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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3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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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2007.9.2/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지난주일 저녁 SBS스페셜 “맨발의 의사들”을 보신 분 계실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잘 산다는 나라 미국은 5,000만 명 이상이 의료보험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못받고 매년 2만명 가까운 환자가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쿠바의 국민소득은 한국의 5분의 1 수준인데도 전국민이 무료 교육, 무료의료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동네에 보건의들이 있어 아침에는 환자를 보고, 오후에는 자기가 담당하는 주민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들은 가정의처럼 주민들을 방문하여 병의 원인, 환경을 미리 파악하여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었습니다. 그 가난한 나라가 세계에서 의료 봉사를 제일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63년 이후 지금까지 101개국에 10만 명의 의사들이 무료 의료봉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취재진이 찾은 동티모르에도 전국에 걸쳐 250명의 쿠바의사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쿠바는 2005년 파키스탄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세계 최대 규모인 2천 500명의 의사들을 보내어 160만 명을 치료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의료봉사를 하였습니다.
외국인 장애인들을 불러 전액 무료로 15,725 명의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기적의 작전'이라 불리는 시력회복수술로 앞을 못 보는 중남미의 빈민들을 쿠바로 데려와 무료로 수술해 주었습니다. 그 수가 무려 4년 간 30여 만 명입니다. 향후 10년 내에 장애를 갖고 있는 600만 명의 시력을 회복해 줄 계획이라고 합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는 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중남미, 아프리카, 심지어는 미국에서 온 빈곤층 학생들이 무료로 교육받고 있었습니다. 책, 교복, 식사 심지어는 용돈까지 모든 게 무상으로 제공되었습니다. 이렇게 공부한 학생들은 졸업 후 그들이 살던 가난한 마을로 돌아가 치료받을 돈이 없어서, 병원이 너무 먼 곳에 있어서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이윤추구가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지구 저편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기적이었습니다. “쿠바는 왜 이러한 지원 활동을 하고, 그 대가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쿠바의사들이 하는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돈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는 것. 그리고 아픈 사람이 다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그들이 돌려주는 사랑이 그들이 얻는 대가라고 합니다.” 그들은 혼자의 삶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생각하고 진정한 휴머니즘을 구현하였습니다. 자본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사명에 충성하는 삶이었습니다. 직업을 돈 벌이 수단이 아닌 섬김을 위한 소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단순히 가진 것을 나눠주고 좋은 의사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행복해 했습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것을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님이나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진실한 신앙인으로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나 혼자 흥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 지구촌이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이, 가족, 교회, 직장 민족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헐벗고 굶주린 나라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일을 일부 감당하여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해 보다 낳은 지구촌을 위해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로 공부하지 못하는 최빈국 어린이들 800여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학교를 만들고 계속 학교를 지어가고 있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하여 장학금을 마련하고 어려운 나라에 100개의 교회를 짓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꿈꾸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꿈꾸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힘이 통치하는 지상왕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왕국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지배하는 왕국,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왕국입니다. 아담이 반역하여 타락하고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인생을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나라, 사탄의 노예가 되어 죄의 고리로 묶여있는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나라, 사랑이 지배하여 진정한 치유와 기쁨이 있는 나라,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나라,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병든 자나 건강한 자나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나라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에 이 일을 위해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일을 흥하게 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 길이 흥할 수도 있고 쇠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기업도, 국가도 흥할 수도 있고 쇠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쇠하는 길이 아니라 흥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길을 택해야 흥하는 길을 갈 수 있을까요?
1.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어진 고난을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30-32).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안전한 북쪽 지방을 떠나 고난과 핍박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 길을 택하여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수님 주변에 군중이 모이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복음을 전하며 이 길을 같이 가야할 제자들만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합니다. 첫 번째 예고에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 8:31)”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에서는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라는 말씀을 첨부하였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에 대하여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3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제자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인자가 사람의 손에 넘기워진다는 것은 무리 가운데 배신자가 있음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유다의 마음이 반역을 품고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죽는 것도 부활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시편41:9)과 은 30에 팔릴 것(스가랴11:12)이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을 것이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이해하고 있는 메시아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사악한 헤롯 왕가를 정복하고 왕는 메시아였습니다. 불의한 자들을 정복하고 진정한 공의와 정치적 자유와 평화를 이루는 왕이었습니다. 배신당해서는 안됩니다. 죽어서는 안됩니다. 정복하고 승리하여 메시아가 되어야 합니다.배신당하고 고난당하고 죽임당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에 일어날 이에 대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고난을 두려워하며 피하는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가는 길이라는 것을 거듭 말씀하시고 실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흥하게 하는 길은 고난의 길을 피하는 길이 아닙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자신을 흥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흥하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조그마한 부담도 회피하고 싶습니다. 주님 때문에 조그마한 억울함을 당해도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주의 일하다고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다가오면 가룟 유다처럼 쉽게 배신해 버립니다. 바울을 따르던 부겔로와 허모게네처럼 도망가 버립니다(딤후1:15). 고난이 당하면 다윗을 따르던 아히도벨처럼 모반해 버립니다. 이런 것은 고난이 두렵기 때문도 있지만 생각의 다름 때문에 이러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해 보면 그것을 하나님의 더 알게 되고 지금 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또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체험하는 은혜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다의 생각처럼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을 갔다면 유다는 배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신의 길은 결코 흥하는 길이 아닙니다. 고난 앞에서 피하는 길, 포기하는 길은 쇠하는 길입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맨 밑바닥 9층에 배신자를 넣어 놓았습니다. 배신자 가룟 유다의 길은 결국 자살로 끝이 났습니다. 3년 동안 동고 동락하며 신임해 주어 회계를 맡겼던 제자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배신하고 자결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다윗으로부터 사랑받았던 참모 아히도벨도 압살롬을 배후에서 조정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쇠하는 인생으로 마쳤습니다. 나오미의 두 며느리를 보십시오. 한 며느리는 쇠하는 길을 택하였지만 룻은 흥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고난이 싫다고 고난을 피하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고난을 함께 극복하는 흥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주시는 축복을 모르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주시는 성숙을, 고난을 통해 주시는 미래의 영광을 모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고 피하고 배신합니다.
지난 한 주간 금식기도하며 바울이 인생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사랑하는 아들처럼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목회를 위임했던 디모데에게 유언적으로 보낸 목회 편지인 디모데 전후서를 계속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바울이 노년에 감옥에 갇히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했습니다(딤후2:15). 그런데도 오네시보로는 남아 감옥에 갇히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면회하며 바울을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딤후2:16-17).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렸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지만 누가는 남아 바울을 돌보았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인간의 본모습'과 '그릇의 크기'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인재는 고난 속에 길러집니다. 고난은 변화와 성숙의 시작입니다. 골이 깊으면 메아리는 더 크게 울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은 고난을 무서워하며 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린 사람들입니다. 산을 울창하게 하는 나무는 영리한 나무도, 멋진 나무도, 큰 나무도 아닙니다. 모진 고난에서도 끝까지 살아 남아 있는 나무입니다. 존 칼빈이 즐겨 암송한 성경구절은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3장 13절) 였습니다. 영문 밖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었습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배반 당하시고, 매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영문 밖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셔 죽으신 예수님의 삶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폴리갑은 타오르는 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을 삼키려고 활활 타오르는 불이었습니다. 로마의 권위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떠냐? 이제라도 네가 섬기는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번만 부인하는 것이. 그러면 너는 살아 나갈 수 있다." 천천히 그 로마인을 바라보던 폴리갑이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강인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나를 저 불 속에 던지시오. 어떻게 내가 그 분을 부인할 수 있겠소. 오늘까지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는데!" 눈을 돌려 다시 불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한 고난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흥하는 길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 앞에서 흥하는 길은 주님을 위한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2. 섬김을 받으려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길을 택하여야 합니다.(33-35)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예수님의 왕국을 지상 왕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왕국의 장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그들이 서로 논쟁을 하였습니다. “누가 서로 크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논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아시고 가버나움 집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노중에서 무엇을 토론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이미 노출되어 부끄러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을 불러 놓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왕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고 뭇사람의 끝이 되는 것이고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흥하는 길은 지배하는 대 야망을 섬기는 대 야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쇠하는 길은 섬김을 받으려고 목숨 걸도 투쟁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흥하는 길을 세상을 도울 수 있는 분명한 비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요즈음 일반 회사도 섬기지 않으면 쇠합니다. 섬기는 회사가 흥합니다. 서비스가 좋은 회사가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비스가 좋은 식당이 흥합니다. 최고의 리더는 섬기는 리더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번트 리더십"을 제임스 C. 헌터는 "권력이란 얼마 동안은 효과가 있고 얼마간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나 지속되면 인간관계를 훼손하게 되고 반항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뢰이고 이 신뢰는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즉 사랑의 섬김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최상의 서비스"라는 책을 쓴 발 지(Val Gee)는 "고객의 68%가 단골이 되지 않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나쁜 서비스 때문이다. 한 사람의 불만 고객이 10-20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서비스도 상품이다 "를 쓴 칼 알브레히트는 "우수한 제품을 미흡한 서비스로 제공하느니, 차라리 평범한 상품을 우수한 서비스로 제공하는 편이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김의 도를 가르쳐 준 후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4-17)" 섬김은 망하는 길이 아닙니다. 흥하는 길입니다. 교회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면 세상을 본받다 이 섬김의 정신을 교회가 잃어 가는 것을 봅니다. 요즈음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복음 성가는 “당신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 나를 도와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 민족은 섬김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서열문화 때문입니다. 누가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늘 신경을 써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도 성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항렬을 따집니다. 항렬이 낮으면 그 때부터 말을 놓습니다. 출신학교를 물어보고 반드시 몇 회 졸업이냐? 몇 학번인가?를 물어봅니다. 자신보다 낮으면 그 때부터 상대가 어떤 직분과 어떤 일을 하던 상관없이 내려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적 기독교가 되어서 직분을 서열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다 섬기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엡4:12절을 보십시오. 왜 우리에게 직분을 주었습니까?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고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직분입니다. 만일 교회 직분자들이 섬김의 꿈을 가지고 산다면 서로 비난하지 않으며 분열되지 않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것입니다. 섬김의 길을 순간 순간 택하기만 해도 교회는 쇠하지 않고 흥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섬김의 도를 실천한 조덕삼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국회의원이었던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입니다. 평생 섬김으로 사신 분입니다. 금산 교회를 자기 집에서 개척하고 이자익 목사님을 섬겼습니다. 이자익 목사 장로교에서 유일하게 세 차례 총회장을 역임하신 훌륭한 분입니다. 경남 남해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1세 때 어머니마저 여의고 행상 차림을 하고 전북 김제군 금산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금산리에서 제일 부자인 조덕삼이라는 집에 들어가 머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전주 선교부에서 활동하던 데이트(최의덕) 선교사가 1900년 금산에 도착해 조덕삼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를 했습니다. 이 때 조덕삼 부부와 이자익과 자신의 아들 조영호가 함께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매년 농한기가 되면 전주 서문교회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이 말을 몰고 참석했답니다. 조덕삼은 남자 사경반에서 성경을 배웠고 이자익은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 한글반에 편성되어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게되었답니다. 이렇게 해서 조덕삼 지주가 은혜를 받고 금산교회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부흥되어 교인이 100명 가까이 되자 장로를 한 분 피택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장로 피택에는 머슴인 이자익이 된 것입니다. 상놈과 양반이 가리던 때 주인과 머슴이 경쟁하여 머슴이 장로가 되는 것은 상상도 못할 때입니다. 조덕삼은 당시 최고의 부자였고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머슴과 경쟁해서 머슴이 장로가 된 것입니다. 교인들은 모두 놀라고 당황하였답니다. 이 때 조덕삼 옹은 조용히 일어나 교인 앞에 서서“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얼마나 멋있는 섬기는 인생입니까? 이것은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 서울의 승동교회에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 신자들이 이에 반발하고 떠나 안국동에 안동교회(홍문석골교회)를 세웠습니다. 연동교회에서는 가죽 신을 만드는 갖바치 출신인 고찬익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그 교회의 양반 신자들이 이탈하여 묘동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렇게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조덕삼 옹이 이해한 것입니다. 이것이 흥하는 길이었습니다. 만약 거기에서 섬김을 받기 위해 몸부림쳤다면 그 길은 쇠하는 길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장로가 된 종이 주일이 되면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하면 주인인 조덕삼 영수는 맨 앞자리에 앉아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 주인 조덕삼은 이자익 장로를 신학교에 보냅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자 나중에 장로가 된 조덕삼 장로는 종인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모셔 섬겼답니다. 조덕삼 장로는 유광학교를 설립하고 사업에서는 더욱더 성공을 거두어 나갔지만 교회 일에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돌아가실 때 조덕삼 장로는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절대로 우상 섬기지 말고 제사 지내지 말라, 예수를 잘 믿어야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하며 운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숨이 끊기기 직전 까지 찬송가 525장 (주 믿는 형제들)을 4절 마지막 까지 다 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후손들이 계속 장로가 되어 한 교회를 지금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존경을 받고자 하면 존경으로 섬겨야 합니다. 인정을 받고자 하면 인정하며 섬겨야 합니다. 건강을 받고자 하면 몸으로 섬겨야 합니다. 부자가 되고자하면 물질로 섬겨야 합니다. 마음의 풍요를 누리고자 하면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길은 쇠하는 길이 아니라 흥하는 길입니다.
3. 작은 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대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36-37)
이제 36절을 보십시오. 첫째가 되고자 하면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웠습니다. 당시 이 어린아이들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어디에 가서든지 무시받는 자들입니다. 어린 아이는 출세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명성을 증가시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헬라적 무화권 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 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37절을 보십시오.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나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에게 대하는 태도를 예수님께 대하는 태도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혁명적인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어린이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25:31-46을 통하여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양과 염소로 나눕니다. 그런데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둡니다. 양은 예수님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 의인들이 언제 그렇게 하였냐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40절 보십시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45-46절을 보십시오. 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대하는 길이 흥하는 길입니다. 인생 성공은 대인관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처세술이 있지만 그 복잡한 것보다는 오늘 이 말씀 작은 자 하나라도 예수님 대하듯하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작은 자 하나를 예수님 대하듯하면 대인관계는 성공합니다. 쇠하지 않고 흥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기업도, 국가도 이 단순한 진리 하나만 잘 실현하여도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승재씨가 쓴 "소설 우리 예수님" 중에 "제일 교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입니다. 아주 잘 지어졌습니다. 문화시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일에 헌 누더기를 걸치고 왼팔이 없는 누더기 옷을 입은 거지가 봇짐을 걸머진 채 교회에 들어옵니다. 안내를 보던 남 집사가 떠밀어냅니다. "나 예배보러 왔소" "이런 꼴로 예배보면 안된다."며 송집사는 백 원 짜리 하나 쥐어 주고 보내려고 합니다. 이 때 부목사가 "어디서 왔소" "예배보는데 어디서 온 게 무슨 상관이요, 나 집이 없는 줄 뻔히 알지 않소." "누구 소개로 왔소" "거리에서 예수 믿으라라는 말 듣고 왔소" 들여보냈습니다. 송집사는 헌금 훔치러 왔으니 보내자고 합니다. 그 주변에는 아무도 앉지 않습니다. 부목사가 나가면서 인사합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이요. 그럼 다음 일요일에 많은 친구들을 데려 오겠소." 거지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다음 주 헌금 시간에 헌금바구니를 그 앞에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헌금할 수 없소." 당회에서 구제비 주고 못 오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거지아이 "우리 아저씨가 목사님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다리 밑 가마니로 가리고 사는 천막에 희끄무레 죽은 시체 같은 몸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듯 소리 없이 한 쪽 손을 들려고 하였습니다. 손에는 꼬기 꼬기 꾸겨진 100원 지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가를 말하려다가 끝내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가 외면하는 이 거지가 예수님일 수 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며느리가, 내가 보기 싫은 시어머니가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친구가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혼하고 싶은 남편이 아내가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속 섞이는 자식이, 늘 손해만 끼치는 일가 친척이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가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늘 비난하는 성도가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 자, 세상의 실패자들이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거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올 수 있습니다. 한 아이를 예수님처럼 대하는 것이 흥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쇠하는 길이 아니라 흥하는 길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고난을 피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어진 고난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작은 자를 무시하는 것보다는 작은 자를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처럼 존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고난을 피하는 길보다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길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작은 자를 무시하는 길보다는 작은 자를 존귀하게 여기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 길이 마침내 흥하는 길입니다.
2007.9.2/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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