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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4:3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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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738 |
2006. 7.9.
잠잠하라!
오늘 본문은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하루 종일 군중들과 지내느라 피곤한 탓인지 쉬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배들도 여러 척 따라왔다고 합니다. 극성스러운 사람들이겠지요. 요즘 스타들의 팬들 중에서도 극성파들은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다른 배들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성서 기자는 오직 예수님이 타고 계신 배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습니다. 폭 12km, 길이 21km 정도의 그 호수는 지형적으로 돌풍이 자주 분다고 합니다. 때마침 돌풍이 불어 닥친 것 같습니다. 37절은 이 상황을 아주 절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 어부들이 많았지만 한밤중에 돌풍이 일고 물이 배 가득 차게 될 경우에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허둥대면서 이 상황을 벗어나보려고 애를 썼을 겁니다. 우선 물을 퍼내야겠지요. 돛이 있는 배라면 돛을 끌어내려야 하고, 노 젓는 배라면 파도에 배가 넘어가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물이 잠기고 있는 배를 버리고 각자 헤엄쳐서 육지로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배를 버리면 큰일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장면과 전혀 다른 장면이 똑같은 그 배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38절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뱃고물은 아랫부분에 비해서 약간 높은 쪽이니까 물이 아직 올라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앞서 군중들과 보낸 일들로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으로서는 잠에서 깰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주무시고 있었다는 보도는 예수님의 피곤한 상태를 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내면세계를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적인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당황하는 제자들과 태평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겠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38절) 제자들의 하소연은 당연합니다. 지금 상황이 아주 위급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 몰라라 하고 잠에 취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된 원인을 따지자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신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왔지만 제자들은 난파 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어디 이번 경우만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내도록 제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건 앞에서 그들이 겪었을 정신적 혼란은 거의 공황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그 뒤로도 그런 상황이 쉽게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는가, 하는 호소는 이 순간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성서 기자는 이제 이 이야기의 주체를 예수님에게로 옮깁니다. 제자들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이 깬 예수님은 일단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항해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고요하고 잠잠해져라!”(39절) 예수님은 돌풍이 잠잠해지도록 기도하신 게 아니라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명령은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칠 때나 장애인을 고칠 때 내린 것과 똑같습니다. 막 1:21-28절에는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오거라!” 여기서 입을 다물라는 명령과 오늘 본문에서 잠잠해지라는 명령은 똑같습니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병이나 자연의 폭력적인 힘이 모두 악한 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연현상을 향해서 흡사 어떤 인격적인 실체를 향해서 말씀하듯이 “잠잠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고 합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믿음의 분량이나 형태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이런 성서의 설명 앞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당혹스럽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이 도술을 부리는 손오공 쯤 된다는 말인가요?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단순한 믿음은 귀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걸 믿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믿어질 만한 것을 믿는 것이지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것을 무조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내용들은 복음서 안에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겠지요. 과연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지만 성서 기자들이 그렇게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건가요? 우리 이야기의 흐름 상 설교가 끝나는 부분에서 이에 대한 대답이 나올 테니까 그때까지 조금 기다립시다.
돌풍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두 가지 질문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입니다. 겁과 믿음은 대립적인 개념입니다. 겁이 많은 사람은 아직 믿음이 없는 거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질문, 또는 이런 책망은 타당한 말씀인가요? 당장 죽을 것 같은데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법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제자들의 행동을 놓고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는 예수님의 책망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러분, 제자들이 돌풍과 파도와 난파 직전의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걸 느끼지 못하는 상태는 광신일 뿐이지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여전히 몰랐습니다. 어쩌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두려운 사건을 두려워했다는 사실보다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이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책망 받은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어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체가 관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간혹 내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의심이 생길 때가 있을 겁니다. 믿음이라는 건 그 무엇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며 활동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확증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믿음을 자신의 심리적 확신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믿어진다고 말합니다. 그가 일으키신 모든 기적이 그대로 믿어진다고 말합니다. 믿어지지 않을 때는 “믿씁니다!” 하고 자기 암시에 빠지기도 합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몇 시간 씩 똑같은 찬송을 부르면서 열광적인 종교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그런 믿음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확신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이비 이단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통일교 신자들도 문선명 씨를 재림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주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믿고 싶어지며, 그런 방식으로 확신을 얻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교 믿음은 우리 내면의 심리적 작용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심리현상은 속임수입니다. 잠시 자기를 망각할 정도로 확신이 들어오겠지만 그런 쪽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의 판단력은 더욱 흐려집니다.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해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일한 것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고, 그 신뢰에 근거해서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맡기고 삽니다.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곧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나 지금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믿음이나 결국은 똑같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자는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가능한 것이지만 후자는 그것을 전제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는 누군가, 하는 질문과 그것을 이해하지 않은 채 우리에게 바른 신앙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바로 그것입니다. 왜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책망입니다. 왜 아직까지도 나를 모르는가 하는 책망 말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돌풍과 파도의 상황에서 그렇게 당황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두려운 상황이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그 자리에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사건이 일단락되고 예수님에게 따끔한 책망을 들은 다음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41절) 이제야 제자들은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마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군가?” 예수가 누군가? 그의 정체는 무언가?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종말이 무엇인지 하는 것도 역시 이 질문 앞에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계속 붙들고 있나요? 아니면 그는 늘 그렇게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물론 교회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되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중심에 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큰 착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목표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할 뿐이지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자들은 뒤늦게 중심 주제를 붙들었습니다.
앞에서 저는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잠잠하게 만드신 예수님의 이런 명령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을 뒤로 돌렸습니다. 성서 기자의 관심은 예수님이 자연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만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는 곧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 두 사실을 구분하지 않으면 우리는 광신자가 되든지 불가지론자가 됩니다. 이걸 구분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만날 수 있습니다. 성서 기자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성서기자는 이렇게 수군거리는 제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의 정체 앞에서 놀라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또 다른 두려움을 이미 앞에서 묘사했습니다. 제자들이 바람과 파도를 보고 겁을 먹었다고 말입니다. 똑같은 사람에게서 일어난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의 두려움을 성서기자는 이 이야기에 숨겨놓았습니다. 하나는 파도를 본 두려움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제압당하는 것을 본 두려움입니다. 전자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공포지만 후자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외경입니다. 전자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한 현실에 의해서 일어나는 두려움이지만 후자는 존재와 생명의 비밀 앞에서 경험하는 충격이고 놀라움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돌풍과 파도를 두려워합니다. 그건 인간이면 어쩔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사건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에게서 일어난 사랑, 평화,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충격이며 놀라움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그런 거룩한 두려움에 근거해서 우리는 그 이외의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잠잠하라!
오늘 본문은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하루 종일 군중들과 지내느라 피곤한 탓인지 쉬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배들도 여러 척 따라왔다고 합니다. 극성스러운 사람들이겠지요. 요즘 스타들의 팬들 중에서도 극성파들은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다른 배들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성서 기자는 오직 예수님이 타고 계신 배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습니다. 폭 12km, 길이 21km 정도의 그 호수는 지형적으로 돌풍이 자주 분다고 합니다. 때마침 돌풍이 불어 닥친 것 같습니다. 37절은 이 상황을 아주 절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 어부들이 많았지만 한밤중에 돌풍이 일고 물이 배 가득 차게 될 경우에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허둥대면서 이 상황을 벗어나보려고 애를 썼을 겁니다. 우선 물을 퍼내야겠지요. 돛이 있는 배라면 돛을 끌어내려야 하고, 노 젓는 배라면 파도에 배가 넘어가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물이 잠기고 있는 배를 버리고 각자 헤엄쳐서 육지로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배를 버리면 큰일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장면과 전혀 다른 장면이 똑같은 그 배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38절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뱃고물은 아랫부분에 비해서 약간 높은 쪽이니까 물이 아직 올라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앞서 군중들과 보낸 일들로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으로서는 잠에서 깰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주무시고 있었다는 보도는 예수님의 피곤한 상태를 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내면세계를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적인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당황하는 제자들과 태평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겠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38절) 제자들의 하소연은 당연합니다. 지금 상황이 아주 위급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 몰라라 하고 잠에 취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된 원인을 따지자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신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왔지만 제자들은 난파 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어디 이번 경우만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내도록 제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건 앞에서 그들이 겪었을 정신적 혼란은 거의 공황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그 뒤로도 그런 상황이 쉽게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는가, 하는 호소는 이 순간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성서 기자는 이제 이 이야기의 주체를 예수님에게로 옮깁니다. 제자들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이 깬 예수님은 일단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항해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고요하고 잠잠해져라!”(39절) 예수님은 돌풍이 잠잠해지도록 기도하신 게 아니라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명령은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칠 때나 장애인을 고칠 때 내린 것과 똑같습니다. 막 1:21-28절에는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오거라!” 여기서 입을 다물라는 명령과 오늘 본문에서 잠잠해지라는 명령은 똑같습니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병이나 자연의 폭력적인 힘이 모두 악한 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연현상을 향해서 흡사 어떤 인격적인 실체를 향해서 말씀하듯이 “잠잠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고 합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믿음의 분량이나 형태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이런 성서의 설명 앞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당혹스럽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이 도술을 부리는 손오공 쯤 된다는 말인가요?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단순한 믿음은 귀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걸 믿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믿어질 만한 것을 믿는 것이지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것을 무조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내용들은 복음서 안에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겠지요. 과연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지만 성서 기자들이 그렇게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건가요? 우리 이야기의 흐름 상 설교가 끝나는 부분에서 이에 대한 대답이 나올 테니까 그때까지 조금 기다립시다.
돌풍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두 가지 질문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입니다. 겁과 믿음은 대립적인 개념입니다. 겁이 많은 사람은 아직 믿음이 없는 거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질문, 또는 이런 책망은 타당한 말씀인가요? 당장 죽을 것 같은데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법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제자들의 행동을 놓고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는 예수님의 책망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러분, 제자들이 돌풍과 파도와 난파 직전의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걸 느끼지 못하는 상태는 광신일 뿐이지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여전히 몰랐습니다. 어쩌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두려운 사건을 두려워했다는 사실보다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이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책망 받은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어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체가 관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간혹 내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의심이 생길 때가 있을 겁니다. 믿음이라는 건 그 무엇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며 활동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확증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믿음을 자신의 심리적 확신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믿어진다고 말합니다. 그가 일으키신 모든 기적이 그대로 믿어진다고 말합니다. 믿어지지 않을 때는 “믿씁니다!” 하고 자기 암시에 빠지기도 합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몇 시간 씩 똑같은 찬송을 부르면서 열광적인 종교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그런 믿음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확신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이비 이단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통일교 신자들도 문선명 씨를 재림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주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믿고 싶어지며, 그런 방식으로 확신을 얻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교 믿음은 우리 내면의 심리적 작용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심리현상은 속임수입니다. 잠시 자기를 망각할 정도로 확신이 들어오겠지만 그런 쪽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의 판단력은 더욱 흐려집니다.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해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일한 것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고, 그 신뢰에 근거해서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맡기고 삽니다.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곧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나 지금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믿음이나 결국은 똑같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자는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가능한 것이지만 후자는 그것을 전제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는 누군가, 하는 질문과 그것을 이해하지 않은 채 우리에게 바른 신앙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바로 그것입니다. 왜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책망입니다. 왜 아직까지도 나를 모르는가 하는 책망 말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돌풍과 파도의 상황에서 그렇게 당황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두려운 상황이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그 자리에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사건이 일단락되고 예수님에게 따끔한 책망을 들은 다음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41절) 이제야 제자들은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마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군가?” 예수가 누군가? 그의 정체는 무언가?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종말이 무엇인지 하는 것도 역시 이 질문 앞에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계속 붙들고 있나요? 아니면 그는 늘 그렇게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물론 교회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되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중심에 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큰 착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목표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할 뿐이지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자들은 뒤늦게 중심 주제를 붙들었습니다.
앞에서 저는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잠잠하게 만드신 예수님의 이런 명령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을 뒤로 돌렸습니다. 성서 기자의 관심은 예수님이 자연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만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는 곧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 두 사실을 구분하지 않으면 우리는 광신자가 되든지 불가지론자가 됩니다. 이걸 구분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만날 수 있습니다. 성서 기자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성서기자는 이렇게 수군거리는 제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의 정체 앞에서 놀라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또 다른 두려움을 이미 앞에서 묘사했습니다. 제자들이 바람과 파도를 보고 겁을 먹었다고 말입니다. 똑같은 사람에게서 일어난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의 두려움을 성서기자는 이 이야기에 숨겨놓았습니다. 하나는 파도를 본 두려움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제압당하는 것을 본 두려움입니다. 전자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공포지만 후자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외경입니다. 전자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한 현실에 의해서 일어나는 두려움이지만 후자는 존재와 생명의 비밀 앞에서 경험하는 충격이고 놀라움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돌풍과 파도를 두려워합니다. 그건 인간이면 어쩔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사건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에게서 일어난 사랑, 평화,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충격이며 놀라움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그런 거룩한 두려움에 근거해서 우리는 그 이외의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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