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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믿음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679 추천 수 0 2010.09.11 22: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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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8:11-21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열린교회//2007.7.24

 

아프카니스탄에서 23명의 신앙인이 봉사하러 갔다가 탈레반에게 인질로 잡혔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기도해야할 일입니다. 저도 어제 긴급 기도 요청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문을 보니까 폭력으로 인질을 붙잡아간 탈레반의 잘못은 보도하지 않고 잡힌 사람들을 비난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 선교사를 많이 보내고 있는데 국내 선교가 부진하니까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경쟁적으로 해외에 선교사를 보내어 이슬람권을 자극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가지 말라고 한 곳을 왜 가서 선교하느냐는 식입니다. 선교하는 것이 마치 큰 악을 저지른 것처럼 보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보도 태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쟁으로 인하여 병들고 굶주린 그들을 도와 주러 간 것이 무엇이 잘 못된 것입니까? 설령 선교 목적으로 갔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이 잘 못되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악입니까? 교회를 건축하고 복음 전하는 것을 마치 큰 악을 저지르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때 그 순교를 당하면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악을 저질렀을까요? 헌금을 가져와 우리나라에 교회를 건축해 준 것이 악이라고 영국이나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을까요? 봉사 중에 정신의 위한 봉사, 영혼을 위한 봉사보다 더 큰 봉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빵 몇 개 주는 것보다 가치가 없겠습니까? 지금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당하고 불안해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위로해주고 격려해주지는 못할지언정 비난하면 되겠습니까? 가끔 보면 적이 누구인지 아군이 누구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이기 전에 같은 동포인데도 기독교를 적으로 상정해 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쁜 점만 들추어내고 그것을 빌미로 교회를 핍박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회만 되면 올무를 씌워 확대해석하고 매도해 버리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어떤 과장이 일을 맡아 진행하면 도와주지는 못하고 자신의 라이벌, 적으로 생각하여 늘 꼬투리를 잡아 비난하고 약점과 실수를 잡아 상대를 매장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도회와 남전도회 회장이 되어 수련회를 계획하고 체육대회를 진행하고 건축을 앞장 서서 진행하면 도와주지는 않고 실수나 약점이 없는가를 늘 살펴보면서 무슨 실수나 약점만 발견되면 그것을 꼬투리 잡아 비난하고 매장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인류 구속이라는 우주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새 시대 새창조의 역사를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유대인으로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니까 올무를 잡아 넘어뜨리기 위해 늘 눈에 불을 키고 감시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예수님께서 굶주린 백성을 먹이시고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로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의 약점을 잡아 올무에 씌워 넘어뜨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금식을 한 사람들입니다(눅 18:12).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행 26:5; 빌 3:5)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 자들입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 인구는 2만 5천에서 3만 명 정도 였는데 바리새인들은 6천 명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 부활 등을 믿었으며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었으며 철저히 헬라 문화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고, 굶주린 사람을 배불리게 하는 좋은 일을 하는데도 어떻게든 흠을 잡아 넘어뜨리려고 가는 곳마다 주시를 하였습니다. 아마 이들이 보리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어마리로 예수님께서 장정 4천 명을 먹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일반인 같으면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하기 위해 예수님께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하여 마음이 꼬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번 적으로 삼은 예수님을 어떤 일을 해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선행을 베푸는 것도,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도, 병자를 고쳐주는 것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싫으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싫은 것입니다. 잘 해준 사람도 한 번 원수로 삼으면 사사건건 잘못을 잡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인 인간의 마음입니다.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는 참으로 좋은 일을 하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1. 바리새인들의 표적과 믿음/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권력욕(교만)
11절을 보십시오.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힐난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온 목적이 자비를 구한 것도 아니고 은혜를 받기 위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교훈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힐난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밀을 잡아 헐뜯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든 올무를 잡아 공중 앞에서 망신을 주고 넘어뜨리기 위해서입니다. 교인 중에서도 한 번 마음이 꼬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을 합니까?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광야에서 떡으로 굶주린 백성을 먹인 것은 이 땅의 떡이지 모세가 행한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행한 것처럼, 여호수아가 해와 달을 멈춘 것처럼,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한 것처럼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나타내 보라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이 말씀하신 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 것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하면 예배를 드리면서 내 마음을 한 번 감동시켜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해 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진정 그들이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이것 저것 함정에 빠뜨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고 만나기만을 대기하고 있던 자들입니다. 우리도 한 번 악의를 품고 상대를 넘어뜨리려고 생각하면 상상을 하면서 갖가지 넘어뜨릴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까? 상대의 약점을 드러내야만 자신의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선을 은폐하고 모든 책임이 상대에게 있다는 사실을 들어내기 상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혹시 예배드리면서 직장 동료에 대하여 가족에 대하여 교인들에 대하여 바리새인같은 마음을 가지고 오신 분이 있습니까? 마음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예배 중에 오늘도 말씀 가운데 은혜 주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주시는 우리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믿음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 오늘도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온 이들의 생각을 다 아셨습니다.
얼마든지 이들의 요구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표적을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들의 마음을 읽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깊이 탄식하였습니다. 어떤 표적을 보여 주어도 믿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깊은 숨을 끌어올리다는 말입니다. 깊이 한숨을 쉬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맹목과 위선과 완악함으로 예수를 책잡고자 하는데 있음을 보시고 깊은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 위선을 은폐하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잘 해주고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마음에 비수를 품고 이를 갈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탄식이 나옵니까? 지금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적 로마인이 아닙니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힘을 합하여 민족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적이 아닙니다. 그들을 구원하려 오신 분입니다. 그들의 억울함과 그들의 한을 풀어 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올무를 잡기 위해 표적을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고한 그들의 마음을 보고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실망과 분노를 표현한 것입니다. 위선과 형식주의, 아집과 편견, 독선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봉사를 외면하는 자들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은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정죄하는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였는데도 감화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교만하고 완악한 그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많은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예수님이 참으로 아버지께서 보낸 분인 것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표적이 나타났습니다(마3:16,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7)”

우리가 [표적], [이적]과 [기사]를 혼돈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나타나는 사건의 목적과 의미를 표현하는 용어이며 [이적]이라는 말은 일어나는 사건의 성격을 묘사한 말이고 [기사]라는 말은 일어나는 사건의 현상을 주로 표현하는 용어들입니다. 표적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행하신 표적에는 대인 표적과 대물 표적이 있습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내어 쫓거나 불구자를 성하게 하는 표적 등입니다. 이 표적은 반드시 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즉각적으로 모든 사람이 완전하게 치유를 받습니다. 요즈음 행해지는 신유은사를 통한 치유와는 다릅니다. 은사적인 기적은 표적적 기적는 다릅니다. 신유 은사는 믿음이 있는 병자만이 그것도 다가 아니고 더러 점진적으로 나음을 얻게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대물 표적은 예수님이 피조 만물을 상대로 단회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 표적, 몇 개의 떡과 몇 마리의 물고기로 수 천명을 먹이는 표적,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는 표적, 물위로 걸으시는 표적 등이 바로 예수님이 만물의 질서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예수님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즉 만물을 다스리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시기 위해 베푸신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 자를 살리시는 표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 쫓아내어 주었습니다.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었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었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각종 질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입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을 목격하기도 했고 소문을 통해 들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한 때 의심하였습니다.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메시아가 오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35:5-6)”라고 예언을 하였는데 예수님이 바로 예언한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3-5)”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미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이 메시아의 표적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2)”
귀신들까지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라(눅4:41)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수많은 표적을 주었는데도 믿지 못하고 빌미를 잡아죽이려고 하는데 무슨 표적을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마16:4)”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이적을 행하였는데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속임에 불과하거나 사단의 힘을 이용한 사술(막3:22-30)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그들을 "악한 세대" (눅 11:29)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보여줄 것은 오직 폭풍 중에 바다에 던져졌던 요나 선지자의 표적뿐이라는 것입니다(욘 1:2-3). 요나의 표적을 바리새인들은 믿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적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심판을 선포하는 자로 니느웨에 갔듯이, 예수님도 죽음에서 다시 사신 자로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을 심판하시러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였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요나의 표적을 왜 믿습니까? 그들이 보아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경험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면 표적을 봐도 믿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그것을 명백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갔습니다. 불꽃 가운데 고통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께 구합니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7-28)” 그 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29)”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보면서 믿으려고 하지말고 말씀을 통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이야 말로 참으로 복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성경은 말씀합니다. 표적을 보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말씀을 듣는다고 다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행5:3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때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저희가 말씀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했습니다. 사사 건건 시비를 하며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처음부터 경쟁자로, 대적자로 설정을 하니까 무슨 말씀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강퍅한 마음, 완고한 마음, 교만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관계가 나빠지면 전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행7:54에 나오는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4)" 똑같은 말씀이지만 받아들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똑같은 복음이지만 행2:37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7)"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내적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아 믿음을 가지니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세례받은 자가 3천이나 되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교제합니다.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기사와 표적이 나타납니다. 서로 소유를 팔아 나누어 씁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고 백성들의 칭송을 듣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통하여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적에 대한 체험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이적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믿음의 눈으로 주위를 살펴 보십시오. 온 세상은 하나님의 표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길거리의 풀 한 포기, 밭에서 자라는 곡식, 산기슭에 핀 꽃 한 송이 속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이미 이 세상에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성소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보통 장소를 성스러운 장소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

2. 제자들의 표적과 믿음/믿음을 자라지 못하게 만드는 염려
그러면 제자들의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많은 표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갔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합니다. 서로 상의합니다. 떡 가져온 것을 잊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4,000명을 먹이고 남은 떡이 일곱 바구니나 되었는데 그것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배에는 떡 한 개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표적을 본 사람들입니다. 직접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먹을 것으로 걱정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염려합니다. 고민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믿음 약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들이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누룩은 악한 교훈과 부패의 상징으로 특히 은밀하고 간악하여 속으로 침투하는 악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형식주의와 거기서 발생하는 독선과 위선을 말합니다(눅12:1). 헤롯의 누룩은 권력과 부를 지향하는 세속주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 없는 바리새인들과 헤롯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길 원했습니다.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입니다. 본래 그들은 원수지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비난하고 잡아죽이는데는 서로 연합을 합니다. 형식적 신앙과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다가도 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연합하여 공동의 적을 만들어 놓고 상대를 공격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형식주의와 헤롯의 세속주의에 오염되지 말 것을 경계합니다. 나쁜 교훈은 금방 퍼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게 인간을 지배해 버리고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때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오직 떡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한 번 관심을 가진 것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벗어나기 얼마나 힘이 듭니까? 모든 사건의 뚜껑을 열어 보면 맨 밑바닥에 돈문제가 또아리를 틀고 있지 않습니까? 돈에 대한 염려가 마음을 붙들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밑바닥을 드러내면 이것이 드러납니다.
이 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다 아시고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영적 무지를 3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의 핵심과 의미를 바로 꿰뚫는 통찰력이 부족하냐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닫는 것이 느리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장성하여 우선순위가 바뀌고 마음의 태도가 바뀌기를 원한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땅에 것에만 관심을 가지신 그들을 보며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표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아직 성숙한 믿음으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돈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신령한 세계가 보이지 않고 믿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신앙의 체험이 기억되지 않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또 기억지도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영적 무지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충분히 떡을 제공하였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은 군중들이나 나을 바 없는 것입니다. 5천명을 먹이고 4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고 몇바구니를 거두었느냐는 것입니다. 4천 명을 먹이고 몇바구니나 거두었냐고 그들에게 물어 보십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핵심적으로 부른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예수님이 답답해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도 자라지 않으면 우리 예수님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머리가 있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마음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늘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12)” 이 말씀을 믿고 삽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다가 서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돈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믿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표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영안이 열리고 영적 세계에 대한 귀가 열려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6-9)“
아무것 없어도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우리의 의를 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롬 4:5)”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2)”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길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믿음으로 1세기를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일군으로 믿음 하나로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씨가 뿌려졌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길가 같은 마음을 옥토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키길 원하십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기 전에 말씀을 받아들이길 원하십니다. 돌밭 같은 마음을 옥토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키릴 원하십니다. 말씀으로 오는 환난과 핍박을 견디길 원하십니다.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옥토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키길 원하십니다. 세상의 염려의 유혹을 이기길 원하십니다. 재리의 유혹을, 일락의 유혹을 이기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길 원하십니다. 바리새인의 형식주의와(7:4,8), 헤롯의 세속주의(6:17), 사두개인 회의주의(막12:8), 제자들의 비관주의 늪에 갇혀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그 모든 장애물을 넘을 수 있습니다. 표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적을 만들고 믿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쓰임받는 일군들이 되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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