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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넓히시는 하나님.

마가복음 권진관............... 조회 수 1769 추천 수 0 2008.04.18 07: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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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7:24-30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우리는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희망을 잃게 되기도 하며, 무슨 일이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의미를 찾지 못할 때, 그리고 좌절하고 희망을 가지지 못할 때 희망을 갖게 하고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주는 힘의 원천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 나의 삶의 희망이 되시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 짧은 시간 동안에 자매 형제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드리려고 하는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위로와 은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일들이 잘 안될 때, 특히 내가 생각했던 일들이 아주 의미가 있고 최상의 것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실패하게 됐을 때 크게 실망합니다. 지난 학기 동안 좋은 강의를 해냈다고 생각하고 학생들로부터도 호응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도 정작 그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가 기대했던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는 실망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동료 목사 중 민중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분이 있는데 최근 그분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자기 교회에 아주 착실한 젊은 여신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신도는 고등학교만 나왔지만 서울에서 대학공부를 더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정 형편이 나빠서 먼저 공장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고, 그런 가운데 이 목사님의 교회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그 여신도는 교회에서 정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주일을 지켰으며, 새벽기도회, 성경공부 등 교회의 모든 행사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2년간의 청년회 회장, 교회 희년위원회 위원장 등을 두루 잘 감당하고 헌금도 열심히 내는 정말 빠져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그 신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 정성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교인은 전도도 많이 해왔기 때문에 결혼하게 되면 그 남편도 틀림없이 데리고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교회를 안 나오겠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다른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었으며 평소에 이 목사님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던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대형 버스만 30대가 넘는 대단히 큰 교회라고 합니다. 하필이면 소문도 좋지 않은 그 교회를 왜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에 이 목사님은 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이 그 동안 모든 자존심을 걸고 감당해 왔던 목회가 일순간 무너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수의 교인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교회의 희망이었던 사람을 잃었다는 것은 목회자의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 대형 교회는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고도 사람을 끄는데, 내가 그렇게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있는 우리 교회로부터는 사람들이 떠나가 버리기만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실망 속에서 찾는 것은 하나님뿐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나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기에 나는 이런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모든 삶들도 결국 실패작인지 모릅니다. 권력자들도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같이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비애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연구한 것이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때에 오는 외로움과 허탈감은 보상받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 많은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들의 무상함을 느끼게 될 때 자신의 삶을 실패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도 이러한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실패라고 생각할 때 오는 무상함과 실망 앞에서도 삶의 의미와 희망을 주고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분은 우리와 관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나의 등을 두드려 주시며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우리 부모나 선생님과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고통 당할 때 같이 마음 아파하시고 함께 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리고 매순간마다 이러한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들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을 잊게 하는 사건들을 접하였습니다. 이 사건들은 다음의 몇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잊게 하는 사건 중에 하나가 최근 많이 문제되고 있는 인간 복제의 현실화의 사건입니다. 인류가 이룩한 과학문명 중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위협한 사건은 지구가 돈다고 하는 천동설이 아니라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원자탄 발명과 그리고 최근에 나온 인간복제의 기술일 것입니다. 이 각각의 사건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만이 해내실 수 있는 것들을 인간들이 해낼 수 있게 만든 사건들입니다. 핵무기의 개발로 사람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복제로 사람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미국은 인간의 배아를 복제하는 것은 인정하되, 이 배아를 자궁에 넣어 자궁에서 자라게 하는 것을 막는, 즉 기술적으로 복제는 허용하되 그것으로 인간을 직접 만드는 것만은 막는 방향으로 미국정부의 입장이 정해졌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둘째로, 아직은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영역으로 시간의 초월이 있습니다. 빛의 속도에 맞먹을 정도로 빨리 달릴 수 있는 우주선으로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우주 여행의 1년이 지구의 10년 이상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나이는 한 살밖에 안 먹었는데 지구에 돌아와 보니 10년이 경과한 것이 됩니다. 나이 차이가 많은 연인간에는 좋은 해결책을 가진 것이 되겠지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70이 넘었는데 그 부인은 아직 20대라고 하지요. 만약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세포를 복제하여 그것을 부인의 자궁에 넣어 10개월 후에 아이를 낳게 한다면, 새로 태어난 아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똑같이 생긴 1살 짜리 아기인데 이 아기를 놔두고 그 엄마가 빠른 우주선을 타고 몇 년간만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남편은 죽고 거의 같은 나이의 성인이 된 복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다시 만나 살게 된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의 부활이 아니라, 우주여행 갔다 온지 3년만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내일의 주가를 알아낼 수 있으므로 떼돈을 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 지구는 이 세상에 없는 세상이 되겠지요. 그러나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점쳐오고 있습니다. 영화 "Back to the future"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저는 최근에 작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류의 21세기에 현실로 가능한 세계를 점친 어떤 신학자가 말한 것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컴퓨터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종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언급되었는데 앞으로는 그들이 판을 치고, 사람들이 교회에는 안 나가고,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거실에서 예배드린다는 상식적인 얘기였습니다. 요즘 큰 교회들이 지교회들을 지어 놓고, 본교회의 예배 실황 혹은 설교 실황을 들려주고 헌금을 걷는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전자교회인 TV를 통한 교회예배에서 안수나 안찰도 TV로 준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TV 화면에 얼굴을 갖다 대던가, 손을 갖다대던가 하는 방식으로 안수를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컴퓨터가 발달하고 멀티미디어가 일상화되는 21세기에는 지식의 정보화가 이루어져서 굳이 신학교나 대학에 가서 공부할 필요 없이 4년치 혹은 3년치의 강의를 CD에 넣어 그것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온갖 신학정보, 목회정보를 다 가질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또 컴퓨터의 발전으로 전자공간, 가상현실이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고민할 것 없이 컴퓨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이콘을 클릭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고, 어떻게 해야 그를 경험할 수 있고, 그가 지금 이 시간에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자막에 쭉 나타날 수도 있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클릭만 하면 됩니다. 다만 몇몇 사람의 전문가만 고민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이야말로 얼마나 기가 막히게 잘못된 것이고, 전체주의적인 것이고,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는 것인가는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이중에서 가장 큰 충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모방으로 가득 찬 세계로 21세기에는 너무나 모방이 완벽해져서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현실이 연출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내성적인 청년이 직장에서는 아주 충실한 일꾼이었다가 집에 돌아오면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 온갖 하고 싶은 일을 다 벌이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 파멸하고 만다는 얘기가 현실로 들려올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이러한 가상현실의 공간에서는 인간의 마음마저도 쉽게 조작할 수 있어서 은혜의 기분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먹으면 되고, 사랑 받는 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드링크제를 먹으면 되고, 희망을 갖고 싶으면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약을 복용하고, 어떤 가상현실 속을 헤매면 될 것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연출하는 현실은 실제로 모두 가짜라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좀먹어 갈 수도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가상현실이 하나님을 대신하며, 인간복제기술이나 핵무기개발 등 과학기술이 하나님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하나님은 구체적인 우리들과의 관계 속에 계신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슬플 때 나와 함께 슬퍼하시고, 내가 기쁠 때 그분도 기뻐하십니다. 나와의 관계 속에 계시는 그 분은 우리들의 이웃들과도 관계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웃들의 어려움도 헤아려 주시고 그 어려움에 참여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간 동안에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것입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변방 띠로 지방을 가셨을 때, 그곳에서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이방인 여인은 자기의 딸이 마귀 들려 고통 당하고 있으니 그 마귀를 좇아 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매우 놀라울 정도로 배타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데 이 여인의 대답이 예수를 아주 감동시켜 버렸습니다.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예수는 철저히 유대민족 우선주의였습니다. 우선 유대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자꾸 우리들도 해방시켜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에게 투자해두어야 유대를 악의 무리로부터 건져내고자 할 때 유대백성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적인 사고가 예수님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도움을 줘봐야 당장 유용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도 사물을 유용성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유용한 것인가부터 생각합니다. 나의 목표를 위해 전략적인 가치가 있는 가로 판단합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만나기 이전의 예수도 그러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녀들뿐 아니라 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아픔에도 동참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이 여인은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이제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중이 없어졌다고 하며 민중신학도 이젠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요, 그 사랑의 관계를 넓히시는 하나님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과제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민족 아니 우리 남한의 한국사람들만을 위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동포인 북한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곤 나아가서 우리는 민족의 경계를 뛰어 넘어 아시아의 민중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계가 좁을수록 우리는 가짜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족주의, 지역주의, 또 민족주의를 뛰어넘으라고 요청하시고 초청하시는 분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 민중의 아픔 특히 북한민중의 아픔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 와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고통에도 응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맺는 분이십니다. 그 관계를 맺되 전지전능하게 맺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픔을 남김없이 알고 계신다는 면에서 전지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픔 속에 전적으로 참여하실 만큼의 아픔을 수용하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점에서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예수에게 소개하였고, 예수는 그 하나님이야말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임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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