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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

마가복음 길희성............... 조회 수 2410 추천 수 0 2008.01.10 13: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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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4-15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나는 50여년을 예수를 믿어 왔어도 지금도 늘 기독교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가, 왜 내가 예수를 믿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여태껏 예수를 믿어 온 사람이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이러한 질문은 우리 기독자의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자기행위에 대한 부단한 반성과 성찰은 그 행위가 타성에 젖은 습관적이고 맹목적인 행위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늘 그 본질과 목적을 확인하지 않으면, 자칫하면 타성에 젖은 습관적,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고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밀어내기 쉽습니다. 이제 우리 새길교회도 창립된지 9돌, 근 10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 신앙의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새겨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 교회의 사명을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얼마 전 로스엔젤스에 들렸을 때 저는 한 작은 신앙모임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각자가 자기가 이해하는 대로 기독교 신앙에 관하여 얘기하는 데, 참석자 가운데 한 안과의사가 자기의 경험을 말했습니다. 어느 환자 하나가 보험처리 관계로 치료날짜를 사실과 달리 적어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난감해 하다가, 신자인 자기가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치료비를 좀 덜 받겠으니 사실대로 날짜를 적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러한 자그마한 행동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그곳 의사 사회에서는 의료보험 관계로 편법이 성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고, 고지식하게 의료행위를 했다가는 손님이 다 떨어져서 병원의 운영이 어렵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이 안과의사의 행위는 결코 작은 용기만을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저를 더 감동시킨 것은, 그가 무척 보수적인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그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과 하나님 나라를 직결시킨다는 사실이 결코 평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 새길교회 신자같으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길는지 모르나, 수만명 모이는 한 커다란 보수적인 교회 - 그 교회 금년도의 표어가 교회확장의 해라고 합니다 - 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신앙고백을 들었을 때 저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 기독교인들 가운데 누구든 붙들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천차만별의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의 체험을 강조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죄사함과 구원, 어떤 사람은 삼위일체, 오직 성경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총으로만을, 하나님 경외, 충실한 교회생활, 교황의 가르침대로, 부활과 영생을 믿는 것,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의 신성을 믿는 것 등 별의별 답이 다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가 행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거의 망각하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섬기고 예수를 숭배하는 기독교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위에 말한 부활, 십자가, 삼위일체, 기적 등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에 수렴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 없이는 그것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신앙의 파편, 맹목적인 집착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야말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새길교회는 바로 이 점을 새롭게 자각하고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길을 걸으려고 나선 신앙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고백은 첫머리에서도 창조의 완성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을, 끝머리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합니다"라는 구절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선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보면 이것은 사실 상징이라 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것입니다. 개념이란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한 것, 파악이 가능하며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친숙한 사물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상징은 우리에게 친숙한 말이나 개념, 혹은 사물들을 빌려서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 실재, 초월적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인간의 언어이고 개념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세상의 무엇에 대해서 적용하는 평범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실재와 그의 신비, 그의 활동, 그의 성품, 그의 뜻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의 왕국과는 전혀 다른 질서와 가치의 세계이며, 하나가 영에 속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육에 속한 질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힘으로만 실현되는 세계이지만 그 자체가 영적인 세계는 아닙니다. 물질, 사회, 역사와는 무관하게 오직 개인의 마음속에서 실현되는 그런 내면적이고 사적인 세계, 신비적 체험의 세계가 아니라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객관적 세계입니다. 초월적이지만 성령의 힘에 의해서 변화된 공적 세계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라'이며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에 사로잡혀 육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세계이며, 그러기에 복음서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신비(마가 4:11) 혹은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이러한 초월적 세계, 우리가 아는 그 어느 것과도 아주 다른 신비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안내해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첫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에 코를 박고 사는 답답한 존재, 세상의 손해와 이익의 계산밖에 모르는 지극히 타산적인 존재, 일차원적인 세계에 갇혀서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한심한 육에 속한 존재에게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세계, 영원한 세계,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세계로 우리를 불러서 그 세계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감사합니다.
나는 진정한 사상이란 강한 세계부정을 통해 일단 인간을 이 현실세계의 종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초월적 세계로의 초대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우리가 안주하고 살만한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모든 종교적 사상의 시작입니다. 보이는 세상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사람에게 초월에 대한 갈망과 비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초월적 실재요 신비한 세계이기는 하나 결코 그것은 시간과 역사의 세계와 무관한 어떤 형이상학적 실재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은 형이상학적 초월성이 아니라 미래라는 시간적 초월성을 지닙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으로 실현될 구체성을 띤 실재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고 매력입니다. 반면 불교의 니르바나는 초월적이기는 하나 역사적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아는 일상적인 세계, 즉 현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아니 예수의 산상보훈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여러모로 현실과는 정 반대의 세계이나, 그래도 미래라는 시간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언젠가는 역사의 한 결정적인 순간에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면서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현실이지, 이 세계와는 전혀 동떨어진 어떤 형이상학적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은 현실이 아니지만 분명히 지상에서 현실화될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희망으로 기다릴 미래적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붙잡을 수 있는 세계이며, 희망 가운데서 바라보는 구원의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믿음의 대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초월의 초대는 곧 믿음으로의 초대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우리의 시야를 넓게 해주신 예수는 동시에 믿음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신 분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초월로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믿음은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비약이기 때문에 불확실성을 수반하는 모험이며 용기입니다. 그러나 이 모험 없이는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는 법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현실주의자는 믿음 없이 살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현실을 뛰어넘고자 초월을 갈망하는 자에게는 믿음의 모험을 감행해야 하는 것이며,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믿음의 모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우리를 열도록 초대하신 분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미래를 희망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신 분입니다. 역사와 현실, 시간의 세계를 도피하지 않고 역사 현실 한 가운데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비전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는 요즈음 노인들의 세계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이를 먹으면서 머지 않아 노인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을 주위에서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인에게서 가장 비참한 것은 앞을 내다볼 일이 별로 없다는 것, 즉 희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의사에게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앞이 꽉 막혀 버렸다는 것이 노인들의 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가 전한 복음과 신앙은 미래를 향해 열린 희망의 복음이고 신앙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최대 축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통스러운 순간 속에서나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그리스도인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희망찬 삶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인생을 상을 타는 그날을 기다리며 자기를 채찍질하여 달리는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셨습니다(빌 3:12-14; 고전 9:24-27).
실로 인생이 경주라면 실컷 달렸는데, 열심히 뛰었는데 어디를 향해 뛰었는지도 모르고 뛰었다면 그것처럼 한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기껏 인생의 종착역에 가서 보니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자기가 헛살았다는 생각에 허탈해 하는 것이 우리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허무한 경주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 역사와 창조의 완성을 향해 믿음과 희망으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하나님 나라가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허황된 약속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의심을 거부합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자신 있게, 대담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 앞에 임박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때'(kairos)라는 말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시간(chronos)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역사의 어떤 결정적인 순간, 하나의 질적 전환의 순간, 하나님의 결정적인 역사 개입의 순간을 뜻하는 말이며, 따라서 인간들에게는 심판과 구원의 순간이요, 위기와 결단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께서 말하는 카이로스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적 시대,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나님의 구원의 순간입니다. 따라서 때가 찼다는 말은, 이 메시아적 시대의 예언이 성취되는 기쁜 순간, 복된 순간이 드디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다가왔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이 메시아의 시대가 이제 한낱 기다림이나 환상이 아니라 현실로 드러나 바로 우리 곁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4장의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시는 말씀이나,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시는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현실성이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 나라라는 초월적인 실재, 신비스러운 세계가 이제 예수 자신과 그의 제자들의 말과 행동 속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 예수 자신의 증언이요, 그의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증언이요, 성서기자들의 증언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세 번째 이유, 즉 우리는 아직도 기다리는 존재이지만,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메시아적 시대에 진입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감사와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러기에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는 예수만이 할 수 있었던 자신 있는 말씀입니다. 최근의 여러 종말론적 단체들의 허황된 예언처럼 곧 탄로가 났던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예수와 그가 벌린 하나님 나라 운동은 우리를 속이지도 않았고 실망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진정한 성령의 힘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운동은 기존의 운동과는 달리 새로운 정신, 새로운 방법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지배보다는 섬김, 영광보다는 고난, 힘보다는 약함, 세상적 지혜보다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있었고, 독선보다는 겸손, 단죄와 정죄보다는 자비와 용서, 십자가의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가 선포하고 실천한 이 길이 너무나도 엉뚱한 하나님 나라의 길이기에 끝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자칫하면 하나의 사기극, 우리를 실망시키는 또 하나의 역사의 비극적 에피소드로 끝나는가 싶었을 때, 부활의 기쁜 소식과 더불어 예수가 하신 말씀과 행동이 거짓이 아니고 모두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고, 흩어졌던 제자들은 다시 모여들어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 나라 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옮아간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만 전했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와 예수를 함께 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둘은 뗄레야 떼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는 육신의 예수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하나님 나라 운동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성령의 힘,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 영의 힘으로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는 운동으로 자리 잡았으며,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믿음의 초대는 예수 자신으로의 초대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는 것은 곧 예수를 믿는 것과 불가분의 운명적 관계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종말을 외치면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헛된 환상을 약속하면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는 초월적 세계의 비전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의 능력의 말씀과 행적으로 보여 주셨고, 특히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가시적으로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은 한마디로 이에 대한 기록이요 증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인격, 그의 행동과 삶 속에서 불가시적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모습, 초월적 하나님 나라의 세계 내적 현존을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실재성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예수를 믿는 세 번째 이유이며,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또 하나의 큰 축복입니다. 예수와 함께 시작한 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 메시아적 새 시대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채 미래를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희망과 인내 가운데서 그것을 기다리면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와 예수를 향한 믿음의 결단은 회개의 결단으로 구체화된다고 예수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을 대면해야 하는 두려운 날이기도, 심판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카이로스적 순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카이로스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이 새로운 현실, 새 시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동참할 것이냐, 아니면 이전의 모습 그대로 현실에 안주하고 집착하며 살다가 죽음 앞에서 힘없이 무너질 것인가의 결단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새역사, 메시아 시대에 동참하려는 믿음은 회개, 메타노이아의 결단으로 나타나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메타노이아란 삶의 완전한 방향전환, 전 인격적 자세전환을 뜻하는 말입니다. 회개는 곧 믿음의 행동적 표현입니다. 회개는 믿음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회개는 과거에 집착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향해, 초월을 향해 정향하는 행위로,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히 과거를 청산하고, 기득권을 포기하며, 현실에의 집착을 단호히 거부하는 뼈아픈 자기부정의 행위가 요청되는 법입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통스러운 자기부정 없이는 회개는 있을 수 없고, 회개 없이는 진정한 믿음이 없으며, 믿음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 새 역사, 새 창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른바 역사 바로잡기,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역사 바로잡기는 몇 사람을 감옥에 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뼈아픈 자기반성과 회개 없이는 역사가 바로 잡아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우리는 알고 있기에 우리의 마음이 착잡한 것입니다. 그나마 붙잡혀 가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진정으로는 고사하고 겉으로나마 뉘우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는데 우리는 절망감마저 가지게 됩니다. 백담사를 수백번 갔다온들 무엇합니까? 요즈음 총선을 앞두고 온 나라가 정치열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면 모두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마당입니다. 자격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여 종전의 깡패들의 집단 같았던 정치 판을 정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아무런 자기반성이나 회개의 눈물 없이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데 있습니다. 제 꼴은 생각 않고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독재치하에서 항거는커녕 온갖 혜택과 특권을 누리던 사람이 말을 바꾸고 당을 바꾸어 국민을 속이려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래서는 결코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커녕 세상적인 의미에서도 새로운 정치, 새로운 역사는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회개를 통한 믿음, 회개를 통한 새로운 세계, 부정을 통한 긍정,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왜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안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역설적인 이유로, 만약 예수가 회개 없는 천국을 외쳤다면 저는 안 믿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종말론적 신앙집단이나 사교집단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세상의 종말이 곧 온다고 공갈협박은 해도, 뼈아픈 회개를 촉구하는 듣기 싫은 소리는 절대로 하지 않고, 허황된 축복과 특권을 약속합니다. 이것이 사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른바 복음주의적 전도사들의 경우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다는 얘기는 곧잘 하는데 회개의 내용과 성격, 즉 구체적으로 무엇이 죄인지에 대한 인식이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진정한 종교는 뼈아픈 자기부정과 삶의 청산 없이는 결코 지고의 행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내가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도 불교에서는 자기부정의 끊임없는 수행과 고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정직한 종교입니다. 값싼 은총을 남발하는 우리 개신교가 부끄럽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사이비 종교와 진정한 종교를 가르는 척도는 필경 그 종교가 진정한 회개를 말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회개를 통한 새로운 삶, 과거청산을 통한 새로운 역사의 시작, 십자가에 자기의 욕정을 못박는 죽음을 통한 부활의 생명, 이것이 예수가 전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회개는 결코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닙니다. 매일, 매순간, 매주일 우리는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가 과연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았는지 아니면 육에 따라 썩어질 현세적 질서에 얽매여 살았는지를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기에 자기는 날마다 죽는다 했던 것이며, 우리에게 영과 육의 삶이 혼재하는 한 끊임없이 우리는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아프게 자기를 채찍질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상에서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간 후에야 우리는 더 이상 회개의 아픔 없이도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이전에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은 아직은 그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잠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상고하면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말처럼 끊임없이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키는" 회개의 삶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 본질과 이유를 4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예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의 초월은 몰 역사적인 형이상학적 초월도 아니고, 개인주의적인 내면적 신비주의도 아니며 우리에게 세계와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하는 시간적 초월이며 우리를 이러한 세계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 초월의 모습을 예수께서는 이미 지상의 역사 속에서 그의 말씀과 행적,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현재화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가능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넷째, 회개의 자기부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구체화시켜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진정한 생명과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새길공동체의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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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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