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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 아래서의 삶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307 추천 수 0 2010.10.18 23: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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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9:14-29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8.26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건망증이 심한 집사님이 있었답니다. 화요일 성경공부 모임이 있는데 리더에게 갈 수 없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왜 올 수 없냐고 물어보니까 갑자기 큰아버지 회갑 잔치에서 회갑잔치란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머리에 기억나는 것은 육순(60세)과 회갑이란 말이 생각나 “큰 아버지 육갑잔치간다”고 했답니다. 회갑잔치에 참여했는데 조카가 특별 서비스를 한다고 와서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겠냐고 물어 보았답니다. "설레임"을 먹고 싶었는데 설레임이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망설임 갔다 달라“고 했답니다. 집에 와서 은행 통장 재발행하러 갔는데 은행원 앞에서 갑자기 ”재발행“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이것 재개발하러 왔습니다"했더니 은행원이 한 참 웃더랍니다. 옆에 임산부가 있어서 "산달이 언제예요" 물어 보고 싶은데 그 말이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만기일이 언제예요"라고 물어보자 임산부가 노려보더랍니다.
나이 들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말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내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내 몸이지만 내 속에 있는 장기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 발이지만 내 발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지만 내 마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건강과 자식 문제는 더욱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에 자식 문제로 자신의 능력의 한계 앞에 몸부림치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아들이 간질병에 걸린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심한 경련을 일으킵니다. 땅에 엎드려 굴며 거품을 흘립니다. 이를 갑니다. 때로는 파리하게 질려 죽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반 간질병과 달랐습니다. 귀신이 들려 때로는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아이들 고치지 위해 재산은 허비했을 것이고 가정을 웃을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온 식구가 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문제들이 다가 올 때가 있습니다. 자녀 문제로, 경제 문제로, 인간관계 문제로, 직장 문제로, 부부 문제로 웃음을 잃어 버리고 근심에 쌓여 있는 성도님 계십니까?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문제의 해답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내 문제를 앞에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1. 변론이 아니라 기도로/사역(14, 28-29)
예수님과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서 내려가자 마자 첫 번째 다가온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변화산 같은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문제가 산적한 현실이었습니다. 능력의 한계로 귀신들리고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한 것입니다. 남아 있는 9명의 제자와 서기관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서로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변론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식 문제를 놓고 부부가 변론하다 싸우고 원수가 됩니다. 방법 문제를 놓고 동료들끼리 서로 변론하다 원수가 됩니다. 신앙 문제를 놓고 교인들끼리 서로 변론하다가 등을 돌립니다. 이 문제를 서기관과 제자들, 그리고 무리들은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아버지만 아들의 치료를 위해 간절히 나아갔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제 삼자들은 늘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는 지금 심각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논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논쟁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질병은 귀신들려 생긴 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신들려 되었느냐? 아니면 자연적으로 생긴 병이냐?”라고 논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에 걸리면 그 질병에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 죄 때문에 이런 병이 걸렸느냐?”라고 논쟁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했는데 고치지 못했는데 “너희 선생은 고치는 데 왜 너희들은 고치지 못하느냐?”고 논쟁했을 수 있습니다. 질병 치유는 관심도 가지지 않고 군중 앞에서 서로 논리적 싸움으로 잘났다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본질은 외면하고 인기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 자기 능력을 과시합니다. 논점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지지 세력을 만들기 위한 명분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변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곳은 법정에서 있는 일입니다. 법의 기준으로 죄인가 아니가 누가 어떤 죄를 지었는가를 판가름할 때 법정에서 변론하는 것입니다. 변론하고 다툰다고 악한 것들이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10시간 회의한다고 악한 것들을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변론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변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생각하니까 변론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삶에서 지금 변론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진정 변론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 버립니다. 전투적 사고로 변하여 양심도 말씀의 기준도 살아지고 오직 권모술수와 전략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탄의 사람으로 전락되어져 갑니다.
병원에서 환자 놓고 변론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물에 빠져 죽어가는 웅덩이에서 변론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불행에 처한 그 가정의 행복을 찾아 주는 것입니다. 눈물로 살아가는 부모의 아픔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29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변론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집에 들어와서 예수님께 제자들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변론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처럼 그 문제를 가지고 변론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변론은 하면 할수록 더 부풀어지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합니다. 변론할 시간이 있으면, 비난할 시간이 있으면, 논쟁할 시간이 있으면, 회의할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변론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변론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의견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함정에 빠뜨립니다. 변론으로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은 할 수 없는 것을 풀 수 없습니다. 변론으로 상처가 치유되고 변론으로 관계가 회복됩니까?
기도를 통해 모세는 광야에서 산적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기도를 통해 솔로몬은 지혜와 부귀 영화를 누렸습니다. 기도를 통해 엘리야는 불을 내렸습니다. 기도를 통해 히스기야는 불치의 병을 고쳤습니다.
우리가 지금 변론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변론하기 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도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 구원받을 수 있느냐? 받지 못하느냐? 할례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핍박과 박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교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변론하기보다는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속에 역사합니다. 악한 것이 나아갑니다. 교만이 깨어집니다. 기도할 때 마귀의 궤계가 무너지고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2. 변론이 아니라 믿음/관계(15-23)
삶의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변론이 아니라 기도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예수님께서 다시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변론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불치의 병을 고치는 것이 변론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변론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삶의 복잡한 문제를 푸는 열쇠가 변론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고 하였지만 제자들이 능히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19절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제자들의 영적 실패의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에 있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진리에 대하여 패역하여 불신앙의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논쟁을 하는 서기관과 예수님의 아홉 제자, 그리고 그 주위에 있는 수많은 군중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성경에 능통하고 금식을 하고 많은 논쟁을 하지만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제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능력을 행하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제자들을 통해 무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선한 의지를 신뢰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버지의 회의적인 믿음을 경책하십니다. 반신반의의 믿음을 책망하십니다. 아이의 치유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도 그들 마음 속에 내제 되어 있는 이런 불신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힘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귀신을 변론으로 쫓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곧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틀어지면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면 그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사용하는 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받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믿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제가 대통령의 아들이 되면 청화대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경비가 잡지 않습니다. 내 집에 들어가는데 왜 잡습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대통령이면 아버지의 권세를 어느 정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질과의 관계에서 힘을 얻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신용입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힘을 가지려면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으로 힘을 얻게 됩니다.
이 때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혜가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적한 문제가 있습니까? 내 믿음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들이 믿음을 가지고 가면 실상으로 나타나고 보지 못한 것들이 믿음이 있으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이 믿음이 마음을 지배하고 몸을 지배하고 믿음이 행동을 다스리며 믿음이 미래를 만들어 냅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세상을 바꿉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 백성들과 변론하지 않습니다.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르치라는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그렇게 함으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를 메고 가라고 합니다. 논쟁하지 않습니다. 믿고 나아갈 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립니다. 여리고성을 돌라는 것입니다.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음을 돌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10명의 문둥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합니다. 당시 제사장에게 가면 죽임을 당합니다. 변론하지 않습니다. 믿고 나아가다 보니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예배를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고,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을 예비하였고, 믿음으로 이삭을 축복하였고, 믿음으로 모세는 잠시 고난받는 것을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해 나가십니다. 그런데 그 때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방 군인은 수가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수가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뜨거운 신앙,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무기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 믿음을 통하여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기드온의 3백 용사를 보십시오. 믿음의 사람 3백명, 전략도 무기도 수도 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족하지만 적들에게 없는 것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 갑니다. 결국 오늘 우리 시대에 있어 모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3. 변론이 아니라 말씀의 권세/변화(25-27)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것이 변론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다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로 더러운 귀신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말씀의 강력한 권세로 더러운 귀신을 좇아 냅니다. 귀신은 최후의 발악을 합니다.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나가고 아이는 죽은 것같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변론이 아닙니다. 귀신과 변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이 권세를 주셨습니다. 막6장 7절을 보십시오.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이미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막 3:15).
이 권세를 제자들은 사용해 본 사람들입니다. 6장 13절을 보십시오. “많은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변론 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론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영적 권세를 가지고 말씀으로 악한 세력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는 변론하고 설득하고 회의하고 논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력한 영적 권세를 사용해야 악한 세력이 물러나고 정상적인 정신으로 회복이 됩니다. 베드로는 이 권세를 받았으나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세 번이나 부인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날에 성령 충만받고 이 권세를 사용합니다. 한 번의 설교로 3천명을 회개시켰습니다. 이 권세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의 주신 권세로 말씀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룻다에서 중풍병자 애니아 고치셨습니다. 8년 된 중풍병자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로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행 9:34)”라고 말씀합니다.
욥바에서 죽은 자인 다비다를 살리셨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행 9:40)라고 말씀합니다. 권세를 사용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말씀의 권세가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맺힙게 됩니다. 귀신이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 험담과 비난, 음욕과 교만, 분냄이 다 물러갑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주렁 주렁 맺히게 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내 성품이 바뀌어 집니다. 내 기질 바뀌어 집니다. 참 사람 바뀌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 부부가 차를 타고 시어머니 생신을 맞이하여 시집에 갔다고 합니다. 남편은 늘 부정적인 사람이고 사람을 의심하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교회를 20년 다녀도 변하지 잘 변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면서 결혼을 앞두고 있는 처제 신랑 될 사람을 계속 비난하더라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학벌도 없고 메너도 없고...” 등등 계속 비난하자 아내가 “그만 두세요, 당신은 얼마나 잘났어요.”라고 쏘아 붙였답니다. 그것이 다툼이 되어 싸우고 가는데 차 앞에 개가 어슬렁 거리며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그 개를 보면서 “당시도 저 개같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개가 옆으로 피하자 아내는 창문을 내리고 개에게 “시아주머니 안녕 하였어요.”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개 동생이라는 이야기지요. 인간이 이렇습니다. 참 악합니다. 개같은 기질이 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켜 참 행복하고 평안하고 기쁨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주렁 주렁 맺히게 됩니다. 나도 어찌할 수 없는 귀신들린 아이같은 내 마음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갖가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악한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며 살 수 있습니다. 갖가지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 삶의 기적을 체험받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도구는 달란트와 은사입니다. 달란트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개발해야 합니다. 땅에 묻어 놓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갖가기 은사가 나타납니다. 지혜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의 통역의 은사 등 갖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1)구하여야 한다.(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오순절의 성령도 기도하다 받았고(행1:14), 행4:23-31에도 기도하다 받았고
행8:15-17에도 기도하다 받았습니다. 왕하2:9 엘리사도 구하여 받았습니다.
(2)회개하여야 합니다.(행2:38-39) (3)순종해야 합니다.(행5:32) 행1:12-14의 행동은 곧 행1:4,5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풀지지 않는 삶의 문제가 있습니까? 변론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변론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변론이 아니라 말씀의 권세입니다. 성령 충만받아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게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자신과 세상을 향해 선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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