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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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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 http://www.wordspring.net |
하나님의 나라-(1)
본문/ 막1:14-15
1.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는 평소 어떤 문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 문제를 설명하여 보라고 하면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머뭇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문제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공관 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통 털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91회나 나타날 정도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비유의 중심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 그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마10:7, 눅9:2, 10:9-11)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기독교의 중심 사상인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혹은 하늘 나라(Kingdom of Heaven)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개념 정리가 미흡한 상태에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주 동안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에 게재된 <하나님의 나라> 항목을 기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2.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에언자들에 의하여 계시되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주변 모든 나라들의 신들은 그 각각의 나라 안에서 그 나라의 신으로만 인정받는 신들이었습니다. 다곤은 오직 블레셋 사람들의 신이었고, 림몬은 오직 암몬 사람들의 신이었고, 마르둑은 오직 바벨론 사람들의 신이었을 뿐이지 온 세계와 우주 전체의 신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자신은 그런 국지적인 신이 아님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언자를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그 분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가?
첫째. 하나님은 다른 나라의 신처럼 그 나라에 한정된 신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기준으로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입니다(암1-2).
둘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참 신이며, 영원하시고 우주적이시며, 그 하나님의 나라는 불멸하다고 하였습니다(시145:13, 103:19 사45:5, 특히 단7:14).
셋째. 하나님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께서 역사와 시간과 나라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입니다(암5:18-20, 습1:14-18, 사2:2-4, 11:6-9, 미4:1-4 등).
3.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구약은 약속이요, 신약은 성취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는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 종인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희미하게 계시하셨습니다만, 신약에 와서 하나님은 그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실하게 계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보면 앞에 말씀드린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 나라 내용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다는 사상 그리고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현실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사상, 하나님께서 마지막 하나님의 날에 만물을 심판하신다는 종말론적인 사상 말입니다.
그런데 에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 개념 속에는 이 각각의 사상이 조화롭게, 심오하게 그리고 더 폭 넓게 확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종전의 예언자들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와 확연히 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입니다.
4.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이란 무엇인가?
예언자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인가? 예언자들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신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 하나님의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런 이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면적 이해였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심층적 이해였다는 점에서 예언자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심층적 이해는 역설적(Paradox)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도 예언자들처럼 하나님 나라가 언젠가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종말론적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가 예수 자신의 인격과 예수 자신의 사역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이라고 합니다.
5. 마치는 이야기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언젠가 올 것이다(막1:15).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내 속에 이미 왔다(눅11:20)고 하셨습니다.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그러나 진리입니다. 노자가 道可道非常道 라고 하였듯이 사람의 말로 진리를 완전히 드러 낼 수 없습니다. 모순이면 진리가 아니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모순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2)
본문/ 막1:14-15
1.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가 보통 <나라>라고 할 때 <나라>는 국토, 국민, 주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나라>는 히브리어로 “말쿠트”, 희랍어로 “바실레이아” 인데 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은 國土나 國民이 아니라 <주권>입니다. 그러므로 요즈음 영어권에서는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보다는 <Reign of God, Sovereignty of God, God's Rule>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뜻입니다. 즉, 사랑, 정의, 평화, 자유라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실현되고 있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신약성서, 특히 공관복음서에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다양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무엇보다 먼저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이제 곧 지극히 가까운 미래에 들이닥칠 나라”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의미를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2. 이제 아주 가까이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을 많은 학자들이 현재완료형으로 이미 와 있다(the Kingdom of God has com)는 뜻으로 보고 싶어하지만 그 실제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가 이제 막 임박하였다>는 아주 가까운 미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영어로 to draw near, to arrive, to reach, 등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막9:1>,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막13:26>,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막14:25> 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도 <하나님 나라가 지극히 가까운 미래에 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혼인 잔치의 비유, 추수의 비유 등 이 모든 비유들도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멀고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곧 들이닥칠 나라입니다. 예수는 이것을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의 본문 마가복음1:15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임계점이 찼다는 것입니다. 임계점(the critical point)이란? 어떤 가연성 물질에 열을 가하면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다가도 열을 점점 더 가하여 그 가연성 물질에 불이 붙을 수 있을 만한 온도에 이르면 어느 순간 확 불이 붙는 임계온도를 의미합니다.
나의 삶, 가정, 인간 관계, 국가, 교회 공동체...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흐느적흐느적 허송 세월하며, 노세 노세 젊어 노세 하다가, 다음에 하지 다음엔 꼭 하지 하면서 미적미적 하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심각한 존재론적 의문과 늙음, 병듦, 무의미성, 죽음과 같은 엄청난 비 존재의 심연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임계점에 도달 때가 있는데 바로 그 임계점의 때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비유가 암시하듯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심판이 무엇입니까? 심판이란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요, 자기 스스로의 평가이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심판이 더 무섭고 무거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3:16-1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12:48>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나와 너의 허탄한 삶을 심판하기 전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육을 좇아 살아온 지금까지의 잘못된 우리의 삶의 구조를 완전히 뒤집어 갈아엎고, 영을 좇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막1:1).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요6:29).
4. 마치는 이야기
나는 내 삶의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고백합니다. 너는 어떠합니까? 이제 곧 들이닥칠 하나님 나라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나라-(3)
본문/ 눅7:18-23, 11:20, 17:20-21
1. 들어가는 이야기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을 동시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은 두 겹 새끼줄이 서로 어우러져 꼬아져 있어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같이 서로 황홀하고 어지럽게 엮어져 있어 그 내용은 둘이나 그 외적 모습은 하나이듯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막9:1), 그리고 가라지 비유, 양 염소 비유, 달란트 비유 등은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간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눅7:18-23, 11:14-26, 17:20-21, 등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드러내 주시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다음에 기록한 성경 본문들은 필히 일일이 찾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드러내 주시는 말씀들
첫째. 눅7:18-23 말씀입니다. 눅4:1-30과 눅7:18-23은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습니다. 눅4:16-21은 광야 시험에서 예수님께서 깨달으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무엇이라야 하는가?> 하는 내용을 이사야61:1-2를 인용하시어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눅7:22은 예수께서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지금 현실 속에서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신 기록입니다. 이들 본문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적 증거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현실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참고:마11:4-5).
둘째. 눅11:14-26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사탄 마귀의 세력인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증거라고 하신 것입니다.
셋째. 눅17:20-21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within you 혹은 among you로 읽을 수 있습니다. within you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서 운동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이 되고, among you는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 개념으로 여기 저기가 아니라 존재의 심층적 의미에서 나 개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 강해집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요, 나 중심이 아니라 이웃 중심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사역을 본 받는 삶을 살 때, 하나님 나라가 나의 삶의 현실 속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 현실 속에 분명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모습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명백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눅4:14-26의 말씀은 산상수훈의 구체적 실현 과정이며,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눈앞에 집어들어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청빈한 삶, 질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한 정성스러운 배려, 인생의 바른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들에게 전하신 복음의 말씀, 죄책감으로 주눅들고 말라비틀어진 사람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용서의 선포, 그런 사역이었습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자연히 나타납니다. 진정한 하나님 사랑은 곧 진정한 이웃 사랑에로, 또한 진정한 이웃 사랑은 곧 진정한 하나님 사랑에로 승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무엇이 먼저냐고 묻는다면 하나님 사랑이 먼저라고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그 분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그 사랑이 무엇인 줄 알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내 나이 20에 이 세상을 바꾸어버리겠다고 결심하였네. 내 나이 40에 내 가족이라도 바꾸어보겠노라고 결심하였네. 내 나이 60에 내 자신이라도 바꾸어보리라 결심하였네. 진작 이렇게 결심하였더라면 내 귀한 인생을 그렇게 허비하지 않았으련만!.
나는 하나님 앞에 경배할 때만이 나 자신이 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변해야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말고 나 자신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은 나 자신 안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4. 마치는 이야기
금세기 프랑스 최고의 휴머니스트로 추앙 받는 피에르 신부는 <나의 신앙은 3가지 중심 축을 이루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이다. 둘째는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셋째는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가 받은 사랑을 자발적으로 그 이웃에게 나누어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단순한 기쁨, 101쪽>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4)
본문/ 마7:21
1. 들어가는 이야기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 중 가라지 비유와 겨자씨 비유는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을 잘 드러내 주신 비유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막13:32), 우리 각 사람은 각자가 처한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큰 나무로 혹은 알곡으로 성장하여야 한다(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눅17:20-21)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을 큰 나무로 혹은 알곡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그 대목들을 찾아보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 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20).
*너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 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18:3 막10:15).
*만일 네 손이, 네 발이,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고, 빼버리고 하나 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3-48).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마5:3 눅6:2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0).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 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요3:5).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 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요일 3:14).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3.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위에 열거한 말씀들을 볼 때 4 복음서는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를 <영생 eternal life>, 혹은 <생명 life>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막9:43-47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 나라와 영생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막10:17-31에서 부자 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영생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보다 영생 혹은 생명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가난한 사람(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이란 경제적 가난이 아니라 그 심령이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을 의미함),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사람, 어린아이 같이 순전하고, 겸손하고, 전폭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그렇다면 가난하고, 의롭고, 거듭나고, 어린아이 같고, 예수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등등 이 모든 자격을 갖추어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는 말인가? 더욱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라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면 그 누가 있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유대교보다 더욱 강력한 율법적 종교를 세우셨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30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하신 말씀과는 얼마나 모순됩니까?
이것은 모순의 문제가 아닙니다. 앞에 열거한 말씀들은 경우 경우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주신 말씀이지 그 하나 하나가 율법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 나라 입학 자격>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모두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는가? 아닙니다!. 사람의 자유로운 결단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막10:17-31).
4. 마치는 이야기
이것을 예수님은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1-32>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이것을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3:17>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예수의 영을 받아 자유하여, 나를 온전히 바치는 그 삶의 자리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5)
본문/ 눅17:20-21
1. 들어가는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저 유명한 본문을 여러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개역성경>.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공동 번역>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바리사이들에게서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지켜보는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보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보시오, 사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2. 본문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첫째.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육체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은 여러 가지입니다. 肉眼, 慧眼, 心眼, 靈眼 등이 그것입니다. 육안이 중요합니다만 육안이 다가 아닙니다. 사람의 육안은 원시, 근시, 난시, 착시, 환시, 착각 등으로 극히 제한적이고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나온 것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는 그런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형체나 모양이나 형상이나 물질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는 것은 공간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름다운 왕궁이나 웅장한 자연 풍경 같은 공간 개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within you> 혹은 <너희 가운데 among you>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 안에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공간 개념이 아니라 마음 개념이고, 심층 개념이고, 영적 차원이라고 하셨습니다.
3.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공간적으로 어디 어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우리 가운데 혹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존재 양식,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임하여 役事하는 현실이며, 동시에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Dynamic하고 Dramatic한 삶의 현장입니다. 루돌프 오토는 이것을 “떨리면서도 끌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의 체험이 라고 하였습니다(참고. 말씀의 샘물 고전예화 194호).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현장은 종교, 사상, 문화, 피부색, 출신 지역, 빈부귀천, 남녀노소, 동서고금, 등 모든 인간적 차별과 제한성을 초월한 그런 세상입니다. F.J.Crosby는 이것을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 영광을 누리도다”(찬송가 204장)라고 하였고, C.F.Butler는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찬송가 495장)라고 하였고, 선지자 이사야는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라고 하였습니다.
4.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하셨습니다(요12:46). 빛은 진리이며, 지혜이며, 깨달음입니다. 먼저 내 속에, 그리고 네 속에, 그리고 우리들 속에 하나님의 그 빛, 그 진리, 그 깨달음이 충만한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습니다(요일4:8). 이 사랑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이며,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의 사랑이며,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용서하신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무엇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조건부 사랑(because)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무조건적 사랑(in spite of)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런 사랑이 흘러 넘치는 나라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셨습니다(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웅장한 건축물이나, 어떤 공간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엡4:16). 하나님 나라는 그 하나님의 영이 나와 너, 그리고 우리 가운데 때로는 이슬같이, 때로는 비둘기같이, 때로는 폭풍같이, 때로는 불의 혀같이, 놀랍고 신비하게 살아 움직이는 그런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6)
본문/ 막4:26-32
1. 들어가는 이야기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2 가지 비유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는 아무도 몰래 자라나는 씨와 같다 막4:26-29>고 하신 후, 무엇인가 미흡하시다 싶으셨던지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하시며 잠시 머뭇거리십니다. 즉, 남 몰래 자라나는 씨의 비유만으로는 말씀하고자 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본 뜻이 잘 전달되지 않고 있으니 무엇인가 더 좋은 비유가 없을까? 하고 한참 생각하신 후, 또 다시 주신 비유가 바로 겨자씨의 비유(막4:30-32)입니다.
보통 비유 연구서나 비유 설교집을 보면 앞에 것을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라하고, 뒤에 것을 <겨자씨의 비유>라 하여 따로 따로 두 개의 비유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나는 본문의 문맥과 내용으로 보아 이 비유들을 둘로 나누어 따로 따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유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그렇다면 둘 아닌 하나인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두루뭉수리로 싸잡아 말씀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구체적 현실 존재인 <한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일 백 마라 양 가운데 <잃은 양 한 마리>, 열 드라크마 가운데 <잃은 드라크마 하나>,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 밀알이 썩으면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이 썩으면 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하였습니다. 그냥 씨가 아니고, 그냥 겨자씨가 아닙니다. <씨>가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씨 한 알> 그리고 <겨자씨 한 알>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인 <나,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본문에서 밭에 뿌려진 씨와 겨자씨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씨가 모두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한 번 세워지면 그것으로 그만인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이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생명력 있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사람과 자연에게 참으로 유익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남 몰래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 덧붙여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점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조직이 아니라 여기 살아 숨쉬는 <나 자신/myself>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하나님의 나라는 날로 날로 성장하여 알곡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곡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자아실현이며, 자기 완성이며, 인격의 완성이며,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적 깨달음이며, 실존의 기쁨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그것으로 다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나 자신의 성장과 열매 맺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더 있는가? 남 몰래 자라나는 씨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는 나 자신의 내적 완성을 말씀하셨다면, 겨자씨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는 나 자신의 내적 완성은 곧 나의 이웃과 자연에까지 큰 유익을 끼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잘 것 없이 작고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어, 큰 가지를 내면, 그 그늘 아래 사람들이 모여 쉬고,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잘 것 없이 작고 작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받고, 예수의 영을 받아 성장할 때, 나 자신의 구원은 물론이요, 내 이웃 그리고 온갖 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자연까지 구원을 이루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마치는 이야기
본문을 새롭게 읽으면서 나는 참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말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죽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매일 매일 그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나. 미움, 거짓, 음란, 분노, 게으름, 열등감, 두려움, 이생의 헛된 자랑 속에서 몸부림하고 괴로워하는 나. 너절하고, 쩨쩨하고, 조잡하고, 우유부단하고, 죄 많은 나. 이처럼 한심한 나 같은 사람에게서부터도 하나님 나라가 시작될 수 있다고 하신 우리 주님의 그 놀라우신 말씀! 얼마나 감사한가! 얼마나 신비한가! 얼마나 은혜로운가! 할렐루야!.
하나님의 나라-(7)
본문/ 마11:2-19
1. 들어가는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묵상은 이 번호로 잠정적 매듭을 지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어느 때 완전히 이루어 질 나라이지만, 그 때가 언제인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들조차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 아래 두셨다고 하셨습니다(행1:7).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고, 사람의 육체적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즉, 사람들 사이에, 사람들 마음 속에, 사람의 영적 깊이 속에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하셨습니다(눅117:20-21).
나는 오늘 우리의 본문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장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누구인가를 선명하게 규정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뚜렷이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2. 세레 요한은 누구인가?
첫째. 세례 요한은 엄격한 경건주의자입니다. 그는 보통 사람과 달랐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광야에서 살았고, 약대 털옷을 입었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마3:4).
둘째. 세례 요한은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맹렬히 꾸짖은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아모스와 같이 당시 유대사회의 세리, 장사꾼, 군인 그리고 최고 통치권자인 헤롯 왕의 부정과 부패를 서슬 푸르게 책망한 선지자였습니다(눅2:11-14).
셋째. 세례 요한은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고, 좋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였습니다(마3:9-12).
예수님은 이런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이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종교적 경지, 최고의 인격적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칭찬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놀라운 세례 요한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만도 못하다고 하셨습니다(마11:9-11).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3.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작은 자가 그 위대한 세례 요한보다 큰 이유?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사람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차이는 차원을 달리하는 질적 차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주신 말씀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차이입니다.
첫째. 세례 요한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 먹을 수 없는 메뚜기와 석청, 입을 수 없는 약대 털옷과 가죽띠를 띠고 보통 사람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 않는 경건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즐겨 마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차이입니다.
둘째. 세례 요한에게서는 감히 옆에 가서 말 붙이기도 두려운 종교적 권위, 엄숙, 무엇인가 범접 할 수 없는 카리스마, 위엄이 흘러 넘칩니다. 막달라 마리아, 수로보니게 여인, 수가성의 여인, 니고데모, 나다나엘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허물없이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차이입니다.
셋째. 세레 요한은 사회의 도덕적 타락과 사회 정의를 촉구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성전 청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사회 지도자들을 심히 책망 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인데 세레 요한에게는 소경이 보며, 앉은 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사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사회 문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회 문제를 온 마음과 몸으로 껴안는 그 부분이 없습니다. 그걸 사랑이라 할지? 정의라 할지? 그 명칭이 무엇이던지 간에 세례 요한에게는 그런 그 무엇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차이입니다.
4. 마치는 이야기
요즈음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 이용상의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책들이 우리 교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종교다원주의 수용,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 탈피, 개인구원보다 사회구원, 교회와 목사들의 치부와 타락에 대한 비판 등 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 좋은 뜻으로 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두 분들의 신학적 입장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서 있지 아니하고, 세례 요한적인 사람의 나라에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주간<말씀의 샘물>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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