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1:15-19 |
---|---|
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요즈음 종교가 또 다시 사회적 관심을 모으면서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되는 것은 주로 좋지 않은 일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들만 보도된다는 데, 종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종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관심이 없던 매스컴들이 종교계에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야단들입니다. 종교 전문기자 하나 제대로 두지 않고 있다가 무슨 비리나 문제성 사건이 터지면 신문사마다 난리가 난 듯 여기 저기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전화하기 바쁩니다. 그리고 전화로 한 마디 주어 듣고는 확실한 근거도 없이 그럴 듯한 말로 원인 진단과 처방을 내 놓는 기사를 써댑니다. 얼마 안 있어 그 사건은 까맣게 잊혀지고 종교는 또 다시 관심의 뒷전으로 물러납니다.
저도 명색이 종교학자로 통하다 보니, 얼마 전 만인중앙교회의 MBC 방송국 난입사건이 터지자 심심치 않게 언론사들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실, 불쑥 그런 전화를 받으면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나 자신 만인중앙교회라는 이름을 보도를 통해서 처음 알았을 뿐, 평소에 그런 것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사람이 무슨 재주로 그 사건에 대해서 정확한 원인분석과 대책을 제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난 전문가가 아니니 다른 사람한테 물어 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우선 우리 나라에 그런 전문가가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자꾸 말을 시키며 물어보는데,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겠고, 그러다 보니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되며, 전화를 끊고 나서야 정작 꼭 해야 했을 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단골 손님처럼 매스컴에 등장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의 사정도 나와 비슷하게 불쑥, 아니 무례하게 전화를 받는다고 하며, 원하지도 않는 대화를 하다가 몇 마디 하면 그것이 무슨 권위 있는 사람의 말처럼 인용되며 활자를 탄다고 합니다. 그나마 정확하게 인용되면 다행이고 보통은 거두절미하고 제멋대로 인용되기 일쑤이며, 더 나쁘게는 기자가 마음대로 작문을 하고 이미 자기가 결론은 내 놓고는 학자들의 말은 들러리나 양념 정도로 섞어서 기사를 쓰는 것이 예사라고 합니다.
여하튼 종교마저도 각박한 세상에 아름답고 훈훈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연출하며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귀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스캔들을 뿌리고, 언론의 고발 프로그램의 취재 대상이 되며,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는커녕 개탄과 탄식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종교계의 현실입니다. 한 사회의 종교계, 교육계, 언론계가 부패하면 그 사회는 끝장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셋은 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에 가장 근본이 되는 도덕과 양심을 길러주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위기는 실로 위험수위를 넘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문제 투성이가 우리 나라 교육계와 종교계이며, 그래서 정치계 못지 않게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사회에 부담만을 안겨주는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교육계는 개혁이니 뭐니 떠들기라도 하지만, 종교계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언론계는 어떻습니까? 권력에 길들여지고 선정주의, 상업주의에 빠져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보도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 우리 언론계의 현실입니다. 남더러 개혁하라고 떠들기만 하고 자기는 꼼짝도 하지 않으며, 때로는 개혁하려는 것도 하지 못하도록 왜곡보도를 일삼는 언론계 역시 종교계 못지 않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커녕 구속하고 억압하는 종교, 진리를 말하기보다는 사기를 일삼는 종교, 인생의 지혜와 통찰보다는 무지와 광신으로 사람들을 몰아 넣는 종교, 시대를 앞서가면서 인류의 미래를 밝히기보다는 시대와 함께 호흡하지도 못하면서 낡아빠진 전통의 껍데기만 붙잡고 앉아 있는 한국 종교, 정말 이제 청산의 대상, 정리해고와 퇴출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종교가 없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까요? 종교가 없어지면 무엇이 아쉬울까요? 고작해야 민중의 아편을 없애 버린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편 환자, 종교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이 당분간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겠지만 시간이 가면 오히려 정상인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주술과 미신이 사라지고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종교라는 환상적 행복을 없애야 비로소 진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우리 사회는 계몽기를 거치지 못한 사회입니다.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서구는 이미 오래 전에 탈기독교, 탈종교 시대를 살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아직 종교가 번창하던 중세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종교가 번창하고 성업중인 나라는 무언가 사회가 그만큼 병들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좋은 일이 못 됩니다. 한국에서 종교가 번창한다는 사실은 결코 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불안하고 사람들이 마음 둘 곳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요, 후진성의 증거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 사람들이 유별나게 종교심이 강해서 종교가 번창한다는 소리도 합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인들만 종교적일 리가 있겠습니까? 신화 같은 이야기,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의 종교의 번성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역시 종교 아편론임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급속히 팽창하는 것도 한국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요 은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구한 말의 혼란기와 일제를 거쳐 6.25, 급격한 사회변동 등 격동의 근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의 고통과 절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지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고통스러운 역사를 잊기 위한 민중의 아편이었다면, 이제 과감히 그것을 떨쳐버릴 때가 온 것은 아닐까요? 아편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건전하지 못한 사회의 병폐에 기생하는 아편이라면, 그런 종교는 하루라도 빨리 정리되는 것이 좋습니다.
한국 종교 중 퇴출 대상 제 일호는 어느 종교일까 저는 가끔 혼자서 생각해봅니다. 단연 기독교, 정확히 말해 개신 교회들이 아닌가 저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최근 조계사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난동을 연출한 불교계도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기독교도 불교도 변명하기를 그런 현상은 일부 광신도, 일부 몰지각한 신도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이고 대다수는 모두 '건전한' 신앙생활을 영위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킨 셈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성 교회나 집단을 '이단'이라고 몰아붙일 것이며 그들과 선을 그어서 기성 교단을 방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종교계에 일어나는 한심한 현상, 비리가 나타나게 된 배후를 묻고 근본 원인을 따진다면, 우리는 결코 그것이 일부 몰지각한 광신도들만의 행태요 이상한 이단 종파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광신성과 권위주의가 판을 치고 이성과 양심의 소리가 무시되는 한국 종교계 전체 풍토가 언제 어디서든 유사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텃밭이며 그럴 소지를 다 안고 있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비리를 캐기 시작하면 아마도 웬만한 대형 교회들은 대형 교회대로, 그리고 수없이 많은 조그마한 교회는 그들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들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엄청난 종교계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 가톨릭 교회처럼 조직과 제도를 강화하던가, 둘째, 상식과 이성이 통하고 존중되는 사회풍토를 조성하던가, 셋째, 국민의 생활수준과 대중의 민도가 높아져서 아편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던가, 넷째, 권위주의와 광신 대신 자유로운 비판정신이 살아 숨쉬는 종교계의 풍토조성이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사회 일각에서는 이렇게 종교계가 문제가 많으니 차라리 법적 장치를 마련해서 종교를 규제해야겠다고 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종교 문제는 어디까지나 종교계와 시민 운동에 맡겨야 합니다. 계몽에 맡겨야 합니다. 비단 종교의 자유를 제약하거나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누가 정통과 이단을 가릴 것이며, 누가 사이비 판정을 내릴 것입니까? 문화관광부 직원들입니까? 판사들입니까? 그렇다고 자기 종교, 자기 교파에 편향되어 있는 신학자들을 불러서 해결할 것입니까? 또 등록도 안 해주고 국가에서 인정도 안 해 준다고 문제성 있는 집단이 종교활동을 중지할 것입니까? 만약 계속한다면 정말 단속할 힘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지하로 숨을 것이며, 결국 어느 때 가서는 모두 양성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 것입니다. 반면, 사이비 종교가 국가의 인정을 받을 경우 오히려 면죄부를 받고 합법성을 가장하여 더 활동하기 좋을 것입니다. 수많은 문제들이 야기될 것입니다. 종교의 문제는 역시 국가가 개입할 문제이기보다는 종교에 맡기고 시민운동에 맡겨야 할 문제입니다.
민도가 높아져서 아편으로서의 종교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사기를 치지 못하도록 신도들의 지성과 양심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책임을 묻고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역시 사기 극을 연출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힘없는 자, 가난한 자,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 아편을 피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취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엉터리 목사와 승복만 걸친 가짜중들이 발붙일 곳이 없도록 국민의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어리석게 속아넘어갈까 할 정도로 속고 있는 민중들이 참으로 딱하고 화가 날 정도이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속이는 종교 사기범들은 실로 우리들의 분노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봉독한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분노의 말씀과 행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분노는 대부분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경직된 율법주의자들,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자들,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죄인들을 따돌리고 더 괴롭히는 자들,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나 병들고 불구가 된 자들을 업신여기고 외면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주님의 분노는 불타오른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 이른바 예루살렘 성전정화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그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꼴사납게 장사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내쫓고 성전을 조용하고 깨끗한 기도의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뜻만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란 어떤 곳입니까? 유대 종교생활의 중심, 제사의 중심지입니다. 거기서만 제사를 드리는 독점권을 행사하던 하나님의 전입니다. 유월절과 같은 큰 국가적인 축제나 명절 때 유대 민족 전체가 드리는 제사, 혹은 수시로 개인이 죄를 없애고 부정을 씻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제사를 위해서는 양과 염소, 혹은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빈자의 제물')를 제수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제수를 사고 파는 상인들이 이방인들도 접근이 가능한 성전 뜰에서 장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년에 한 번 씩 바치는 성전 세를 이스라엘 은화 반 세겔로 바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오는 유대인들을 위한 환전상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에 불한당 같은 청년 예수가 나타나 '깽판'을 친 셈이 되었으니 당시 사제들의 분노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단순히 과격한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가 뜻하는 바가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사행위 자체를 못하도록, 따라서 사제들과 제사장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전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또 환전상들의 상을 엎어버리고 쫓아 낸 것은 성전 세를 못 내도록 한 행위로서, 역시 성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제관들과 율사들이 그를 없앨 궁리를 했다는 복음서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예수의 이 과격한 행위는 순간의 충동이 아니라 의도적인 도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위험인물로 낙인찍히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는 재판에서 성전 모독 죄의 죄명으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성전이 폐허가 될 것을 예언하였을 뿐 아니라,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만에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짓겠다는 허황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거짓 증언이었지만, 예수는 여하튼 당시 유대교의 성전 종교문화에 반기를 든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사와 사제와 성전이 필요없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를 선언하고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성전'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백성, 성별된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을 대신한 새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는 일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에는 성과 속의 구별도 없고 정하고 부정하다는 관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죄인도 의인도 따로 없습니다. 예수의 눈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도 없고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의로운 자도 없는 세계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사는 공동체이며, 대제사장과 일반 사제와 평신도라는 성스러움의 위계질서가 없이 모두가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인 평등한 공동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는 인간을 종교로부터 해방시킨 것입니다. 성과 속을 구별하고, 정과 부정을 따지며, 죄인과 의인을 심판하고 따돌리던 차별과 억압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를 청산하고자 했습니다. 율법의 올가미로 사람들을 얽매고, 죄인 아닌 죄인을 양산하는 체제를 거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야 할 떳떳하고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딸들을 종과 같이 비굴한 자로 비하시킨 종교체제에 그는 몸으로 저항하다가 결국 비명에 간 것입니다.
성전의 무엇이 예수님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성전은 불결한 자, 부정을 탄 자, 불구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간주된 자들의 출입이 금지 된 곳이었습니다. 정결 의례의 규칙을 지킬만한 여유도 없었고 제물을 사서 바칠만한 돈도 없이 가난한 자들, 그리고 죄인의 낙인이 찍힌 자들은 감히 접근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성전에 와서 속죄의 제사, 정결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정결함을 선언 받아야 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성전은 하나님의 도움과 은총을 가장 필요로 한 자들의 접근이 차단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제도와 전통은 한 마디로 말해 병 주고 약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온갖 율법의 올가미로 죄인들을 양산해 놓고는 와서 제사를 드리고 용서받고 부정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기서만 하라는 완전 독점 기업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돈 없어 가난한 자, 부정탄 자라고 낙인찍힌 문둥병자나 자기 몸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불구자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아모스 5장 21∼24절의 말씀은 성전에서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예수님은 이런 것을 못 참은 것입니다. 못 참은 정도가 아니라 직접 나서서 모든 번거러운 절차를 무시하고 죄로 번민하거나 죄인의 누명을 쓴 사람들에게 사제들을 무시하고 직접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고('하나님 한 분이 아니고서야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는가'라는 비난을 받았음), 부정하다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 죄인들이나 세리들과 스스럼없이 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안식일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고쳐주었으며, 죄를 묻지도 않았고, 부정하다는 생각 전혀 없이 그는 문둥병자나 혈루병자 등 온갖 종류의 병자들과 불구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께서는 성전의 필수적 기능인 제사 자체를 거부했으며, 제사장의 권위를 무시했으며, 율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율법주의를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성업 중인 성전 산업을 '강도짓'이라고 불렀으니 제관들과 율사들이 그를 없애 버릴 방도를 찾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이사야 56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사보다는 기도를 강조하셨으며, 호세아 선지자를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는 자비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미운 짓은 골라서 하셨으니 그가 겪을 운명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 미운 짓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오늘 읽은 성전에서의 '난동'입니다. 결국 그 자신이 그만 제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제사와 제물이 필요없다고 한 대가로 그 자신 인류를 위한 마지막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제사가 필요없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용서하기 위해 애꿎은 동물의 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피를 요구하는 하나님, 대가성 용서를 하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며, 그러한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아무런 매개자나 중보자 없이, 그리고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도 없이 다만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떠한 제도적 장치나 권위도 자비의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하고 소용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식과 부모 사이에 무슨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며 무슨 중개인이나 중재자가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그 어떤 죄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증언이었고 사도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예수가 사셨다면 누가 그의 분노의 제 일차적 대상이 되었을까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 왔으며, 지금도 그 버릇을 진정으로 뉘우치거나 고치려고 하지 않는 재벌들, 또 권력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이전투구하고 있는 우리 정치인들, 다 예수님의 진로의 채찍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 땅의 종교 지도자들, 마음 약한 자들을 상대로 아편 팔아먹는 종교 마약 딜러들,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의 재물을 강탈하는 날강도 같은 종교 장사꾼들, 신도들이야 병들고 가난하던 말든 아랑곳없이 그랜저 승용차에 몸을 싣고 다니는 성직자들, 강도 맞아 쓰러져 피 흘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피해 가는 종교귀족들, 라스베가스에서 교인들의 헌금으로 놀음을 하고도 교회재정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고 큰 소리치는 목사들에게 예수께서는 제일 먼저 채찍을 가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 팔아먹고 부처 팔아먹는 종교 산업, 종교 비지네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지독한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며, 이런 짓을 정당화해주고 옹호해주는 종교 이데올로기를 신랄하게 비판하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문제성 집단이나 교회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율법주의와 인간의 양심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권위주의와 열광주의, 광신과 독선이 팽배해 있는 일반 교회, 주류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성 교회와 건전한 교회, 이단성 교회와 정통을 자랑하는 교회의 구별은 사실 오십보 백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웬만한 비판적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려야 다닐 교회가 없다는 게 그들의 한결 같은 증언입니다. 대부분의 종교 집단들과 교단들이 이미 그 안에 문제성 종교가 될 소지, 그 싹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신학이 바뀌고 예수 믿는 근본 목적과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만민중앙교회와 같은 현상과 사건은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예수의 정신을 상기하면서 자기 비판을 가하지 않는 한 우리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 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종교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함부로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종교는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지녔습니다. 종교는 본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해결사, 인간의 병을 고치는 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약을 먹고 중독 되면 더 이상 약이 없습니다. 해결사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가 속으면 정말 회복하기 어렵게 쫄딱 망해버리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가 아편이요 가짜 약이라면, 정말 없는 것만 못합니다. 바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평신도 교회를 꾸려나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저도 명색이 종교학자로 통하다 보니, 얼마 전 만인중앙교회의 MBC 방송국 난입사건이 터지자 심심치 않게 언론사들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실, 불쑥 그런 전화를 받으면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나 자신 만인중앙교회라는 이름을 보도를 통해서 처음 알았을 뿐, 평소에 그런 것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사람이 무슨 재주로 그 사건에 대해서 정확한 원인분석과 대책을 제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난 전문가가 아니니 다른 사람한테 물어 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우선 우리 나라에 그런 전문가가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자꾸 말을 시키며 물어보는데,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겠고, 그러다 보니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되며, 전화를 끊고 나서야 정작 꼭 해야 했을 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단골 손님처럼 매스컴에 등장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의 사정도 나와 비슷하게 불쑥, 아니 무례하게 전화를 받는다고 하며, 원하지도 않는 대화를 하다가 몇 마디 하면 그것이 무슨 권위 있는 사람의 말처럼 인용되며 활자를 탄다고 합니다. 그나마 정확하게 인용되면 다행이고 보통은 거두절미하고 제멋대로 인용되기 일쑤이며, 더 나쁘게는 기자가 마음대로 작문을 하고 이미 자기가 결론은 내 놓고는 학자들의 말은 들러리나 양념 정도로 섞어서 기사를 쓰는 것이 예사라고 합니다.
여하튼 종교마저도 각박한 세상에 아름답고 훈훈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연출하며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귀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스캔들을 뿌리고, 언론의 고발 프로그램의 취재 대상이 되며,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는커녕 개탄과 탄식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종교계의 현실입니다. 한 사회의 종교계, 교육계, 언론계가 부패하면 그 사회는 끝장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셋은 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에 가장 근본이 되는 도덕과 양심을 길러주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위기는 실로 위험수위를 넘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문제 투성이가 우리 나라 교육계와 종교계이며, 그래서 정치계 못지 않게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사회에 부담만을 안겨주는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교육계는 개혁이니 뭐니 떠들기라도 하지만, 종교계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언론계는 어떻습니까? 권력에 길들여지고 선정주의, 상업주의에 빠져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보도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 우리 언론계의 현실입니다. 남더러 개혁하라고 떠들기만 하고 자기는 꼼짝도 하지 않으며, 때로는 개혁하려는 것도 하지 못하도록 왜곡보도를 일삼는 언론계 역시 종교계 못지 않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커녕 구속하고 억압하는 종교, 진리를 말하기보다는 사기를 일삼는 종교, 인생의 지혜와 통찰보다는 무지와 광신으로 사람들을 몰아 넣는 종교, 시대를 앞서가면서 인류의 미래를 밝히기보다는 시대와 함께 호흡하지도 못하면서 낡아빠진 전통의 껍데기만 붙잡고 앉아 있는 한국 종교, 정말 이제 청산의 대상, 정리해고와 퇴출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종교가 없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까요? 종교가 없어지면 무엇이 아쉬울까요? 고작해야 민중의 아편을 없애 버린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편 환자, 종교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이 당분간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겠지만 시간이 가면 오히려 정상인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주술과 미신이 사라지고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종교라는 환상적 행복을 없애야 비로소 진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우리 사회는 계몽기를 거치지 못한 사회입니다.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서구는 이미 오래 전에 탈기독교, 탈종교 시대를 살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아직 종교가 번창하던 중세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종교가 번창하고 성업중인 나라는 무언가 사회가 그만큼 병들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좋은 일이 못 됩니다. 한국에서 종교가 번창한다는 사실은 결코 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불안하고 사람들이 마음 둘 곳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요, 후진성의 증거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 사람들이 유별나게 종교심이 강해서 종교가 번창한다는 소리도 합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인들만 종교적일 리가 있겠습니까? 신화 같은 이야기,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의 종교의 번성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역시 종교 아편론임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급속히 팽창하는 것도 한국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요 은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구한 말의 혼란기와 일제를 거쳐 6.25, 급격한 사회변동 등 격동의 근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의 고통과 절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지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고통스러운 역사를 잊기 위한 민중의 아편이었다면, 이제 과감히 그것을 떨쳐버릴 때가 온 것은 아닐까요? 아편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건전하지 못한 사회의 병폐에 기생하는 아편이라면, 그런 종교는 하루라도 빨리 정리되는 것이 좋습니다.
한국 종교 중 퇴출 대상 제 일호는 어느 종교일까 저는 가끔 혼자서 생각해봅니다. 단연 기독교, 정확히 말해 개신 교회들이 아닌가 저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최근 조계사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난동을 연출한 불교계도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기독교도 불교도 변명하기를 그런 현상은 일부 광신도, 일부 몰지각한 신도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이고 대다수는 모두 '건전한' 신앙생활을 영위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킨 셈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성 교회나 집단을 '이단'이라고 몰아붙일 것이며 그들과 선을 그어서 기성 교단을 방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종교계에 일어나는 한심한 현상, 비리가 나타나게 된 배후를 묻고 근본 원인을 따진다면, 우리는 결코 그것이 일부 몰지각한 광신도들만의 행태요 이상한 이단 종파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광신성과 권위주의가 판을 치고 이성과 양심의 소리가 무시되는 한국 종교계 전체 풍토가 언제 어디서든 유사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텃밭이며 그럴 소지를 다 안고 있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비리를 캐기 시작하면 아마도 웬만한 대형 교회들은 대형 교회대로, 그리고 수없이 많은 조그마한 교회는 그들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들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엄청난 종교계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 가톨릭 교회처럼 조직과 제도를 강화하던가, 둘째, 상식과 이성이 통하고 존중되는 사회풍토를 조성하던가, 셋째, 국민의 생활수준과 대중의 민도가 높아져서 아편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던가, 넷째, 권위주의와 광신 대신 자유로운 비판정신이 살아 숨쉬는 종교계의 풍토조성이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사회 일각에서는 이렇게 종교계가 문제가 많으니 차라리 법적 장치를 마련해서 종교를 규제해야겠다고 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종교 문제는 어디까지나 종교계와 시민 운동에 맡겨야 합니다. 계몽에 맡겨야 합니다. 비단 종교의 자유를 제약하거나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누가 정통과 이단을 가릴 것이며, 누가 사이비 판정을 내릴 것입니까? 문화관광부 직원들입니까? 판사들입니까? 그렇다고 자기 종교, 자기 교파에 편향되어 있는 신학자들을 불러서 해결할 것입니까? 또 등록도 안 해주고 국가에서 인정도 안 해 준다고 문제성 있는 집단이 종교활동을 중지할 것입니까? 만약 계속한다면 정말 단속할 힘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지하로 숨을 것이며, 결국 어느 때 가서는 모두 양성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 것입니다. 반면, 사이비 종교가 국가의 인정을 받을 경우 오히려 면죄부를 받고 합법성을 가장하여 더 활동하기 좋을 것입니다. 수많은 문제들이 야기될 것입니다. 종교의 문제는 역시 국가가 개입할 문제이기보다는 종교에 맡기고 시민운동에 맡겨야 할 문제입니다.
민도가 높아져서 아편으로서의 종교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사기를 치지 못하도록 신도들의 지성과 양심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책임을 묻고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역시 사기 극을 연출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힘없는 자, 가난한 자,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 아편을 피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취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엉터리 목사와 승복만 걸친 가짜중들이 발붙일 곳이 없도록 국민의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어리석게 속아넘어갈까 할 정도로 속고 있는 민중들이 참으로 딱하고 화가 날 정도이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속이는 종교 사기범들은 실로 우리들의 분노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봉독한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분노의 말씀과 행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분노는 대부분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경직된 율법주의자들,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자들,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죄인들을 따돌리고 더 괴롭히는 자들,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나 병들고 불구가 된 자들을 업신여기고 외면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주님의 분노는 불타오른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 이른바 예루살렘 성전정화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그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꼴사납게 장사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내쫓고 성전을 조용하고 깨끗한 기도의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뜻만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란 어떤 곳입니까? 유대 종교생활의 중심, 제사의 중심지입니다. 거기서만 제사를 드리는 독점권을 행사하던 하나님의 전입니다. 유월절과 같은 큰 국가적인 축제나 명절 때 유대 민족 전체가 드리는 제사, 혹은 수시로 개인이 죄를 없애고 부정을 씻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제사를 위해서는 양과 염소, 혹은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빈자의 제물')를 제수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제수를 사고 파는 상인들이 이방인들도 접근이 가능한 성전 뜰에서 장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년에 한 번 씩 바치는 성전 세를 이스라엘 은화 반 세겔로 바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오는 유대인들을 위한 환전상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에 불한당 같은 청년 예수가 나타나 '깽판'을 친 셈이 되었으니 당시 사제들의 분노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단순히 과격한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가 뜻하는 바가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사행위 자체를 못하도록, 따라서 사제들과 제사장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전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또 환전상들의 상을 엎어버리고 쫓아 낸 것은 성전 세를 못 내도록 한 행위로서, 역시 성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제관들과 율사들이 그를 없앨 궁리를 했다는 복음서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예수의 이 과격한 행위는 순간의 충동이 아니라 의도적인 도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위험인물로 낙인찍히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는 재판에서 성전 모독 죄의 죄명으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성전이 폐허가 될 것을 예언하였을 뿐 아니라,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만에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짓겠다는 허황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거짓 증언이었지만, 예수는 여하튼 당시 유대교의 성전 종교문화에 반기를 든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사와 사제와 성전이 필요없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를 선언하고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성전'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백성, 성별된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을 대신한 새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는 일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에는 성과 속의 구별도 없고 정하고 부정하다는 관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죄인도 의인도 따로 없습니다. 예수의 눈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도 없고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의로운 자도 없는 세계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사는 공동체이며, 대제사장과 일반 사제와 평신도라는 성스러움의 위계질서가 없이 모두가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인 평등한 공동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는 인간을 종교로부터 해방시킨 것입니다. 성과 속을 구별하고, 정과 부정을 따지며, 죄인과 의인을 심판하고 따돌리던 차별과 억압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를 청산하고자 했습니다. 율법의 올가미로 사람들을 얽매고, 죄인 아닌 죄인을 양산하는 체제를 거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야 할 떳떳하고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딸들을 종과 같이 비굴한 자로 비하시킨 종교체제에 그는 몸으로 저항하다가 결국 비명에 간 것입니다.
성전의 무엇이 예수님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성전은 불결한 자, 부정을 탄 자, 불구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간주된 자들의 출입이 금지 된 곳이었습니다. 정결 의례의 규칙을 지킬만한 여유도 없었고 제물을 사서 바칠만한 돈도 없이 가난한 자들, 그리고 죄인의 낙인이 찍힌 자들은 감히 접근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성전에 와서 속죄의 제사, 정결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정결함을 선언 받아야 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성전은 하나님의 도움과 은총을 가장 필요로 한 자들의 접근이 차단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제도와 전통은 한 마디로 말해 병 주고 약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온갖 율법의 올가미로 죄인들을 양산해 놓고는 와서 제사를 드리고 용서받고 부정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기서만 하라는 완전 독점 기업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돈 없어 가난한 자, 부정탄 자라고 낙인찍힌 문둥병자나 자기 몸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불구자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아모스 5장 21∼24절의 말씀은 성전에서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예수님은 이런 것을 못 참은 것입니다. 못 참은 정도가 아니라 직접 나서서 모든 번거러운 절차를 무시하고 죄로 번민하거나 죄인의 누명을 쓴 사람들에게 사제들을 무시하고 직접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고('하나님 한 분이 아니고서야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는가'라는 비난을 받았음), 부정하다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 죄인들이나 세리들과 스스럼없이 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안식일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고쳐주었으며, 죄를 묻지도 않았고, 부정하다는 생각 전혀 없이 그는 문둥병자나 혈루병자 등 온갖 종류의 병자들과 불구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께서는 성전의 필수적 기능인 제사 자체를 거부했으며, 제사장의 권위를 무시했으며, 율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율법주의를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성업 중인 성전 산업을 '강도짓'이라고 불렀으니 제관들과 율사들이 그를 없애 버릴 방도를 찾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이사야 56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사보다는 기도를 강조하셨으며, 호세아 선지자를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는 자비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미운 짓은 골라서 하셨으니 그가 겪을 운명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 미운 짓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오늘 읽은 성전에서의 '난동'입니다. 결국 그 자신이 그만 제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제사와 제물이 필요없다고 한 대가로 그 자신 인류를 위한 마지막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제사가 필요없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용서하기 위해 애꿎은 동물의 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피를 요구하는 하나님, 대가성 용서를 하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며, 그러한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아무런 매개자나 중보자 없이, 그리고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도 없이 다만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떠한 제도적 장치나 권위도 자비의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하고 소용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식과 부모 사이에 무슨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며 무슨 중개인이나 중재자가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그 어떤 죄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증언이었고 사도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예수가 사셨다면 누가 그의 분노의 제 일차적 대상이 되었을까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 왔으며, 지금도 그 버릇을 진정으로 뉘우치거나 고치려고 하지 않는 재벌들, 또 권력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이전투구하고 있는 우리 정치인들, 다 예수님의 진로의 채찍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 땅의 종교 지도자들, 마음 약한 자들을 상대로 아편 팔아먹는 종교 마약 딜러들,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의 재물을 강탈하는 날강도 같은 종교 장사꾼들, 신도들이야 병들고 가난하던 말든 아랑곳없이 그랜저 승용차에 몸을 싣고 다니는 성직자들, 강도 맞아 쓰러져 피 흘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피해 가는 종교귀족들, 라스베가스에서 교인들의 헌금으로 놀음을 하고도 교회재정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고 큰 소리치는 목사들에게 예수께서는 제일 먼저 채찍을 가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 팔아먹고 부처 팔아먹는 종교 산업, 종교 비지네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지독한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며, 이런 짓을 정당화해주고 옹호해주는 종교 이데올로기를 신랄하게 비판하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문제성 집단이나 교회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율법주의와 인간의 양심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권위주의와 열광주의, 광신과 독선이 팽배해 있는 일반 교회, 주류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성 교회와 건전한 교회, 이단성 교회와 정통을 자랑하는 교회의 구별은 사실 오십보 백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웬만한 비판적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려야 다닐 교회가 없다는 게 그들의 한결 같은 증언입니다. 대부분의 종교 집단들과 교단들이 이미 그 안에 문제성 종교가 될 소지, 그 싹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신학이 바뀌고 예수 믿는 근본 목적과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만민중앙교회와 같은 현상과 사건은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예수의 정신을 상기하면서 자기 비판을 가하지 않는 한 우리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 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종교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함부로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종교는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지녔습니다. 종교는 본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해결사, 인간의 병을 고치는 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약을 먹고 중독 되면 더 이상 약이 없습니다. 해결사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가 속으면 정말 회복하기 어렵게 쫄딱 망해버리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가 아편이요 가짜 약이라면, 정말 없는 것만 못합니다. 바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평신도 교회를 꾸려나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