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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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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인간의 욕망 중에 중심부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대단히 강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모두 중심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곧 성공, 출세, 그리고 번영으로 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부에 인간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가치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권력, 부, 명예 등 말입니다. 이런 희소가치를 서로 먼저, 더 많이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면서,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 차이는 곧 차별의 바탕과 구실이 되고 맙니다. 세계도 중심국가와 주변국가들로 갈라지게 되며, 나라 안에서도 KS, TK, PK 등 중심부가 생겨나면서 주변부와 긴장·마찰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쟁과정에서 일단 중심부를 장악한 세력은 기득권을 계속 더 쌓고 싶어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여기서 무리를 저지르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지난 역사를 보아도 그러하고, 특히 오늘의 현실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인생은 이런 뜻에서 끊임없이 중심부를 향해 달리는 경주자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이 같은 인간의 욕망과 행적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까요? 중심부 세력이 주변부 사람들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수탈할 때 그것을 성서는 결코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변두리 사람들이 중심부로 나아가려는 것에 대해서는 성서가 어떤 가르침을 던져줄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사건을 또 한번 만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찬찬히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변두리 사람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은 유대의 고을 중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자라나신 나사렛도 별 볼일 없는 고장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친구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요1:46)라고 되물었던 일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출생지나 성장지 모두 변두리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거주지였습니다.
당신의 활동무대도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의 땅으로 경멸받던 곳이었고, 그곳은 흑암의 백성들이 살았던 죽음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따스한 햇볕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그늘진 소외지역이었습니다(마태5:13∼16).
예수님의 직업도 목공과 석공이었으니, 별 볼일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옛날 우리 조선시대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에서 공이 차지했던 자리와 비슷합니다. 목수와 석공이 결코 고상한 예술가의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애정이 어린 관심도 바로 변두리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당신의 첫 메시지도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와 같은 변두리 인간의 온전함(구원)을 위한 메시지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正 )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예수님은 앉은뱅이, 눈먼 자, 귀머거리, 가난한 자, 죽은 자와 같은 비인간화된 존재에 대한 사랑을 강력하게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법(語法)도 중심부를 쥐틀고 있었던 율법주의자들이 즐겨했던 어법을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전통은 이렇게 말했으나, 나는 말하노니 . . ."라는 식이었습니다.(마태5:21, 27, 31, 33, 38, 43). 중심부의 사고방식을 백팔십도 뒤집는 발상과 발언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이 사건이 갖는 의미의 층(層)은 다양합니다. 하기야 모든 예수사건이 지니는 뜻은 깊고 풍부하지요. 안식일의 참 의미, 예수의 용기, 병 고침, 정치·종교적 대결, 예수 반대 세력의 연대 등 다양한 의미의 층이 있지만, 이 중에서 변두리 사람을 중심부로 끌어올리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중심부에서 새 임무를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저는 부각시키고 싶습니다.
먼저 이 사건에 나오는 중심부 세력의 의도부터 주목해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중심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고소할 증거를 찾기 위해 예수행동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군사통치시대 중앙정보부 요원 같았지요. 종교적 이단자나 범법자를 색출하는 임무를 띠고 회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당시 강력한 실정법이었던 안식일 법으로 예수를 송사하기 위해 그곳에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와 같은 의도를 다 아시고 계셨으나 개의치 않고 용기 있게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길 수 있는 조건들이 성숙해 있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그 회당에 변두리 인간들이 있었는데 특히 눈에 대번에 띄는 지체 장애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 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에 따르면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지체 장애인이 아니라 병에 걸려 손이 말랐다고 합니다. 원래는 석공(石工)이었다고 합니다. 석공에게는 손과 팔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것은 생존수단 그 자체입니다. 손이 말라버리면, 생명선이 끊어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IMF로 고개를 숙인 사람의 딱한 처지와 같이 견줄 수 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자마자 중병에 걸려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러한 처절한 형편과 겨룰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치유활동 소식을 들었겠지요. 그래서 그분에게 희망을 걸고 회장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그에게는 안식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요했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은 요즘 우리의 국가보안법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됩니다. 일을 하게 되면 엄벌을 받게 되지요. 그러나 예외적으로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도 법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출산행위라든지, 사람이 무너진 벽에 깔린 경우 그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벽을 치워낼 수 있는 정도의 일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골절을 다치면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정형외과는 안식일에 문을 닫아야 했겠지요. 수족이 삐어도 그곳에 찬물을 끼얹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이 위독했을 경우에만 치료행위는 허용되었습니다. 손 마른 자의 병은 안식일에 결코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이제 사건은 터진 것입니다. '범법행위'가 저질러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 직전에 철이 없는 예수제자들이 이미 안식일 법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다가 발각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은 '초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두 단계에 걸쳐 일으킵니다.
첫째 우리 주님께서는 무시무시한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원리와 원칙을 일깨워주십니다. 선(善)이 악(惡)보다 더 소중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어떤 경우에서나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확인시켰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은 이 귀중한 하나님의 법(자연법이라 해도 좋습니다)을 어긴 것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둘째 단계에서 주님의 명령은 놀랍습니다. 두 가지 권고를 하십니다. 먼저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하십니다. 이 지체 장애인은 평생 변두리에서 살았습니다. 석공으로서, 그 후에는 장애인으로서 변두리에서 숨죽여 살아왔습니다. 짐작하건대 단 한번만이라도 그는 중심부에 우뚝 서서 당당히 살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헌데 주님께서 별안간 그에게 고 명령했습니다.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나오라는 명령이지요. 변두리에서 뿌리 뽑힌 서러운 삶을 살았던 인간, 장애인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구걸하며 살 수밖에 없는 변두리 인간에게 밝고 환한 중심부에 우뚝 서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인간, 학대받는 변두리 인간이야말로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주인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가 아닙니까? 변두리 인간이 주인의식 느끼게 하여 마침내 중심부로 나아가게 하는 다리 역할을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교회가 중심부의 심부름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심부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손 마른 자에게 두 번째 명령을 하십니다. "손을 펴시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명령은 무슨 뜻일까요? 무엇보다 손을 내밀라고 하시므로, 손 마른 자의 병이 고쳐졌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건강한 정상적 인간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손 펴는 것이 단순한 건강회복의 뜻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뜻은 그 말라붙었던 손을 폄으로써, 그리고 내밀음으로써 남에게 도움을 주라는 명령입니다. 남을 위한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비록 육체의 손과 팔은 온전하다 하더라도 남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손 마른 장애인과 다름이 없습니다. 손은 멀쩡해도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왔다면, 우리는 장애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내 새끼, 내 가족, 내 친척, 내 동창, 내 고향 사람들만 위해 불철주야 힘써 왔다면, 손 마른 장애인의 삶을 불철주야 살아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은 곧 이와 같은 장애인의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라는 주님의 명령은 이제부터 남을 위해 당신의 존재를 던지시오 라는 명령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역사를 향해 그 손과 팔을 넓게 그리고 길게 뻗어야 합니다. 그 손과 팔이 안으로만 굽는 교회는 예수의 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나도, 우리 교회도 손 마른 장애인이 아니었던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을 활짝 펴고 힘껏 뻗어 변두리에서 한 맺혀 사는 인간들을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지대로 옮겨 놓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도 그들을 중심부로 불러내시면서 온전케 된 손을 남을 위해 더욱 힘껏 뻗기를 권고하시는 우리 주님을 쳐다봅시다. 그분의 "한 가운데 서서, 손을 펴시오"라는 음성을 듣고, 이 명령에 순종합시다. 우리를 위해 손과 팔만 펼쳐주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려 피와 땀, 그리고 온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이런 경쟁과정에서 일단 중심부를 장악한 세력은 기득권을 계속 더 쌓고 싶어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여기서 무리를 저지르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지난 역사를 보아도 그러하고, 특히 오늘의 현실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인생은 이런 뜻에서 끊임없이 중심부를 향해 달리는 경주자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이 같은 인간의 욕망과 행적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까요? 중심부 세력이 주변부 사람들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수탈할 때 그것을 성서는 결코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변두리 사람들이 중심부로 나아가려는 것에 대해서는 성서가 어떤 가르침을 던져줄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사건을 또 한번 만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찬찬히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변두리 사람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은 유대의 고을 중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자라나신 나사렛도 별 볼일 없는 고장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친구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요1:46)라고 되물었던 일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출생지나 성장지 모두 변두리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거주지였습니다.
당신의 활동무대도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의 땅으로 경멸받던 곳이었고, 그곳은 흑암의 백성들이 살았던 죽음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따스한 햇볕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그늘진 소외지역이었습니다(마태5:13∼16).
예수님의 직업도 목공과 석공이었으니, 별 볼일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옛날 우리 조선시대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에서 공이 차지했던 자리와 비슷합니다. 목수와 석공이 결코 고상한 예술가의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애정이 어린 관심도 바로 변두리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당신의 첫 메시지도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와 같은 변두리 인간의 온전함(구원)을 위한 메시지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正 )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예수님은 앉은뱅이, 눈먼 자, 귀머거리, 가난한 자, 죽은 자와 같은 비인간화된 존재에 대한 사랑을 강력하게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법(語法)도 중심부를 쥐틀고 있었던 율법주의자들이 즐겨했던 어법을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전통은 이렇게 말했으나, 나는 말하노니 . . ."라는 식이었습니다.(마태5:21, 27, 31, 33, 38, 43). 중심부의 사고방식을 백팔십도 뒤집는 발상과 발언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이 사건이 갖는 의미의 층(層)은 다양합니다. 하기야 모든 예수사건이 지니는 뜻은 깊고 풍부하지요. 안식일의 참 의미, 예수의 용기, 병 고침, 정치·종교적 대결, 예수 반대 세력의 연대 등 다양한 의미의 층이 있지만, 이 중에서 변두리 사람을 중심부로 끌어올리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중심부에서 새 임무를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저는 부각시키고 싶습니다.
먼저 이 사건에 나오는 중심부 세력의 의도부터 주목해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중심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고소할 증거를 찾기 위해 예수행동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군사통치시대 중앙정보부 요원 같았지요. 종교적 이단자나 범법자를 색출하는 임무를 띠고 회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당시 강력한 실정법이었던 안식일 법으로 예수를 송사하기 위해 그곳에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와 같은 의도를 다 아시고 계셨으나 개의치 않고 용기 있게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길 수 있는 조건들이 성숙해 있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그 회당에 변두리 인간들이 있었는데 특히 눈에 대번에 띄는 지체 장애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 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에 따르면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지체 장애인이 아니라 병에 걸려 손이 말랐다고 합니다. 원래는 석공(石工)이었다고 합니다. 석공에게는 손과 팔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것은 생존수단 그 자체입니다. 손이 말라버리면, 생명선이 끊어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IMF로 고개를 숙인 사람의 딱한 처지와 같이 견줄 수 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자마자 중병에 걸려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러한 처절한 형편과 겨룰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치유활동 소식을 들었겠지요. 그래서 그분에게 희망을 걸고 회장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그에게는 안식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요했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은 요즘 우리의 국가보안법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됩니다. 일을 하게 되면 엄벌을 받게 되지요. 그러나 예외적으로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도 법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출산행위라든지, 사람이 무너진 벽에 깔린 경우 그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벽을 치워낼 수 있는 정도의 일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골절을 다치면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정형외과는 안식일에 문을 닫아야 했겠지요. 수족이 삐어도 그곳에 찬물을 끼얹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이 위독했을 경우에만 치료행위는 허용되었습니다. 손 마른 자의 병은 안식일에 결코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이제 사건은 터진 것입니다. '범법행위'가 저질러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 직전에 철이 없는 예수제자들이 이미 안식일 법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다가 발각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은 '초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두 단계에 걸쳐 일으킵니다.
첫째 우리 주님께서는 무시무시한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원리와 원칙을 일깨워주십니다. 선(善)이 악(惡)보다 더 소중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어떤 경우에서나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확인시켰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은 이 귀중한 하나님의 법(자연법이라 해도 좋습니다)을 어긴 것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둘째 단계에서 주님의 명령은 놀랍습니다. 두 가지 권고를 하십니다. 먼저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하십니다. 이 지체 장애인은 평생 변두리에서 살았습니다. 석공으로서, 그 후에는 장애인으로서 변두리에서 숨죽여 살아왔습니다. 짐작하건대 단 한번만이라도 그는 중심부에 우뚝 서서 당당히 살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헌데 주님께서 별안간 그에게 고 명령했습니다.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나오라는 명령이지요. 변두리에서 뿌리 뽑힌 서러운 삶을 살았던 인간, 장애인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구걸하며 살 수밖에 없는 변두리 인간에게 밝고 환한 중심부에 우뚝 서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인간, 학대받는 변두리 인간이야말로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주인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가 아닙니까? 변두리 인간이 주인의식 느끼게 하여 마침내 중심부로 나아가게 하는 다리 역할을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교회가 중심부의 심부름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심부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손 마른 자에게 두 번째 명령을 하십니다. "손을 펴시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명령은 무슨 뜻일까요? 무엇보다 손을 내밀라고 하시므로, 손 마른 자의 병이 고쳐졌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건강한 정상적 인간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손 펴는 것이 단순한 건강회복의 뜻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뜻은 그 말라붙었던 손을 폄으로써, 그리고 내밀음으로써 남에게 도움을 주라는 명령입니다. 남을 위한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비록 육체의 손과 팔은 온전하다 하더라도 남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손 마른 장애인과 다름이 없습니다. 손은 멀쩡해도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왔다면, 우리는 장애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내 새끼, 내 가족, 내 친척, 내 동창, 내 고향 사람들만 위해 불철주야 힘써 왔다면, 손 마른 장애인의 삶을 불철주야 살아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은 곧 이와 같은 장애인의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라는 주님의 명령은 이제부터 남을 위해 당신의 존재를 던지시오 라는 명령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역사를 향해 그 손과 팔을 넓게 그리고 길게 뻗어야 합니다. 그 손과 팔이 안으로만 굽는 교회는 예수의 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나도, 우리 교회도 손 마른 장애인이 아니었던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을 활짝 펴고 힘껏 뻗어 변두리에서 한 맺혀 사는 인간들을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지대로 옮겨 놓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도 그들을 중심부로 불러내시면서 온전케 된 손을 남을 위해 더욱 힘껏 뻗기를 권고하시는 우리 주님을 쳐다봅시다. 그분의 "한 가운데 서서, 손을 펴시오"라는 음성을 듣고, 이 명령에 순종합시다. 우리를 위해 손과 팔만 펼쳐주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려 피와 땀, 그리고 온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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