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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의 꼴찌하기: 예수의 원초적 열정

마가복음 한완상............... 조회 수 2021 추천 수 0 2008.08.18 20: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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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9:33-37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주일설교 
본문: 마가복음 9:33~37, 고린도전서 13:9~13

21세기 우리 삶이 과연 20세기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이 될까 걱정하게 됩니다. 그것은 불과 몇 년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20세기가 너무나 끔찍스러운 비극과 비참의 세기였기 때문입니다. 결단코 새로운 세기는 20세기의 반복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그간 물질적 삶은 풍요해졌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경탄할만하고, 인간의 평균수명도 크게 늘어났지만, 진정 인간의 삶의 질은 높아졌다고 할 수 없고, 인간의 부당한 고통 역시 줄어들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21세기가 되었지만 전쟁의 현실은 더욱 추악해지고 전쟁소문과 불안은 더욱 널리 번지는 듯 합니다. 행복과 평화는 그만큼 더 멀어지는 듯 합니다.

우리가 20세기를 생각하면 몇 가지 강렬한 이미지(image)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진 버섯 구름의 공포, 나치의 아우슈비츠의 참혹한 학살장면, 스탈린 치하의 강제수용소 굴락의 을씨년스러운 모습. 이 모든 영상은 한 마디로 인류역사의 진보에 대해 근원적 회의를 불러일으킵니다. 살상규모의 극대화, 그 잔인성의 극심화가 그 같은 회의를 부추기지요. 우리 민족사의 20세기를 되돌아 보아도 그 비극적 이미지는 더욱 절실하게 우리가슴에 와 닿습니다.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의 아픔, 그 후 타율적 분단의 고통, 냉전체제 유지에 따른 민족고통과 가족고통, 권위주의 통치로 인한 인권유린의 아픔 등의 쓰라린 과거가 오늘에도 숨쉬고 살아있는 듯 합니다.

한마디로 20세기에는 전쟁과 여러 가지 혁명들이 분출하다시피 했으나 그것들이 인류에게 진보를 담보해주지 못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 나치혁명, 제3세계의 쿠데타. 이 모든 것이 권력의 악순환만을 거칠게 강화시켜준 것 같습니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았고 혁명은 또 다른 유혈혁명을 낳았습니다. 과연 이 같은 악순환이 21세기에도 반복되어야 할까요?

여기서 2천년 전, 막강한 단극체제로 등장했던 팍스 로마나(로마제국) 체제하에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로마식민지 팔레스타인의 한 청년 예수의 꿈과 의지는 무엇이었으며, 그가 원래 갖고 있었던 그 열망(the original impulse of Jesus)이 갖는 대안적 공동체의 성격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깊이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의미 있고 적절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21세기와 더불어 단극지배체제로 등장한 팍스 아메리카나가 인류를 불안케 하고 있는 이 때, 예수님의 그 원초적 열망이 정말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깨뜨릴 수 있는 복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 주님 예수께서 제시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그 주요 특징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원래 품고 계셨던, 그리고 끈질기게 설파하셨던 비전은 하나님나라의 비전이었습니다. 그것의 참모습을 샅샅이 정확하게 밝혀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참모습의 일단을 밝히기 전에 왜 그것이 그토록 필요한지를 기독교라는 종교의 입장에서 우리는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합니다. 21세기는 비극의 20세기를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세계사적 관점 이외에 기독교 역사의 관점에서도 예수의 원래적 꿈을 제대로 알아야 할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박해 받던 초대 기독교가 로마의 권력에 편입되어 지배체제의 중심부로 나아가게 되면서 예수의 원래 꿈은 훼손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틴 대제의 관용령 이후, , , 가 새로운 규범으로 설정되고 강요됨으로써 ‘기독교왕국(Christendom)’은 강고하게 세워졌으나,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는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우뚝 서게 된 기독교왕국이라는 현실이 하나님지배라는 예수님의 원래 꿈을 허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스러운 모순이요,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의 이름으로 온갖 잔인하고, 위선적인 반인륜적 범죄가 저질러졌음을 상기할 때 더욱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독교 왕국의 신민으로서의 기독교 신자에서 성실한 예수따르미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21세기를 평화와 정의의 세기로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이 시점에서 예수의 원초적 추동과 열망을 깊이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충실한 예수따르미가 되려면 예수님의 그 꿈과 비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또는 하나님지배) 꿈을 이해하려면 예수 당시 지배체제의 실상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실상을 배경으로 예수님의 원초적 의지와 비전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이 좀 더 뚜렷하고 정확한 예수 이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지배체제나 팔레스타인 지배체제 모두 약자를 억압하는 계급구조에 기초했습니다. 억압적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가부장적 지배였습니다. 법체계도 대체로 특권을 옹호하였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인종우월주의와 선민사상을 중시하였고, 종교적 순결규례를 엄수해야만 했습니다. 종교적 의식인 희생제는 이 제도화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같은 당시 지배체제를 배경 삼아 보면, 예수의 하나님지배는 너무나 놀라울 만치 기존체제를 확 뒤집어 엎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로 떨어지는 새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지요. 폭력과 배타에 기초한 지배체제가 비폭력과 전적포용(all?inclusive)의 새로운 체제로 뒤바뀌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가장 힘주어 강조하신 계명,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이 되기도 하는 계명은 바로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인데, 그것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사랑보다 보이는 이웃사랑을 통한 하나님사랑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적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바른 길이었습니다. 밥상공동체를 통한 계급 타파도 바로 열린 사랑의 실천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중에 가장 잘 그의 원래 비전을 표현해주는 것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첫째가 되려면, 즐거운 꼴찌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첫째가 되어도 계속 꼴찌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위계질서가 엄연히 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바로 꼴찌되는 선택, 그것도 즐겁게 꼴찌되는 결단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째의 꼴찌되기와 꼴찌하기가 갖는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그 본질적 의미와 그 실천적, 윤리적 의미를 함께 깨달아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예수의 세상오심 그 자체가 첫째의 꼴찌되기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성육신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어 저 높고 높은 곳, 저 거룩 거룩한 곳에 계신다고 믿었던 절대자 하나님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肉化)하신 사건입니다. 바로 이 같은 성육신 사건은 절대적 외재신(外在神)이 스스로 그 절대권력을 비워서 사람 속으로, 역사 속으로, 세상 속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하나님의 참모습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당신의 아빠 하나님과 같이 자기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고, 십자가의 고행길로 찾아오셨으며 가장 비참하고, 가장 비천한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장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가장 비천한 인간들의 그 억울한 아픔을 당신자신의 아픔으로 동고(同苦)하시는 사랑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성육신은 하나님사랑의 자기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사랑이 자기비움일터인데, 가장 모범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요, 그 하나님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서 구체화된 것입니다. 성육신은 그러기에 자기비움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황제의 신 또는 대제사장의 하나님은 성육신을 거부합니다. 절대적인 외재신(外在神)으로 인간 위에서 인간을 통치하고 심판하지요. 그러기에 그들 신도 성육신되어야 합니다. 육화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육화는 자기비움의 실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가 꼴찌가 되는 실천의 깊은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 예수님 당시의 로마황제가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그것을 자기비움으로 실천했다면 그들이 줄줄이 암살당하는 비극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체제의 부패와 멸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사두게파들도 성육신의 뜻을 깨달아 실천했다면, 예수님의 성전 숙청사건을 오히려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되는 사건은 닫힌 구조 속에서 첫째로 영원히 남아있고 싶어하며, 무리해서라고 그 자리를 반드시 지켜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치욕과 곤욕의 사건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또한 치졸하고 우매한 선택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의 꼴찌되기와 꼴찌하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고난과 고뇌, 그의 고통과 죽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즐거운 꼴찌하기가 갖는 윤리적 뜻을 깨닫고 또한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겸손의 미덕을 인식하는 일, 그것은 인내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랑의 덕목에서 오래 참는 것과 온유함을 강조했습니다. 오래 참을 수 있는 힘은 소망 없이는 어렵습니다. 소망에 불타는 사람은 그것이 이뤄질 때까지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가치 있는 희망이 없을 때는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지요. 값진 소망은 실제로 강인한 믿음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소망)의 실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오래 참음과 값진 소망과 강인한 믿음은 한 묶음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비움의 아픔, 곧 사랑의 아픔은 忍, 信, 望을 모두 껴안게 되지요.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바울이 선언한 것입니다.

첫째의 꼴찌하기, 곧 예수의 사랑은 또 깊은 인식론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겸손과 인내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연관되기도 합니다만, 내가 지금 알고 깨닫고 있는 것은 결코 전체적인 진리 파악이거나, 완전한 진실이해가 아니라는 겸손한 인식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부분적인 것일 뿐이요, 그것도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 희미한 것이라는 인식론적 겸허함, 그것이 꼴찌됨의 특징입니다. 예수 당시 거울은 실물을 그대로 뚜렷하게 비춰내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거울처럼 그렇게 또렷하게 실물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희미하게만 반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인식의 불완전함, 희미함을 거울에 비유하여 솔직히 인식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따르미야말로 바로 즐거운 꼴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고, 나아가 그들은 자기인식의 절대화를 절대를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확실성의 문화(culture of certitude)가 갖는 억압적 위험성을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의 힘은 결코 사랑의 힘, 첫째가 즐겁게 꼴찌가 되는 힘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인들은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지난 천칠백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제도 기독교가 저지른 온갖 끔찍스러운 죄악은 바로 이 같은 확실성의 문화에서 배태된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십자군의 반인륜적 죄악도 바로 그러한 확신문화에서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4세기 초까지 로마의 지배권력 밑에서 박해 받는 종교였습니다. 가장 비참한 꼴찌의 자리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될 만큼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으나, 그 고난을 즐겁게 견딜 수 있었습니다. 로마체제의 첫째들은 이 같은 초대교회 신자들인 꼴찌의 의연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탄절 때마다 우리가 보게 되는 명화에서도 네로황제는 죽임을 당하면서 절제 있게, 품위 있게, 찬송을 부르며 죽어가는 초대 예수따르미 꼴찌들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분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 꼴찌들이 4세기 초 지배종교가 되면서 첫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기독교는 첫째의 종교, 지배종교가 되었습니다. 하나의 교회, 곧 보편교회(Catholic Church)는 보편적으로, 한결같이 이견자들을 억압하고 통제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의 예수, 곧 교리로 정착된 예수상 만을 숭상하기로 작정하였고, 이 예수상은 첫째들의 우상으로 우러러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갈릴리의 예수, 실물 예수, 역사의 예수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갈릴리의 예수는 기독교왕국 안에서 사라지거나 왕따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고 또 부끄럽게 하는 것은 4세기 초에 꼴찌에서 첫째가 된 보편교회가 꼴찌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탄압을 보편적으로 끈질기게 실행해왔다는 비극의 사실입니다. 결국 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사랑의 예수를 핍박해왔다 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예수님의 선포가 기쁜 소식이 되는 까닭은 그것이 꼴찌에게 첫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 그 희망이 현실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이 되는 까닭은 단순히 자리 옮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꼴찌자리가 첫째자리로 바뀐다는데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복음이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악순환의 고리를 영원히 과감하게 깨뜨린다는 소망과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어, 그 전의 첫째들이 했던 나쁜 지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의 첫째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게 스스로 즐겁게 꼴찌가 되려는 결단을 내린다는 것, 그래서 악의 지배가 다시 계속되지 않게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지난 천칠백 년의 기독교 역사는 대체로 바로 이 같은 복음의 부재를 의미하기에 지금도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요.
예수님께서 너희들 중 첫째가 되기 원한다면 남을 섬기는 종, 곧 꼴찌가 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세상의 억압적 지배를 종식시키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마치 포악한 시어머니 밑에서 지독하게 시집살이 했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자기 시어머니의 잘못을 반복하듯, 인류역사는 혁명, 반혁명을 거쳐 첫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었으나, 첫째들의 권력횡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악의 권력의 종식, 즉 권력악순환의 종식을 위해서, 적어도 예수따르미들은 첫째가 되면 즐거이 꼴찌가 될 줄 알아야 한다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권면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 주셨고 수모, 비난, 채찍, 배반, 죽음을 의연하게 몸소 받아들였습니다. 부당한 죽음의 권력에 즐거이 죽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가장 비참한 꼴찌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악의 권력, 사망의 지배를 종식시키려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겨내는 기쁜 소식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 위해, 죽음의 권세 앞에서 스스로 죽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적어도 우리 스스로를 예수따르미로 주장한다면, 악의 권세를 악으로 이기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칼로 칼을 이기려는 유혹, 혁명을 또 다른 유혈 혁명으로 극복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유혹은 악순환을 강화시켜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들이 이 유혹에 빠져 역사를 계속 악순환의 암흑 속으로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십자군의 십자가가 결코 아닙니다. 십자군의 십자가는 악순환의 고리를 더욱 강화시켜 줍니다. 그러기에 11세기의 십자군으로 오늘까지 기독교 문명과 무슬림 문명은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차 책임은 기독교에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악순환의 고리를 영원히 깨뜨리는 사랑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21세기 초에 21세기의 로마제국 같은 나라가 지난날 보편적 기독교가 저질렀던 잘못을 반복할 것 같아 우리가 더욱 불안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에 11세기 때 혼이 난 예수님의 영은 21세기 초에도 전전긍긍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지난해 말에 중증 장애인들이 사는 우성원(又聖院)을 방문했습니다. 적십자사 자원봉사대원들과 함께 갔었는데, 그 때 원장님이 이렇게 증언하셨습니다. 원생들은 대체로 세상에서 따돌림 당한 장애우들인데 모두 인생 꼴찌들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체육대회 때 달리기 시합을 시켜보면, 흥미로운 일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빨리 앞으로 달려가던 장애인이 갑자기 뒤를 돌아 뒤에 쳐져 있는 친구를 보고 더 달리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함께 같이 뛰려고 말입니다. 혼자 일등하지 않고 함께 일등하려고 말입니다. 그야말로 이 꼴찌들은 다른 꼴찌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고, 함께 첫째 되는 기쁨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동고동락(同苦同樂)이 아니겠습니까. 이 꼴찌들은 함께 아파하며 함께 달리는 동고주(同苦走)들이요, 이들이 진짜 예수따르미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로 달려가신 것은 바로 동고주(同苦走)하신 동고주(同苦主)이시기 때문이지요. 이 같은 모습은 기도하는 천박한 , 특히 기독교 출세문화에 젖어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는 광복 60주년이어서 기쁨과 영광의 회갑이기도 하지만, 분단 60주년 곧 고통의 회갑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평화와 환희의 희년 회갑을 향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전쟁과 닫힌 지배가 없는 새로운 세기를 열어가기 위해 우리 예수따르미들은 예수님의 운동에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세계역사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를 악순환 고리의 제거를 통해 새롭게 써야 합니다. 비극의 20세기 민족사를 평화와 정의의 민족사로 바꿔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새길공동체는 스스로 꼴찌되기를 자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온라인(on-line)에서 남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기 위해 자기를 비우는 메시지를 계속 더 많이 생산해내야 합니다. Music Cafe는 Music Oasis로 거듭나서 새로운 활기를 더욱 널리 전파시켜 나가야 합니다. 격려, 위로, 감동의 샘물이 Music 오아시스와 다른 온라인 마당을 통해 생수처럼 흘러내려야 합니다. 황무지를 장미꽃밭으로, 마른 땅을 터져 나오는 샘물마당으로 더욱 더 변화시켜나가야 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한 분위기가 온라인상에서 사철 감도는 곳이 바로 새길공동체요, 오프라인에서는 더욱 더 은혜롭게 열린 공동체가 펼쳐지는 곳이 다름아닌 바로 새길공동체라는 고백적 탄성이 터져나와야 합니다. 확신의 교만은 인식론적 겸손함으로 대체되는 감동이 항상 솟아 나오는 새길공동체,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곳에서는 누구나 첫째가 즐거운 꼴찌가 되고, 꼴찌가 겸손한 첫째가 되는 기적 아닌 기적이 항상 현실로 분출되야 합니다. 2005년 새길은 바로 이 같은 사랑의 새길로 성큼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길에 우리 주님 예수님은 동고주로 저희들에게 즐거이 찾아오시어 영원한 동락의 길벗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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