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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마가복음 권진관............... 조회 수 1492 추천 수 0 2008.09.04 23: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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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2:20-21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6.2.19주일설교 
 제목: 삶의 의미
본문: 마가복음 2:20~21
설교: 권진관 (새길교회 2006.2.19주일설교)

최근 우리 교회의 강단을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한 설교가 두 주째 이어서 나왔습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류상태 형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김기동 자매)가 같은 주제였는데, 저도 오늘 설교의 제목을 “삶의 의미”라고 잡아서 이 인생 시리즈 대열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가지고 말씀드리게 되었는데, 이런 제목은 오늘 예배가 우리 교회의 젊은 사람들의 졸업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예배로 드리게 되었기 때문에 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저의 눈길을 끈 부분은 21절 말씀인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이 말씀에 담겨 있는 통찰에 저는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 예수는 일상생활 속에서 깊은 진리를 파악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는 일상생활을 어쩌면 그렇게 자세하게 관찰하셨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삶의 의미를 어쩌면 그렇게도 예리하게 파악하셨는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에서도 삶의 현장에 대한 예수의 예리한 관찰이 엿보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여러 단계를 거쳐 갑니다. 하루를 접고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고, 한 달을 접고 다른 한 달, 한 해를 접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그런가 하면 유치원 생활을 접고, 다음 학교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접고 다음의 장으로 넘어갑니다. 인생은 한 챕터, 한 챕터 넘어가는 책과도 같습니다. 또 천 한 조각, 한 조각이 이어져서 하나의 아름다운 옷이 되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헌 조각들로 기워지면 낡은 옷이 되어 곧 뜯어지고 손상됩니다. 헌 조각과 새 조각을 이으면 그 옷은 더 빨리 찢어집니다. 우리 인생에서 천 헌 조각은, 그리고 새 조각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이 지루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그 삶 속에서 새로운 시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새로운 시작이 없이 다만 반복이 되는 삶은 그것만큼 지루한 것이 없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적어도 고통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은 고통을 당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새로운 시작, 무언가 가슴 두근거리고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자체는 결코 우리에게 긍정적이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 새로운 것을 시작하도록 동기부여하는 경우는 있습니다만은 고통자체가 우리의 새로운 시작은 아닙니다.

저의 대학시절의 얘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저는 대학 4학년 때 학교 다니기를 멈추고 졸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군대를 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으로 옥고를 치루었기 때문에 다시 대학교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결국 거의 8~9년을 그냥 지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실직생활 한참하다가 노동도 해보고, 또 신학교에 가서 공부했고 KNCC에서 청년담당간사로 열심히 일했지만, 제가 다니던 서울대학으로는 돌아가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거기에 학위를 마치게 되었는데, 저는 기네스북에 올라도 될 기록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철학박사 Ph.D를 마치고 나서 대학 학부를 졸업하여 학사를 받은 사람 아닙니까? 한동안은 시간이 거꾸로 갔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민주화운동 보상을 한다고 해서 기분 좋았는데, 교수라고 거기에도 해당되지 않더군요. 저의 삶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제가 감옥에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감옥으로부터 나와서 자유의 몸이 되어서부터 아무 일을 하지 못할 때, 그때가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실직자들의 심정이 바로 이런 거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대학 졸업하고는 그대로 실직생활을 하고 있는데, 저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갈 곳, 가야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밤이 되면 어둠이 나를 감싸 주고, 가족이 있어 돌아갈 때가 있어서 좋았는데, 오라는 곳이 없는 아침과 낮 시간은 고역이었습니다.

고난은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한 전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고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고난은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그 고난을 새로운 에너지로 동원해야 할 과제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삶 속에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고난과 결단, 결단은 고난을 낳습니다. 결단이 고난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리스키(risky)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5:3~4에 내가 좋아하는 바울의 말씀: “다만 그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소망은 소망을 이룬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끙끙 고난당하다보면, 어느덧 그 희망이 실현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경험은 대체로 고난 다음에 옵니다. 물론 우연히 닥쳐오는 행운, wind fall, good luck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것은 고난 없이 주어지는 그야말로 바람을 불어 저절로 떨어진 사과와 같은 것인데, 이것은 일생에 한두 번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대체로 새로운 시작은 항상 우리의 노력, 고난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할 때 우리는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어두운 터널을 헤쳐 나가다 보면 어느덧 통로를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일생에 몇 번은 행운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결혼은 행운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 wife가 그때 매우 미인이었고 그렇게 저를 보살펴 줄 수 없습니다. 두 번째의 행운은, 결혼할 전후로 해서 저는 제가 하고 있는 기독교 운동이 너무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모색하던 중에 미국에 계신 은사님이신 문동환 박사님께서 유학을 원하면 미국 유학길을 열어주시겠다고 제안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유학을 가게 된 것인데 이것이 그야말로 wind fall이었습니다. 어렵게 여권과 비자를 받고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저는 많이 자책하게 되었습니다. 동지들, 친구들을 뒤에 두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게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조국이 아직도 독재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유학으로 도피하고 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미안함이 있는 중에도, 내가 유학을 갈 수 있다는 게 다행이고 기쁜 일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때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이었는데, 내가 이 고통당하고 있는 동지들, 동료들을 놔두고 떠나는데 자책감보다는 기분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가 이제까지의 매너리즘에 빠져서 반복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내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굴러오는 우연한 행운은 인생에서 겨우 한두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인생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결단해야 하고, 그 결단으로부터 오는 위험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의 관문을 통과하려면, 고난의 긴 통로를 먼저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졸업은 끝이요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영어에서 졸업을 commencement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졸업은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입니다. 출발이 있기 때문에 끝이 있는 것입니다. 마무리, 즉 끝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무리(결단)하고 나야 다시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가 없으면 시작도 없습니다. 마무리가 없으면 즉, 졸업이 없으면 새로운 시작도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 졸업이 있는 것입니다. 마무리와 새로움이 동시에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딸이 올해 대학을 졸업합니다. 대학 졸업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심각하고 걱정이 많은지 제 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4학년 학생들 모두 걱정이 태산입니다. 진로걱정, 취직 걱정, 인생의 새출발을 한다는 게 무언지 등등 걱정이 태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졸업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출발인데, 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결단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학교라고 하는 테두리 속에서 안주하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보호받았던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인생을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인생은 다만 여관일 뿐이다. 뒤의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곧 넘겨주도록 준비해야 하는 곳, 천상으로부터 타락한 영혼들이 징계와 순화를 받는 곳, 정신병 병동과 같은 곳, 모든 배설물들이 모여 있는 화장실과 같은 곳이다. 이렇게 아주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이렇게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팝송의 제목대로, It is a wonderful world이며 wonderful life인 것입니다. wonder 즉 놀라움, 새로움이 가득한 것이 인생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생을 동물적인 삶과 인간적인 삶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이 단지 나만의 복리를 위한 것, 나만의 기쁨과 행복만을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진정 인간적인 것이 되려면, 적어도 남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남들의 복리를 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의 인간적인 삶, 즉 이웃의 복리를 위해 나를 투신하는 인생을 예수의 삶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가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이웃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대의를 위해 사셨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삶과 행복을 무시하고 타자의 삶과 행복만을 위해서 극단적인 삶을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복리를 중시하지만, 그러나 적어도 공익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우리의 일부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하여 공공성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삶은 동물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모든 이들이 자신만을 위하여 걸을 때 “소수”가 가는 길, 이웃을 위한 “좁은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소수의 길, 좁은 길을 모든 사람들이 걷게 되기를 기대하셨던 것이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행사가 있었습니다. 35년의 짧은 일생을 마친 모차르트의 삶은 그야말로 새로움이 가득한 알찬 인생이었다고 봅니다. 우리 곁에 항상 모차르트의 곡이 들려지는 것은 그의 헌신적인 새로움과 아름다움과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 덕분이 아니었는가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새로운 출발로 점철되는 것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졸업, commencement, 새로운 출발이 없는 인생은 불행한 것입니다. 매일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삶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생동안 같은 일에 종사하는 장인들, 교수들(교수도 일종의 장인이지요) 안에 어디 새로움이 있는 것일까요? 저는 TV에서 도자기공이 갓 구어 낸 도자기들 중에 마음에 안 드는 그 많은 값비싼 것들이 약간이라도 흠이 있으면 가차 없이 깨 버리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 이것도 이전의 것을 깨는, 자신 속에 있는 낡은 천 조각을 솎아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고 보다 아름다운 것, 보다 선한 것을 추구하는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학자인 저는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 고민은 신학이 사회적인 적합성, 설득력을 상실하여, 역동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전 민중신학이 생겼을 당시에는 신학담론이 역동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은 상아탑 일각에서의 독백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민중신학은 백안시당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자신들만의 철옹성을 쌓아놓고, 그 속에서 안주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교도 지금 많이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한때 한 신학교에 수백 수천 명하던 신학생들이 이제 수백, 수십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재정도 없다고 난리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신학자, 한국신학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신학이 이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신학을 뒤로하고 새로운 신학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고민입니다. 신학계에 새로운 시작이 정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음 두 가지의 경우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단조로우며, 같은 것이 반복되지만 장수하는 인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삶 속에 창조성과 새로움이 많지만, 그리 길지 않는 인생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길게 살면서 늘 창조적인 삶을 선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습니다만은 만약에 이 두 가지 종류의 인생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라면, 두 번째의 인생이 더 값질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짧고 굵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러한 삶에 동참하실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예수를 잘못 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자,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가 잘 아는 어떤 목사가 북한 봉수교회는 가짜 교회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마는, 그렇게 따지면 3박자 축복(3박자 복음의 근거는 요한 3서의 서두 인사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2절))을 복음의 핵심 메시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교회도 가짜가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이었지, 그리고 예수께서 산상 수훈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평화를 위하여 살고,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르라고 했지, 물질적 축복, 육체적 축복, 영적인 축복은 이와는 거리가 멀어도 매우 먼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면, 대형교회들로부터 쫓겨나고 마는데, 이러한 교회야말로 진정 더 큰 가짜교회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가 한국 대형교회에 오시게 되면 문전 박대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실증적으로 부활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부활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절만 되면 설교자들이 이 부활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얼마 전 부활절에 부활에 대해서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부활을 제대로 설명할 수없음을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빈 무덤이 있었다는 것으로만 부활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필요한 것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없으면 삶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예수와 같이 자신의 삶을 고난 속에서도 투신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그냥 자동적으로 오는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부활은 헌신의 결과물입니다. 십자가의 결과물입니다. 희망 속에서 겪는 고난의 결과물입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제 이 사회의 공동선,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개인적인 선물입니다. 부활의 경험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경험의 결과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나타납니다. 사회적인 공동의 선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은 개인의 내면 안으로 느껴지는 감동에서 경험되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사회적인 공동의 선으로 나타납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부활이 깃들여 있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시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졸업을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졸업이란 다름 아니라,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새로운 결단과 새로운 출발은 우리 자신이 깨어지는 경험을 수반합니다. 이 깨지는 경험에는 고난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자신을 둘러싼 외피인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바로 삶의 진실입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행복한 것인데, 우리가 좋은 꿈을 많이 꿀 때가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저의 경험으로는 내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많은 꿈을 꾸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상서로운 꿈이 나타납니다. 꿈은 꿈을 꾸는 자, 희망하는 자에게 오는 하나님의 계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 항상 상서로운 꿈들이 많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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