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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0:2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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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인철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1.12.2 주일설교 |
막 10:23-27, 마 6:24
I. 들어가는 말: 상처입은 아메리칸 드림
지난 9월 11일 뉴욕 맨해튼에서 전대미문의 비행기 테러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상자의 숫자나 테러의 방식, 그리고 대형 빌딩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장면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그 목표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세계무역센터일까?
저는 이번 학기에 학부 1학년 학생들에게 "기독교와 현대사회"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이 사건이 터져서, 중간고사 시험으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빛에서 뉴욕 비행기 테러 사건을 비판적으로 평가해보라"는 문제를 내었습니다. 대학 1학년 학생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볼지, 또 이 사건을 예수의 하느님 나라와 어떻게 연결시킬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여러분도 궁금하실 것 같아, 제가 한 학생의 답안지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번 미국 테러 사건과 미국의 아프간 공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Pax Americana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현실적이고 솔직한 이름은 '미국화'이다. 미국은 세계의 기득권자이자, 현재로서는 정면 도전할 만한 세력도 없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세계의 부에 대한 극심한 편중을 불러일으켰다. 가난한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유한 나라는 더욱 부유해졌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의 '용의자'와 '피해자'를 보도록 하자. 용의자는 가난한 지역의 테러리스트이며, 피해자는 세계의 패권국이다. 사실 이번 테러의 대상이 '세계무역센터'였다는데 대해서 나는 이것이 매우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예수 시대의 '율법'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모든 측면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잔인한 세계화의 흐름이나 율법은 인정할 수 없다. 이번 테러는 이러한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수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미국인들이 과연 잘못이 없다고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과거 나치시대에 수많은 유태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주변 국가들과 독일인들이 '무고'하다고만 할 수 있는가? 중동 지역의 가난한 나라,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에 대해서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개방'만을 요구했던 미국의 정책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일반 미국 시민들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는가? 나는 이번 테러가 '모두가 잘 살아보자. 패권국이 하는대로 하면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기치 아래 미국이 불린 배는 그만큼의 가난한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뒤따랐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그들이 가장 극단적인 처방을 내린 것이라 생각한다."
학부대학 1학년 여학생이었습니다. 이 학생 이외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이와 비슷한 논조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학생들 논의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는 Pax Americana(미국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심장이고, 미국의 Pax Americana는 제 3세계 민중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세워진 것이다.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은 제 3세계 민중의 Pax Americana에 대한 저항과 거부의 표시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Pax Romana에 대한 하나의 대안 세계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Pax Americana에 대한 하나의 대안 세계일 수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3년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20만 명 이상의 평화 시위자 앞에서 미국의 꿈, American Dream에 대해 연설했습니다:
"친구들이여, 나는 오늘, 현재의 어려움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 박힌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일어나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명한 진리를 믿는다'라고 하는 신조의 진정한 의미를 따라 살게 되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킹 목사의 꿈은 모든 인간이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사는 새로운 미국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꿈은 헐리우드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꾸었던 꿈과는 다른 꿈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아메리칸 드림은 세계화의 기치 아래 세계 모든 나라를 미국 앞에 무릎꿇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제국의 꿈이요, 그 안전한 제국 안에서 최상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꿈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미국이민을 희망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박찬호와 박세리의 승리에 그토록 환호하는 것일까요?
2. 아메리칸 드림, 코리안 드림
어느 덧 아메리칸 드림은 한국에 전염된 듯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도 코리안 드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중국의 조선족과 동남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 말은 일상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꿈이 있고, 한국에 가면 우리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난 10월 초 남해안에서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국 동포 11명과 중국인 등 60명이 배를 타고 한국에 밀입국하려다가, 25명이 3평 남짓한 밀폐된 창고에서 질식사했고, 이들의 시체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6월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불법 체류 외국인은 21만 5천 여명에 이르고, 이중 6만 천 여명은 중국 동포라고 합니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찾아 한국에 온 것일까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단체의 한 홈페이지에 이런 사연이 올라왔습니다. 지난 96년 방글라데시에서 아핫산이라는 사람이 28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와 딸을 두고 한국에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왔습니다. 봉급은 40만원이 채 안되었습니다. 그것으로는 송금할 돈이 없어, 그곳을 빠져나와 안산의 한 가전업체에 월 70여 만원을 받기로 하고 불법 취직했습니다. 휴일없이 하루 12시간씩 일했습니다. 하지만 돈은 한푼도 받지 못한 채, 그 곳을 나와야 했습니다. 그 후 일자리를 얻지 못해 친구의 집을 전전하며 굶기를 밥먹듯 하다, 98년 결국 병을 얻었습니다. 불명열과 뇌막염. 3일 입원했다가 돈이 없어 퇴원하고는 안산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를 찾았는데, 병이 악화되어 재진찰한 결과 간질성 폐렴과 간 손상 진단이 나왔답니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배려했는데, 비행기를 타기도 전 병이 더욱 악화되어 위독한 상태랍니다. 의사 진단으로는 사망률 90%랍니다.
코리안 드림, 한국의 꿈은 과연 무엇일까요? 한국인들은 과연 무엇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요? 과거 제3공화국 시절 즐겨 불려졌던 노래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한국을 찾는 조선족과 동남아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한국에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갖고 한국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마도 한국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꿈꾸는 나라, 이제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일뿐만 아니라, 코리안 드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3. 코리안 드림과 기독교인
물질적인 풍요를 꿈꾸는 나라 한국, 이것이 동남아 젊은이들의 눈에 비쳐진 한국이요, 한국인들이 너나 없이 지향하는 한국이라면, 우리는 과연 이 꿈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는 과연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우리의 꿈은 무엇인가?
우리는 기독교인이려고 합니다. 그것도 올바른 기독교인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인 우리는 또한 코리안 드림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향수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가? 우리는 내심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풍요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것은 다 포기할 수 있어도,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꿈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내심 소리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4. 한 부자 젊은이의 갈등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부자가 되었지요.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인생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영원히 사는 길을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상기시켰지요. 젊은이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요. 예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곧바로 정곡을 찔렀습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가슴에 활을 맞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떠났다고 했습니다. 아마 두 번 다시 예수를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다음 말은 풍요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를 중히 여기면 다른 하나를 업신여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편으로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는 매우 듣기 거북한 말입니다. 마음의 재물을 말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물질의 재물을 말한다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최근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오늘날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복음서 안에서도 이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부자의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정신화하는 작업이 내밀히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펑크라는 예수 세미나 학자는 예수 길들이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청장년부 성경공부에 초대받았습니다. 일회적인 성경공부여서, 본문을 심사숙고하여 택했습니다. 성경공부에 참가하는 분들의 현재 삶에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예수의 비유를 골랐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포도원에 포도따는 일일 노동자를 구하는 어떤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였습니다. 주인은 모두에게 동일한 일당을 약속하고 일을 시켰지요. 일당 계산시에는 마지막 사람부터 주었는데, 모두에게 동일한 일당을 주었습니다. 당연히 새벽에 온 사람이 불만을 터뜨리며 이의를 제기했지요. 그러나 예수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자들에게 이것이 하느님 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저의 설명이 끝나고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제게 약간 흥분한 듯 말했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 아닙니까? 저도 덩달아 약간 흥분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지요: "주인의 행동이 공산주의라고 말씀하신 것이라면, 예수는 공산주의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셈이지요." 두가지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 본문이 부모 잘 만나 유아세례받은 사람이나 요행 죽기 전에 회개한 사람이나 천당가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온 지금까지의 전이해에 상처를 입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금이 높은 한국 사람보다는 임금이 낮은 흑인이나 남미 사람들을 고용하여 철저히 시간당 pay를 지불해 온 자신들의 사업방식에 불편함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지요. 그렇다면 예수의 그 비유는 성공을 거둔 것이고, 그 날의 성경공부는 의미있는 것이었다고요.
5. 하느님의 꿈
저는 얼마 전 좋은 책 한 권을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마커스 보그의 "새로 만난 하느님"이라는 책입니다. 보그는 예수 세미나에 속한 유명한 신약성서 학자입니다. 이 분은 이 책 6장의 소제목을 "하느님의 꿈"이라고 붙이고는, 부제로 "Politics of Compassion"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이 부제의 번역을 "함께 아파하는 삶의 세계를 향한 정치"라고 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잘 한 번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느님의 꿈을 해몽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보그는 여기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은 이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아픔이 없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부와 재물에 뜻을 두고, 그것을 성공과 행복의 잣대로 삼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부와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은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사람도 자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부와 재물을 얻는 수단일 뿐입니다.
부담스러운 말이지만, 예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부와 재물에서 눈을 떼어야 합니다. 사람과 자연을 만나려면 부와 재물에서 눈을 떼어야 합니다. 부와 재물로 상징화된 물질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하늘의 준엄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사람의 아픈 신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자연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무릇 하느님의 꿈을 꾸고자 하는 사람은 아메리칸 드림에서 꿈깨야 합니다. 코리안 드림에서도 꿈깨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의 실체가 보이고, 한국의 실체가 보입니다. 우리가 꿈꿔야 하는 것은 이 세상 안의 구석진 곳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는 사람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이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꿈, 하느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6. 나가는 말
얼마 전 새벽에 고등학교 때 절친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울면서 자기 동생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차마 왜 죽었는지 물을 수 없어, 문상가서 물어 보았습니다. 나이 40에 3류 대학교를 나와 이름난 증권회사 부장이 되었는 데, 출장갔다 와서 목욕 중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의사진단은 과로사였습니다. 4형제 중 가장 미남이었고,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고, 회사에서도 가장 인정받는 직원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참으로 허망했습니다.
사람이 부를 얻으면 인생이 너무 짧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부유한 청년이 그랬지요.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석유재벌 록펠러도 54세에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왔습니다. 돈은 벌었는데, 생명을 잃게 된 것이지요. 의사 진단으로 1년 정도 살 것으로 예측했답니다. 주치의는 "오래 살고 싶으면 이제부터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에 대해 노력해 보라"는 특이한 처방을 내렸답니다. 록펠러는 이 처방을 받아들여 이 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남을 위해 쓰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그는 그후 44년을 더 살아, 9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의사로부터 오래 사는 비결을 터득한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뉴욕 비행기 테러 사건 이후, "Simple Life"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필요한 만큼 벌고, 남은 만큼 나누는 단순한 생활의 기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지요. 교훈치고는 참으로 뼈아픈 교훈입니다. 도덕적인 규범을 지키며 사는 일은 그런대로 해볼 만한 것이지만, 우리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절대 쉽게 수용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누가 과연 이 문지방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믿음만이 이 골 깊은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긴 동면의 겨울 동안 하느님의 꿈을 꾸시는 새길교회의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I. 들어가는 말: 상처입은 아메리칸 드림
지난 9월 11일 뉴욕 맨해튼에서 전대미문의 비행기 테러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상자의 숫자나 테러의 방식, 그리고 대형 빌딩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장면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그 목표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세계무역센터일까?
저는 이번 학기에 학부 1학년 학생들에게 "기독교와 현대사회"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이 사건이 터져서, 중간고사 시험으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빛에서 뉴욕 비행기 테러 사건을 비판적으로 평가해보라"는 문제를 내었습니다. 대학 1학년 학생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볼지, 또 이 사건을 예수의 하느님 나라와 어떻게 연결시킬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여러분도 궁금하실 것 같아, 제가 한 학생의 답안지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번 미국 테러 사건과 미국의 아프간 공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Pax Americana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현실적이고 솔직한 이름은 '미국화'이다. 미국은 세계의 기득권자이자, 현재로서는 정면 도전할 만한 세력도 없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세계의 부에 대한 극심한 편중을 불러일으켰다. 가난한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유한 나라는 더욱 부유해졌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의 '용의자'와 '피해자'를 보도록 하자. 용의자는 가난한 지역의 테러리스트이며, 피해자는 세계의 패권국이다. 사실 이번 테러의 대상이 '세계무역센터'였다는데 대해서 나는 이것이 매우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예수 시대의 '율법'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모든 측면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잔인한 세계화의 흐름이나 율법은 인정할 수 없다. 이번 테러는 이러한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수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미국인들이 과연 잘못이 없다고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과거 나치시대에 수많은 유태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주변 국가들과 독일인들이 '무고'하다고만 할 수 있는가? 중동 지역의 가난한 나라,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에 대해서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개방'만을 요구했던 미국의 정책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일반 미국 시민들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는가? 나는 이번 테러가 '모두가 잘 살아보자. 패권국이 하는대로 하면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기치 아래 미국이 불린 배는 그만큼의 가난한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뒤따랐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그들이 가장 극단적인 처방을 내린 것이라 생각한다."
학부대학 1학년 여학생이었습니다. 이 학생 이외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이와 비슷한 논조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학생들 논의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는 Pax Americana(미국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심장이고, 미국의 Pax Americana는 제 3세계 민중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세워진 것이다.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은 제 3세계 민중의 Pax Americana에 대한 저항과 거부의 표시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Pax Romana에 대한 하나의 대안 세계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Pax Americana에 대한 하나의 대안 세계일 수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3년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20만 명 이상의 평화 시위자 앞에서 미국의 꿈, American Dream에 대해 연설했습니다:
"친구들이여, 나는 오늘, 현재의 어려움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 박힌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일어나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명한 진리를 믿는다'라고 하는 신조의 진정한 의미를 따라 살게 되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킹 목사의 꿈은 모든 인간이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사는 새로운 미국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꿈은 헐리우드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꾸었던 꿈과는 다른 꿈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아메리칸 드림은 세계화의 기치 아래 세계 모든 나라를 미국 앞에 무릎꿇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제국의 꿈이요, 그 안전한 제국 안에서 최상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꿈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미국이민을 희망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박찬호와 박세리의 승리에 그토록 환호하는 것일까요?
2. 아메리칸 드림, 코리안 드림
어느 덧 아메리칸 드림은 한국에 전염된 듯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도 코리안 드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중국의 조선족과 동남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 말은 일상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꿈이 있고, 한국에 가면 우리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난 10월 초 남해안에서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국 동포 11명과 중국인 등 60명이 배를 타고 한국에 밀입국하려다가, 25명이 3평 남짓한 밀폐된 창고에서 질식사했고, 이들의 시체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6월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불법 체류 외국인은 21만 5천 여명에 이르고, 이중 6만 천 여명은 중국 동포라고 합니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찾아 한국에 온 것일까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단체의 한 홈페이지에 이런 사연이 올라왔습니다. 지난 96년 방글라데시에서 아핫산이라는 사람이 28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와 딸을 두고 한국에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왔습니다. 봉급은 40만원이 채 안되었습니다. 그것으로는 송금할 돈이 없어, 그곳을 빠져나와 안산의 한 가전업체에 월 70여 만원을 받기로 하고 불법 취직했습니다. 휴일없이 하루 12시간씩 일했습니다. 하지만 돈은 한푼도 받지 못한 채, 그 곳을 나와야 했습니다. 그 후 일자리를 얻지 못해 친구의 집을 전전하며 굶기를 밥먹듯 하다, 98년 결국 병을 얻었습니다. 불명열과 뇌막염. 3일 입원했다가 돈이 없어 퇴원하고는 안산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를 찾았는데, 병이 악화되어 재진찰한 결과 간질성 폐렴과 간 손상 진단이 나왔답니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배려했는데, 비행기를 타기도 전 병이 더욱 악화되어 위독한 상태랍니다. 의사 진단으로는 사망률 90%랍니다.
코리안 드림, 한국의 꿈은 과연 무엇일까요? 한국인들은 과연 무엇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요? 과거 제3공화국 시절 즐겨 불려졌던 노래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한국을 찾는 조선족과 동남아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한국에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갖고 한국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마도 한국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꿈꾸는 나라, 이제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일뿐만 아니라, 코리안 드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3. 코리안 드림과 기독교인
물질적인 풍요를 꿈꾸는 나라 한국, 이것이 동남아 젊은이들의 눈에 비쳐진 한국이요, 한국인들이 너나 없이 지향하는 한국이라면, 우리는 과연 이 꿈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는 과연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우리의 꿈은 무엇인가?
우리는 기독교인이려고 합니다. 그것도 올바른 기독교인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인 우리는 또한 코리안 드림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향수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가? 우리는 내심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풍요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것은 다 포기할 수 있어도,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꿈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내심 소리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4. 한 부자 젊은이의 갈등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부자가 되었지요.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인생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영원히 사는 길을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상기시켰지요. 젊은이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요. 예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곧바로 정곡을 찔렀습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가슴에 활을 맞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떠났다고 했습니다. 아마 두 번 다시 예수를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다음 말은 풍요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를 중히 여기면 다른 하나를 업신여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편으로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는 매우 듣기 거북한 말입니다. 마음의 재물을 말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물질의 재물을 말한다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최근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오늘날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복음서 안에서도 이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부자의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정신화하는 작업이 내밀히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펑크라는 예수 세미나 학자는 예수 길들이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청장년부 성경공부에 초대받았습니다. 일회적인 성경공부여서, 본문을 심사숙고하여 택했습니다. 성경공부에 참가하는 분들의 현재 삶에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예수의 비유를 골랐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포도원에 포도따는 일일 노동자를 구하는 어떤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였습니다. 주인은 모두에게 동일한 일당을 약속하고 일을 시켰지요. 일당 계산시에는 마지막 사람부터 주었는데, 모두에게 동일한 일당을 주었습니다. 당연히 새벽에 온 사람이 불만을 터뜨리며 이의를 제기했지요. 그러나 예수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자들에게 이것이 하느님 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저의 설명이 끝나고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제게 약간 흥분한 듯 말했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 아닙니까? 저도 덩달아 약간 흥분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지요: "주인의 행동이 공산주의라고 말씀하신 것이라면, 예수는 공산주의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셈이지요." 두가지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 본문이 부모 잘 만나 유아세례받은 사람이나 요행 죽기 전에 회개한 사람이나 천당가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온 지금까지의 전이해에 상처를 입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금이 높은 한국 사람보다는 임금이 낮은 흑인이나 남미 사람들을 고용하여 철저히 시간당 pay를 지불해 온 자신들의 사업방식에 불편함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지요. 그렇다면 예수의 그 비유는 성공을 거둔 것이고, 그 날의 성경공부는 의미있는 것이었다고요.
5. 하느님의 꿈
저는 얼마 전 좋은 책 한 권을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마커스 보그의 "새로 만난 하느님"이라는 책입니다. 보그는 예수 세미나에 속한 유명한 신약성서 학자입니다. 이 분은 이 책 6장의 소제목을 "하느님의 꿈"이라고 붙이고는, 부제로 "Politics of Compassion"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이 부제의 번역을 "함께 아파하는 삶의 세계를 향한 정치"라고 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잘 한 번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느님의 꿈을 해몽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보그는 여기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은 이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아픔이 없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부와 재물에 뜻을 두고, 그것을 성공과 행복의 잣대로 삼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부와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은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사람도 자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부와 재물을 얻는 수단일 뿐입니다.
부담스러운 말이지만, 예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부와 재물에서 눈을 떼어야 합니다. 사람과 자연을 만나려면 부와 재물에서 눈을 떼어야 합니다. 부와 재물로 상징화된 물질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하늘의 준엄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사람의 아픈 신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자연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무릇 하느님의 꿈을 꾸고자 하는 사람은 아메리칸 드림에서 꿈깨야 합니다. 코리안 드림에서도 꿈깨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의 실체가 보이고, 한국의 실체가 보입니다. 우리가 꿈꿔야 하는 것은 이 세상 안의 구석진 곳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는 사람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이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꿈, 하느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6. 나가는 말
얼마 전 새벽에 고등학교 때 절친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울면서 자기 동생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차마 왜 죽었는지 물을 수 없어, 문상가서 물어 보았습니다. 나이 40에 3류 대학교를 나와 이름난 증권회사 부장이 되었는 데, 출장갔다 와서 목욕 중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의사진단은 과로사였습니다. 4형제 중 가장 미남이었고,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고, 회사에서도 가장 인정받는 직원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참으로 허망했습니다.
사람이 부를 얻으면 인생이 너무 짧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부유한 청년이 그랬지요.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석유재벌 록펠러도 54세에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왔습니다. 돈은 벌었는데, 생명을 잃게 된 것이지요. 의사 진단으로 1년 정도 살 것으로 예측했답니다. 주치의는 "오래 살고 싶으면 이제부터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에 대해 노력해 보라"는 특이한 처방을 내렸답니다. 록펠러는 이 처방을 받아들여 이 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남을 위해 쓰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그는 그후 44년을 더 살아, 9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의사로부터 오래 사는 비결을 터득한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뉴욕 비행기 테러 사건 이후, "Simple Life"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필요한 만큼 벌고, 남은 만큼 나누는 단순한 생활의 기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지요. 교훈치고는 참으로 뼈아픈 교훈입니다. 도덕적인 규범을 지키며 사는 일은 그런대로 해볼 만한 것이지만, 우리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절대 쉽게 수용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누가 과연 이 문지방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믿음만이 이 골 깊은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긴 동면의 겨울 동안 하느님의 꿈을 꾸시는 새길교회의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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