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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믿음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담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931 추천 수 0 2010.09.11 18: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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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7:24-30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성남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유고에서 태어나 평생을 인도 캘커타의 가난한 동네에서 보내다가 1997년 세상을 떠난 테레사 수녀는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빈손으로 병원과 보육원 등을 세웠고 그 빈손으로 가난한 자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인도 캘커타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했답니다. 그때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그녀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물었답니다. "보육원 건축을 위한 기금은 얼마나 마련되어 있습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오직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는 기자들이 둘러싼 책상 위에 정말 동전 세 닢을 올려놓았답니다. 그녀의 행동에 기자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답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답니다. "여러분의 웃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3실링과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나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저는 이 돈이 반드시 하나님의 의지대로 쓰일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녀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큰 믿음 앞에 기자들은 더 이상 웃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3실링은 테레사 수녀의 큰 믿음대로 움직였습니다. 3실링은 사랑을 실천하는 귀중한 씨앗이 되어 많은 이들의 따뜻한 손길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테레사 수녀는 기자들에게 약속한대로 보육원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굳은 의지와 가능하리라는 큰 믿음, 이것의 바로 테레사 수녀가 일으킨 많은 기적의 열쇠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믿음은 힘이 있습니다. 믿음은 위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옮겨줍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은 질병을 고칩니다. 믿음은 삶의 질을 바꾸어 줍니다. 믿음을 우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믿음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를 만들어 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 이 불신 시대 속에서도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테레사 수녀처럼 큰 믿음을 가진 한 여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도저히 믿음을 가질 만한 여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 중에서는 로마의 백부장이 유일한데 여성 중에서는 이 여인이 유일하게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라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보고 칭찬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참으로 큰 믿음을 가진 여인입니다. 저도 신앙 생활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김 목사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얼마나 듣고 싶은 말입니까? 목회하면서 참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가 많은데 매순간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난주도 몇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이런 음성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여인이 어떻게 하여 이런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큰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큰 믿음에 이르기까지는 넘어야 할 담이 있었습니다.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해 넘어야 할 담이 무엇이겠습니까?

1. 첫 번째 넘어야 할 담은 인간의 한계상황의 담입니다. 큰 믿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이라는 담을 딛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앞에 나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26절에 보면 헬라인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베니게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혈통적 배경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방여인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 이외의 족속들을 그저 막연하게 부른 명칭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해서 아주 좋지 않는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클레멘트 서한에 의하게 되면 이 여인의 이름은 쥬스타라고 합니다. 이 여인의 딸의 이름은 비어니스라고 합니다. 역사가 죠세프스는 이 여인의 딸이 뵈니게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데는 태어나고 자라온 배경이 중요합니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천주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회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회교도가 되기 쉽습니다. 부모님이 큰 믿음을 가지고 산 가정의 자녀들이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 쉽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녀들의 부모의 신앙을 모방하기 쉽습니다.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을 본받아 자신들이 결혼하여서 가정을 이루면 가정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을 잘 지키지 않으며 소홀히 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라서도 부모의 신앙을 모방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믿음을 가질 만한 신앙적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헬라권에 속한 사람은 헬라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28).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사람은 이 여인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부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이 여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는 존칭어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마15:22)”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예수님이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앞에 나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되신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무엇으로 인하여 이런 큰 믿음이 생겼을까요? 성경에 능통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 것이라고 거짓 비난을 하고 있는데 이 여인은 이런 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2년 넘게 좇아 다녔던 제자들도 아직 주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데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인간편에서 보면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속에서 절박성 때문입니다. 절박한 상황이 오면 믿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딸 때문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귀신들린 딸을 둔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은 저주받은 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미쳐 날뛰며 돌아다닙니다. 통제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폭력적으로 칼을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나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때로는 파괴합니다. 늘 긴장해 있습니다.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가정의 행복과 축복, 기쁨을 빼앗긴 것입니다. 한 사람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가족의 문제입니다.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갖가지 방법으로 딸을 치료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딸을 고쳐 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눈물 흘리며 보낸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인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자신의 무능력을 처절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 자녀들이 아팠을 때 대부분 다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큰 아이가 아파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잔일이 있습니다. 부모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아이의 고통을 내가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이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라는 정직한 고백을 합니다. 딸의 문제를 자신의 풀 수 없다고 이 여인은 예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믿음으로 가는데 통과해야 할 첫 번째 문이었습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을 당하면 그것으로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한계 상황을 주님을 만나는 문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겸손과 절대 신뢰의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당시 이들 이방인들은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Josephus). 그러나 절박한 인생 문제 앞에 그 적대감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민족적 우월성도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오직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적 자존심을 모두 팽개치고 예수께 메어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죽은 자를 살린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만이 자신의 딸 문제, 자신의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소문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가서 예수님 발 앞에 모든 창피를 무릎 쓰고 겸손하게 엎드렸습니다. 아이가 귀신이 들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정신 의학자 해리스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세 가지 경우에 천성이 변한다고 합니다. 첫째, 현재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둘째는 소망이 안보일 때 인간은 변할 수 있으며, 셋째, 유레카 상황(Eureka Stage)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고 합니다.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큰 깨달음이 있을 때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이런 상황이 다가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통이 믿음을 주기 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도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질병과 죽음의 위기, 경제적 고통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큰 믿음을 가지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큰 광풍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수 있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주님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살인을 하고 광야에 도망가 도망자 신세로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왕자의 신분에서 도망자의 신분이 된 그에게 그 상황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때로는 직장을 잃습니다. 사업에 실패합니다. 그 좋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한 두 해가 아닙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는 무려 40년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민족 지도자로 사명을 받았습니다. 고난의 현장이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죽음의 위기를 당합니다. 인기 절정의 순간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절박한 죽음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메어 달렸습니다. 그리고 큰 믿음을 가지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브린나의 핍박 때문에 한나는 하나님께 눈물 흘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큰 믿음을 통해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고난은 큰 믿음을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한계상황의 문을 통과함으로 좌절하고 쓰러질 것이 아니라 큰 믿음을 갖는 디딤돌로 사용해야 합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믿음도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고난의 크기만큼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하면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기간이 너무 길다고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40년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는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이라는 바벨론 포로생활의 과정을 지났습니다. 고난의 길이만큼 믿음은 더욱 견고해 집니다. 고난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큰 믿음을 견고히 하는 기간으로 삼으면 됩니다. 우리가 문제를 당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제 삶에 있어 늘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2. 두 번째 넘어야 할 담은 자기 위선의 담입니다. 은폐 할 것이나 드러낼 것이냐의 경계선에서 큰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치부를 정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고통스런 인생문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하였습니까? 예수님께 나와 간구하였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살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서 간구하였다는 말은 한 번 부탁하고 만 것이 아니라 들어 주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매달렸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간구합니까? 자신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으니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치부를 들어내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식적이지 않습니다. 잘 되지 않는데 잘 된다고 그저 얼버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지금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심각한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가식적이지 않는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적인 기도를 듣고 싶어하시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수치스런 가정사를 드러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딸이 귀신들인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결혼도 생각해야 하고 당시 저주받아서 귀신들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식적으로 자신의 죄를 숨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큰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늘 남의 허물만 봅니다. 자신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판단자인데 늘 자신이 판단자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신이 판단자가 되어 “저 말씀은 저렇게 해석했으면 좋을 텐데, 저 말씀은 김 집사가 들어야 할 텐데”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 놓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큰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저도 성경 공부를 하면서 참 믿음이 자라지 않는 사람을 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말씀을 공부하였는데도 여전히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을 보면 자기 정직성이 없습니다. 자기 솔직성이 없습니다. 남의 말은 잘합니다. 성경 이야기는 잘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씀을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늘 은폐합니다. 적당히 포장을 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10대 꽃단장 , 20대 치장 , 30대 분장 , 40대 변장 , 50대 가장 , 60대 위장하다 보면 70대 환장 , 80대 끝장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이 다 아시지만 솔직하게 부끄러운 부분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내어놓아야 합니다. 문제는 은폐하거나 과장하거나 위장하면 해결될 길이 없습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내어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이 죄가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문제를 은폐하고 위장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주님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는데 통과해야 할 문입니다. 은폐하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할 수 없지만 드러내는 사람은 믿음이 날로 날로 성장합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처럼 늘 가식적인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기도해도 서서 사람들 들으라고 기도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금식을 하여도 남의 눈을 늘 의식합니다. 정직성이 없습니다. 진실성이 없습니다. 가식적이고 형식적입니다. 만약 다윗이 간음한 후 계속 그것을 은폐했다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는 나단 선지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큰 믿음을 가진 바울을 보십시오. 자신이 살인자라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습니다. 포장하거나 미화시키지 않습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자신의 원통함을 마음의 괴뢰움을 통곡하며 솔직하게 아룁니다.

3. 세 번째 넘어야 할 담은 자존심의 담입니다.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겸손하게 주의 은총을 간청해야 합니다.
여인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간절히 간구하였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거절합니다. 한 마디로 거절해 버립니다. 개처럼 취급해 버립니다. 그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를 보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처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들은 채도 하지 않습니다. 침묵합니다. 한 말씀도 대답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모멸감을 느끼겠습니까? 우리 성도님이 저에게 어떤 부탁을 했는데 이렇게 하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계속 간구하니까 제자들은 그 여인의 소리가 소음으로 듣고 그 여인을 보내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 여인의 접근을 방해합니다. 교회에 왔는데 교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절을 하며 간청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를 개처럼 취급하며 거절해 버렸습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였겠습니까? 비참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속에서 쌍소리가 나왔을 것입니다. 더러워서 못 참겠다고 침 뱉고 갈 수도 있습니다. 누가 조금만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못 견디는 것이 인간입니다. 남의 자존심은 심각하게 손상시키면서 자신의 자존심만 내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사했는데 받지 않아도 못 견디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모멸감을 받고 자존심을 짓밟혔는데도 이 때 이 여인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큰 믿음입니다. 어떻게 우리 주님이 응답해 주시던지 그것은 주님이 옳습니다. 100%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어도 수용하는 것입니다. 손해가 되어도 수용하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이 옳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주인되심, 메시아 되심을 인정합니다. 예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뭉개져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유대인의 우선권과 특수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비천한 존재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마치 상아래서 꼬리를 흔들고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귀여운 강아지도 부스러기를 먹듯이 자신과 자신의 딸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개'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할 때 받는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주의 은총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렇지 못했습니다. 우월의식과 오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극복하고 오직 은혜만을 바라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경 29절을 보십시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이방 여인이 평생 안고 시름해했던 최대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었습니다.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돌아가니 아이가 정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선언과 동시에 이미 귀신이 그 딸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원거리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경우는 본서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예수가 어떤 특별한 명령이나 외침 없이 당신의 거룩한 의지로 질병을 치료시켰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적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침묵 앞에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문제를 해답을 가지고 계신 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대부분 문제를 만나면 문제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문제에 집착하면 할수록 가정의 행복은 깨어지고 기쁨은 살아집니다.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를 드러내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에게 집착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아무리 침묵의 기간이 길고 외면하여도 예수님께 집중합니다. 다른데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봅니다. 제자들이 방해합니다. 그것 개의치 않습니다. 제자들 만나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소리를 지는 것입니다. 방해하는 제자들을 통하여 오히려 예수님께 더 접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다가 방해되는 요소가 있습니까? 그것을 디딤돌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실패하면 그 실패가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방해 요소가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장애물이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큰 신앙을 가지는데 마지막 통과해야 할 문은 자존심이었습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자존심 싸움이 아닙니다. 영적 싸움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입니다. 자존심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메시아 컴플렉스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칼 바르트는 “자존심이야말로 원죄의 뿌리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존심의 벽을 허물고 여인은 겸손하게 주님께 무릎 끓습니다. 거절당하고 무시하고 냉대와 멸시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주실 것을 호소하면서 겸손히 엎드렸습니다. 어떤 수모를 당하고 수치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딸을 위해서는 그 모든 수모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강하면 남의 이야기 듣기 싫어합니다. 가장 남의 이야기 안 듣는 사람이 전문가입니다. 설교에서도 가장 은혜를 못받는 사람들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나아만 장군 자존심 때문에 갈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존심 꺾고 물 속에 들어가자 문둥이에서 낫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내 자존심 짓밟혀도 가족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면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서 가장 자존심이 높은 사람들이 소위 중위들입니다. 군종시절 보면 오히려 장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도 보면 목사 1년차 2년차, 장로 1, 2년차, 권사, 집사 1,2년차 자존심 싸움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침뱉음과 갖은 수치를 당하며 자손심을 짓밟혔습니다. 인류 구속사역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존심이 짓밟혀서 하나님이 영광된다면 얼마든지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성자일수록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겸손하게 살며, 적당하게 나쁜 사람은 자신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제일 악한 사람은 자신이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내 딸이 죽을 지경인데 자존심이 문제이겠습니까? 아무리 짓밟는다고 해도 매달려야 합니다. 들어 줄 때까지 매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지만 다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은혜이고 자비일 뿐입니다. 안 고쳐주면 어쩔 것입니까?

아무리 부르짖어도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됩니까? 풀어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해도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사람으로 인해 주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되는 것이 있습니까? 심각하게 자존심 상하도록 거절당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큰 믿음을 원하십니다.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위장하지 말고 솔직하게 주님께 나의 삶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자존심 앞에서 무너지면 안됩니다. 아무리 방해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디딤돌로 삼고 일어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것을 넘어가면 바로 앞에 있습니다. 아무리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다하여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주님 붙들고 네 소원대로 되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소원을 이루어 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이해하는 것, 오직 그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간절한 기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죄인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겸손과 순종,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 이것이 곧 큰 믿음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믿음이 큰 만큼 인생은 커지고 믿음의 크기만큼 마음의 크기도 삶의 폭도 넓어집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은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이루게 합니다. 믿음은 신비한 에너지가 있어 믿는대로 되어지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자신감을 주고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고 했습니다. 우리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여자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한 번 외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우리 성도님이 순간순간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7.7.1 열린교회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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