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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6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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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 http://www.wordspring.net |
본문/막14:66-72, 마26:69-75, 눅22:56-62, 요18:15-27
1. 들어가는 이야기 /
폭설이 내린 산 기슭에 핀 화사한 설중매를 보고, 우리는 비록 찬 바람이 불고 눈이 쌓였더라도 이제 곧 봄이 올 것을 압니다. 바다 저 건너편에서 구름이 몰려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오, 이제 큰 비가 내리겠구나 짐작합니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자신에게 닥쳐 올 고난과 죽음을 미리 예고 하신 것은 무당식의 예언도 아니고, 사주팔자 풀어서 나오는 운명적 예고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미리 예고 하신 것은 자신의 뜻이 바로 사탄의뜻과는 정반대의 길이므로 필연적으로 일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고, 공과 사는 서로 섞일 수 없고, 물질 제일주의와 하나님 제일주의는 타협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빛이냐, 어두움이냐?, 진리냐, 비진리냐?의 싸움 터에 서있는 자신을 뚜렷히 보신 것입니다.
2. 起 예수의 고난 예고와 제자들의 반응
예수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탄 마귀의 음모와 잔인한 술수를 절감 하시고, 마지막 유월절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에게 닥칠 고통과 수모와 죽음을 절실하게 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난 당할 때에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한결같이 < 주님,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배반 하다니요.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고 하십니다. 예수의 이 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분연히 일어나 < 주님, 정말 섭섭합니다. 이 시몬 베드로를 믿지 못하신다는 것입니까? 주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감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 하였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3. 承 베드로의 이 다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집칸이나 마련하고, 뭔가 좀 안정된 살림살이 해보려고, 사무실, 시장, 파출부, 공무원, 운전, 공사 현장, 실험실, 학교, 연구실, 오파상, 세일즈맨, 노동판에서 분주하고, 피곤하게, 땀 흘리며 삽니다. 그러다 문득 나 스스로의 인생을 응시 할 때, 아! 허무한 인생이로다! 이렇게 산들 어쩌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인가? 하는 심각한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더욱이 고생만 실컷 하다가 이제 좀 살만한가 했는데, 중병에 걸려 허위적 거리거나, 죽는 친구들을 보면 도무지 남의 일이 아니라 내가 바로 저짝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 때 < 안된다! 나의 한번밖에 없는 이 인생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 이렇게 땅만 보고 살 수는 없다! >는 우리 영혼의 처절한 아우성를 듣습니다. 우리는 이 영혼의 아우성을 듣고 베드로 처럼 분연히 일어나 다짐합니다. < 그렇지! 나도 이제 사람답게 살아야겠다. 예수를 믿어도 정말 믿는 것 처럼 진짜로 믿어야겠다.
예수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하늘의 것, 거룩한 것, 숭고한 삶을 추구하며 살으리라! 먹고 사는 문제를 초월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살으리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순수의 삶을 살으리라! 오, 주님 나를 도우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결단 할 때가 있습니다.
4. 轉 예수께서는 바다같이 깊은 눈으로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 내가 주와 함께 죽는 데까지라도 가겠습니다! >라는 베드로의 그 다짐 속에는 전혀 거짓이 없는 순수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그 결심이 실제 상황에 부닥치면 산산히 무너져 내릴 한갓 감정적 흥분의 목소리 임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여 왜 자기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느냐?며 가슴을 쳐보이며 답답해 하는 베드로에게 그저 침묵 하셨습니다.
5. 結 감정과 현실은 다릅니다.
마침내 그 무섭고 어두운 긴 밤이 왔습니다. 칼, 몽둥이, 채찍, 위협, 공갈, 폭력을 앞세운 사탄의 힘이 현실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깊고 깊게 드리웠습니다. 이 가공스러운 고통과 고난이 실제 상황으로 나타나자, 평소에 다지고 다졌던 그 모든 결단과 고백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공 수표가 되었습니다. 모두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베드로 역시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큰 소리로 가슴을 탕탕치면서 주여, 다 버릴지라도 나만은 남겠습니다.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라도 같이 가겠노라던 자기 목소리가 차마 그 발을 뗄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는 가야바의 뜰에 숨어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다리가 벌벌 떨립니다. 그때 대제사장 하인 하나가 베드로를 유심히 보더니 < 당신 저 예수와 한패지! >라고 하자, 베드로는 대번에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합니다.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나 앞문으로 나오는데 다른 하인 하나가 < 이것 봐! 당신 분명히 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어! >라고 하자, 이번에는 맹세하고 부인합니다. 큰일났다 싶어 가야바의 뜰을 빠져나오는데 또 한 사람이 < 너는 분명히 예수와 한패다! >라고 하자 이번에는 아예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이 말을 할 때 매맞으시던 예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눅22:61). 그 때 어데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6. 마치는 이야기 /
역사는 예수의 뜻과 사탄의 뜻이 맞붙어 싸우는 현실 세계입니다. 오늘날 교인이 천만이고, 신학교가 만원이고, 곳곳에서 신앙 세미나, 찬양 집회가 넘치고, 아멘! 할렐루야!가 논두렁의 개구리 소리같이 귀따겁게 들립니다마는 왜 우리의 기독교에는 마냥 패전의 비보만 들리는가!
그날 밤, 용감하고, 기골이 있어 보이고, 의리 있어 보였던 갈릴리 사람은 막상 부닥친 현실에서 맹세코 그분을 모르노라고 부인하고, 새벽 닭 우는 어둠 속에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막상 부닥치면 < 나는 모르노라, 모르노라, 맹세코 모르노라 >고 하였던 나의 통곡입니다. 아! 부끄럽고 부끄럽도다!
그분을 모르노라고 한 나의 배신이 어찌 닭 울기 전 세 번 뿐이랴!
1. 들어가는 이야기 /
폭설이 내린 산 기슭에 핀 화사한 설중매를 보고, 우리는 비록 찬 바람이 불고 눈이 쌓였더라도 이제 곧 봄이 올 것을 압니다. 바다 저 건너편에서 구름이 몰려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오, 이제 큰 비가 내리겠구나 짐작합니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자신에게 닥쳐 올 고난과 죽음을 미리 예고 하신 것은 무당식의 예언도 아니고, 사주팔자 풀어서 나오는 운명적 예고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미리 예고 하신 것은 자신의 뜻이 바로 사탄의뜻과는 정반대의 길이므로 필연적으로 일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고, 공과 사는 서로 섞일 수 없고, 물질 제일주의와 하나님 제일주의는 타협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빛이냐, 어두움이냐?, 진리냐, 비진리냐?의 싸움 터에 서있는 자신을 뚜렷히 보신 것입니다.
2. 起 예수의 고난 예고와 제자들의 반응
예수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탄 마귀의 음모와 잔인한 술수를 절감 하시고, 마지막 유월절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에게 닥칠 고통과 수모와 죽음을 절실하게 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난 당할 때에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한결같이 < 주님,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배반 하다니요.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고 하십니다. 예수의 이 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분연히 일어나 < 주님, 정말 섭섭합니다. 이 시몬 베드로를 믿지 못하신다는 것입니까? 주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감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 하였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3. 承 베드로의 이 다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집칸이나 마련하고, 뭔가 좀 안정된 살림살이 해보려고, 사무실, 시장, 파출부, 공무원, 운전, 공사 현장, 실험실, 학교, 연구실, 오파상, 세일즈맨, 노동판에서 분주하고, 피곤하게, 땀 흘리며 삽니다. 그러다 문득 나 스스로의 인생을 응시 할 때, 아! 허무한 인생이로다! 이렇게 산들 어쩌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인가? 하는 심각한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더욱이 고생만 실컷 하다가 이제 좀 살만한가 했는데, 중병에 걸려 허위적 거리거나, 죽는 친구들을 보면 도무지 남의 일이 아니라 내가 바로 저짝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 때 < 안된다! 나의 한번밖에 없는 이 인생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 이렇게 땅만 보고 살 수는 없다! >는 우리 영혼의 처절한 아우성를 듣습니다. 우리는 이 영혼의 아우성을 듣고 베드로 처럼 분연히 일어나 다짐합니다. < 그렇지! 나도 이제 사람답게 살아야겠다. 예수를 믿어도 정말 믿는 것 처럼 진짜로 믿어야겠다.
예수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하늘의 것, 거룩한 것, 숭고한 삶을 추구하며 살으리라! 먹고 사는 문제를 초월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살으리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순수의 삶을 살으리라! 오, 주님 나를 도우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결단 할 때가 있습니다.
4. 轉 예수께서는 바다같이 깊은 눈으로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 내가 주와 함께 죽는 데까지라도 가겠습니다! >라는 베드로의 그 다짐 속에는 전혀 거짓이 없는 순수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그 결심이 실제 상황에 부닥치면 산산히 무너져 내릴 한갓 감정적 흥분의 목소리 임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여 왜 자기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느냐?며 가슴을 쳐보이며 답답해 하는 베드로에게 그저 침묵 하셨습니다.
5. 結 감정과 현실은 다릅니다.
마침내 그 무섭고 어두운 긴 밤이 왔습니다. 칼, 몽둥이, 채찍, 위협, 공갈, 폭력을 앞세운 사탄의 힘이 현실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깊고 깊게 드리웠습니다. 이 가공스러운 고통과 고난이 실제 상황으로 나타나자, 평소에 다지고 다졌던 그 모든 결단과 고백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공 수표가 되었습니다. 모두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베드로 역시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큰 소리로 가슴을 탕탕치면서 주여, 다 버릴지라도 나만은 남겠습니다.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라도 같이 가겠노라던 자기 목소리가 차마 그 발을 뗄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는 가야바의 뜰에 숨어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다리가 벌벌 떨립니다. 그때 대제사장 하인 하나가 베드로를 유심히 보더니 < 당신 저 예수와 한패지! >라고 하자, 베드로는 대번에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합니다.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나 앞문으로 나오는데 다른 하인 하나가 < 이것 봐! 당신 분명히 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어! >라고 하자, 이번에는 맹세하고 부인합니다. 큰일났다 싶어 가야바의 뜰을 빠져나오는데 또 한 사람이 < 너는 분명히 예수와 한패다! >라고 하자 이번에는 아예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이 말을 할 때 매맞으시던 예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눅22:61). 그 때 어데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6. 마치는 이야기 /
역사는 예수의 뜻과 사탄의 뜻이 맞붙어 싸우는 현실 세계입니다. 오늘날 교인이 천만이고, 신학교가 만원이고, 곳곳에서 신앙 세미나, 찬양 집회가 넘치고, 아멘! 할렐루야!가 논두렁의 개구리 소리같이 귀따겁게 들립니다마는 왜 우리의 기독교에는 마냥 패전의 비보만 들리는가!
그날 밤, 용감하고, 기골이 있어 보이고, 의리 있어 보였던 갈릴리 사람은 막상 부닥친 현실에서 맹세코 그분을 모르노라고 부인하고, 새벽 닭 우는 어둠 속에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막상 부닥치면 < 나는 모르노라, 모르노라, 맹세코 모르노라 >고 하였던 나의 통곡입니다. 아! 부끄럽고 부끄럽도다!
그분을 모르노라고 한 나의 배신이 어찌 닭 울기 전 세 번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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