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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원의 예수, 새길의 예수, 그리고 공동체

마가복음 홍상수 형제............... 조회 수 1865 추천 수 0 2009.10.31 14: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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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46~52 
설교자 : 홍상수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9.9.20 설교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기도원의 예수, 새길의 예수, 그리고 공동체
[마가 10 : 46~52, 요한 3 : 1~10]
홍상수 형제

먼저 이 말씀증거는 상당히 공정하지 않은 전함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수적인 신앙에서는 가장 훌륭한 점을 그리고 새길의 신앙에서는 그 그림자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의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록 조금 불편할지라도, 진정한 우리의 성숙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저 자신과 삶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의 기질은 MBTI검사를 했을 때 INTP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지적인 것을 상당히 즐거워하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대학전공을 수학으로 선택했고 여전히 수학을 좋아하고 그 선택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요. 사춘기가 되면서는 조금씩 자아에 눈을 뜨게 되고 동시에 주위 사람들이나 사회의 모순을 조금씩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러한 모순을 부모님에게 많이 느꼈는데요. 그렇게 느낀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의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당시 제가 생각하기에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만 말씀드리면 부모님의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집에서는 자주 싸우고 교회에서는 나름 경건하게 본인들의 모습을 드러내었는데요. 점점 그러한 모순이 저에게 여러 고민과 답답함을 가져다주었고, ‘부모님이 믿는 기독교는 참으로 형편없는 답답한 종교구나 그리고 동시에 위선적인 종교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저는 이런 고민을 털어 놓을 수도 없었고 말하지도 못한 채 생각은 점점 한 쪽으로 치우쳐 갔습니다. 급기야는 속마음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내가 20대가 되면 이런 위선적인 기독교를 떠나고, 있지도 않은 하나님은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교회도 다니지 말아야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22살이 되었는데요. 갑자기 22살을 언급한 이유는 그 때 제 삶에 고난 혹은 삶의 고통이 왔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긴 한데, 그러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저의 간증이 될 거 같아 조금 막연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정 저의 삶 속에 아무것도 의지 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이었고 주위의 어떤 이의 말도 위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란 존재를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라도 믿어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저에게 있는지도 믿겨지지도 않았고 만약 그가 살아계신다면 그래도 한창 20대를 누릴 만한 시기에 이런 힘겨움을 주셨는지 원망했지요. 사실 지금 생각해도 22살이면 아직은 좀 어린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아는 형과 누나의 손에 이끌리어―거의 반강제적이라고 해야 할 까요?―기도원이라는 곳을 난생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습니다. 전형적인,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도원인데요. 처음 그곳 예배 분위기를 보고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글쎄요. 박수치고 소리 내어 기도하는 모습이 TV에서 보던 이단 사이비, 광신도 집단 같았습니다. 반지성적이고 인생의 갈 때까지 간 막장 인생의 모임이랄까요? 그 당시 느낌을 떠올리면 정말 두드러기가 날거 같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너무나 이질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기도원에 있다는 자체가 ‘내 인생이 왜 이러나?’ 생각하며 서글퍼 했지요. 그래도 기도원 예배는 꾸준히 참여했고, 억지로 의지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진정 나로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게 해달라고,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6개월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 마디로 쉽게 표현했지만 생각과 마음의 극심한 갈등이 그 6개월간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대학에서 IVF라는 기독학생회 활동도 하고 나름대로 신앙과 관련된 여러 서적도 즐겨 읽으며 기독교와 관련한 여러 모양을 즐기게 되었는데요. 그러면서 서서히 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쉽게 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서서히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비민주적인 교회의 운영, 성경보다는 교회문화에 치중,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는 목사님의 설교, 특별히 새길에 오기 직전의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지닌 물질적 탐욕 등등. 이러한 것들이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럽기에 저는 교회를 알아보았고 드디어 새길에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새길의 여러 장점이 있지만, 지난 2년 남짓의 기간동안 저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는 배우는 즐거움이었습니다.(물론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적인 즐거움이었습니다. 다양하고 지성적인 설교말씀, 각종 포럼, 많은 지적인 교우 분들, 열려있는 교우 분들. 참으로 저에게 소중하고 이전교회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삶을 간단히 소개해 드렸는데요. 특별히 신앙적인 면에서 말씀드린 이유는 비록 제가 보수교회의 잘못된 문화로 힘들어서 새길에 오긴 했지만, 여전히 기도원의 보수적이고 감성적인 신앙과 동시에 새길의 열려있는 지성적인 신앙을 모두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의 신앙적 배경으로 인해서 저는 경계에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는데요. 보수교회에서는 비교적 진보적인 신앙을 지닌 자로 비춰지고 우리 새길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신앙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청년회에서 이런 느낌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면을 좋게 해석한다면 ‘양쪽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볼 수 도 있지 않겠냐?’라는 소박한 기대를 해보려고 합니다.

자, 그러면 마가복음 10:46-52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본문은 보통 기도원이나 부흥회 등에서 가장 선호하는 치유함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소경이자 거지인 바디매오가 주위의 거침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부르짖고 결국 예수와 만나게 되며 자신의 삶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였던 눈을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놀라운 기적에도 불구하고 기도원이나 부흥회 등에서 이 말씀 등을 너무나 자주 사용해서 그런지 거부감도 좀 들고 아쉽게도 이제는 별다른 감흥도 없습니다. 그냥 바디매오라는 이름정도나 기억되며, 심지어는 지적인 회의마저 들기도 합니다. ‘과연 예수께서 기적을 행한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가?’

최근에 여전히 존재하는 저의 삶의 무게감으로 인해서 지난주에 순복음계열의 강남금식기도원이라는 곳을 다녀왔는데요. 그곳에 가서 기도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해서 간 것인데요. 기도원 문화를 어느 정도 경험한 저이지만 처음 그 곳에 갔을 때 여전히 어색하고 좀 나랑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도 좀 불편하고요. 어쨌든 거기서 저도 나름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요. 밤에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외적으로는 저들이 맹목적이고 무모해 보일지라도, 저들은 마음 중심으로, 온 힘을 다하여 나에게 매달리고 나만 바라보고 있다.’ 그날 저 자신을 돌이켜 봤습니다. 어느새 전심으로-with all my heart-기도했던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하고 지적인 회의만 커진 저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디매오의 신앙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의 마음중심으로 부르짖는 모습을, 예수를 향한 그의 갈망을 저도 다시 한 번 배우고 싶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이 바디매오의 신앙이 한국의 보수적 신앙의 여러 면 중에서 가장 위대한 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감정에 치우치고 기복적인 신앙으로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비참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전 존재의 무게중심이 실려 있습니다. 한국 보수교회가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이유로 저는 이 뜨거운 감성의 신앙에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어쩌면 저를 포함해서 우리 새길의 신앙에 이러한 면이 조금 부족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1-10로 옮겨가겠습니다. 이 본문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자 지식인 그리고 산헤드린 회원인 권력자였습니다. 그런 사회적 위치 때문인지 ‘밤에’ 예수께 찾아와서 여러 가지 질문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그 나름대로는 상당히 진지하고 합리적으로 질문하는 것 같기는 한데, 지금 이 본문을 보는 독자들이 보기에는 약간은 엉뚱한 거 같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4절) 특별히 10절에서 보이는 예수의 반응은 조금은 냉소적이기도 합니다.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는 이 분야의 정통한 지식인 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것을 모를 수 있단 말이냐?’

저는 니고데모를 조금 비판적으로 이끌고 가긴 했지만 그를 전적으로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비록 그가 호기심에서 예수를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의 위치에 걸맞지 않게 엉뚱한 대답과 질문으로 일관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진리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인 니고데모 역시 소경 바디매오와는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예수를 지식과 들리는 소문을 넘어서 직접 대면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나 세워 보려합니다. ‘만약 니고데모가 남들의 이목을 피해서 밤중이라도 예수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말입니다. 본문 4절이나 9절의 반응을 살펴볼 때, 그는 당대의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수께서 전하는 말씀을 거의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이 지닌 지식에 자족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의 성격을 보건데 삶의 여러 의문에 정직한 질문도 하고 호기심도 드러내고 철학적 사유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인생의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미로 같으며 때로는 불가해하기에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런 질문을 포기하고 사회적 위치에 안주하며 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만약이라는 가정이 조금 불편할지 모르지만, 예수를 만나지 못한 만약의 니고데모가 동시에 저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오릅니다. 아니면 바디매오처럼 예수를 만났지만 어느새 저는 니고데모같이 변했고 니고데모의 그림자를 지니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삶의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사는 게 아니라, 내가 공부하고 나름 자부심 있어 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하나님으로 대체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에 마음을 기울이기 보다는 삶을 내가 가진 생각으로 쉽게 재단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럼으로써 저의 삶은 지난 1년간 건조해지고 왠지 모르게 머리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은 분명히 알겠는데, 삶의 현장 속에서 그가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분명 삶의 현장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분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 새길의 모든 분들과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몇몇 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머리로는 무언가 채워지는 것 같은데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종 신학강연이나 설교가 지적으로는 상당히 즐겁기는 하지만 때때로 권태롭고 심지어는 허무하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저와 이 몇몇 분들의 이야기가 새길을 대표한다고는 볼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새길이 공동체를 지향하는 이상, 비록 작은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불편한 고백이 새길 신앙에 드리운 희미한 그림자는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새길의 한 교우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그래도 새길 교회와 같이 지성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라고 말입니다. 저 역시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교회가 반지성적 모습을 너무나 강하게 보이기에, 우리 새길 교회와 같이 지성적인 교회가 그 대안적인 모델과 균형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새길 교우 분들께 초점을 옮기고 싶습니다. 우리 새길의 성도들 각자는 지?정?의를 지닌 인격체이기에, 더군다나 지성적인 것을 기질적으로 좋아하는 분들이 많기에, 실제 교회활동에 있어서는 균형이 필요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전체는 지성적인 신앙을 지향할 수 있겠지만, 실제 교회사역은 감성의 신앙과 지성의 신앙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인물을 통해서 말씀드리자면, 바디매오의 신앙과 니고데모의 신앙이 통합되는 방향으로 가야 우리 새길의 현실적인 어려움이 극복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감히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보려고 합니다.

새길 교회의 설교자를 외부에서 초청하실 때, 합리성을 유지하면서도 앞서 언급한 뜨거운 감성의 신앙을 존중하는 분들을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부르시는 것은 어떤지 제안해봅니다. 심지어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과 같은 분들도 초청할 수 있다면, 초청해서 우리 새길이 그의 설교 말씀을 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쉽게 기복신앙의 대부라고 판단하지 말고 왜 그의 신학이 여전히 한국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지에 대해 직접 보고 듣고 깊이 고민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너무 쉽게 그런 분들을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새길이 진정 열린 신학을 견지한다면, 기독교 안에서 흐르는 다른 측면도 기꺼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새길 교회는 한국교회에서 상당히 독특한―unique―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조금 고립되어 있는 것도 같습니다. WCC총회가 몇 년 후에 한국에서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장 큰 화두가 한국교회의 하나 됨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 새길이 우리 안에서의 연합과 일치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와의 연합과 일치에 지금보다 더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더욱 설교자 외부초청에 대한 제안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보수적이라 여겨지는 교회 지도자분들이 우리 새길의 모습을 보고 배우며 동시에 우리도 그들의 모습을 통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다시 저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새길에 온지 횟수로는 3년, 만으로는 2년이 넘었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청년회 총무로서, 거의 매주 교회에 나와서 직접적으로는 청년회 일을 하고 때때로 교회일도 자원하여 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우리 청년회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즐거웠고 반갑고 동시에 우리 친구들과 여러 신학적인,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토론할 때는 지적인 즐거움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는 것도 놀러가는 것도 열심히 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청년친구들도 조금씩 계속 들어와서 얼마 전 전교인 수련회에서는 청년들이 차지하는 인원비중이 이전보다 더 컸고 그날 아주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내심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요. 나름 일이나 관계에서 또 놀이에서 열심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저의 마음 중심에는 허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외로움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지만 안개와 같이 저의 마음에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만약 안과 밖이 있다면, 밖의 마음은 즐거운데 안의 마음은 허했습니다. 주일날 새길에 오고 청년회 활동을 할 때 그 마음의 격차는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단지 나의 내면의 그림자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원인도 있을 수 있는가? 고민을 했는데요. 우연히 M. 스캇 펙―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개인적으로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 하나입니다.―이 쓴 ‘평화 만들기’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주된 내용 중 하나는 진정한 공동체란 어떠한 곳이고, 그러한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책의 자세한 얘기는 시간상 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제 나름대로 내렸는데요. 저의 과거 경험과 앞서 언급한 책을 근거해 볼 때 우리 새길 청년회는 아직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청년 개인의 삶의 중심을 청년회 모임에서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동시에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며 함께 기도하는 장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 너’가 아닌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이며 심지어는 제3의 사회적 이슈만을 소재로 할 때가 대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주 동안 그가 혹은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고민은 무엇이고 슬픔과 기쁨은 무엇인지 너무나 자주 봤지만 좀처럼 알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청년회의 모습이 우리 새길의 축소판은 혹시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매주일 등나무 카페에서 미소를 띠고 반갑게 인사는 하지만 새길 교우 분들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얼굴과 성함, 직업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긴 하지만 그 이상 그 분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느낌이 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면, 혹시 의외로 여러분들이 공감을 하신다면 우리 새길을 위해서 감히 또 다른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만들기 모임’ 혹은 ‘공동체 장려모임’ 등과 같은 이름의 소모임―빛대화 같은 모임처럼 말입니다.―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것이 만들어 진다면, 처음에는 공동체와 관련된 책을 나누고 그리고 나서는 공동체를 직접 만드는 훈련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1주 동안 아니면 지난 인생동안 살아온 과정을 나누고, 서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바디매오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러한 소모임을 제안한 또 다른 이유는 저 자신부터 우리 새길에 와서 마음의 쉼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힘을 얻고 싶습니다. 동시에 그러한 모임 속에서 함께 뜨거운 기도를 나누고 싶습니다.

자 이제 결론을 맺으려 합니다. 어쩌면 저의 섣부른 판단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그리고 22년 새길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지난 2년간 저의 느낌을 지나치게 일반화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새길이 지성적인 신앙뿐만 아니라 바디매오와 같이 뜨거운 감성의 신앙, 더 나아가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을 전하는 장이 되길 원합니다. 벌들이 향기를 내뿜는 꽃을 찾아오듯이, 사랑에 굶주린 이들이 사랑의 꽃향기를 맡기 위해 우리 새길에 와서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되길 진정으로 소망합니다. 이러한 소망이 저로 하여금 이 글을 작성케 했는지 저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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