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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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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 http://www.wordspring.net |
능치 못할 일이 없는 믿음을 가로 막는 세가지 병폐
본문/ 마가복음 9 ; 23 -24
1. 들어가는 이야기 /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 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힘있게 증거하여 주셨습니다.
2. 起 /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불행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을 얻지도 못하고 우리가 두드리는 문은 꼼짝도 않고 굳게 닫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겨자 씨만한 믿음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도무지 현실적으로 아무런 응답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남들 처럼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축복 받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까? 역으로 말해서 우리가 이미 축복을 받았다면 우리는 왜 축복 받은 줄도 모르고 우울하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확실한 직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좋은 집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배우자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공부 잘 할 수 있는 높은 아이큐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잘 다룰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 할 때 마다 지금 나의 형편에 꼭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아룁니다. 아뢰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요? 그러면 그런 믿음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대개 이런 것이 우리 신앙인의 문제요, 답답함입니다. 우리는 기뻐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넘치는 충만감에서 살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은 그 이유를 밝히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 우리 모두가 바라는 해가 힘있게 돋는듯한 충만한 삶을 시작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3. 承 / 자동차가 있습니다. 엔진도 좋고, 기름도 가득하고, 고장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잘 나가지 못합니다. 나간다고해도 겨우 빌빌거리고 힘듭니다. 가만히 보니 사이드 브레이크를 잠가두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도 있고, 보잘 것 없으나 그래도 겨자 씨만한 믿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기쁘지도 않고, 힘도 없고, 빌빌거리며 시원하게 잘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원인은 우리 믿음의 엔진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잔뜩 올려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4. 轉 / 우리 믿음의 엔진을 잔뜩 틀어쥐고 있어서 우리가 힘차게 달려 나가지 못하게 하는 그 사이드 브레이크의 정체란 과연 무엇일까?
첫째, 무사안일 주의 ( Mannerism )입니다
어제 뜬 해가 오늘도 또 떳구나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해는 어제의 해가 아닙니다. 어제 만났던 사람 오늘도 또 만나는구나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은 어제 만났던 그 사람이 아닙니다. 刮目相對란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삼일 후에 만나면 너무나 발전 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이런데도 우리는 매일 매일을 어제와 똑 같은 날로 살아아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사안일한 태도가 싱싱 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을 마비 시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날이 아니고, 내일은 오늘과 같은 날이 아닙니다.
둘째, 부정적 이기주의 ( Egoim )입니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자존심이란 좋은 것입니다. 자존심에서 긍지와 명예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 이웃을 사랑하라 하실 때 < 네 몸과 같이 >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 몸을 돌로 찧찟는 사람이나, 마약하는 사람이나, 목 매다는 사람에게라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엔진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건전한 자존심이 아니라 부정적 이기심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제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하는 이기주의, 옛날 세 친구가 동행으로 길을 갑니다. 금덩이 세 개를 주웠습니다. 하나 씩 나누었습니다. 어느 정자 아래 쉬었습니다. 한 사람은 막걸리 받으러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돌아온 그 친구를 남은 둘이서 때려 죽이고 그가 사온 막걸리로 축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도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이기심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기심이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옥죕니다.
셋째, 꽉 막힌 합리주의 ( Rationalism )입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것을 숭상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합리적이 아닙니다. 2 + 5 = 7 이것은 합리적입니다. 물고기 2마리 + 보리떡 5 = 5,000은 합리적이 아닙니다만 믿음의 현실입니다. 가) 무거운 것은 물에 가라앉는다 / 나) 쇠는 무겁다 / 다) 그러므로 쇠는 물 속에 가라 앉는다. 합리적입니다. 그렇다면 로버트 풀턴 (1765-1815)은 결코 무쇠 덩어리 기선을 물 위에 띄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는 호머가 그리스 신화를 각색한 서사시이다 / 나) 신화는 현실이 아니다 다) 그러므로 트로이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합리적입니다. 그렇다면 하인리히 슈리만 (1822-1890)은 결코 트로이성을 발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 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나) 사람은 날개가 없다 / 다) 그러므로 사람은 날 수 없다. 합리적입니다. 그렇다면 라이트 형제는 결코 비행기를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합리주의가 믿음의 엔진을 바짝 주눅들게 하고 있습니다.
5. 結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바라십시오. 무사안일주의, 부정적 이기주의, 꽉 막힌 합리주의를 버리십시오. 어떻게 버릴 수 있습니까? 성령의 바람을 사모하고, 기도의 불을 올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을 확신 하십시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임을 명심 하십시요.
본문/ 마가복음 9 ; 23 -24
1. 들어가는 이야기 /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 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힘있게 증거하여 주셨습니다.
2. 起 /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불행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을 얻지도 못하고 우리가 두드리는 문은 꼼짝도 않고 굳게 닫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겨자 씨만한 믿음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도무지 현실적으로 아무런 응답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남들 처럼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축복 받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까? 역으로 말해서 우리가 이미 축복을 받았다면 우리는 왜 축복 받은 줄도 모르고 우울하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확실한 직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좋은 집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배우자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공부 잘 할 수 있는 높은 아이큐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잘 다룰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 할 때 마다 지금 나의 형편에 꼭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아룁니다. 아뢰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요? 그러면 그런 믿음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대개 이런 것이 우리 신앙인의 문제요, 답답함입니다. 우리는 기뻐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넘치는 충만감에서 살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은 그 이유를 밝히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 우리 모두가 바라는 해가 힘있게 돋는듯한 충만한 삶을 시작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3. 承 / 자동차가 있습니다. 엔진도 좋고, 기름도 가득하고, 고장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잘 나가지 못합니다. 나간다고해도 겨우 빌빌거리고 힘듭니다. 가만히 보니 사이드 브레이크를 잠가두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도 있고, 보잘 것 없으나 그래도 겨자 씨만한 믿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기쁘지도 않고, 힘도 없고, 빌빌거리며 시원하게 잘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원인은 우리 믿음의 엔진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잔뜩 올려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4. 轉 / 우리 믿음의 엔진을 잔뜩 틀어쥐고 있어서 우리가 힘차게 달려 나가지 못하게 하는 그 사이드 브레이크의 정체란 과연 무엇일까?
첫째, 무사안일 주의 ( Mannerism )입니다
어제 뜬 해가 오늘도 또 떳구나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해는 어제의 해가 아닙니다. 어제 만났던 사람 오늘도 또 만나는구나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은 어제 만났던 그 사람이 아닙니다. 刮目相對란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삼일 후에 만나면 너무나 발전 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이런데도 우리는 매일 매일을 어제와 똑 같은 날로 살아아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사안일한 태도가 싱싱 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을 마비 시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날이 아니고, 내일은 오늘과 같은 날이 아닙니다.
둘째, 부정적 이기주의 ( Egoim )입니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자존심이란 좋은 것입니다. 자존심에서 긍지와 명예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 이웃을 사랑하라 하실 때 < 네 몸과 같이 >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 몸을 돌로 찧찟는 사람이나, 마약하는 사람이나, 목 매다는 사람에게라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엔진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건전한 자존심이 아니라 부정적 이기심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제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하는 이기주의, 옛날 세 친구가 동행으로 길을 갑니다. 금덩이 세 개를 주웠습니다. 하나 씩 나누었습니다. 어느 정자 아래 쉬었습니다. 한 사람은 막걸리 받으러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돌아온 그 친구를 남은 둘이서 때려 죽이고 그가 사온 막걸리로 축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도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이기심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기심이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옥죕니다.
셋째, 꽉 막힌 합리주의 ( Rationalism )입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것을 숭상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합리적이 아닙니다. 2 + 5 = 7 이것은 합리적입니다. 물고기 2마리 + 보리떡 5 = 5,000은 합리적이 아닙니다만 믿음의 현실입니다. 가) 무거운 것은 물에 가라앉는다 / 나) 쇠는 무겁다 / 다) 그러므로 쇠는 물 속에 가라 앉는다. 합리적입니다. 그렇다면 로버트 풀턴 (1765-1815)은 결코 무쇠 덩어리 기선을 물 위에 띄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는 호머가 그리스 신화를 각색한 서사시이다 / 나) 신화는 현실이 아니다 다) 그러므로 트로이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합리적입니다. 그렇다면 하인리히 슈리만 (1822-1890)은 결코 트로이성을 발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 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나) 사람은 날개가 없다 / 다) 그러므로 사람은 날 수 없다. 합리적입니다. 그렇다면 라이트 형제는 결코 비행기를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합리주의가 믿음의 엔진을 바짝 주눅들게 하고 있습니다.
5. 結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바라십시오. 무사안일주의, 부정적 이기주의, 꽉 막힌 합리주의를 버리십시오. 어떻게 버릴 수 있습니까? 성령의 바람을 사모하고, 기도의 불을 올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을 확신 하십시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임을 명심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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