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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적

마가복음 김재성 목사............... 조회 수 2412 추천 수 0 2008.07.15 1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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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9:14-29 
설교자 : 김재성 목사 
참고 : 새길교회 2000.7.16주일설교 
예수의 기적 이야기는 복음서의 3분의1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귀신 축출 기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예수가 귀신을 쫓아낸 것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가 한 귀신 축출 행동을 그대로 따라서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교회는 무당이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교회나 유명한 기도원 등에서는 귀신 쫓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곳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활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나, 병을 치료할 시기를 놓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입으로는 '예수 이름'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특정 개인을 우상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위험을 피하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적 의미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귀신들림의 기준과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다음에 귀신을 내쫓는 것의 의미를 물어야 합니다.

귀신들림의 기준

1세기 팔레스틴에서 어떤 사람이 귀신에 들렸다고 하는 것은 대개 신체적·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상태입니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의 경우, 극도의 난폭함과 대인기피증, 자해 행위 등이 나타납니다(막 5:3-6). 오늘 봉독한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린 아이는 그 증세로 보아 간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신분열 증세로 볼 수 있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은 자신을 '나'라고 했다가 '우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또 한 사람에게 많은 귀신이 들어갔다는 것도 일종의 정신분열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예수에 의해서 풀려났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다가 돌아와 보니 청소가 잘 되어 있어서 자기보다 더 악한 딴 귀신 일곱을 데리고 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마 12:43-45).
멀쩡한 사람을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다는 것 때문에 미친 사람이나 귀신들린 사람으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였습니다(막 3:21f.). 세례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귀신이 들렸다는 소리를 들었고, 예수는 먹고 마신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마 11:18f.). 바울이 신문자들 앞에서 조금도 굽힘이 없이 당당하게 자신이 복음을 전하게 된 경위를 밝히자 총독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하였습니다(행 26:24). 이런 경우들은 정신·신체적 병리현상으로서 귀신들림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귀신들림의 원인

정신·신체적 병리적 현상으로서 귀신들림의 경우에도, 그 귀신들림 또는 병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서 입장이 달라집니다. 유대적 관념에서는,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치유 이야기에서 보면, 예수의 제자들도,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요 9:1). 병에 걸린 사람은 병 때문에 고생하고 다시 죄인으로 정죄를 받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귀신에게 희생된 사람과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귀신은 쫓아내고 희생된 사람은 구해냅니다. 그래서 예수의 귀신 축출 활동에서는 그 귀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보면, 예수는 귀신을 내쫓을 때 막연하게 "귀신아 나가거라" 하지 않고 "벙어리, 귀머거리 귀신아" 하고 구체적 대상을 명시한 다음에 "내가 너에게 명한다. 아이에게서 나가라" 하고 명령합니다. 앞에서 이 아이의 아버지는 그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라고 했고(17절), 마가복음 기자는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는데(25절), 예수는 그 귀신의 정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도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습니다(5:13). 그러나 예수는 그 귀신을 쫓아낼 때도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음으로써 그 정체를 폭로시키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냥 귀신을 쫓아내면 일회적인 일로 끝나지만, 그 정체를 밝히면 그 귀신을 근본적으로 내쫓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귀신은 "군대입니다. 우리의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주변에 있는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는데, 2000 마리나 되는 돼지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시위'는 예수 당시의 귀신 축출 활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세기에 귀신 축출가로 활동한 티야나의 아폴로니우스는, 귀신을 쫓아내면서, "눈에 보이는 어떤 표징으로 정말 떠난다는 것을 드러내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자 귀신은 조각 입상 하나를 넘어뜨리면서 떠납니다. 같은 시기의 엘르아자르라는 사람도, 귀신을 내쫓으면서, 물을 가득 부은 잔이나 대야를 놓아두고, 귀신에게 그것을 뒤엎고 나가라고 명령합니다. 귀신이 나간 것을 사람들에게 입증해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귀신에게 시위를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2000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몰살당하는 시위 장면은 조각 입상이 넘어지는 것이나 잔이나 대야의 물이 쏟아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는 그 사람을 귀신 들리게 한 실체가 집단적인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 귀신이 스스로 밝힌 군대라는 이름에 꼭 어울리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로마 군대의 잔인한 진압에 강제로 동원된 군인이거나, 로마 군대에 저항하다 전사한 사람의 가족이거나, 또는 그 잔혹한 현장을 직접 보고 충격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식민 지배, 군인들의 잔인한 진압 등이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정신의학자들이 이미 밝힌 바입니다. 알제리의 정신의학자 파농(F. Fanon)은 식민 지배와 원주민들의 정신병 사이의 관계를 밝혔습니다. 식민지 원주민은 식민 지배자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세계를 선망하는데, 여기서 일종의 정신분열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군인에게 체포되거나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어린아이들에게서도 정신 이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나온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에서는 광주항쟁 진압군에게 어머니와 가족을 잃고 미쳐버린 한 소녀가 등장합니다. 그런 희생자를 돌보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학대하고 성폭력까지 휘두르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에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광주항쟁에 진압군으로 동원되었다가, 너무 당황하여 어린 여고생을 실수로 쏴 죽이게 된 사람이 그 충격과 죄책감으로 병들어가고 파괴되어 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끝내 그런 잔인한 기억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면서 "나 다시 돌아갈래" 하는 절규를 남기고 자살을 합니다. 최근에 신문보도를 보면, 월남전에 참전한 사람들이 전쟁 직후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인 사람이 미국에도 많고 한국에도 수백 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주로 극심한 소음공포증이나 대인기피증을 보이며, 정신분열증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집안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과 같이, 저수지 부근 야산에서 움막을 짓고 27년째 가족들과 인연을 끊은 채 야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으로서 기적

예수 당시의 무당이나 일반적 귀신 축출가들은 눈앞에 드러난 병자의 증상을 치유하고 돈을 받거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관심했지, 그를 병들게 한 구조악이나 악마적 실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악마적, 구조적 세력의 정체를 밝혀서 그것을 근본적으로 추방하려 한 점에서 그들과 다릅니다. 예수는 이런 귀신 축출 활동을 하나님 나라 운동의 가장 중요한 실천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고 했습니다(눅 11:20). 하나님 나라의 대망은 당시의 바리새파, 에세네파, 묵시문학 운동 등에 두루 나타나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은 낡은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대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저 대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악마적 실체와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제일 중요한 과제로 삼았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할 때도 더러운 귀신을 내쫓는 것을 제일 중요한 과제로 주었습니다(마 10:1; 막 6:7). 당시의 종교 지배 체제는 다른 귀신 축출가나 무당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으면서 예수에 대해서는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는다고 모함을 하였는데, 이는 예수의 귀신 축출이 이런 정치적 의미를 가졌으며,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서 이루는 기적

예수의 기적 이야기에는, 예수는 시혜자이고 병든 사람은 수혜자인, 또는 예수는 초월적 능력을 갖고 있고 병든 사람은 무능한, 이른바 주객도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 치유 기적에서, 예수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 안수를 하거나, 병이 나았다는 선언을 하거나, 귀신을 쫓는 명령을 하지 않습니다. 여인이 사람들을 헤치고 뒤에서 와서 예수의 몸에 손을 대었고, 그 순간 병이 나았습니다. 여인이 기적의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에게서 능력을 훔쳐내듯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여인을 격려하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대낮에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유대 사회의 통념이나, 더구나 부정한 몸―유대 사회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으로 다른 사람을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통념을 깨고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예수에게 손을 대었습니다. 그런 적극적 행동을 예수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눈먼 바디매오에게 예수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고 묻습니다.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하자, 예수는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막 10:51f.).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도 아닙니다. 다시 보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그런 염원을 예수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병을 낫게 하고 기적을 일으킨 것이라고 격려했습니다.
예수께서 고향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하면서 무시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준 것 밖에는, "아무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다"고 합니다(막 6:5). 일으키지 "않았다"가 아니라 "할 수 없었다"(ouk edynato)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도 혼자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셈입니다. 예수의 기적은 혼자서 한 기적이 아니라 더불어서 일으킨 기적입니다.
더러운 귀신을 내쫓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귀신 들린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곁에 있는 아버지의 믿음이 그 아이를 구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도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이 고침을 받는다(막 7:25). 병자 자신, 그의 주위의 사람, 예수가 함께 일으킨 기적이다.

한계 상황의 초월로서 기적

예수의 기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막장 인생 또는 한계 상황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은 의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재산을 다 허비했다고 하고, 그런데도 더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간질병 걸린 아이 경우도, 어려서부터 그랬다고 하니 아버지는 이런 저런 방도를 다 취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이번에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예수의 제자들에게 아이를 데려 온 것입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이제 그는 이제 마지막 희망을 예수에게 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한계 상황에서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그 한계를 초월할 수 있기를 염원하고 또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게르트 타이센은 이런 것을 "한계 초월의 동기"라고 합니다.
간질병 걸린 아이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예수에게 "할 수만 있으면 불쌍히 여겨 고쳐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을 때, 예수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가 해 주리라고 기대했는데, 예수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모든 문제를 대신해서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능치 못함이 없다"(fanta dynata)는 말은 하나님의 행위를 설명할 때 쓰이는 전문 용어인데, 믿는 사람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24절) 하고 외치기 전까지 예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내가 믿습니다" 할 때,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론적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 한계 상황에서 낙망하여 주저앉지 않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혈루증 앓던 여인이 그 한계 상황에서 주저앉지 않고 예수에게 손이 닿기만 하면 나으리라고 믿고 손을 내뻗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칭찬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한계 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작은 가능성이라도 붙잡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하고서 바로 다음에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예수께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든 문제를 혼자서 다 해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약하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다만, "내가 믿습니다" 하고 입을 여는 것,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계를 초월하는 첫 걸음은 우리 스스로 내디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영화 〈박하사탕〉은 우리의 자화상을 잘 그렸다 할 수 있지만, 한계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는 데 이 영화의 한계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포자기가 없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견디기 어려워도 "나 다시 돌아갈래" 하는 과거 지향적 향수를 갖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순수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과거에도 인간은 여전히 타락한 존재였으며 문제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내게 닥쳐 온 한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믿는 사람은, 그 현실이 아무리 받아들이기 어렵고 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낙망하지 않고,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낫는 것도 기적이지만, 한계 상황에서 그렇게 믿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삶 속에서 이런 저런 일로 한계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흔히들 하필 자기만 운이 없어서 그런 시련을 겪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은 그런 데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쉽게 낙망하고 불운을 탓하면서 자포자기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와 더불어 기적을 경험하고 병이 낫고 귀신을 쫓아낸 많은 사람들은, 많이 배운 사람도 부자도 권세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의 기적, 기도의 기적을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이런 믿음의 선배들처럼, 삶의 어려운 순간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유한한 인생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체험하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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