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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2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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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90725 |
2009.2.8
치병과 축귀
오늘 우리가 설교의 주 텍스트로 읽은 본문에는 세 가지의 비슷한, 그리고 짧은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첫 이야기는 29-31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습니다. 예수님이 그 손을 잡아 일으키자 열병이 나았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32-34절입니다. 저물어 해 질 때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35-39절입니다. 새벽녘에 기도하러 나가신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주님을 찾는다고 알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전도의 사명에 관해 거론하신 뒤에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고 귀신을 내쫓으셨다고 합니다.
이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치병과 축귀 사건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치병과 축귀는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시몬의 장모 이야기에서 열병이 떠났다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곧 귀신이 떠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다른 두 이야기도 치병과 축귀를 같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병이 낫는다는 것은 곧 귀신이 쫓겨난다는 의미였습니다.
복음서에는 왜 이런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까요?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고대인들의 세계관에서는 그런 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주술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악한 영이 인간의 운명에 개입해서 파괴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운명을 극복하려면 악한 영을 쫓아내야 했습니다. 질병도 그런 현상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불치병이나 난치병들은 더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병이 왜 시작하는지,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의학적인 정보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힘이 바로 귀신이었습니다.
속칭 귀신파라고 불리는 기독교인들 중에는 여전히 고대인들의 주술적 세계관을 그대로 추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넘어져도 귀신의 작용이라느니, 감기에 결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귀신을 직접 본다고도 합니다. 정통교회에서도 이런 간증들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옵니다. 어느 신자의 턱에 붙어 있는 일곱 귀신을 보고 내쫓아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안수 기도를 통해서 불치병이나 장애를 치료했다는 말은 자주 듣습니다. 크게 보면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겠다는 생각, 십일조 헌금을 통해서 축복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들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신앙 현상이 한국교회의 저변에 넓게 퍼져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이런 생각은 상식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고 신앙적으로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의 지동설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그 이전의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서가 말하는 축귀 사건도 천동설과 같이 잘못된 거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런 질문은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귀신은 그 당시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세계를 읽는 통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연과학의 방식으로 세상을 읽는 것과 똑같았습니다. 복음서는 그 당시의 세계관을 통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일종의 손가락질처럼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이 귀신을 제어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귀신의 능력
오늘 설교 본문의 세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으신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 앞 구절인 막 1:21-28에서도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복음서는 귀신이 예수님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공생애 초기의 세 가지 시험에서도 예수님은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귀신, 또는 마귀가 예수님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는 복음서 기자들의 주장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예수님이 모든 귀신과 마귀를 완전히 제압한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부분적인 전투에서는 이겼을지 모르지만 아직 싸움이 끝난 게 아닙니다. 귀신의 작용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귀신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근원적인 세력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도 온갖 귀신이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고 끈질긴지 우리가 오히려 지쳐 나자빠질 지경입니다.
오늘의 국내외 정치, 교육의 문제는 여기서 반복해서 길게 말씀드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귀신이 들리지 않았다면 오늘의 정치인들이 이렇게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지는 않을 겁니다. 귀신이 들리지 않았다면 교육 당국자들이 어린 청소년들을 입시 지옥으로 몰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오늘 한국의 교육은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게 사교육을 통해서 진행되니까요. 큰 도시의 웬만한 집의 자녀들은 선행학습을 받는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미 공교육이 무너졌습니다. 이런 것에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들도 웬만해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나가고 있으니까요. 귀신들림 현상과 비슷합니다.
오늘의 가장 전형적인 귀신은 자본주의이겠지요. 돈이면 무엇이나 가능하다는, 돈만이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물신주의가 귀신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모두 경제발전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웁니다. 잘 살아야겠다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문제는 그것이 절대 가치로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자본과 물질 만능주의가 오늘 우리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런 물질 만능주의는 이제 우리가 손 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력은 분명히 귀신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삶의 만족을 느낄 줄 모른다는 귀신에 들려 있는 건 아닐는지요. 우리 마음의 한 구석이 늘 비어 있다는 느낌말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죽음 앞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실존적 허무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끝없는 자기연민으로 인한 허무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인간이 자기연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야 없겠지만 거기에 종속되는 것은 분명히 귀신 들림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의 귀신이 무엇이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앞에 열거한 내용들은 웬만큼 성서와 세상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정작 궁금한 것은 예수님이 귀신을 제어했는데 왜 이런 귀신의 세력들이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날뛰는가에 있습니다. 공생애만 본다면 엄밀하게 말해서 예수님은 귀신과의 싸움에서 졌습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귀신을 내쫓기는 했지만 결국은 그들에게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신에게 완전히 당했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들짐승도 제 집이 있지만 당신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싸움은 분명히 진 싸움입니다.
그런 주장은 기독교 신앙과 상관없는 패배주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치병과 축귀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신 분이니 승리자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능력을 행한 사람들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런 초자연적 능력을 보인 카리스마로만 말한다면 엘리야나 엘리사가 예수님보다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도 그런 능력을 보인 사람들은 허다했습니다. 그런 것만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별로 특별한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런 능력을 행했어도 십자가 사건 앞에서 아무도 그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악의 (존재론적) 세력 앞에서 예수님의 운명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그와는 정반대로 승리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세속적인 성공신화가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싸구려 약처럼 팔리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를 일종의 처세술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울도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과의 싸움에서 밀려나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뿌린 복음의 씨가 어떤 결실을 거둔지를 알지 못한 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죽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은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불가능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귀신, 또는 마귀나 악마와의 싸움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싸워봐야 승산도 없고 별 소득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처형당했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그런 악한 세력과의 투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귀신은 너무 교묘하기에 우리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보십시오. 지금 우리 인류의 문명이 겉으로는 풍요롭고 멋스러워 보이지만 실제 내용적으로는 궁핍하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에 나선 이들에게도, 노동해방과 역사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계속해서 인간의 삶을 파괴하려는 욕망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무슨 구원이 가능하겠습니까?
승리자 예수
귀신과의 싸움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싸우십니다. 우리는 실제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자기를 굴복시킴으로 싸움을 이기십니다.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신약 공동체는 바로 그것을 보았습니다. 빌 2:6-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기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위 구절에서 “지극히 높여”는 부활과 승천을 가리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소위 ‘케노시스’라고 일컬어지는 이 빌립보서의 송영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강함이 아니라 약함입니다. 높음이 아니라 낮음입니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입니다. 증오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런 싸움을 누가할 수 있나요? 사람이 할 수 있을까요?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귀신과의 싸움 자체를 폐기처분하셨습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부활생명으로 모든 싸움은 끝났습니다. 귀신은 악을 도모해서 개인이나 공동체를 상하게 하거나 심지어 죽게 할 수는 있지만 부활 생명에 더 이상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이 부활생명은 오직 이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할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종말론적 구원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종말론적 구원과 그 승리를 믿고 희망하는 우리는 우리 앞의 악을, 즉 생명파괴 세력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걸 하나님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기도나 하고 예배만 드리면서 그 승리의 순간을 기다려야만 할까요? 궁극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가 현실로 드러나기까지 우리는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영인 귀신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치병과 축귀를 행하며 사셨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설교의 주 텍스트로 읽은 막 1:29-39에 나오는 세 이야기는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너무 낭만적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인류가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악의 존재론적 세력인 귀신이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 귀신이 보이나요? 보이지 않는다면 싸울 의지도 생기지 않겠지요.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귀신론자들처럼 모든 걸 귀신의 탓으로 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주술적으로 해석해도 좋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악의 뿌리가 존재론적으로 아주 깊다는 뜻입니다. 그게 얼마나 깊은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바로 우리 자신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부단히 자기를 주님의 빛으로 성찰해야 하겠지요. 그런 성찰을 그치면 순식간에 우리는 악한 귀신의 세력에 휩쓸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싸움은 부활의 예수님에게 기대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귀신의 저주인 폭력과 싸움과 죽음을 종말론적으로 극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증거하고 있는 치병과 축귀 이야기는 이런 종말론적 승리의 예표이며, 예증이며, 징표입니다. 그것으로는 아직 완전한 승리는 물론 아닙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귀신의 놀이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세력은 이미 끝장났습니다. 그 마지막이 다만 유예되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21세기 대명천지에 귀신의 폭력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그렇고, 세계 곳곳도 그렇습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귀신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얼굴이 회색빛으로 변한 걸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악의 권세를 허물었습니다. 그 주님을 찬양합시다. (20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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