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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를 결박하라

마가복음 조태연 목사............... 조회 수 2355 추천 수 0 2008.05.28 08: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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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3:20-35 
설교자 : 조태연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저는 어려서부터 옛날 이야기를 좋아했기에, 한동안 KBS 사극 『용의 눈물』을 즐겨 보았습니다. 백성을 위해 나라를 위해 뜻을 세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은 가히 후 세대 사람들에게 가르칠 만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짜리 아들 녀석과 함께 어느덧 애청자가 되었고, 사극이 끝나면 아들과 역사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기회를 갖곤 하였습니다. 본디 역사를 모르고 역사의 교훈에 무딘 저희들에겐, 역사를 접하는 좋은 매개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점차 『용의 눈물』에 식상하게 되었습니다. 시청률을 의식했는지 사건 전개가 늘어지고, 그 내용도 아주 비교육적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오직 왕실의 절대권력 한가지만이 절대진리라고 외쳐댈 뿐이며, 드라마 밖에서는 우리 시청자들이 오직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는 그자들처럼 그렇게 인륜도 버리고 천륜도 버릴 수밖에 없다고 은연중에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삶은 권력자가 압제자로 군림하는 역사의 질곡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정확히 38년 전, 그러니까 1960년 4월 19일은, 학생들의 역사적인 혁명이 일어난 한국 근대사의 기념할 만한 날입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12년 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그 부정과 부패가 3·15 선거에서 절정을 보였습니다. 학생들은 분연히 일어났고 드디어 4월 19일에는 전국적으로 총궐기하였습니다. 경찰은 부패한 정권의 편에 서서 발포하였고, 절대 부패한 절대권력의 살인적 무력에 180명의 학생과 시민이 죽어갔습니다. 1주일 후 드디어 초대 대통령 이승만씨는 하야했고 자유당 정권은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국민의 뜻이라 선전한다 할지언정 민심을 떠난 모든 권력은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든 노력은 처참한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 혁명적 사건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것도 180명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귀한 교훈입니다.
61년 5·16은 말해 무엇하고 80년 광주는 말해 또 무엇합니까?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는 한민족 역사의 질곡을 봅니다. 이 역사의 질곡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한민족의 이러한 경험들에 대한 성서적/기독교적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귀신 축출에 대한 마가복음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의 교훈을 배우려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궁극적 가치가 '오직 인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예수와 서기관들 사이의 논쟁 이야기입니다. 쟁점은 인간에게서 귀신을 내어쫓는 예수의 사역에서 권능(힘)의 출처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일까 혹은 악령일까?" 대체 이러한 것이 왜 논쟁의 원인이 됩니까? 도무지 이러한 것이 왜 우리의 쟁점이 되어야 합니까? 먼 옛날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肉化)하였다면 오늘날 귀신(사탄)은 어떠한 모습으로 화육(化肉)합니까? 옛날 옛날 예수의 이 논쟁이 과연 우리를 새로운 논쟁에 연루시킬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인가 사탄의 성육신인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면서 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현상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 바알세불에 신접했기 때문이며 결국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바알세불'은 원래 히브리어로서 '높음'(공중), '처소', '거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알세불은 '거주의 영'입니다. 거주의 영 바알세불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 국가, 제도, 심지어 지성소나 교회 등 어디에도 거주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온 그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대로라면, 그래서 예수 현상이야말로 사탄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을 이용한 것이라면, 예수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들의 말대로라면 예수는 사탄의 도구이고 그의 사역은 오직 악마의 활동이었을 뿐입니다. '예수의 악령화'라고나 할까요? 그들은 주장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다. 그는 사탄의 화육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몰랐을까요? 명색이 학자들이고 그것도 신학자들인데 그들이 몰랐을까요?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죽음의 세력에 억눌려 고통받던 많은 사람들을 구하시는 엄청난 치료의 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참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깜깜하였습니다. 아니, 그냥 눈을 감아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예수를 비난하고 정죄한 불가피한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예수가 참람하게도 오직 하나님만의 권위를 주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신학이 예수를 정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신의 뜻을 밝히고 집행하는 이라 자처하였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는 듯 처신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서기관들은 자칭 이 세상에서 신을 대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권력자들은 언필칭 신의 이름으로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무엇으로 분별합니까? 오직 자기의 이익이고 자파의 권력입니다. 그 서기관들에게도 자신과 다르거나 반대되는 모든 것들은 다 사탄일 뿐이었습니다. 전쟁과 침략을 좋아하는 모든 '영웅들'이 그랬고, 압제와 착취를 도모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그 사탄적 억압을 도리어 해방과 구원이라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억압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것은 해방이 아닌 압제였고 구원이 아닌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신학자들만의 사유물이 아니고, 신의 정의는 강한 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크든 작든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이러한 모순은 얼마든지 발생합니다. 나와 다른 것, 우리와 적대적인 것을 사탄적인 것으로 동일시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를 편드는 편애가 아니라 보편적 사랑입니다. 모든 병든 자, 억압당하는 자, 그리고 고통 당하는 자를 향한 보편적 사랑입니다. 예수의 인간 사랑은 이렇게 모든 약자들 가운데 구현된 하나님의 성육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의사를 무시한 전체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개개인의 의사를 자유롭게 개진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그래서 조화로운 다양성의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둘째, '거주의 영'은 어디에 거주하는가(23∼26절)?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22절과 30절에는 예수를 향한 서기관들의 두 차례 반복된 그 치명적 정죄가 있습니다.

22절 - 서기관들의 정죄 : '바알세불을 지폈다'
23∼29절 예수의 대답
30절 - 서기관들의 정죄 :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그들의 정죄 사이에는, 23절부터 29절까지, 단호하신 예수의 대답이 자리합니다. 대칭적 샌드위치의 문학적 구조를 연출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마가는 예수와 그들 사이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성공적으로 제시합니다.
다시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의 대답은 23절부터 26절까지 나타난 '분쟁'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아래 제시된 것처럼,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유도되어 나라와 집과 사탄의 매우 정교한 삼중적 병행으로 진행합니다:

23절 -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절 -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절 -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절 -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합니다.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 남과 북, 경상도와 전라도로 갈라져 서로 싸웠습니다. 우리민족이 일제에 강점 당한 것은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라져 분쟁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이 갈라져 서로 싸우면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싸우면 아이들은 마음 붙일 곳이 없어지고 결국은 콩가루 집안이 됩니다. 형제 자매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부모가 정 붙일 곳이 없어지고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됩니다. 때때로 가정으로 표상 되는 교회는 또 어떠합니까? 교회도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합니다. 우리는 이따금씩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아주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타자를 구분하고 스스로를 타자로부터 차별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리 때문에, 신학 때문에, 세례 때문에, 악기 때문에 . . . . 한국 개신교의 교파주의는 '다양성의 수용'에서 온 것입니까? 아니면 권력과 이권의 더러운 탐욕에서 온 그 사탄적 분파주의/분리주의의 소산입니까? "무엇이든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합니다." 이같이 사탄도 갈라져 서로 싸우면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우 조심스레 구성된 이 삼중적 병행은 그 이상의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자신의 텃밭을 둔 그 서기관들과 싸우실 때에, '나라'는 다윗 왕국의 중앙집권화된 정치를 뜻하고, '집'은 그 나라의 상징적 중심인 언필칭 하나님의 집 '성전'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특히 '나라'와 '집'은 예수의 말씀 안에서 '사탄'과 나란히 놓이며 동일시 됩니다. 다윗 왕국의 정치와 그 헤게모니인 성전이 사탄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유대 나라도 처참한 종말을 맞을 것이고, 그 권부인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훗날 역사는 서기 70년의 유대전쟁을 통하여 이 예언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세계에서 '거주의 영' 바알세불은 어디에 거주합니까? 거주의 영 사탄은 권력의 구조와 제도에 '거주'하며, 구체적으로는 군사정권이나 제국주의 등 억압과 착취의 모든 모습으로 화육(化肉)합니다. 약한 자를 압제하는 모든 권력도, 힘없는 이를 착취하는 모든 기득권도 모두가 예외 없이 사탄의 화육에 다름 아닙니다. 그들은 겉보기에 잘 나가는 성공자들이지만 실상은 사탄입니다.

셋째,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가?

예수의 말씀이 계속됩니다. 27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오늘의 본문에서 성서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세간'이란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그릇들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에 한 차례 더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성전 기물을 뜻합니다. 집에서 필요하든 들(밭)에서 필요하든, 전쟁 때 사용되든 평화 때 사용되든, 세속적인 목적에서이든 혹은 종교적 목적에서이든 '모든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예수께서 강한 자를 결박하는 것이 사탄을 내어쫓는 것이라면, 사탄을 결박하고 빼앗는 '세간'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며 그 영혼입니다. 예수는 권력의 구조와 각종 제도들 그리고 군사정권의 억압과 사탄적 힘이 스며 있는 '세계'를 뚫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을 늑탈(탈취)합니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귀신을 내어쫓는 예수의 사역은 귀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 능력의 놀라운 구현이었고 진정한 인간화의 성스런 사역이었습니다.
'강한 자'란 누구입니까? 그것은 물론 사탄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사탄을 결박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예수 자신입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마가복음 1:7절에서 예수를 가리켜 자신보다 '더 강한 자'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 사역의 본질이란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집을 탈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입으로 직접 말씀하신, 예수의 자기 이해이고 자기 선언입니다: "누구든 오해 말라!" 만일 사탄이 군사독재적/제국주의적 억압의 구조로 구현한다면 그리고 예수의 성스러운 사역이 힘의 재조직화라면, 예수의 투쟁 대상은 모든 바알세불적인 권력구조와 그 권력자들입니다. 예수 사역의 핵심은 힘의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사탄은 아무런 친밀한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는 사탄의 집을 뚫고 들어가 그를 결박하고 인간과 영혼을 해방시킵니다. 마가는 조롱합니다. "그들이 틀렸다! 아하, 그 신학자들이 오해하였다!" 예수 안에서 역사하는 힘은 사탄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예수는 사탄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결박하고 그 세간을 빼앗는 분입니다. 그것은 사탄에게 결박된 인간을 놓아주기 위함이며, 모든 사탄적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함입니다. 예수의 의도는 드러났습니다. "강한 자를 결박하라, 사탄적 굴레에서 인간을 탈취하라!" 질곡의 역사 아픔의 시대를 살아가던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용서 못한 죄는 무엇인가?

28∼29절은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시작합니다. 특히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이란 말로 시작함으로써, 예수의 이 말씀은 대단한 강조와 더불어 권위를 얻습니다. 성령을 모독(훼방)함으로써 용서받지 못한 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가의 예수 이야기에서 예수가 기소 당하는 것은 언제나 신성모독(참람함)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예루살렘의 신학자들이 예수를 정죄하는 것은 그가 신성을 모독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서 대제사장은 다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과 함께 예수의 신성모독을 지적하며 사형을 언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형을 언도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정작 신성을 모독한 자는 다름 아닌 대제사장 자신이었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신성모독은 사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예수 안에 활동하시며 사탄을 쫓아내는 그 해방의 영은 거주의 영 사탄과 대립된 것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학자들은, 예수가 더러운 귀신이 들린 채 능력을 행사한다고 보았습니다. 성령을 훼방(모독)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란, 예수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이렇게 악령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선을 악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사탄의 파괴적 행위와 맞바꾸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바, 바알세불이 거주하는 그 억압적/파괴적/사탄적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을, 악마적인 것이라고 왜곡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그 위대한 해방 사역의 취지를 왜곡시키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신학을 이용하여 진정한 인간 해방의 거룩한 사역을 추악한 그 어떤 것으로 말하는 자들은 결단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예루살렘 신학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발생하는 어떤 구체적 해방의 신학적 기쁨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눈은 감겨져 있고 가슴은 탐욕으로 가득한 언필칭 시대의 스승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었습니다. 진정 용서받지 못할 죄란 다름 아닌 그들의 신학적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비전.

이 모든 신학적 논쟁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가족들의 오해로 드리워 있습니다. 이 모두는 '집안에서' 발생한 일이고, 특히 31∼35절까지 나온 진정한 '집'에 대하 새로운 비전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안에' 계실 때 주창한 것입니다. 마가에서 '집'은 교회 곧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하나의 집과 같다는 데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회당이나 바깥 사회가 권력을 중심으로 차별적 계층구조를 형성한 것과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는 '집 안에서' 차별 없이 그 이름 없는 무리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누구든 그와 함께 있으면 차별 없이 하나님의 가족, 즉 그 나라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주창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새로운 가정교회는 혈육의 유대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근거합니다. 그것은 권력과 제도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제국주의적 압제와 착취로부터의 독립을 통하여 오는, 모든 '인간화'의 거룩한 신적 의지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의 근본적인 재사회화'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조직하신 그 새로운 가족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수평적으로 구조화된 인간들의 상호 관련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피와 인종과 민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연과 지연과 학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억압과 폐쇄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개방과 해방 곧 열림과 놓임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평등하게 맺는 형제 됨이고 자매 됨이며 어미 됨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인간의 해방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 구현되기를 바라며, 그 나라의 평화와 예수의 사랑이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의 성숙한 인간상과 더불어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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