 갑자기 자명성을 상실하는 상황을 우리는 가끔 만납니다. 갑자기 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보이고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의미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찾아왔던 그 학생은 곧 이러한 의미의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일찍이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인의 삶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것은 죽음도 죄도 아니고 무의미성이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고대인들의 최대 관심은 인간의 유한성, 곧 죽음의 문제였고, 중세인들의 가장 큰 관심이 죄의 문제였다면, 현대인에게는 삶의 의미를 발견 못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정신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40대 중반이 되면서 남자나 여자 모두 인생의 의미의 위기를 맞는다고 흔히 얘기합니다. 남자들은 지금까지 애써 추구해온 것들이 어느 정도 성취되고 앞으로는 별다른 전망이 내다보이지 않을 때 답답함과 지루함,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가 생겨야 하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 다른 차원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실직을 했다든지, 일찍 은퇴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자녀와 남편을 돌보느라 정신 없이 지냈지만, 이제 막상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해서 독립하고 남편은 한참 자기 직장생활에 바빠 아내에게는 통 관심이 없고, 물질적으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몸은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되면, 갑자기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며, 나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심각하게 되묻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다 그런 고민을 남편에게 털어놓기라도 하면, 여편네가 한가하고 팔자가 편하니까 그따위 사치스러운 고민이나 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텅 빈 가슴을 새로운 의미와 보람으로 메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뒤늦게 직장도 가져보려 하고 자기의 사업도 해보려고 하고, 댄스 홀에 드나들어보기도 하며, 혹은 교회생활에 몰두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유가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행여 이러한 40대 후반의 의미의 위기를 잘 넘겼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극복하기 어려운 병마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며, 죽음의 그림자가 앞을 가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말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과 사별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다시피 했던 존재를 죽음으로 잃게 되었을 때 한 인간이 느끼는 인생의 허무감과 무의미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무너져 버리는 것 같은 의미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우리가 인생여정에서 불가피하게 만나는 온갖 의미의 위기에 대처해 나가면서 인생에 보다 깊고 넓은 의미와 보람을 제공해 주는 힘입니다. 그리하여 인생을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조명하고 이해하며 새로운 양식으로 살게 해주는 힘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 새로운 존재들이며, 앞으로 닥쳐오는 인생의 시련과 위기가 무엇이든지, 이 한 믿음으로 대처해 나갈 힘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를 만나서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매우 간결하게 서술된 만남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이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언뜻 보면 이해가 안가는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와 같이 일생 고기잡이로 생활을 하던 자가 예수의 한 마디에 금방 생업을 던져버리고 그를 좇을 수 있었으며, 또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사실, 전후좌우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다시 말해 베드로의 생활환경이나 심적 상태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기에 어째서 그가 그런 과감한 삶의 전환을 시도했는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또, 납득이 간다 해도,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다시 말해 생업을 계속하면서도 예수를 따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질문도 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예수를 따른다해서 하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모두 교회 일에 미치거나 모두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나 신부가 되어도 좋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이야기는 바로 그 간결성으로 인해 신앙이 과연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는 힘이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나 마태와 같은 제자들의 개인적인 상황이 어떠했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 모두 의미의 위기를 느끼고 있던 존재들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절망 가운데서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던 당시 갈릴리 민중의 모습을 발견하든, 혹은 당시의 기성 종교의 무력함을 절감하고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독선에 실망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의 출현을 기다리던 경건한 유태인들의 모습을 발견하든, 아니면 단순히 고기잡이라는 별로 의존할만한 생계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에 생계를 맡기고 살아야 했던 가난하고 불안한 인생의 소유자들의 모습을 발견하든, 혹은 그밖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개인적, 심리적 환경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해도, 여하튼 그들은 자기들 인생이 더 이상은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의미의 위기에 봉착해 있던 존재들이었으며, 따라서 예수의 부름에서 새로운 인생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고 삶의 전환을 시도했던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들의 삶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그들 자신의 결단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전에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의 권위 있고 확신에 찬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예수라는 존재, 그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를 따라 오라'는 말은 오직 예수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최대의 유혹, 모든 사이비 지도자들의 최대의 유혹이 신도들로 하여금 바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자기를 섬기게 하고, 자기를 우상화하게 하려는 유혹입니다. 그들은 온갖 감언이설과 허황한 말로 자기를 따르도록 해 놓고는 거대한 종교재벌이 되어 돈벌이를 일삼는가 하면, 추종자로 하여금 살인까지 저지르게 하고는 자기는 미국으로 줄행랑을 놓기도 하며, 심지어는 텍사스 왜코의 다윗파나 오대양 사건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수십 명을 집단자살로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나를 따라 오라"고 하는 말과 크고 작은 사이비 종교지도자들, 혹은 히틀러나 김일성과 같은 이른바 영도자들(Fuehrer)의 "나를 따르라"와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전하는 신앙의 세 번째 진리에 접합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자기 자신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서, 자기가 대접받고 대우받기 위해서,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기 위하여 제자들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부름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하나님나라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도록 제자들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대와 멸시, 실의와 좌절 속에서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고기잡이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갑자기 인생의 새로운 의미가 부상했고 새로운 사명이 부여됨과 동시에 삶에 새로운 의욕과 활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예수라는 자의 인격 하나만을 믿고 오직 하나님나라라는 목표에 자신의 전 인생을 거는 험난한 제자의 길을 지체 없이 따라나선 것입니다. 예수는 결코 제자들에게 허황한 약속으로 그들을 속이거나 유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면 출세를 한다든지, 종교 지도자가 된다든지, 사업이 잘된다든지,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든지, 방언을 하고 안수기도로 병을 고칠 수 있다든지, 혹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든지 하는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난에 찬 길인가를 예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진작 이것을 알았더라면 제자들은 그렇게 선뜻 따라나서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나 답답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 나머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새로운 삶의 모험을 감행하기로 따라나선 것입니다. 생의 의미의 위기를 맞던 차에 예수라는 존재를 만나 오직 그의 인격 하나만을 믿고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에 투신한 신앙의 고전적인 예를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의미한 삶 속에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나라라는 인생의 새로운 비전과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기로 결심한 존재들입니다. 실로 우리는 어리석은 존재들이기에 예수의 12제자들과 같이 그를 오해하기고 하고, 실로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이기에 그를 실망시키기도 하고, 배반하기도 하며, 회의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휘청거리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길이 옳을 길이라 여기기에 포기하지도 못하고 아직도 예수에 붙잡혀 제자의 길을 가기로 매 주일 모여 서로서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 이외의 그 어느 누구의 부름을 받고 그를 따라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가 좋기에 감히 못할 줄 알면서도 멀리서나마 그들 따르려고, 아니 흉내라도 내보려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탓하고 원망하려면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하며, 믿고 따르려면 오직 예수 한 분만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 길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제자의 길이 예수와 더불어 고난 받는 십자가의 가시밭길임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세상의 영광과 성공을 약속하는 이 땅의 수많은 교회의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조그마하고 보잘것없는 교회, 자기의 건물하나 마련 못하고도 고통받는 이웃에게 아낌없이 베풀려는 이 교회, 신자들이 죽어도 장지 하나 약속 못해주는 무력한 교회,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이 교회, 그리고 점점 다른 교회와 같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유혹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이 교회에 아직 몸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 제자의 길에 나선 것은 또한 맹목적인 예수 숭배를 위해 나선 것도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 이천 년에 지은 가장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예수 자신이 그토록 철저하게 지향했던 하나님과 그의 나라 대신 맹목적인 예수 숭배에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예수를 따라 나서는 제자의 길보다는 그를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주술적인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변혁할 힘을 잃어버리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사후에 천당 간다는 공짜 티켓을 남발하는 종교로 되어버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 이천 년의 역사와 전통은 별로 자랑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저는 종교학자로서 객관적으로 볼 때, 기독교 이천 년 역사의 기록이 유교 이천 오백 년, 불교 이천 오백 년, 힌두교 삼천 년, 이슬람교 천사백년의 역사 기록에 비해 볼 때 도덕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별로 나은 것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교회가 수없이 많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나라를 향해 예수가 걸은 나눔과 섬김, 희생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의 길은 온데간데없고 주여 주여 이름만 부르는 맹목적인 예수 숭배에 빠져버린 사람들로 꽉 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조직과 제도는 어마어마하게 짜이고 신도들은 들끓지만 고난의 종 예수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성업중인 교회는 얼마든지 있지만 예수의 길을 걷는 신자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근본 원인을 우리는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지 결코 자기를 믿고 자기를 섬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복종하여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하시다가 십자가 위에서 비극적 인생을 마감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일으켜 살리심으로 그와 함께 제자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다, 구세주다 , 메시아다, 주님이시다 등 여러 가지 칭호를 달리하여 고백하면서 그를 높이고 그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려는 제자의 길이 없이 그를 믿는다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사람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공짜로 주어질 리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걸으셨던 길인 것입니다. 예수는 결코 남더러 가라고 하고는 자기는 가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잘못된 삶의 자세와 가치관을 말끔히 떨어버리고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를 숭배하기 위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과 재능, 재산과 시간, 정력과 정성을 희생하여 하나님과 그의 뜻을 섬기며 그의 나라 사업에 투신하고자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의 부름을 받아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존재들입니다. 실로 현대인들은 생활은 풍족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까닭 없이 엄습해 오는 삶의 무의미성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러한 현대인의 모습을 마치 멋있는 자동차는 있는데 정작 몰고 갈 곳이 없는 사람과도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현대인이 느끼는 전반적인 무의미성과 목적상실성에는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아니면 하늘의 뜻, 천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늘에 의해 주어진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고 우주와 인생에 도덕적 의미가 내재해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중세인들에게 삶의 무의미성이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사건과 사물의 배후에 있는 의미(why)는 묻지 않고 어떻게(how)만을 묻는 기계론적 사고에 젖게 되다보니 의미의 차원은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목표를 상실하고 표류하는 인생이 되어 버린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뿐입니까? 현대인들은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뒤바뀌며, 의와 불의가 혼동되는 세상,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들과 무고한 생명들이 수없이 죽어 가는 세상에 과연 하나님은 계신 것이며 인생에 도덕적 의미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회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인생을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살수도 없습니다. 도피주의와 향락주의의 유혹에 굴할 수도 없으며, 회의만을 씹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중세인들이 지녔던 폐쇄적이고 경건한 목적론적, 도덕주의적 세계관으로 쉽게 되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아직도 열려 있다면, 현실의 안락과 안주를 버리고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안고서 인생의 온갖 고통과 부조리, 불의와 억압을 온 몸으로 부딪치며 살다가 제명도 다하지 못하고 단명한 예수라는 존재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길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에게 매료되고 그에게 붙들림 되어 그를 통해서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고, 그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보면서, 그가 간 길을 실천을 통해 흉내라도 내다가 행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비로 어여삐 보셔서 영원한 부활의 생명에 참여시켜 주시지나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믿음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은 어쩌면 제자들과 같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저지른 철모르는 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 했던 결단인지도 모릅니다. 공연히 색다른 교회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 근처를 어른거리다가 억지 십자가를 진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은 꼴이 되었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며, 회의가 들고 통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내킨 걸음을 되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가보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제자의 길이 결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고뇌와 번민을 안겨주며, 위선을 더해주고 독선을 조장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괴로움에 차라리 교회에 오느니 골프를 치던지 노래방이나 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유혹이 들 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일주일에 한번씩 아편이나 진정제 주사를 맞으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민중과 함께 하지 못하기에 미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무슨 넋두리나 자위행위를 하기 위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고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괴로워하는 일을 회피하지 않고, 부서지고 깨어지는 체험을 자청하여 이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은 깨어지고 부서지는 아픔이 없이는 주어지지 않으며 십자가의 고통 없이 부활의 영광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예수를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그리스도인의 상은 스스로 신앙이 좋다하고 스스로 잘 믿는다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양심에 괴로움을 품고 자괴하며 자책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을 외치고 말끝마다 주님을 끌어들이는 경건의 위장이 아니라, 교회가 무언지 모르고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나 예수만은 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 늘 부족한 줄 알면서도 괴로운 마음을 마다하지 않고 주의 전을 찾아 자복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일이라도 찾아서 말없이 행하는 영혼들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교회는 튼튼한 제도나 잘 짜여진 조직이 아니며, 권위 있는 교권과 위계질서도 아니며, 장엄한 성가대나 웅변적 설교도 아니며, 그 어떤 치장이나 허례허식도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교회공동체는 오직 예수가 가신 길에 매료되어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알고 있기에,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의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고민하고 자책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면서,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제자의 길을 걸어보겠다고 따라나선 사람들의 공동체일 뿐입니다. 이 공동체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오직 한 가지, 곧 예수가 가신 나눔과 섬김의 길, 선교와 봉사의 실천에 얼마만큼 앞장서느냐 일뿐이지, 주여 주여 불러대는 신앙도 아니며 유창한 기도나 아름다운 찬양, 안정된 체제나 잘 짜여진 교육프로그램이나 매끄럽게 진행되는 예배의식도 아니며, 화려한 성전이나 의례는 더욱더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에서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말없이 겸손하게 행하는 것만이 주님께서 우리의 공동체를 심판하실 기준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저의 말을 마치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사를 행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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