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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7:2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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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
우리들은 바야흐로 제3천년의 시작이 임박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귀가 따갑게 21세기의 이야기를 듣고 있고, 새 시대에 관한 여러 가지 예견들을 제시받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는 오래 전부터 여러 관점에서 제시되어졌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든 전환을 핵심적으로 말한다면 결국 모든 관계구조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원적이고 지배·피지배의 구조로부터 다양하고 상호 호혜적인 관계구조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이요 새 시대를 여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전환을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들이 시도되고 진행되어 왔습니다. 새길교회도 기독교 안에 새 패러다임을 오게 하기 위한 한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러나 그리 쉽사리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구 패러다임에 익숙하여 있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새 방법에 대해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우리의 머뭇거림이 우리들이 가진 경직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정적인 것, 지금까지 나를 지켜오던 규범적인 것, 소위 합법적인 것, 그런 것들이 익숙하고 편안하여 그 틀을 넘어선다는 것은 두렵고 힘들며 오히려 거부감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경직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 종교적 영역이라 생각하며, 지금까지의 규범들을 하나님의 뜻이요 진리라고 정당화 시켜왔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안에서 소위 진보적이라 하고 열려있다는 지식인 혹은 지도자들도 사실 보면 어느 선까지만 경직성을 풀어놓았지 전부 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몇 가지 부분들은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불변하는 복음이라고 믿고 신화적 원형으로 유지하기를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어느 정도 이루어 나갈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경직성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지혜에 대하여 폭넓게 생각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지혜는 때로는 처세술이나 잔꾀나 순간적 임기응변적 대응력 같은 그런 뜻으로도 이해됩니다. 이런 지혜에 대한 이해 때문에 때로는 지혜롭다는 것이 도덕성을 어느 정도 결여한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통합적 판단력이나 개인의 상황을 최대한 고려하는 깊은 배려의 태도나 그리고 관계성에 비중을 두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 나가며 그래서 모두에게 평화를 갖도록 하는 결과를 추구하는 태도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존의 위기에서 살아나게 하는 기지를 발휘하는 것도 지혜의 범주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지혜는 사람을 살리고, 평화와 화해와 조화롭게 하며, 모두 어우러져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의 지혜문서에도 지혜에 대한 이같은 다양한 이해의 모습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이 지혜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 곧 경직성, 합법성, 규범주의를 넘어서는데 줄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읽은 성서 본문으로부터 볼 수 있는 한 지혜와 그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은 쉽게 읽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모습은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예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이며 하나님이신 예수, 인류를 사랑하되 자기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인데 여기서는 한 이방 여인이 자기 딸의 병을 고치려는 일념에서 간청하는 그 어미의 정을 무참하게 무시하면서 거절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여인을 개로 취급하는 무자비한 유대 민족주의 남자 같아 보입니다. "이런 분이 인류를 사랑하는 자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이 예수의 모습은 우리의 일반적 예수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의 냉혹한 거절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여인에게 자극을 주어 그 믿음을 상승시키는 교육적인 효과를 위하여 예수께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여 왔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이 이방 여인은 매우 믿음이 좋은 신앙의 모범으로 칭찬을 받아왔고 끈질기게 인내하면서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데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어떤 고통도 감내하는 끈질긴 모정의 사람임은 물론이고, 겸손한 믿음이 예수를 기쁘게 한 믿음의 여인이며, 재치 있는 대답으로 예수의 시험을 통과한 지혜로운 여인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여인을 물론 신앙의 모범인으로 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단순하게 무조건 믿고, 참고, 구하기만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고, 더 나아가 이 여인을 모범으로 무조건 예수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는 식의 신앙행태를 조장하는데 대해서도 우리는 염려해야 합니다.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종교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이 본문을 다시 읽게 되면, 우리는 이 말씀이 주는 커다란 의미를 새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예수께서 여행하며 지나가신 이 곳은 두로라는 지역으로, 두로지방은 두로도시의 근교지역으로 갈릴래아 북쪽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 지방에도 유다마을들이 있었습니다. 두로시는 광범위한 교역이 성행하는 부유한 도시였으며, 페니키아, 유대, 헬레니즘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로지방은 주로 농사를 지어 두로시에 식량을 공급하며 살고 있는 가난한 곳입니다. 주기적으로 식량난이 올 때는 두로시의 부자들이 곡물을 다 사가서 주위 지역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됩니다. 두로의 교역은 에스겔 27 : 17에도 나타나듯이 유다 이스라엘이 밀과 고무, 밀랍, 꿀, 기름 등을 두로시에 제공하고 있고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두로의 교외지역은 두로시의 식량공급원이었습니다. 가난한 유대인들은 문화적 차이도 겪으면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의 태도를 보게 되면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는 이 여자를 시로페니키아 출신 그리스 여자로 규정합니다. 이 여자는 지리적으로는 페니키아 출신이고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페니키아어는 아람어와 유사하여 예수와 의사소통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자녀들을 먼저 배부르게 해야 한다"고 하는 말은 가난하고 늘 빼앗기고 있는 유대인들, 부로부터 소외되어 고생하는 가난한 자에 대한 사회적 상황을 직시하게 합니다. 두로시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곡물을 모두 사갔고, 지역 유대인들은 겨울 저장물을 다 써버리고 여름 내내 메마른 식물의 싹이나 뿌리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마가복음 7 : 27의 "먼저 유다 변방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빵을 가져다가 도시의 부유한 이방인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나 개보다는 자녀를 택하듯이 부유한 이방인보다는 가난한 유대인을 염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대답 안에는 그 두로시의 부유한 사람들이 갖는 오만과 독선을 당신은 가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두로시의 안정되고 풍요한 삶에서 가지는 편견과 막힌 사고를 당신은 가지지 않았는가? 라고 묻는 물음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유한 이방인과 가난한 유대인 사이의 적대감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 관계의 문제입니다. 두로시는 지속적으로 유다지역으로 영토 확장을 노렸고, 두로지방 유대인들의 재산을 징발하였고,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유대인들은 부유한 그리스인들을 침략하였습니다. 그들은 적대적인 관계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유한 헬라여자가 가난한 유대 떠돌이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고 예수는 두 관계의 냉정한 인식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관계의 폭로를 통하여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냉혹한 말들은 바로 정확한 상황인식을 상호 가지자는 것이고 이 과정을 통과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자는 태도에서 온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여자는 모든 것을 시인하고 자신들이 부를 무기로 가난한 자들의 양식을 빼앗은 개와 같은 존재들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태도가 예수를 변화시켜 딸의 병을 고쳐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치유와 살림의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가난한 유대인의 고통을 부유한 도시사람이 알고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라는 요구입니다. 예수의 태도는 즉 가난하고 권리를 빼앗긴 자들을 우선시 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원칙을 여기서도 밝히는 것이며, 유대 우선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가지 '개'라는 표현의 문제는 당시 율법을 모르는 평범한 백성을 일컬을 때 쓰기도 했고 이방인을 부를 때 쓰기도 한 말로 이 표현에는 율법을 모르는 민중, 여성, 이방인, 병자 등에 대한 멸시가 깔린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여인의 태도에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예수의 그 냉혹한 말씀은 여인에게 두로시의 관점에서 가진 경직성을 깨트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일상적 경험에서 얻어지는 내용으로 여인에게 그 여인이 가질 수 있는 모순을 지적합니다. 경제적으로 유대인을 착취하면서 두로시 우월주의를 가지고 그 규범적 사고에 있으면서는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의 말씀에 두로시 여인은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두로의 합법성이 얼마나 유대인들에게 부당한 것이며, 그 잘못을 알고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인의 놀라운 개방성, 열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놀라운 것은 이제 이 여인이 예수에게 예수가 가지고 있는 경직성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혜롭게 예수 자신이 한 말을 변형시켜서 그 문제를 지적합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당신이 행여라도 유대 율법주의에 의하여 이방인을 경멸하는 경직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방인도 하나님의 빵 부스러기를 먹는 자녀가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라는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가 부유한 그리스가 가난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문제 삼으면서 그 불의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에 100% 동의함과 동시에, 자신이 그 경제적 착취자의 입장에 서 있음을 인정하고 잘못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도 일종의 편견이며 그것 또한 차별과 소외의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여인의 지혜가 예수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딸의 생명을 살리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두로시와 그 변두리 유대인들의 불평등한 관계로 인한 적대적 관계에 상호이해와 화해와 새로운 관계 정립의 상황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합니다. 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지혜가 놀라운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이 여인을 단순한 인내와 끈질긴 간청과 무조건적 믿음을 가진 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을 변형하여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한 여인의 용기와 지혜를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4장의 예수와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 이야기와 유사한 형태를 가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상호적으로 자신들이 가진 경직성을 대화를 통하여 무너뜨리고 놀라운 관계를 일으키는 지혜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가 예수의 열림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이 아닌 상호적 열림, 예수가 일방적으로 우위에서 열림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인과 함께 경직성을 풀어 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제 지혜의 특성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가져오고, 화해하고, 함께 하는 상황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지혜의 힘과 그 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지혜를 더 이해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 민담에는 지혜로운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개똥에 미끄러진 장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노파가 홀로 사는데 심술궂은 범이 이 노파의 무밭을 매일 짓밟았습니다. 노파는 궁리를 하다가 계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범에게 오늘밤에 팥죽을 쑤어 줄 테니 무밭을 밟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노파는 장독대에 화롯불을 묻어 놓고, 부엌에는 물통에 고춧가루를 풀고, 행주에는 바늘을 꽂아 놓고 또 부엌문 밖에는 쇠똥을 깔아두고 마당에는 덕석을 펴놓고 문간에 지게를 세워두었습니다. 밤에 범이 왔는데 "아이 추워라"고 하니까 노파가 범에게 장독대에 화로를 가져 오라 합니다. 범이 숯불이 꺼졌다고 말하니까 노파가 입으로 불어보라고 했습니다. 숯불이 범 눈에 들어가니 노파는 부엌에 가서 물로 씻으라고 합니다. 범은 물에 있는 고춧가루에 눈이 따가워 펄펄 뛰니까 노파는 행주로 닦으라고 하였고 행주에 꽂힌 바늘에 찔린 범이 소리를 지르며 나오다가 쇠똥에 미끄러지니 덕석이 범을 둘둘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문간에 있던 지게가 범이 쌓인 덕석을 지고 바다에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들도 재미있게 듣는 이 이야기는 한 힘없이 사는 노파가 권력가진 자들에게 지혜로 대항하여 권력자들을 물리쳤다는 힘없는 민중의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이 노파의 지혜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부장적 억압과 군주제의 폭력 아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국 민중과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지혜가 바로 힘없는 그들에게 생존력을 주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제도화된 사회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힘없는 개인을 살아남게 하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지혜로부터 나오는 정의는 합법적, 규범적 법칙에 의한 정의와는 대조적입니다. 논리에 맞고 원칙에 합당한 정당성을 기초로 하거나 전제로 한 논리적, 제도적 정의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생활의 경험 속에서 체득된 정의, 삶의 진리가 절절이 묻어 있는 정의입니다. 논리적이고 제도적인 정의의 자세에서는 그것은 정의로 인정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정의는 불의를 극복해내고 대항하는 힘을 가집니다. 생활의 경험 속에서 체득한 지혜는 강한 대결자, 억압자를 물리치고 평화를 이루는 참으로 민중적 정의의 표현입니다.
지혜는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진리를 인간의 일상적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습니다. 주어진 규범과 원칙에 의해서 진리나 정의를 규정짓는 일반적 법질서와는 달리 개개인의 상황과 맥락에서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것이 지혜의 특성입니다. 생활 속의 관계성, 생활 속의 정의는 지혜로부터 나옵니다. 지혜는 원칙의 사회제도나 공정성의 문제를 개인의 개별적 요구와 통합적으로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합리성과 법칙에 의한 정의가 아니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특수 상황과 그 맥락에서 정의를 이루어 나가는 생활 속의 정의입니다.
지금은 온 세상이 엄격한 합법성, 이성적 논리의 절대화, 규범과 원칙의 절대화, 그리고 그 규범과 원칙들에 얽매인 생활의 규격화, 결정론적 관계의 설정 등으로 몸살을 앓고 그 폐해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것들을 벗어나려 애쓰는 시대에 이미 돌입하였습니다. 또한 탈 규범화를 통하여 제3천년의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때입니다. 이제 우리 삶은 엄격한 합법성을 넘어 지혜로운 정의의 기반에서 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열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은 합법적, 율법정의가 지배하여 왔고 그 결과로 인한 비극적 역사로 얼룩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여진 수많은 일들 - 종교재판의 혹독성, 마녀화형, 십자군 전쟁,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합리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침묵과 동조, 기독교인들에 의한 노예제도, 미국의 원주민 인디언들의 학살과 제거 등 기독교의 도덕적 위기를 묻고,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주장이 현실적 조건들은 변화시킬 수 없는 감상적 주장들일 뿐이라고 비판받는 것은 바로 엄격한 합법성에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지혜의 원리를 성서로부터, 전통으로부터 새롭게 주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일상적 경험에서 베어 나오는 진리들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의 원리는 여성적이며 민중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입니다. 일상적인 경험들의 가장 비중이 큰 부분은 생존하는 것입니다. 즉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사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관계하며 그렇게 살아가는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관념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찾아 나갑니다. 그래서 지혜는 관계 중심적이며 생명 중심적입니다. 정의의 규정을 합법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맥락에서 개인의 상황이 어떻게 고려되어지는가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 진리들로부터 영원한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지혜의 특성은 성서의 지혜문서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성서의 지혜문서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교리적으로 혹은 경전이나 전통에서 말해진 내용을 하나님의 본질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들이 자기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율법서나 예언서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거나 자기를 계시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지혜서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문서를 현대적 사고의 책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경직성은 남성 중심적, 성직 중심적 제도의 특성에 의한 결과이며, 여성과 민중의 경험이 배제된 기독교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가부장적 원리에 의하여 지배 당해온 기독교 전통은 가톨릭에서는 독신 남성문화의 형태로 교황주의에 빠졌고, 교권의 절대화 속에 오직 통제, 지배의 원리만 작용하였습니다. 가톨릭에서 숨통을 튼 것은 마리아 공경에 있었다고 봅니다. 많은 신도들이 마리아를 통하여 위로 받고, 삶의 힘을 얻으며, 생존케 하는 신적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 경직성의 완화가 마리아 공경에서 이루어 졌다고 봅니다.
여성학자들은 이런 맥락의 윤리를 보살핌의 윤리라고 합니다. 그것을 정의의 윤리와 대칭적으로 비교해 보면 여성주의적 원리들이 드러남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보살핌의 윤리는 책임과 관계라는 도덕적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권리와 규칙이라는 개념이 중심이 아닙니다. 둘째, 보살핌의 윤리는 구체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으며,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상황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셋째, 보살핌의 윤리는 일련의 원칙으로서가 아니라 활동 - 보살피는 활동 - 으로서 가장 잘 표현됩니다. 보편적, 추상적 원칙보다는 누구나 매일 매일 겪고 있는 일상 경험과 도덕문제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교에 의하면 보살핌의 윤리는 획일성, 위계성, 관념적 추상성, 그리고 이런 것들에 의한 지배구조의 문제들을 넘어서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게 됩니다.
지금 이 지혜의 원리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 문제만 아니라 획일적 지배와 권리와 규칙이라는 엄격성에 매몰되어 있는 경직된 모든 구조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진리의 힘입니다. 이데올로기로 경직된 남북관계를 푸는 방법을 햇볕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삶의 경험의 진리에서 나온 지혜의 언어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성 원리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미래 세상의 삶의 원리로 수용하여야만 인류가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민중적 원리, 여성원리, 지혜의 원리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은 지혜와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잠언 8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소피아 - 하나님 곧 지혜 -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직성이 가져오는 죽임의 결과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라면 여성원리, 지혜의 원리에 의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살림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새로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러나 그리 쉽사리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구 패러다임에 익숙하여 있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새 방법에 대해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우리의 머뭇거림이 우리들이 가진 경직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정적인 것, 지금까지 나를 지켜오던 규범적인 것, 소위 합법적인 것, 그런 것들이 익숙하고 편안하여 그 틀을 넘어선다는 것은 두렵고 힘들며 오히려 거부감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경직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 종교적 영역이라 생각하며, 지금까지의 규범들을 하나님의 뜻이요 진리라고 정당화 시켜왔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안에서 소위 진보적이라 하고 열려있다는 지식인 혹은 지도자들도 사실 보면 어느 선까지만 경직성을 풀어놓았지 전부 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몇 가지 부분들은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불변하는 복음이라고 믿고 신화적 원형으로 유지하기를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어느 정도 이루어 나갈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경직성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지혜에 대하여 폭넓게 생각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지혜는 때로는 처세술이나 잔꾀나 순간적 임기응변적 대응력 같은 그런 뜻으로도 이해됩니다. 이런 지혜에 대한 이해 때문에 때로는 지혜롭다는 것이 도덕성을 어느 정도 결여한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통합적 판단력이나 개인의 상황을 최대한 고려하는 깊은 배려의 태도나 그리고 관계성에 비중을 두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 나가며 그래서 모두에게 평화를 갖도록 하는 결과를 추구하는 태도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존의 위기에서 살아나게 하는 기지를 발휘하는 것도 지혜의 범주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지혜는 사람을 살리고, 평화와 화해와 조화롭게 하며, 모두 어우러져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의 지혜문서에도 지혜에 대한 이같은 다양한 이해의 모습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이 지혜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 곧 경직성, 합법성, 규범주의를 넘어서는데 줄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읽은 성서 본문으로부터 볼 수 있는 한 지혜와 그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은 쉽게 읽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모습은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예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이며 하나님이신 예수, 인류를 사랑하되 자기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인데 여기서는 한 이방 여인이 자기 딸의 병을 고치려는 일념에서 간청하는 그 어미의 정을 무참하게 무시하면서 거절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여인을 개로 취급하는 무자비한 유대 민족주의 남자 같아 보입니다. "이런 분이 인류를 사랑하는 자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이 예수의 모습은 우리의 일반적 예수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의 냉혹한 거절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여인에게 자극을 주어 그 믿음을 상승시키는 교육적인 효과를 위하여 예수께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여 왔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이 이방 여인은 매우 믿음이 좋은 신앙의 모범으로 칭찬을 받아왔고 끈질기게 인내하면서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데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어떤 고통도 감내하는 끈질긴 모정의 사람임은 물론이고, 겸손한 믿음이 예수를 기쁘게 한 믿음의 여인이며, 재치 있는 대답으로 예수의 시험을 통과한 지혜로운 여인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여인을 물론 신앙의 모범인으로 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단순하게 무조건 믿고, 참고, 구하기만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고, 더 나아가 이 여인을 모범으로 무조건 예수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는 식의 신앙행태를 조장하는데 대해서도 우리는 염려해야 합니다.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종교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이 본문을 다시 읽게 되면, 우리는 이 말씀이 주는 커다란 의미를 새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예수께서 여행하며 지나가신 이 곳은 두로라는 지역으로, 두로지방은 두로도시의 근교지역으로 갈릴래아 북쪽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 지방에도 유다마을들이 있었습니다. 두로시는 광범위한 교역이 성행하는 부유한 도시였으며, 페니키아, 유대, 헬레니즘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로지방은 주로 농사를 지어 두로시에 식량을 공급하며 살고 있는 가난한 곳입니다. 주기적으로 식량난이 올 때는 두로시의 부자들이 곡물을 다 사가서 주위 지역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됩니다. 두로의 교역은 에스겔 27 : 17에도 나타나듯이 유다 이스라엘이 밀과 고무, 밀랍, 꿀, 기름 등을 두로시에 제공하고 있고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두로의 교외지역은 두로시의 식량공급원이었습니다. 가난한 유대인들은 문화적 차이도 겪으면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의 태도를 보게 되면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는 이 여자를 시로페니키아 출신 그리스 여자로 규정합니다. 이 여자는 지리적으로는 페니키아 출신이고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페니키아어는 아람어와 유사하여 예수와 의사소통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자녀들을 먼저 배부르게 해야 한다"고 하는 말은 가난하고 늘 빼앗기고 있는 유대인들, 부로부터 소외되어 고생하는 가난한 자에 대한 사회적 상황을 직시하게 합니다. 두로시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곡물을 모두 사갔고, 지역 유대인들은 겨울 저장물을 다 써버리고 여름 내내 메마른 식물의 싹이나 뿌리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마가복음 7 : 27의 "먼저 유다 변방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빵을 가져다가 도시의 부유한 이방인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나 개보다는 자녀를 택하듯이 부유한 이방인보다는 가난한 유대인을 염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대답 안에는 그 두로시의 부유한 사람들이 갖는 오만과 독선을 당신은 가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두로시의 안정되고 풍요한 삶에서 가지는 편견과 막힌 사고를 당신은 가지지 않았는가? 라고 묻는 물음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유한 이방인과 가난한 유대인 사이의 적대감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 관계의 문제입니다. 두로시는 지속적으로 유다지역으로 영토 확장을 노렸고, 두로지방 유대인들의 재산을 징발하였고,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유대인들은 부유한 그리스인들을 침략하였습니다. 그들은 적대적인 관계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유한 헬라여자가 가난한 유대 떠돌이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고 예수는 두 관계의 냉정한 인식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관계의 폭로를 통하여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냉혹한 말들은 바로 정확한 상황인식을 상호 가지자는 것이고 이 과정을 통과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자는 태도에서 온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여자는 모든 것을 시인하고 자신들이 부를 무기로 가난한 자들의 양식을 빼앗은 개와 같은 존재들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태도가 예수를 변화시켜 딸의 병을 고쳐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치유와 살림의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가난한 유대인의 고통을 부유한 도시사람이 알고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라는 요구입니다. 예수의 태도는 즉 가난하고 권리를 빼앗긴 자들을 우선시 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원칙을 여기서도 밝히는 것이며, 유대 우선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가지 '개'라는 표현의 문제는 당시 율법을 모르는 평범한 백성을 일컬을 때 쓰기도 했고 이방인을 부를 때 쓰기도 한 말로 이 표현에는 율법을 모르는 민중, 여성, 이방인, 병자 등에 대한 멸시가 깔린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여인의 태도에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예수의 그 냉혹한 말씀은 여인에게 두로시의 관점에서 가진 경직성을 깨트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일상적 경험에서 얻어지는 내용으로 여인에게 그 여인이 가질 수 있는 모순을 지적합니다. 경제적으로 유대인을 착취하면서 두로시 우월주의를 가지고 그 규범적 사고에 있으면서는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의 말씀에 두로시 여인은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두로의 합법성이 얼마나 유대인들에게 부당한 것이며, 그 잘못을 알고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인의 놀라운 개방성, 열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놀라운 것은 이제 이 여인이 예수에게 예수가 가지고 있는 경직성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혜롭게 예수 자신이 한 말을 변형시켜서 그 문제를 지적합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당신이 행여라도 유대 율법주의에 의하여 이방인을 경멸하는 경직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방인도 하나님의 빵 부스러기를 먹는 자녀가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라는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가 부유한 그리스가 가난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문제 삼으면서 그 불의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에 100% 동의함과 동시에, 자신이 그 경제적 착취자의 입장에 서 있음을 인정하고 잘못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도 일종의 편견이며 그것 또한 차별과 소외의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여인의 지혜가 예수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딸의 생명을 살리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두로시와 그 변두리 유대인들의 불평등한 관계로 인한 적대적 관계에 상호이해와 화해와 새로운 관계 정립의 상황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합니다. 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지혜가 놀라운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이 여인을 단순한 인내와 끈질긴 간청과 무조건적 믿음을 가진 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을 변형하여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한 여인의 용기와 지혜를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4장의 예수와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 이야기와 유사한 형태를 가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상호적으로 자신들이 가진 경직성을 대화를 통하여 무너뜨리고 놀라운 관계를 일으키는 지혜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가 예수의 열림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이 아닌 상호적 열림, 예수가 일방적으로 우위에서 열림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인과 함께 경직성을 풀어 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제 지혜의 특성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관계를 가져오고, 화해하고, 함께 하는 상황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지혜의 힘과 그 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지혜를 더 이해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 민담에는 지혜로운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개똥에 미끄러진 장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노파가 홀로 사는데 심술궂은 범이 이 노파의 무밭을 매일 짓밟았습니다. 노파는 궁리를 하다가 계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범에게 오늘밤에 팥죽을 쑤어 줄 테니 무밭을 밟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노파는 장독대에 화롯불을 묻어 놓고, 부엌에는 물통에 고춧가루를 풀고, 행주에는 바늘을 꽂아 놓고 또 부엌문 밖에는 쇠똥을 깔아두고 마당에는 덕석을 펴놓고 문간에 지게를 세워두었습니다. 밤에 범이 왔는데 "아이 추워라"고 하니까 노파가 범에게 장독대에 화로를 가져 오라 합니다. 범이 숯불이 꺼졌다고 말하니까 노파가 입으로 불어보라고 했습니다. 숯불이 범 눈에 들어가니 노파는 부엌에 가서 물로 씻으라고 합니다. 범은 물에 있는 고춧가루에 눈이 따가워 펄펄 뛰니까 노파는 행주로 닦으라고 하였고 행주에 꽂힌 바늘에 찔린 범이 소리를 지르며 나오다가 쇠똥에 미끄러지니 덕석이 범을 둘둘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문간에 있던 지게가 범이 쌓인 덕석을 지고 바다에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들도 재미있게 듣는 이 이야기는 한 힘없이 사는 노파가 권력가진 자들에게 지혜로 대항하여 권력자들을 물리쳤다는 힘없는 민중의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이 노파의 지혜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부장적 억압과 군주제의 폭력 아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국 민중과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지혜가 바로 힘없는 그들에게 생존력을 주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제도화된 사회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힘없는 개인을 살아남게 하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지혜로부터 나오는 정의는 합법적, 규범적 법칙에 의한 정의와는 대조적입니다. 논리에 맞고 원칙에 합당한 정당성을 기초로 하거나 전제로 한 논리적, 제도적 정의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생활의 경험 속에서 체득된 정의, 삶의 진리가 절절이 묻어 있는 정의입니다. 논리적이고 제도적인 정의의 자세에서는 그것은 정의로 인정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정의는 불의를 극복해내고 대항하는 힘을 가집니다. 생활의 경험 속에서 체득한 지혜는 강한 대결자, 억압자를 물리치고 평화를 이루는 참으로 민중적 정의의 표현입니다.
지혜는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진리를 인간의 일상적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습니다. 주어진 규범과 원칙에 의해서 진리나 정의를 규정짓는 일반적 법질서와는 달리 개개인의 상황과 맥락에서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것이 지혜의 특성입니다. 생활 속의 관계성, 생활 속의 정의는 지혜로부터 나옵니다. 지혜는 원칙의 사회제도나 공정성의 문제를 개인의 개별적 요구와 통합적으로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합리성과 법칙에 의한 정의가 아니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특수 상황과 그 맥락에서 정의를 이루어 나가는 생활 속의 정의입니다.
지금은 온 세상이 엄격한 합법성, 이성적 논리의 절대화, 규범과 원칙의 절대화, 그리고 그 규범과 원칙들에 얽매인 생활의 규격화, 결정론적 관계의 설정 등으로 몸살을 앓고 그 폐해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것들을 벗어나려 애쓰는 시대에 이미 돌입하였습니다. 또한 탈 규범화를 통하여 제3천년의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때입니다. 이제 우리 삶은 엄격한 합법성을 넘어 지혜로운 정의의 기반에서 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열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은 합법적, 율법정의가 지배하여 왔고 그 결과로 인한 비극적 역사로 얼룩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여진 수많은 일들 - 종교재판의 혹독성, 마녀화형, 십자군 전쟁,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합리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침묵과 동조, 기독교인들에 의한 노예제도, 미국의 원주민 인디언들의 학살과 제거 등 기독교의 도덕적 위기를 묻고,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주장이 현실적 조건들은 변화시킬 수 없는 감상적 주장들일 뿐이라고 비판받는 것은 바로 엄격한 합법성에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지혜의 원리를 성서로부터, 전통으로부터 새롭게 주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일상적 경험에서 베어 나오는 진리들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의 원리는 여성적이며 민중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입니다. 일상적인 경험들의 가장 비중이 큰 부분은 생존하는 것입니다. 즉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사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관계하며 그렇게 살아가는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관념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찾아 나갑니다. 그래서 지혜는 관계 중심적이며 생명 중심적입니다. 정의의 규정을 합법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맥락에서 개인의 상황이 어떻게 고려되어지는가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 진리들로부터 영원한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지혜의 특성은 성서의 지혜문서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성서의 지혜문서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교리적으로 혹은 경전이나 전통에서 말해진 내용을 하나님의 본질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들이 자기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율법서나 예언서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거나 자기를 계시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지혜서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문서를 현대적 사고의 책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경직성은 남성 중심적, 성직 중심적 제도의 특성에 의한 결과이며, 여성과 민중의 경험이 배제된 기독교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가부장적 원리에 의하여 지배 당해온 기독교 전통은 가톨릭에서는 독신 남성문화의 형태로 교황주의에 빠졌고, 교권의 절대화 속에 오직 통제, 지배의 원리만 작용하였습니다. 가톨릭에서 숨통을 튼 것은 마리아 공경에 있었다고 봅니다. 많은 신도들이 마리아를 통하여 위로 받고, 삶의 힘을 얻으며, 생존케 하는 신적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 경직성의 완화가 마리아 공경에서 이루어 졌다고 봅니다.
여성학자들은 이런 맥락의 윤리를 보살핌의 윤리라고 합니다. 그것을 정의의 윤리와 대칭적으로 비교해 보면 여성주의적 원리들이 드러남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보살핌의 윤리는 책임과 관계라는 도덕적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권리와 규칙이라는 개념이 중심이 아닙니다. 둘째, 보살핌의 윤리는 구체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으며,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상황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셋째, 보살핌의 윤리는 일련의 원칙으로서가 아니라 활동 - 보살피는 활동 - 으로서 가장 잘 표현됩니다. 보편적, 추상적 원칙보다는 누구나 매일 매일 겪고 있는 일상 경험과 도덕문제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교에 의하면 보살핌의 윤리는 획일성, 위계성, 관념적 추상성, 그리고 이런 것들에 의한 지배구조의 문제들을 넘어서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게 됩니다.
지금 이 지혜의 원리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 문제만 아니라 획일적 지배와 권리와 규칙이라는 엄격성에 매몰되어 있는 경직된 모든 구조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진리의 힘입니다. 이데올로기로 경직된 남북관계를 푸는 방법을 햇볕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삶의 경험의 진리에서 나온 지혜의 언어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성 원리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미래 세상의 삶의 원리로 수용하여야만 인류가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민중적 원리, 여성원리, 지혜의 원리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은 지혜와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잠언 8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소피아 - 하나님 곧 지혜 -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직성이 가져오는 죽임의 결과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라면 여성원리, 지혜의 원리에 의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살림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새로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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