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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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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0:2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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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
5월은 가정의 달이라 가정과 가족에 대하여 특별히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은 더구나 어린이날이며 교회에서는 어린이주일인 동시에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날이기에 더욱 가족에 관한 문제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나올 때 제일 먼저 가족 안에 있게 되며 또 장성한 후에는 남녀가 결합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룹니다. 가족은 부부관계와 부모자녀관계로 맺어진 일차적인 사회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서로 가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정이 잘 운영되기를 원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를 모두가 바랍니다. 행복한 가정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행복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조건들을 구비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가족에 대한 문제는 전통적인 이해로부터 변화되어 새로운 것으로 이행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제도적으로 볼 때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제도로의 변화가 동양사회에 확대된 것은 이미 오래된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 여성들의 역할이 변화되었습니다. 과거 현모양처를 이상으로 하고 가정의 영역 안에 머물러 출산과 자녀양육 그리고 가사노동만을 역할로 삼아왔던 여성들이 이제는 가사노동을 벗어나 자유롭고 활발하게 사회적 역할들을 수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 남녀의 관계도 지배·복종(예속)의 관계를 극복하고 평등하고 상호적인 관계로 바뀌어지고 있으며,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져서 과거에는 꼭 결혼을 하는 것이 사는 방법이었으나 이제는 결혼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살며 또 부부관계도 절대적으로 남성에게 얽매이지 않고 이혼의 자유와 독립적인 삶을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실제로 맞벌이할 여성을 배우자로 생각하고, 직업여성이나 전문직을 가진 여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더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족의 형태나 가족 안에서의 남녀의 관계가 많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식구조가 아직 전통적인 생각 그대로 남아 있어서 과거와 동일한 역할을 요구하거나 그러한 기준에서 가족을 규정하고 질서를 세우려는 데서 갈등과 혼란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전근대적 차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실정, 이것을 문화지체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문화지체 현상적인 상태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혼란 속에서 자기 위치와 역할을 찾지 못하고 어려운 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더욱이 여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결과가 생깁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정을 생각할 때 포근함, 달콤함, 편안함 그리고 위로와 휴식과 소생의 감정들을 느낍니다. 이러한 느낌은 대체로 어머니로부터 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집은 어머니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에 대한 우리들의 향수는 매우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인데 이 전통적 이미지의 가정의 내면은 그 가정을 그렇게 낭만적으로 아름답게만 생각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그 아름다운 가정의 평안함 - 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이 있고, 마음껏 푹 쉬고, 티없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고, 새로운 힘과 기쁨을 얻는 꿈속에 그리는 - 그 행복한 꿈속에는 우선 전쟁터와 같은 직장에서 살아남아 온 아버지 남성들의 수고가 배어 있습니다. 처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종일 조직사회에서 시달리면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바치며 일하는 아버지들의 노력이 가정 속에 있습니다. 사실 조직사회에서 경쟁을 뚫고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상사의 눈치를 보아야 하거나 거래처 고객의 비위를 맞추면서 한푼의 경제력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아버지들의 바깥생활은 처절합니다. 우리 나라 40-50대의 남성들이 과중한 업무로 갑자기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신문에서 가끔 보도되는 것을 봅니다. 남성들도 이렇게 과중한 일에 시달리면서 내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방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끔씩 50-60대 아버지의 가출이 드라마에 그려지는 것은 꼭 꾸며진 이야기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지위가 높아진다거나 자기가 창의적으로 실행한 일들이 성과를 가질 때에는 성취감을 가지며 폭넓은 대인관계의 형성을 통하여 사회적 관계가 확대되며 보람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 아버지 상을 이상으로 하는 남성들은 가정에서 자신의 위치가 축소된 현실에 당황합니다. 일 우선, 사회에서의 출세 우선주의에 몰입한 삶은 자녀들과 아내로부터 소외되고 돈벌어 오는 기계로 되어버린 느낌을 갖게 합니다. 자녀들은 어머니와 가까워지고 아버지와의 관계는 친밀성을 잃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이런 현상에 분개하고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씁니다. 폭력적이거나 군림하려고 하며 복종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전통적인 부권의 상은 시대에 부적합한 것이 되어 회복되지 못하고 오히려 관계의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의 꿈속에 들어 있는 여성의 희생은 남성의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그 행복 속엔 물 묻은 아내들의 수고가 배어 있습니다. 아내인 어머니들은 하루종일 집안 일에 종종걸음을 치고 손에 물이 마를 사이 없이 지납니다. 아침밥에서부터 설거지, 청소, 빨래, 아이들 옷가지며 방 살림 보살펴 놓고 동사무소나 은행 등에 볼일보고, 친척 이웃의 경조사 챙기고, 바쁜 걸음으로 돌아와 한 숨 쉴 새도 없이 저녁준비 해야하고, 저녁밥 준비해 놓고 식구들 오는대로 챙겨주고, 저녁 설거지 끝내고 앉으면 과일이며 간식 심부름이 남았고, 그것까지 끝내면 잠자리 준비하고... 종일 피곤한 몸으로 있지만 하루종일 집에서 놀고먹기만 하는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전업주부의 경우가 이렇지만 맞벌이부부 가정의 여성들의 고초는 더욱 심각합니다. 그것도 자아실현을 위해 나가는 주부일 경우 가족들의 이해가 없으면 저녁에 일 때문에 늦어도 눈치보며 살그머니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고 직장에서 늦으면 조바심에 안달하고 사는 생활입니다. 가사노동은 그대로 여자의 몫으로 남아서 집에 돌아와서도 편안함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남자같이 집에서 풀 수도 없습니다. 취업중인 기혼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대체로 4-5시간으로 보는데 취업하고 있는 남성의 가사노동은 20분이라고 합니다. 저소득층의 근로여성들은 더욱더 큰 비중으로 가사노동을 부담하게 되고 그들은 2중 3중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남성은 취업으로 인한 피로를 가정에 와서 풀고 에너지를 다시 충전할 수 있지만 취업이나 바깥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집에 와서도 자기 에너지를 더 가정에 쏟아야하며 그래서 사회적 능력이 감퇴되어 집니다. 여성들의 가장 큰 고통은 무어니 해도 여성들의 자아상실 입니다. 결혼과 함께 사라진 자신의 능력과 존재, 아까운 여자들이 너무나 많다고 오숙희씨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 선조 가운데는 허난설헌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정의 유지는 남성 여성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며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여성에게는 더욱더 크고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곳입니다. 결혼을 하면서부터 여자는 노예가 된다는 표현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성들의 일이 현실적으로 크게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여성관에 의하여 여성은 남성에 예속된 존재이며 어떤 경우에도 가사노동은 여자의 일이다라는 여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업주부는 물론 밖의 일을 가진 여성들은 참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시대 가정의 일반적인 현실입니다.
사실 가정이란 가족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훈련을 하는 일차적인 장소입니다.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관계를 우리는 가족을 통하여 처음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가족 밖의 사람들과도 그러한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근대적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의식에 머물러 있을 때 거기에는 상호적인 사랑과 이해의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전통적 가부장적 가족윤리와 질서는 복종의 윤리가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가부장제에서 아내나 자녀들은 남편의 소유물처럼 간주됩니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그런 것은 말도 안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직도 신문지상에 끊이지 않고 실리는 남편의 폭력에 의한 가정 파괴의 비극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자기 딸에게 상습적으로 욕설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던 사위를 살해한 사건에서 모녀가 서로 자신이 살인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가정의 달을 맞는 우리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전근대적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권회복에 대한 주장이 강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사회에서 발생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들 곧 청소년 범죄의 증가라든가, 도덕성이 상실된 인간 수가 많아진다던가, 또는 비인륜적인 범죄가 날로 늘어난다던가, 폭력이 더 극성을 부린다던가 하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전통적인 가정이 붕괴함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부권의 상실에서 오는 위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소리를 높이고 가부장적 지배질서를 더 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994년에 UN은 그해를 '가족의 해'라고 정하여 세계적으로도 가족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도록 촉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이같이 가족·가정의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게 된 것은 지금의 시대가 '가족·가정의 위기'의 시대라는 판단에서입니다. UN은 물론 부권회복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질서를 찾아 힘있는 가족을 만들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책임윤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들은 새로운 가족관계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넘어야할 과제입니다. 언제나 위기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말의 의미처럼 오늘날 가족의 위기는 이제 우리가 함께 지혜를 모아 새로운 형태의 가정·가족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로의 회귀보다는 새로운 대안적 가족관계의 제시가 요구되는 때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성서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적인 가정·가족은 어떤 것일까요? 이와 같은 전통과 새것의 혼란 가운데 평등하며 상호적이고 그래서 민주적인 가족들이 차츰 늘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제2정무장관실에서는 평등부부 상을 제정하기도하고 아버지들도 좋은 아버지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만들어 전통적 권위의 아버지 상이 아닌 새로운 아버지 상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아버지 상은 복종이 아닌 사랑의 관계에 토대를 둔 아버지와 자녀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가족은 지배·복종의 관계가 아닌 사랑을 토대로 한 관계를 만드는 가정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여성해방이란 바로 복종 대신에 사랑으로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사람들이 각자 자기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여 복종이 아닌 이해와 사랑을 토대로 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바 있습니다(프랑스 영화감독 장 비고의 말).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과 필요에 따라 역할을 나누면서 사는 삶을 이루어 나가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너무나 오랫동안 가족관계를 지배하여 온 덕목입니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 희생이 강요된 오해의 여지를 그 안에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대안적 가족을 열린 가족이라 이름하여 봅니다. 열려 있다는 것은 고정되지 않은 과정 중에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새로운 사고들을 수용하고 관계들과 역할들을 새롭게 설정할 여지를 마련하여 가정·가족을 새로 다시 이야기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누려온 평안함과 따뜻함이 어머니·아내라는 존재의 희생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면서 가정에서 나의 역할을 증대시켜 가사를 분담하는 노력을 하는 남편과 자녀들이 되는 가정, 지금까지 의식주를 염려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었음이 남편·아버지의 혹은 맞벌이하는 어머니·아내의 고달픈 경제적 활동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절제하며 또 가능한 한 자신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하고, 어떤 부분을 도와 그 수고를 나눌 수 있도록 생각하고 염려하는 가족들이 되는 일, 특히 밖에서 일하는 어머니·아내를 위해서 철저하게 가사를 분담하는 자녀·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 또 전업주부로서 수고하는 남편의 노력의 대가를 고마워하고 절제하며 그 범위 안에서 가계를 운영하는 일, 자신의 밖에서의 생활이 아내의 노고와 자녀들의 충실한 성장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그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 등등 새로운 가족관계는 이렇게 복종의 윤리가 아닌 배려와 사랑과 돌봄의 윤리에 의해서 책임적인 각각의 존재가 되어 이루어지는 관계이며 이것이 바로 열린 가족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에서 우리들은 지금 우리가 가진 이 가족의 문제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넓게는 마가복음 8:27-10:45절로 한 단락을 짓는 전체 내용 가운데 마지막 부분에 있는 내용이며, 가깝게는 10:17-10:31절에 나와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대한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마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인간이 어느 만큼 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표현합니다. 마가는 10:17절에서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마가가 말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정도나 부의 축적 정도에 하나님의 나라가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헌신의 정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 있는 것임을 말합니다. 앞에서 나오는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바로 그 내용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와 가족관계에 대한 복음서의 태도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대체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준비를 지상의 가족과 반목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족에 의해 거부당하게 되고(6:4), 가족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하며 참된 모친, 형제, 자매들과 결합해야한다(3:20-21, 31-35)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의 새 가족을 언급하는데, 그 나라는 여인들(1:31, 10:30, 15:41), 어린이들(9:33-37, 10:13, 16), 이방인들(5:1-20, 7:24-30, 15:39)이 환영받는 곳입니다. 부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장애물이요, 고난과 박해를 이기고 충성하는 자들은 종말론적 공동체 안의 제자직을 받는 보상이 있고 도래하는 시대에서의 영생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는 이전의 전통과 다른 새 질서 곧 새로운 관계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버려라, 포기하라는 것들은 낡은 것 옛것을 말합니다. 가족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 공동체에게 다시 배나 되는 가족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예수가 말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간곡한 요청과 연결됨은 이 내용을 둘러싼 큰 틀인 8:27-10:45절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될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도상에서 3번을 남성 제자들에게 고난받을 것을 예고하고, 또한 동시에 그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며, 그 오해 뒤에 예수께서는 3번을 또 가르침을 주고 있는 내용이 아주 잘 정리되어 조직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3번의 가르침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이해를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늘 나라가 올 것인데 그 하늘 나라는 이전과 같지 아니하고 새로운 질서에 의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한 구절씩 보면 8:34-9:1절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여 영광이 아닌 고난의 과정임을 말합니다. 9:35-37절에는 누가 더 큰 자인가 하는 논쟁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꼴찌가 되어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즉 구성원의 새로운 관계를 말합니다. 10:42-45절에는 민족들이 다스리는 방법과 자신의 방법이 다름을 말하는데, 민족들은 내리 누르고 세도를 부리는 지배형태를 갖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위대한 자는 섬기는 자이고 으뜸이 되고자하면 종이 되라고 하며 자신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는 사명을 확인시킵니다. 참으로 지배·복종 관계 질서의 종식을 철저히 요구합니다. 새로운 질서 실천 요구의 철저성은 손이든 발이든 눈이든 범죄하면 찍어내어 버리라고 할 정도로 지독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질서의 부분적 수용이나 변형으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 형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에 요구된 것은 재산의 포기와 가족을 버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 버리고 다시 선택할 만큼 소중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버림과 하나님의 나라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여 보면 예수를 따르던 그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있었던 여성들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가부장적 질서가 확고하던 시절에 여자들이 가정을 버리고 열광적으로 예수를 따라 다니는 모습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당시 부유한 독신 여성, 과부, 이전의 질서에 묶여서 비인간적이었던 여성들이 이 새질서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가족을 버리라는 말과 하나님 나라와의 연결은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관계로 이루어지는 가족공동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찾아왔던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그들이 나의 어머니요 형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나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였고, 오늘 본문에서도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받게 되는 보상이 새로운 공동체 - 확대된 새로운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비전에서 가족의 문제를 보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 여자 그리고 종들과 이방인들에게 열려진 공동체, 곧 포괄적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 나라의 주인은 어린이, 여자, 종, 이방인들입니다. 관계의 새로움 그것은 곧 권위의 중심이 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권위가 지위나 신분, 연령, 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 종이 되고 섬기는 일, 어린아이처럼 되는 일 - 이 뜻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린 공동체입니다.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 열린 공동체의 특성은 권위의 중심을 신분이나 성이나 연령에 두지 않고 즉 그것들에 의한 지배·복종의 관계가 전혀 아니고 오직 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행위에 두었습니다. 길 잃은 양의 비유와 부활 후 베드로에게 부탁한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에 의해 말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이와 같은 가족입니다. 권위의 중심이 옮겨져 있고 포괄적인 가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기독교적 가족에 대하여 말할 때 대체로 에베소서나 디모데서에 나와 있는 가정의례집의 교훈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 내용들은 바울 후기서신에 나타나는 윤리들로서 복음서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 질서와는 반대되는 모습의 가부장화된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이 여성 종들에 대한 권위의 중심을 옮겨 새로운 공동체 안에 그들을 중심으로 포괄한 복음서와는 달리 그 서신들에는 그들이 복종의 윤리 아래로 다시 들어가는 가부장적 질서에 속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베드로 공동체와 대립적 관계에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하는 여러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에 스스로를 비유한 것은 사도들을 자신들의 목자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며, 부활한 주님을 직접 중개자 없이 접근하여 만났고, 여인들의 역할이 현저하였던 평신도 공동체나 그러한 공동체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던 공동체로 보입니다.
마가복음은 묵시록적 기록입니다. 즉 이 복음은 주후 69-70년 초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직전의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쓴 책입니다. 마가 공동체의 혁명적인 특성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어느 때이고 새로운 질서로 전환해야 하는 시대에는 이와 같은 과격한 전환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이 마가복음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 헌금을 하기로 되었기에 간단히 열린 가족에 이어 열린 민족을 생각코자 합니다. 열린 가족이 권위의 중심을 지배집단이 규정한 성이나 연령이나 신분 같은 것에 두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밀려난 이들 중심으로 옮긴 것이고, 열린 가족은 친밀 집단이 확대되는 것을 보여 주었으며, 상호적 희생과 돌봄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제 우리는 통일을 위해 남북이 열린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족관계의 근본은 인간상호관계의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민족의 소단위이고 부부평등은 사회평등의 맥락으로 이어집니다. 민족공동체 형성에 가족의 평등이 기여할 것이며 민족의 정의로운 인륜관계, 사랑의 관계 실현에 연관됩니다. 민족의 권위의 중심을 사랑의 관계에 근거한 인도주의에 두게 될 때 우리는 열린 민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포근함과 따스함의 가족은 인류가 바라는 불변하는 가족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성이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문제삼는 이야기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어린이, 죄인, 이방인, 창녀, 소외된 여성들을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놓는 예수의 그 사랑이 가족을 열고 민족을 여는 근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보여주는 모성적 원리들, 그것으로부터 열린 가족, 열린 민족이 될 수 있습니다. 열린 공동체 안에서 남성도 여성도 남한도 북한도 모두 자유롭게 해방적으로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런데 오늘 우리의 가족에 대한 문제는 전통적인 이해로부터 변화되어 새로운 것으로 이행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제도적으로 볼 때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제도로의 변화가 동양사회에 확대된 것은 이미 오래된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 여성들의 역할이 변화되었습니다. 과거 현모양처를 이상으로 하고 가정의 영역 안에 머물러 출산과 자녀양육 그리고 가사노동만을 역할로 삼아왔던 여성들이 이제는 가사노동을 벗어나 자유롭고 활발하게 사회적 역할들을 수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 남녀의 관계도 지배·복종(예속)의 관계를 극복하고 평등하고 상호적인 관계로 바뀌어지고 있으며,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져서 과거에는 꼭 결혼을 하는 것이 사는 방법이었으나 이제는 결혼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살며 또 부부관계도 절대적으로 남성에게 얽매이지 않고 이혼의 자유와 독립적인 삶을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실제로 맞벌이할 여성을 배우자로 생각하고, 직업여성이나 전문직을 가진 여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더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족의 형태나 가족 안에서의 남녀의 관계가 많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식구조가 아직 전통적인 생각 그대로 남아 있어서 과거와 동일한 역할을 요구하거나 그러한 기준에서 가족을 규정하고 질서를 세우려는 데서 갈등과 혼란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전근대적 차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실정, 이것을 문화지체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문화지체 현상적인 상태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혼란 속에서 자기 위치와 역할을 찾지 못하고 어려운 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더욱이 여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결과가 생깁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정을 생각할 때 포근함, 달콤함, 편안함 그리고 위로와 휴식과 소생의 감정들을 느낍니다. 이러한 느낌은 대체로 어머니로부터 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집은 어머니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에 대한 우리들의 향수는 매우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인데 이 전통적 이미지의 가정의 내면은 그 가정을 그렇게 낭만적으로 아름답게만 생각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그 아름다운 가정의 평안함 - 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이 있고, 마음껏 푹 쉬고, 티없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고, 새로운 힘과 기쁨을 얻는 꿈속에 그리는 - 그 행복한 꿈속에는 우선 전쟁터와 같은 직장에서 살아남아 온 아버지 남성들의 수고가 배어 있습니다. 처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종일 조직사회에서 시달리면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바치며 일하는 아버지들의 노력이 가정 속에 있습니다. 사실 조직사회에서 경쟁을 뚫고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상사의 눈치를 보아야 하거나 거래처 고객의 비위를 맞추면서 한푼의 경제력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아버지들의 바깥생활은 처절합니다. 우리 나라 40-50대의 남성들이 과중한 업무로 갑자기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신문에서 가끔 보도되는 것을 봅니다. 남성들도 이렇게 과중한 일에 시달리면서 내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방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끔씩 50-60대 아버지의 가출이 드라마에 그려지는 것은 꼭 꾸며진 이야기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지위가 높아진다거나 자기가 창의적으로 실행한 일들이 성과를 가질 때에는 성취감을 가지며 폭넓은 대인관계의 형성을 통하여 사회적 관계가 확대되며 보람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 아버지 상을 이상으로 하는 남성들은 가정에서 자신의 위치가 축소된 현실에 당황합니다. 일 우선, 사회에서의 출세 우선주의에 몰입한 삶은 자녀들과 아내로부터 소외되고 돈벌어 오는 기계로 되어버린 느낌을 갖게 합니다. 자녀들은 어머니와 가까워지고 아버지와의 관계는 친밀성을 잃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이런 현상에 분개하고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씁니다. 폭력적이거나 군림하려고 하며 복종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전통적인 부권의 상은 시대에 부적합한 것이 되어 회복되지 못하고 오히려 관계의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의 꿈속에 들어 있는 여성의 희생은 남성의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그 행복 속엔 물 묻은 아내들의 수고가 배어 있습니다. 아내인 어머니들은 하루종일 집안 일에 종종걸음을 치고 손에 물이 마를 사이 없이 지납니다. 아침밥에서부터 설거지, 청소, 빨래, 아이들 옷가지며 방 살림 보살펴 놓고 동사무소나 은행 등에 볼일보고, 친척 이웃의 경조사 챙기고, 바쁜 걸음으로 돌아와 한 숨 쉴 새도 없이 저녁준비 해야하고, 저녁밥 준비해 놓고 식구들 오는대로 챙겨주고, 저녁 설거지 끝내고 앉으면 과일이며 간식 심부름이 남았고, 그것까지 끝내면 잠자리 준비하고... 종일 피곤한 몸으로 있지만 하루종일 집에서 놀고먹기만 하는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전업주부의 경우가 이렇지만 맞벌이부부 가정의 여성들의 고초는 더욱 심각합니다. 그것도 자아실현을 위해 나가는 주부일 경우 가족들의 이해가 없으면 저녁에 일 때문에 늦어도 눈치보며 살그머니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고 직장에서 늦으면 조바심에 안달하고 사는 생활입니다. 가사노동은 그대로 여자의 몫으로 남아서 집에 돌아와서도 편안함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남자같이 집에서 풀 수도 없습니다. 취업중인 기혼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대체로 4-5시간으로 보는데 취업하고 있는 남성의 가사노동은 20분이라고 합니다. 저소득층의 근로여성들은 더욱더 큰 비중으로 가사노동을 부담하게 되고 그들은 2중 3중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남성은 취업으로 인한 피로를 가정에 와서 풀고 에너지를 다시 충전할 수 있지만 취업이나 바깥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집에 와서도 자기 에너지를 더 가정에 쏟아야하며 그래서 사회적 능력이 감퇴되어 집니다. 여성들의 가장 큰 고통은 무어니 해도 여성들의 자아상실 입니다. 결혼과 함께 사라진 자신의 능력과 존재, 아까운 여자들이 너무나 많다고 오숙희씨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 선조 가운데는 허난설헌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정의 유지는 남성 여성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며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여성에게는 더욱더 크고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곳입니다. 결혼을 하면서부터 여자는 노예가 된다는 표현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성들의 일이 현실적으로 크게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여성관에 의하여 여성은 남성에 예속된 존재이며 어떤 경우에도 가사노동은 여자의 일이다라는 여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업주부는 물론 밖의 일을 가진 여성들은 참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시대 가정의 일반적인 현실입니다.
사실 가정이란 가족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훈련을 하는 일차적인 장소입니다.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관계를 우리는 가족을 통하여 처음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가족 밖의 사람들과도 그러한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근대적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의식에 머물러 있을 때 거기에는 상호적인 사랑과 이해의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전통적 가부장적 가족윤리와 질서는 복종의 윤리가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가부장제에서 아내나 자녀들은 남편의 소유물처럼 간주됩니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그런 것은 말도 안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직도 신문지상에 끊이지 않고 실리는 남편의 폭력에 의한 가정 파괴의 비극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자기 딸에게 상습적으로 욕설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던 사위를 살해한 사건에서 모녀가 서로 자신이 살인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가정의 달을 맞는 우리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전근대적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권회복에 대한 주장이 강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사회에서 발생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들 곧 청소년 범죄의 증가라든가, 도덕성이 상실된 인간 수가 많아진다던가, 또는 비인륜적인 범죄가 날로 늘어난다던가, 폭력이 더 극성을 부린다던가 하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전통적인 가정이 붕괴함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부권의 상실에서 오는 위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소리를 높이고 가부장적 지배질서를 더 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994년에 UN은 그해를 '가족의 해'라고 정하여 세계적으로도 가족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도록 촉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이같이 가족·가정의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게 된 것은 지금의 시대가 '가족·가정의 위기'의 시대라는 판단에서입니다. UN은 물론 부권회복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질서를 찾아 힘있는 가족을 만들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책임윤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들은 새로운 가족관계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넘어야할 과제입니다. 언제나 위기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말의 의미처럼 오늘날 가족의 위기는 이제 우리가 함께 지혜를 모아 새로운 형태의 가정·가족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로의 회귀보다는 새로운 대안적 가족관계의 제시가 요구되는 때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성서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적인 가정·가족은 어떤 것일까요? 이와 같은 전통과 새것의 혼란 가운데 평등하며 상호적이고 그래서 민주적인 가족들이 차츰 늘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제2정무장관실에서는 평등부부 상을 제정하기도하고 아버지들도 좋은 아버지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만들어 전통적 권위의 아버지 상이 아닌 새로운 아버지 상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아버지 상은 복종이 아닌 사랑의 관계에 토대를 둔 아버지와 자녀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가족은 지배·복종의 관계가 아닌 사랑을 토대로 한 관계를 만드는 가정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여성해방이란 바로 복종 대신에 사랑으로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사람들이 각자 자기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여 복종이 아닌 이해와 사랑을 토대로 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바 있습니다(프랑스 영화감독 장 비고의 말).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과 필요에 따라 역할을 나누면서 사는 삶을 이루어 나가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너무나 오랫동안 가족관계를 지배하여 온 덕목입니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 희생이 강요된 오해의 여지를 그 안에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대안적 가족을 열린 가족이라 이름하여 봅니다. 열려 있다는 것은 고정되지 않은 과정 중에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새로운 사고들을 수용하고 관계들과 역할들을 새롭게 설정할 여지를 마련하여 가정·가족을 새로 다시 이야기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누려온 평안함과 따뜻함이 어머니·아내라는 존재의 희생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면서 가정에서 나의 역할을 증대시켜 가사를 분담하는 노력을 하는 남편과 자녀들이 되는 가정, 지금까지 의식주를 염려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었음이 남편·아버지의 혹은 맞벌이하는 어머니·아내의 고달픈 경제적 활동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절제하며 또 가능한 한 자신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하고, 어떤 부분을 도와 그 수고를 나눌 수 있도록 생각하고 염려하는 가족들이 되는 일, 특히 밖에서 일하는 어머니·아내를 위해서 철저하게 가사를 분담하는 자녀·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 또 전업주부로서 수고하는 남편의 노력의 대가를 고마워하고 절제하며 그 범위 안에서 가계를 운영하는 일, 자신의 밖에서의 생활이 아내의 노고와 자녀들의 충실한 성장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그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 등등 새로운 가족관계는 이렇게 복종의 윤리가 아닌 배려와 사랑과 돌봄의 윤리에 의해서 책임적인 각각의 존재가 되어 이루어지는 관계이며 이것이 바로 열린 가족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에서 우리들은 지금 우리가 가진 이 가족의 문제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넓게는 마가복음 8:27-10:45절로 한 단락을 짓는 전체 내용 가운데 마지막 부분에 있는 내용이며, 가깝게는 10:17-10:31절에 나와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대한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마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인간이 어느 만큼 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표현합니다. 마가는 10:17절에서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마가가 말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정도나 부의 축적 정도에 하나님의 나라가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헌신의 정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 있는 것임을 말합니다. 앞에서 나오는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바로 그 내용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와 가족관계에 대한 복음서의 태도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대체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준비를 지상의 가족과 반목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족에 의해 거부당하게 되고(6:4), 가족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하며 참된 모친, 형제, 자매들과 결합해야한다(3:20-21, 31-35)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의 새 가족을 언급하는데, 그 나라는 여인들(1:31, 10:30, 15:41), 어린이들(9:33-37, 10:13, 16), 이방인들(5:1-20, 7:24-30, 15:39)이 환영받는 곳입니다. 부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장애물이요, 고난과 박해를 이기고 충성하는 자들은 종말론적 공동체 안의 제자직을 받는 보상이 있고 도래하는 시대에서의 영생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는 이전의 전통과 다른 새 질서 곧 새로운 관계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버려라, 포기하라는 것들은 낡은 것 옛것을 말합니다. 가족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 공동체에게 다시 배나 되는 가족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예수가 말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간곡한 요청과 연결됨은 이 내용을 둘러싼 큰 틀인 8:27-10:45절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될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도상에서 3번을 남성 제자들에게 고난받을 것을 예고하고, 또한 동시에 그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며, 그 오해 뒤에 예수께서는 3번을 또 가르침을 주고 있는 내용이 아주 잘 정리되어 조직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3번의 가르침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이해를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늘 나라가 올 것인데 그 하늘 나라는 이전과 같지 아니하고 새로운 질서에 의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한 구절씩 보면 8:34-9:1절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여 영광이 아닌 고난의 과정임을 말합니다. 9:35-37절에는 누가 더 큰 자인가 하는 논쟁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꼴찌가 되어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즉 구성원의 새로운 관계를 말합니다. 10:42-45절에는 민족들이 다스리는 방법과 자신의 방법이 다름을 말하는데, 민족들은 내리 누르고 세도를 부리는 지배형태를 갖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위대한 자는 섬기는 자이고 으뜸이 되고자하면 종이 되라고 하며 자신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는 사명을 확인시킵니다. 참으로 지배·복종 관계 질서의 종식을 철저히 요구합니다. 새로운 질서 실천 요구의 철저성은 손이든 발이든 눈이든 범죄하면 찍어내어 버리라고 할 정도로 지독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질서의 부분적 수용이나 변형으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 형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에 요구된 것은 재산의 포기와 가족을 버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 버리고 다시 선택할 만큼 소중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버림과 하나님의 나라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여 보면 예수를 따르던 그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있었던 여성들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가부장적 질서가 확고하던 시절에 여자들이 가정을 버리고 열광적으로 예수를 따라 다니는 모습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당시 부유한 독신 여성, 과부, 이전의 질서에 묶여서 비인간적이었던 여성들이 이 새질서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가족을 버리라는 말과 하나님 나라와의 연결은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관계로 이루어지는 가족공동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찾아왔던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그들이 나의 어머니요 형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나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였고, 오늘 본문에서도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받게 되는 보상이 새로운 공동체 - 확대된 새로운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비전에서 가족의 문제를 보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 여자 그리고 종들과 이방인들에게 열려진 공동체, 곧 포괄적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 나라의 주인은 어린이, 여자, 종, 이방인들입니다. 관계의 새로움 그것은 곧 권위의 중심이 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권위가 지위나 신분, 연령, 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 종이 되고 섬기는 일, 어린아이처럼 되는 일 - 이 뜻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린 공동체입니다.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 열린 공동체의 특성은 권위의 중심을 신분이나 성이나 연령에 두지 않고 즉 그것들에 의한 지배·복종의 관계가 전혀 아니고 오직 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행위에 두었습니다. 길 잃은 양의 비유와 부활 후 베드로에게 부탁한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에 의해 말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이와 같은 가족입니다. 권위의 중심이 옮겨져 있고 포괄적인 가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기독교적 가족에 대하여 말할 때 대체로 에베소서나 디모데서에 나와 있는 가정의례집의 교훈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 내용들은 바울 후기서신에 나타나는 윤리들로서 복음서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 질서와는 반대되는 모습의 가부장화된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이 여성 종들에 대한 권위의 중심을 옮겨 새로운 공동체 안에 그들을 중심으로 포괄한 복음서와는 달리 그 서신들에는 그들이 복종의 윤리 아래로 다시 들어가는 가부장적 질서에 속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베드로 공동체와 대립적 관계에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하는 여러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에 스스로를 비유한 것은 사도들을 자신들의 목자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며, 부활한 주님을 직접 중개자 없이 접근하여 만났고, 여인들의 역할이 현저하였던 평신도 공동체나 그러한 공동체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던 공동체로 보입니다.
마가복음은 묵시록적 기록입니다. 즉 이 복음은 주후 69-70년 초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직전의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쓴 책입니다. 마가 공동체의 혁명적인 특성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어느 때이고 새로운 질서로 전환해야 하는 시대에는 이와 같은 과격한 전환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이 마가복음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 헌금을 하기로 되었기에 간단히 열린 가족에 이어 열린 민족을 생각코자 합니다. 열린 가족이 권위의 중심을 지배집단이 규정한 성이나 연령이나 신분 같은 것에 두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밀려난 이들 중심으로 옮긴 것이고, 열린 가족은 친밀 집단이 확대되는 것을 보여 주었으며, 상호적 희생과 돌봄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제 우리는 통일을 위해 남북이 열린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족관계의 근본은 인간상호관계의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민족의 소단위이고 부부평등은 사회평등의 맥락으로 이어집니다. 민족공동체 형성에 가족의 평등이 기여할 것이며 민족의 정의로운 인륜관계, 사랑의 관계 실현에 연관됩니다. 민족의 권위의 중심을 사랑의 관계에 근거한 인도주의에 두게 될 때 우리는 열린 민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포근함과 따스함의 가족은 인류가 바라는 불변하는 가족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성이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문제삼는 이야기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어린이, 죄인, 이방인, 창녀, 소외된 여성들을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놓는 예수의 그 사랑이 가족을 열고 민족을 여는 근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보여주는 모성적 원리들, 그것으로부터 열린 가족, 열린 민족이 될 수 있습니다. 열린 공동체 안에서 남성도 여성도 남한도 북한도 모두 자유롭게 해방적으로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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