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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신 선생님, 예수의 아이러니

마가복음 강철웅............... 조회 수 1749 추천 수 0 2008.09.08 01: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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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17-19 
설교자 : 강철웅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제목: 선하신 선생님, 예수의 아이러니
본문: 마가복음 10:17-19  
설교: 강철웅 (새길교회 2006.4.30]주일설교)

1. 성인 예수와 성인 소크라테스

저는 오늘 좀 진부한 4대 성인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흔히 ‘세계 4대 성인’이라고 하면, 잘 아시다시피 공자,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 이렇게 네 분을 꼽지요. 보통은 왜 여기 소크라테스가 끼었나 하는 질문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세 사람은 유력한 종교와 상관있는 분들인데, 소크라테스만 유독 종교와 크게 상관없는 인물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그래서 간혹 소크라테스를 빼고 무함마드를 넣는 버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4대 성인이라는 개념을 누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아십니까? 이건 어떤 일본 학자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이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한 건 일본 메이지 시대의 이노우에 엔료(1858-1919)라는 사람이랍니다. 당시 일본 철학자들 중에는 동서양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 속에 통합하겠다는 야심찬 노력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그 운동의 지도자였답니다. 1905년에 이 사람이 세계 4대 성인을 꼽고 그들을 위해 ‘데쯔가쿠도’(哲學堂)라는 사당을 만들어 매년 제사까지 드렸답니다. 지금도 도쿄 시내에 ‘철학당 공원’으로 남아 있다고 하는데요. 흥미로운 건 그 사람이 꼽은 목록에는 나머지는 그대로인데, 예수 대신 칸트가 들어 있습니다. 일부러 예수를 뺀 걸 보면, 기독교엔 심오한 철학이 없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칸트 대신 예수가 들어간 버전도 아마 메이지 시대부터 이야기되었던 것 같은데, 문헌상으로는 1938년에 윤리 사상가 와츠지 데츠로(1889-1960)라는 사람이 처음이랍니다.

세계 몇 대 ... 우리나라 몇 대 ... 이런 통속적인 목록이 얼마나 대단한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서세 동점의 시대에 동양의 지식인들이, 서양을 대표하는 성인으로 누구를 꼽았는가 하는 게 자못 흥미로운 점인데, 우리 선입견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처음부터 계속 상수로 들어 있었고, 예수는 오히려 나중 버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나중 와츠지 버전,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버전이 서양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 꼽고 있는 게 바로 예수와 소크라테스인데, 그 두 인물은 그 분들이 보여준 삶의 여러 모습들이 가진 유사성 때문에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지요. 다소 상투적인 그런 비교를 이 자리에서 되풀이하려는 건 아니고,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진리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이 드러내는 예수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위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2.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Socratic Irony)

먼저 소크라테스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을 하나만 들라고 하면 저는 주저 없이 ‘아이러니’(irony)라고 대답합니다. 흔히 ‘반어법’(反語法)이라고 번역되는 이 ‘아이러니’라는 말은, 누군가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 속에 그 말의 표면적인 의미 이외에 다른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표면적인 의미와 상반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을 때, 그걸 ‘아이러니’라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의 평소 언행을 가리키는 말에서 시작됐고요. 그래서 앞에 ‘Socratic’(소크라테스적)이라는 말이 자주 붙어다닙니다. 그가 구사했던 아이러니는 꽤 극단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는 이런 말들을 하고 다녔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으니 당연한 것이죠.” 등등...

이런 말을 하고 다닌 사람이 잘못된 신을 신봉했고 또 그걸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서 그들을 망쳐놓았다는 죄목으로 재판받고 사형 당했다는 것 자체가, 느슨한 시쳇말로 ‘아이러니하다’(?)[=아마 ‘앞뒤가 안 맞는 구석이 좀 있다’는 뜻]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아무튼 소크라테스의 이런 ‘무지 주장’은 굉장히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잘 가르치기 위해 짐짓 ‘모르는 체’하는, 그런 표면적 차원의 의식적인 아이러니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단순한 의미로는, 그러니까 ‘Socratic Irony’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흔히 일차적으로 떠올리는 의미로는, 아이러니가 아니라 아주 진지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그런 말들에는 오히려 더 깊숙한 차원에서 아이러니가 성립하는데, 그 점을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서양적 지혜의 대명사가 되어 이른바 ‘4대 성인’의 반열에 끼어 있게 되었나? 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자세히 말씀드리긴 좀 곤란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결국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온갖 사람들을 만나 보았는데, 결국은 아는 게 없더라, 그들이나 나나 다 아는 게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은데, 그래도 내가 뭔가 그들보다 낫다고 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건 그들은 자기들이 모른다는 걸 모르는(無知의 無知) 데 비해서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無知의 知)는 것이다. 이런 무지의 지, 즉 무지의 자각 상태에 있는 사람만이 알려는 노력을 한다.” 고 말입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무지 주장을 하면서, 그리고 아무 것도 안 가르친다고 하면서, 우리를 위해 진리를 향한 구도의 발걸음을 내딛는 데 모범을 보인 위대한 선생이 되었고, 이것이 보다 깊숙한 차원에서 성립하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르치는 게 없다고 말하는, 그러니까 자신은 선생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걸 가르쳐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3. 선하신 선생님?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본문은 우리에게 상당한 도전과 긴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어딘가로 길을 떠나려는 예수께 ‘한 사람’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어떤 질문을 했다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아무튼 꽤 절박하고 겸손한 자세로 예수께 물은 것 같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그의 자세만큼이나 꽤 중요하고 절박한 물음이고,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을 잘 드러내 줄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서 ‘영생(영원한 생명: z?? ai?nios)을 얻는 것’은 이어지는 이야기의 23절 이하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이고 [이는 앞 9장 43절과 45절에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47절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대체되는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지요], 또 26절에서 말하는 ‘구원을 받는 것’과도 같은 의미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께 무릎을 꿇고 어찌 하면 구원을 받을지, 혹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를 묻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절박한 물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우리가 보기엔 다소 의아하게 진행이 됩니다. 대답은 크게 두 부분(18절과 19절)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선 18절에서 “왜 당신은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 밖에 선한 분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이건 사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질문자가 질문하면서 붙인 호칭 ‘선하신 선생님’(didaskale agathe)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선하신 선생님’이라니? 그런 과분한 호칭은, 특히나 ‘선하신 분’이라는 호칭은, 하느님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까?” 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대답의 내용 자체만 보면 ‘선하다’(‘훌륭하다’, ‘good’: agathos)는 말에만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고, 또 읽지 않은 20절 이하에서 여전히 ‘선생님’으로 부르는데 아무 대응이 없는 걸로 보아도 ‘선생님’ 부분은 그런 대로 문제 안 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질문에 대한 본격적인 대답을 하는 부분인 19절 내용을 보면 사실 ‘선생님’ 호칭에 대해서도 완곡하게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계명들을 알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등등...” 구원의 길을 가르쳐 달라는 질문에 이러이러하라고 답하는 대신에, “계명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예수는 ‘선생님’이라는 역할에 대한 기대마저도 완곡히 물리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대답에 들어 있는 속생각은 아마 이런 것 같습니다: “나를 선하다(훌륭하다, 흠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인 내가 구원의 길을 제시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질문을 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선한 분(즉 하느님)이 아니고 구원/영생의 길에 관해서는 계명이 있고, 그 계명 외에 따로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사실, 오늘 본문은 아주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진 폭발성 혹은 민감함 때문에 본격적으로 다루기를 기피하거나 메시지를 완화하는 등 여러 노력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에서 대개 이 대목은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즉 이 사람이 “이 계명들, 사실 다 잘 지켰다” 고 하니까 예수께서 “그런데 부족한 게 있다, 가서 가진 것들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다시 와서 나를 따라라” 고 하고, 그러니까 이 사람이 사실은 부자였는데, 그 명령에 부담을 느끼고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뒷이야기도 그것 자체로 중요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그 뒷이야기와 오늘 본문 이야기는 내용이 판연히 구분되는 별개의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4세기에 많은 기독교인들을 광란과 살인으로 몰아넣었고 결국은 먼 훗날(11세기) 서방 교회(로마 가톨릭)와 동방 교회(동방 정교회)의 분리로까지 그 여파가 이어진 이른바 ‘아리우스 논쟁’의 핵심 쟁점 구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 본문이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드러내고 있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나중 시대에 이른바 ‘정통’이라고 말해지는 아타나시우스 파(혹은 니케아 파)에게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마태복음(19장 16절 이하)은 이렇게 바꾸고 있습니다. 19장 16절입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가 선하신 분이냐 아니냐,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분이냐 아니냐 라는 논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마가복음 구절을 순화시키려고,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를 부르는 호칭에서 ‘선하신’을 빼고, 대신 구원 받기 위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대답에서 “왜 내게 선한 일을 묻습니까?” 뒤에 “선한 분은 한 분입니다”가 남아 있는데, 사실 마태복음 식 질문에서 이 대답은 반드시 나와야 되는 언급은 아닌, 다소 부자연스런 것이지요.

[* 사족: 사실 수정은 이어지는 뒷이야기에 대해서도 계속 이루어지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질문자를 ‘젊은이’라고 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20절과 22절). 마가복음에서는 어느 부분에서도 그 질문자를 ‘젊은이’라고 칭한 적이 없습니다. 부자와 구원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마태복음 기자는 그 부자를 젊은이로 이해하려 한 것이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표준새번역의 오늘 이야기 부분 위에 달린 ‘부자 젊은이’라는 제목은 잘못 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에 의거하여 마가복음 이야기를 이해하기로 정했을 때 가능한 제목일 텐데,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평행 구절인 누가복음 18장 18절 이하에 보면 여기 문답이 원본인 마가복음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질문자가 어떤 ‘지도자’(관리: archon)로 이해되고 있지요. 그러니까 같은 이야기를 누가복음 기자는 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과의 문답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달리 이해되는 나중 복음서 내용을 가지고 마가복음을 이해할 게 아니라 일단 마가복음 구절 자체만 놓고 이해를 시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정신을 갖고 보자면, 뒷이야기 시작 부분인 20절의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도 사실 오역의 혐의가 짙습니다. ‘어려서부터’로 옮긴 희랍어 ‘ek neot?tos’는 말 자체의 뜻만 고려하면 ‘젊어서부터’로 옮길 수도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neos’라는 말은, 고전 시대 용법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린이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30세까지 젊은이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폭넓은 말인데, 마태복음 식 독해에 맞추다보니까 젊은이가 어린이로 격하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4. 예수의 아이러니 (Jesusian Irony)

이쯤 되면 여러 자매 형제님들께서는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결론이 뭘까? 궁금해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결론, 없습니다.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 저도 사실 두 분 성인들에게서 배운 아이러니라는 기법을 좀 써 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이야기가 어떤 결론으로 가는가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서를 제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읽어보고,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렇게 읽은 것을 또 여러분처럼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들 앞에서 제 생각을 던져 보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 안에서 예수의 생각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그저 신학자들이나 사제들이 정답이라고 정해준 것들을 무작정 되뇌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으로 유연한 자세로 추적해보고, 그런 생각들을, 혹은 고민들을 함께 나누는 일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냐는 겁니다.

사실, 결론이 없다는 건 다소 과장되게 말씀드린 것이고,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에서 쟁점이 될 만한 사안은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하는 일반적인 문제(흔히 기독론이라고 지칭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2) 다른 하나는 그 문제와 관련한 하나의 특수한 문제로서, 예수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 혹은 주장했는가 하는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문제에 대해 우선 전통 기독교의 입장은 주, 구세주(메시아), 하느님의 아들 혹은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점 등을 강조하면서 예수를 신앙의 대상(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faith in Jesus,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면서, 부활 이후 예수의 그리스도임(즉 이른바 ‘신앙의 그리스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신비가, 도덕 선생, 예언자, 정치/사회적 개혁가, 문화 비판자, 갱신 운동 지도자 등 예수를 신앙의 모범(선생)으로, 그러니까 하느님을 예배하고 따르는 길을 가르친 분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faith of Jesus, 예수의 신앙을 강조하면서, 부활 이전 예수의 삶(즉 이른바 ‘역사적 예수’)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입장에 선 역사적 예수 재구성론자들은 전통적인 기독교가 주목하는 신앙의 그리스도가 고백적 전승 내지 교리적 추가를 통해 진짜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가리고 있다고 보고, 그런 덧씌워진 것들을 벗겨내려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민은, 사실 그 둘 다가 일리가 있는데, 그 둘이 상호 배척적인 것으로, 혹은 양자 택일의 대상으로 보인다(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보도록 강요되어 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either-or (이것 아니면 저것)의 논리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왔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오늘 본문은 대안적 입장의 사람들이 전통적 입장을 몰아세우기 좋도록 씌어 있습니다. “봐라, 예수 스스로 자신은 하느님과 구별된 분이라 하지 않았느냐” 고 말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둘째 문제에 대해서도 일단 마가복음에 드러나는 예수의 주된 모습은 메시아로서의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곳곳에 엿보이는 비밀주의가 바로 이런 결론을 지지한다고 봅니다. 마가의 비밀주의가 나온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역사적 예수가 ‘메시아’라는 타이틀을 적어도 공개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어찌 보면 예수는 철저히 유대교 테두리 안에서 가르치고 행동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러니까 유대교를 개혁하려 했지만,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 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아마도 공개적으로 표방한 것이 아닌가, 혹은 그렇게 들릴 만한 표현(예컨대 ‘아버지’ 같은 표현)은 적어도 역사적 예수가 사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지는 ‘권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복종’의 표현이기도 하지요(cf. 요한복음의 여러 구절들). 그런 의미로는 우리도 그분과 더불어 하느님의 아들(자녀)이며, 따라서 그분과 형제자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cf.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히 2:11)]

여기까지가 대안적 입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이야기는 거기서 멈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메시지를 전하는 마가복음 기자의 고백 속에는 또 다른 한 측면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가 메시아로서의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부인하는 건 아니라는 것, 또 예수 스스로 하느님과 구별된 분이라고 주장했다는 데 주목한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을 부인하는 건 아니라는 것, 이것이 마가복음 기자가 곳곳에 비밀주의라는 장치를 심어 놓고, 또 오늘 본문처럼 예수의 하느님 신앙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머릿속에 담고 있던 구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선한 선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결국 우리에게 구원으로의 길을 가르쳐 주는 선한 선생님이 되는 예수, 자신은 한 분 하느님과 구별된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을 보여 주는 형상(eik?n) 혹은 계시(revelation)가 되고, 결국 부활을 통해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고백되는 예수,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는 구세주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구세주, 그런 예수의 아이러니(Jesusian Irony)야말로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세상, 우리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여 계시는 게 분명하지만, 동시에 늘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라는 게 히브리 성서에서부터 줄곧 고백되어 온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초월의 하느님이기만 하면 어떻게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compassion), 우리와 빵을 나눠먹어 가면서 길을 함께 가는(companion)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우리와 함께 하는 하느님의 모습(eik?n)을 우리는 이 땅에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론이 맞냐 틀리냐 이런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 잘 모르고 또 왜 그렇게 복잡하게 고민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바로 이 점, 예수가 하느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느님의 형상(eik?n)이라는 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cf.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eik?n)이시요”(골 1:15). “지혜는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이며 하느님의 활동력(energeia)을 비쳐 주는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의 선하심(agathot?s)을 보여주는 형상(eik?n)이다.”(지혜서 7:26. 공동번역)]

여기서 ‘형상’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콘’(eik?n)은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아이콘’(icon)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컴퓨터의 인터페이스가 그래픽화하기 전에는 복잡한 컴퓨터 언어를 익혀야만 컴퓨터가 하는 일들을 알고 통제할 수 있었는데, 지금 우리는 누구나 비교적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아이콘을 가지고 컴퓨터가 하는 일들을 쉽게 이해하고 사용하게 되었지요. 비슷하게, 예수라는 아이콘은 하느님의 활동(energeia), 하느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드러내 줌으로써 하느님과 우리를 소통하게 해주는 인터페이스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아이콘을 쓰는 컴퓨터가 더 이상 특정 지식 집단 혹은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듯, 하느님 신앙 혹은 하느님과의 소통도 예수라는 아이콘 덕택에 더 이상 특정 사제 집단 혹은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만인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동일한 본질/실체’(homoousios)니 ‘유사한 본질/실체’(homoiousios)니 등등, 어려운 희랍 철학 용어를 끌어들여가면서, 요타(i)가 들어가야 하느냐 마느냐, 하느님과 예수가 일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을 벌이고, 자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하고 죽일 듯이 덤비는(아니, 실제로 많이 죽이기도 했지요), 고대 교회 이래 숱하게 벌어졌던 그런 무지막지한 일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신앙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따라 사는 데 정말 꼭 필요한 일이었는지, 기어코 어느 한 쪽을 택해 믿어야만 올바른 기독인의 삶을 사는 게 되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와 같은 세상을 숨 쉬면서 사신, 숱한 고통과 유혹을 견디신 역사적 예수, 그리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아이콘 역할을 하시는, 부활 이후 신앙의 대상이 된 그리스도, 그 서로 긴장을 이루는 두 모습 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예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참 모습을 찾고 따르려면, 겸손의 예수와 영광의 예수 사이의 그런 긴장, 어정쩡함, 애매함, 불편함, 역설, 아이러니를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둘 중 하나를 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단순함, 조급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자신이 몸소 바로 그런 살아 있는, 건강한 긴장, 역설을 보여 주셨고, 아이러니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의 아이러니를 체득한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기를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성인이 있다.” 고 말입니다. 이 시간, 자신을 낮춤으로써 결국 높아지는, 지는 싸움을 함으로써 결국 승리하는, 그런 아이러니컬한 예수의 자세를 배우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사랑의 하느님, 자신을 낮춤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우리 삶의 험난한 길을 함께 해 주시는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당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를 신앙한다는 것과 예수의 신앙을 따른다는 것이, 우리 안에서 긴장을 이루면서 동시에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그런 긴장을 잘 유지함으로써 당신을 향한 우리 믿음의 길이 굳건해지리라는 것을 이 시간 깨닫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아집의 길이 아니라 관용의 길이 되고, 정죄의 길이 아니라 화평의 길이 되며, 독선의 길이 아니라 겸손의 길이 되도록 늘 붙잡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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