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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나무

마가복음 김이곤 목사............... 조회 수 2906 추천 수 0 2008.02.15 13: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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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8:22-26 
설교자 : 김이곤 목사 
참고 : 새길교회 
"걸어다니는 나무", 그러나 다소 우화적인 냄새가 나는 "나무 이야기"가 오늘 이 시간 우리 이야기의 초점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신·구약 본문 중에서 구약 본문은, "말하는 나무"에 관하여 말하고 있고, 그리고 신약 본문은 "걸어다니는 나무"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저 유명한 "요담의 우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왕이 없는 무정부적 혼란기의 어느 시절, 단지 힘의 논리만이 절대적 신으로 추앙 받고 있던 그 어느 시절, "기드온"이라고 이름하는 "므나쎄" 지파의 한 장수가 대권을 장악하고 왕이 되어 40여년을 통치한 다음, 주어진 수를 호화스러운 권좌에 앉아서 다 누린 다음, 마침내 그 수가 다하여 죽었을 때, 그가 남겨놓은 아들들은 무려 7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 왕조의 비극은 주지하시는 대로 이 70명이 넘는 왕자들 사이의 권력 암투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왕자들 중에서도 특히 세겜 출신의 "아비멜렉"이라는 왕자의 정치적 야심은 비정하다 못해서 처참할만큼 가혹한 형태를 띄었습니다. 마침내, 권력쟁취를 위해서는 형제간의 혈연이나 윤리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해도 좋다는 급진적 사고의 이끌림을 받은 "세겜"의 패륜아 아비멜렉은 오직 왕이 되겠다는 일념에만 눈이 가려서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데까지 갑니다. 어느 날, 그는 소위 말하는 "정치깡패"들을 돈으로 매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매수한 깡패들을 충동질하여 그는 그의 형제 왕자 70여명을 모두 몰아 잡아 한 바위 위에 메어쳐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아니고 70명이나 되는 형제를 모두 한 바위 위에 몰아 잡아 놓고 떡돌 치듯 쳐서 모두 죽이는 이 전대미문의 비인도적이고 반도덕적인 형제 살육행위가 마침내, 사람이나 동물의 양심은 물론이고 나무들의 양심까지 충격을 주어서 나무들로 하여금 사람이 말해야 할 말을 대신하게 하였다는 것이 성서의 입장이었습니다. 나무들이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여류문인 임옥인씨가 어느 일간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의 집 정원에 정성 들여 가꾸어 온 나무를 소개한 바가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무심코 그 나무 곁에 서서 혼잣말로 "이 나무를 뽑아서 딴 곳으로 옮겨 심어야겠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나무가 그 소리를 듣고는 부르르 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본문에 나오는 나무들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아비멜렉의 이 가공할만한 형제살육 행위를 보고 참다 못한 나무들이 또한 분노에 떨면서 감히 앞을 다투어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했노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본래 내 몸에서 감람유 기름을 내는 일을 천직으로 부여받았소. 이 무화과 열매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소. 그런데, 나 어찌 이 귀한 직분을 내어버리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 왕으로 군림하여 으스대고만 있겠소?" 포도나무도 또한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본래 내 몸에서 나는 포도열매로 포도주를 만드는 천직을 부여받았소. 이 포도주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소. 그런데, 나 어찌 이 귀한 직분을 내어버리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 왕으로 군림하여 으스대고만 있겠소?" 그러나 자기 분수를 모르는, 이른바, 역사의 가라지와도 같은 가시나무는 전혀 다른 말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정말로 나를 왕으로 모시려는가? 정녕 그러하거든, 와서 내 그늘 아래 숨어라, 그렇지 않았다가는 이 가시덤불이 불을 뿜어내어 레바논의 송백까지 삼켜버릴 것이다."
이 나무들의 이야기는, 실은 70명이나 되는 형제왕자들을 한 바위 위에 몰아놓고 모두 살육한 아비멜렉의 처절한 형제 살육행위를 전해들은 한 왕자, 즉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유일한 한 왕자인 요담이 그의 형제의 이러한 악행을 비판하는 말을 우화로 지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화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는 "나무가 말을 한다"는 어떤 기상천외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야기를 전해보자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나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나무에 가리워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무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나무처럼 경직되어 있고 아무리 사람이 식물인간화되어 있는 그런 왕권사회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사람을 나무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마치 나무로 보인다고 해서 나무들 속에 가리워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거나, 또는 나무들 속에 가리워 있는 사람을 그냥 나무로만 취급하여, 도끼로 나무들을 모두 찍어 넘기듯 그렇게 모든 사람을 한 바위 위에 묶어 놓고 떡치듯 짓이겨 죽여 버리는, 이른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그런 왕권사회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 역설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왕권사회는 실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나무로만 보게 하는 사회였습니다. 권력이나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사람을 나무처럼 경직된 하나의 소유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로가 아니라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그 사회가 희망이 있는 사회가 되는 법인데 기드온 사후의 아비멜렉 시대의 사회는 실로 "나무에 가리워 있는 인간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그런 희망 없는 사회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맥베드"도 또한 권력욕의 환상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한 잘못으로 인하여 스스로 멸망을 당하였던 한 권력자의 비극적 생애를 소개해 준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정치권력욕의 환상에 사로잡힌 맥베드는 환영 속에 나타난 한 마녀의 다음과 같은 예언에, 마치 최면 걸린 환자처럼 완전히 사로잡히고 맙니다. 환영 속의 그 마녀는 이렇게 외칩니다.

맥베드, 멕베드, 맥베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저 버남의 나무들이 단시네인의 언덕까지 쳐들어오지 않는 한 맥베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이 환영 속의 마녀가 외친 신탁의 소리를 들은 맥베드는 거대한 착각에 사로잡혀, 자신에 차서 그리고 흥분에 들뜬 채 이렇게 외칩니다.

그렇다. 나무들이 걸어다니는 일!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누가 감히 저 나무를 소집하여 대지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나무 뿌리들을 뽑아 내라고 명령할 수 있겠는가? 훌륭한 예언이다! 정말로 고맙다! 버남의 나무들이 움직여 사람들처럼 걸어다니지 않는 한 맥베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맥베드는 여기서 매우 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직화되어 있는 저 나무들도 양심의 충동을 받는 그 날에는 능히 움직여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감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권력에 짓눌려 나무들처럼 경직되어 있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지 결코 나무는 아니라고 하는 것, 그리고 영락없이 나무도 한 번 그 양심이 깨우쳐지면 더 이상 나무가 아니라 사람이 되고, 또 사람이 된 그 나무는 능히 걸어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처럼 감히 복수하는 힘있는 군대로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맥베드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오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마침내 단시네인 성안으로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달려드는 한 전령이 있게 되는데 그는 맥베드를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폐하, 제가 언덕 위에서 파수를 보다가 버남 쪽을 바라본즉 그곳에서 별안간 나무들의 숲이 움직이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전령의 외침은 "버남의 나무들이 단시네인의 언덕까지 쳐들어오지 않는 한 백베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하는 신탁을 전한 환영 속의 마녀가 외쳤던 그 예언을 구체화시켜 주는 그런 외침이었습니다. 과연, 이 전령의 외침은 하나의 "진실"로 드러나게 되는데 단시네인 성문 앞까지 걸어 온 그 나무들은 마침내 자기네의 정체를 드러내었습니다. 그 걸어 온 나무들은 맥베드가 왕권을 가로채기 위하여 살해하였었던 선왕 당컨의 아들인 맬컴 왕자와 이 맬컴 왕자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으려고 맥베드에게 도전한 반란군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러했습니다.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이 실상은 나무가 아니라 실제로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맥베드는 단지 "나무가 어떻게 걸어다닐 수 있는가? 결단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는 잘못된 신념을 아전인수격으로만 이해하고 자기의 정치권력욕을 정당화만 하고 있다가 끝내는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의 공격을 받고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두 이야기, 즉 요담의 우화와 맥베드의 비극을 통하여 인간들이 그 고유한 인간성을 상실하여 식물인간으로 비인간화되는 그런 권력 이데올로기를 우상화하는 시대에 대한 한 날카로운 성서적 시니시즘을 듣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람을 나무로 보는 경직된 시대를 향하여 나무로 간주되어 온 비인간화된 사람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보는 인간화의 시대를 열라고 강력히 촉구하는 한 예언자적 소리를 우리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하여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 본문인, 마가복음 8장 22-26절에 나오는 소경이 본 "걸어다니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도 사실은 바로 이러한 문맥 안에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베쎄다의 한 소경, 그것은 실로 인간을 나무로 보는 비인간화된 예수 당시의 현실을 대변해 주는 한 종교적, 사회적 심벌로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강요 속에 살아왔던 유대인들, 그리고 율법주의의 족쇄를 차고 거짓된 경건을 살아야만 했던 1세기의 유대인들, 그들은 예외 없이 사람을 나무로만 보도록 강요받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소경 아닌 소경들로 가득 차 있는 경직된 사회 속에, 감히 메시아적 사명을 가지고 뛰어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예수님의 생각 속에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안식일이라는 제도의 노예로 경직되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앙이 깊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살아 생동하는 인간인격체들을 율법이니, 교조니, 관습이니, 도덕이니, 기업윤리니, 정치권력이니 하는 것으로 칭칭 묶어 마치 식물인간처럼, 단순한 꼭두각시로 만들어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는 비인간화의 현실을 깨뜨려 보겠다고 나선 것이 또한 예수운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예수운동의 기본정신이었습니다.
걸어다니는 나무들, 이것은 식물인간처럼 경직되어 비인간화된, 소외된 인간들을 완곡하게 묘사한 하나의 성서적 시니시즘입니다. 비인간화된 사람들, 눌림 받고 소외되어 나무나 돌처럼 버려진 사람들, 그래도 사람의 양심을 지키면서 살겠다는 사람들, 그들은 사람은 사람이라도 사람 같지 않아서 일종 걸어다니는 나무들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 이른바, 비인간화된 나무들이 사람으로 보여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는 구원의 희망이 동터온다는 것이 예수의 메시아 운동의 기본정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도 실제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그런 치유행위도 되겠지만 오히려 그것은 사람을 걸어다니는 나무로만 보는 영적 암흑의 현실을 깨뜨려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해주는 인간구원운동, 인간해방운동, 예수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 본문은 예수께서 이러한 비인간화된 현실을 조금씩 메시아의 시대로 변화시켜 가는 인간해방사의 한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나타낸 한 장면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경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좀 보이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 그 소경은 눈을 뜨면서 말하기를,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다니는 것을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 다음 단계로 그의 눈에 손을 대셨더니, 비로소, 눈이 맑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그 소경이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들이 방금 떠나왔던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을 당부하시면서 그를 집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두 가지 점에서 궁금한 점이 나타납니다. 그 첫째는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그 일을 예수님께서는 마을 안에서 하시지 않고 마을 밖에서 하시었다는 것이고, 또 그를 고치신 다음에도 고침 받은 자기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눈을 뜨게 하시는 일을 단 한번에 완료하시지 않고 두 번에 걸쳐서 하셨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많은 사람의 눈이 주목하는 마을 안에서 행하지 않고 마을 밖에서 행하시었다는 것은, 많은 주석가들이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메시아성을 은폐시키려고 노력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성을 은폐하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을 철저히 나무로 비인간화시키는 겹겹이 쌓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감히 무너뜨리고, 걸어다니는 비인간화된 나무들을 감히 참 인간으로 인간화시키는 그런 엄청난 혁명적 메시아의 인간 해방운동이 마을 한 복판에서 드러나게 전개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스런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안식일의 제도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을 해방시켜 인간이 명실공히 안식일의 주인이 되도록 하려 하였던 예수가, 오히려 안식일의 제도에 인간을 노예화시키기를 원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손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였듯이, 식물인간처럼 인간들을 비인간화시켜서 그 인간을 힘있는 자의 상품으로 전략시키는 로마사회의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과감히 깨뜨리고, 거기서부터 상품화된 인간을 건져내려고 하는 혁명적 인간화 운동이, 만일 로마의 악명 높은 팍스 로마나의 이데올로기가 우는 사자처럼 판을 휩쓸고 있는 마을 한 복판에서 전개되었다면 그는 분명히 돌에 맞아 죽는 비극이나 보복폭력 또는 진압폭력에 희생되는 경험을 하였을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메시아 운동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프랑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듯 그렇게 마을 한 복판에서 자기를 시위하며 일어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소경의 손을 잡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무로 비인간화된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을 사람으로 인간화시키는 엄청나고도 철저한 인간변화와 사회변화 활동을 이룩하시고는 눈이 밝아진 소경 되었던 자를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가지 말고 마을을 피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지혜였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생각하셨던 인간변화의 혁명, 즉 사람을 나무로만 보던 세계를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아니 걸어다니는 나무로 식물인간화된 인간을 참 인간으로 해방시키는 엄청난 사회변화를 추구해 간 예수 운동이란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정치적 메시아 운동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가 생각했던 것 같은 그런 순수 종교적 메시아 운동도 또한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메시아 운동이 지닌 그 핵심은 십자가의 대속적 수난과 죽음을 그 값으로 치르고라도 인간의 식물인간화하는 저 악랄한 비인간화의 사회구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보자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엄청난 메시아 관의 차이, 즉 십자가의 대속적 고난을 도구로 삼은 예수의 진정한 메시아 운동과 힘의 논리에 기초한 당시의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그런 정치적이고도 시오니즘적인 폭력적 성격의 메시아운동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저한 괴리 현상은 예수로 하여금 자신의 메시아성을 은폐케 한 그 근본 이유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뜻 사이의 이 엄청난 차이,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시리만큼, 예수님과 당시의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서로 대립 상충되는 메시아관의 차이 때문에, 즉 엄청난 이념적 차이의 깊은 골 때문에 인간화운동의 발전을 급진적으로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즉, 두 번에 걸친 과정을 통하여 진행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운동이 지향해 간 목표는 그것이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그것은 십자가의 대속적 고난을 통하여 이룩하는 인간화운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을 나무로 보는 비인간화의 현실을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인간화의 현실로 바꾸어 가는 그런 인간화운동이었습니다. "걸어다니는 나무들"- 그들이 실상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또한 어디까지나 진정한 사람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들 뒤에 있는 참 인간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더 이상 비인간화시키고 인간이 인간을 식물인간으로 경직화시키는 그런 사회는 기필코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 시대가 오면 율법주의, 교조주의, 권력지상주의, 물질주의, 힘의 이데올로기 등등의 비인간화의 요소들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져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이 눈을 뜨게 되고 마침내는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이 실상은 나무들이 아니라 모두 인격체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감히 나무들의 노래도 듣게 될 것입니다. 감히 나무들의 사랑 이야기도 듣게 될 것입니다. 걸어다니는 나무들! 종로나 을지로나 강남로나 간에 걸어다니는 나무들이 모두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그 때 우리들의 세계에는 메시아의 시대가 비로소 동터오게 될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댓글 '1'

e4r5

2010.06.04 06:33:24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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