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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의 원리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767 추천 수 0 2010.11.17 23: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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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1-12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제가 이 시간 우리 성도님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할 터인데 답을 잘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청년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할 때 자매가 아이를 갖지 말고 둘이만 행복하게 살자고 했습니다. 그 청년도 동의하고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 3년이 되어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부모님 몰래 그런 약속을 하고 결혼하였는데 3대 독자인 아들에게 어머니는 “왜 아이가 없느냐”고 다그쳤습니다. 아들은 차마 결혼 전 약속을 말하지 못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남편도 아이가 있었으면 해 아내에게 아이를 갖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이를 낳으면 몸매가 망가진다고 아이 갖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말다툼이 잦아졌고 중소기업을 하는 남편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면 이혼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살집과 평생 생활비를 주지 않으면 이혼해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럴 때 재판으로 남편이 이혼할 수 있을까요?
민법 제840조에서 규정한 민법상의 재판상 이혼원인은 6가지입니다. 첫째, 배우자의 부정한 행위. 둘째, 배우자의 악의의 유기. 셋째, 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에 의한 심히 부당한 대우. 넷째, 자기의 직계존속에 대한 배우자의 심히 부당한 대우. 다섯째, 배우자의 3년 이상의 생사불명. 여섯째,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입니다.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 중에 이런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중혼, 배우자의 범죄, 부당한 피임, 성병의 감염, 이유 없는 부부 생활 거부, 성적불능, 불치의 정신병, 부부간의 애정상실, 성격불일치, 수년간 계속된 사실상의 별거, 혼인 전 부정으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 어린아이에 대한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모욕 또는 가해, 신앙의 차이, 또는 과도한 신앙생활, 알콜(마약)중독, 방탕한 생활, 가계를 돌보지 않는 배우자의 난맥 행위, 낭비나 불성실 또는 지나친 사치 등이 있습니다. 결혼이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제도이기 때문에 시대 마다 나라마다 결혼을 마음대로 파괴하지 못하도록 법적 제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중국에서도 삼불거칠출이라 하여 7가지 아내를 버릴 수 있는 것과 아내를 버릴 수 없는 3가지를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①불순부모 ②무자 ③음벽 ④질투 ⑤악질(惡疾) ⑥다구설(말이 많은 경우) ⑦절도(竊盜) 등 7가지를 들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7거 지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불거로 ①유소취무소귀(돌아갈 친정이 없는 아내) ② 여경삼년상(함께 부모의 3년 상을 지낸 아내) ③ 전빈천 후부귀(구차스러운 때 들어와 집안이 흥성한 경우의 아내) 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리지 못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중국인 사회에서 근대 민법이 시행되기 시작한 20세기 초엽까지도 이혼에 관한 불변의 규준(規準)으로 적용되어 왔으며,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도입되어 대한제국말까지 기처 또는 며느리 추방의 근거 규정 구실을 하였습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관습과 법이지만 상당히 남성 중심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 사람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첨예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해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이 문제로 예수님을 걸고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 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주고 처형할 수 있는 근거를 잡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올무를 걸어 처형할 명분을 찾기 위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정치적 의도성이 있는 질문입니다. 정치적으로 올무에 걸어 처형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시험하려고 질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 당시 사회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이혼 문제를 질문한 것입니다. 당시 이혼 경력이 있는 헤롯 안디바가 이복 형제인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이하자 세례 요한이 정면으로 반박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처형해 버렸습니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잘 못 말하였다가는 세례 요한과 같은 위기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대하여 간음 이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밝혔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의 입장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마5:27-32)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로 민감한 문제를 의도적으로 거론함으로 예수님을 처형시킬 명문을 얻고자 했을 것입니다.

종교적 의도성이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올무에 걸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힐렐 학파와 삼마이 학파가 있었습니다. 이 두 학파가 이혼 문제에 대하여 당시 팽팽히 맞서고 있었습니다. 힐렐은 바벨론 태생으로 예루살렘에 와서 율법 연구에 크게 성공을 하여 그 도시의 최고 학부 교장이 되었습니다. 이혼의 조건으로 남편을 불편하게 하는 것 즉 음식 망친 것, 밥을 짓다가 태웠우는 것, 다투기 좋아한 것, 남편을 성가시게 하거나 난처하게 하는 것, 아내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다닌다거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린다거나, 아내가 시끄러운 여자이라거나, 혹은 남편이 더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다면, 아내는 버려질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힐렐의 제자인 샴마이는 도덕적으로 부정한 경우에만 이혼을 허락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견해차이가 나는 것은 모세가 신명기 24:1에서 이혼에 대하여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고 말씀하였는데 그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샴마이 학파는 수치되는 일을 음행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음행한 경우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어 쫓을 수 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힐렐 학파는 달랐습니다.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 22:22)”라는 말씀처럼 간음죄를 저지르면 이혼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형을 시켰기 때문에 “수치되는 일”은 간음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우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문제를 예수님께 질문함으로 어느 한쪽 파와 필연적으로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도록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든 둘 중 하나와는 원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인격에 흠을 잡아 매도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혼하라고 하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순되고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왜 어긴 죄를 지었다고 따질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최종적이 권위로 인정하고 있는 모세의 율법에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악한 의도로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 본질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이혼에 대하여 뭐라고 하였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 때 바리새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좋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누구든지 자기 아내에게 이혼장만 써 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님이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왜 그렇게 말하였겠느냐? 그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허락하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이혼을 제도적으로 만들어 이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여성들을 도구처럼 취급하던 시대에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자녀를 낳는 수단, 성적 도구, 경제 수단으로 생각하던 시대에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하에서 이혼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상황의 방지를 위한 입법 조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완악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둔감하고 사랑이 결핍된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혼증서가 없으면 이혼 당한 후에도 계속 한 남자의 아내로 계속 남아 있게 되었고 만약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면 창기 취급을 당하였고 심지어는 간음죄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방지하기 위해 그 말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계속적으로 학대받는 자리에서 해방시키고 공식적으로 이혼 증서를 써줌으로 합법적으로 여인들이 재혼하여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의도적으로 이혼할 것을 가르치거나 조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행복한 가정 생활에 대한 원리를 말씀합니다. 창조 질서에 근거하여, 모세 이전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의 원리를 말씀함으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한 가정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정 생활의 원리, 결혼 생활의 원리가 무엇이겠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세 가지입니다. 행복한 가정 생활을 위한 세가지 원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결혼시킬 때 주신 주례사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이혼에 대하여 질문할 때 똑같은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결혼한 이방인들에게 똑같이 결혼 생활의 원리에 대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1) 그러니까 결혼하는 사람에게나, 이혼을 앞에 둔 사람에게나, 이미 결혼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동일하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에게, 유대인에게,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가정에서 이혼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독립의 원리 즉 떠남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창세기에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떠난다”는 말은 아자브라는 말인데 “굴레를 벗기다. 떠나다. 중지하다”라는 뜻입니다. 부모로부터 정신적 경제적 인격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부모를 떠난다는 원리이다. 동양사회는 여자가 부모를 떠나는데 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했겠습니까?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 인간 삶의 습관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원리는 부모의 권위 통치로부터 떠남을 말합니다. 이제는 한 가정이 새롭게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는 새로운 가정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부모에게 종속된 생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도 떠나야 하고 부모도 떠나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잘되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시부모와 친정 부모에게 결혼하여서도 여전히 종속되어 많은 가정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 사회는 부모도 과도하게 자식들에게 집착하고 있습니다.
딸을 낳으면 부엌에서 죽고 아들을 낳으면 집문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딸을 낳으면 시집을 보내고 손자 손녀 보아 주고 집에 가서 김치해주고 설거지 해주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아들은 낳으면 며느리 두려워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저 김치해다 아파트 현관에 갔다 놓고 오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아버지는 "애야 너는 이제 결혼을 하면 네 가정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집은 언제까지나 그리고 언제든지 너를 환영할 것이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다. 네 남편과 함께 와야 한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을 이루면 모든 익숙한 습관과 분위기 안정감을 포기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내적 분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배우자의 허용과 배려를 우선시 하는 자세입니다. 부모와 성인으로서 관계 갖는 것입니다. 부모의 생각, 견해, 행동보다 배우자의 생각과 감정 행동을 중요시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동의와 도움과 충고를 얻기 위해 무조건 부모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기존의 질서를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남편과 아내가 과거의 친구 친정, 과거의 습관, 사상, 생활 태도도 떠나야 합니다, 그것을 절대시하고 떠나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둘째가 연합의 원리 즉 하나됨의 원리입니다.
“다박”이라는 말은 “밀착하다. 닿다. 확고히 머물다. 굳게 결합하다. 용접하다 아교로 붙인다”는 뜻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편 100% 헌신과 아내 100% 헌신을 요구합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랑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이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한 단위가 되는 것입니다. 옛 친구가 있다면 이제 부부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경제도, 정서도 취미도, 삶의 환경도 이제 부부가 공유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연합을 방해하는 요소는 그 어는 것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 돈, 성격차이, 시집 식구, 친정 식구 등이 끼어 드니까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의 만족, 자녀, 친인척, 경제 그 어떤 것도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끼어 들어 하나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 씨소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삼각점의 꼭지점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관, 가치관이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토요일이면 부부가 같이 나와 청소하시는 집사님들을 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자신의 종교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외적인 종교의식과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 자기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신앙 생활하며 능력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20-30년을 각자 생활하였는데 연합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않습니다. 서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면 됩니다. 서로 인위적으로 가까이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삼각점을 만들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서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까?를 생가하고 서로 어떻게 하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것인?가 서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다보면 더욱 가까이 가게 되고 연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가 일치의 원리 즉, 한 몸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아담에게서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결혼을 통해 둘이 합하여 다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 7:4-5)”
단순하게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결합을 넘어 새로운 존재로의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1+1=1이 되는 원리입니다. 경제활동, 사회생활, 신앙 생활에 있어 한 단위가 되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하나되는 관계로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기고 가정이 행복하지 못합니다.
세계미래학회가 발행하는 미래예측 전문지 <퓨처리스트>에서는 21세기의 가족은 자녀의 재생산.양육 및 사회화 그리고 가족애라는 전통적인 가족 기능이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맞벌이의 증가로 가족은 남성화되고 결혼이 거래라는 개념으로 이혼이 가정파탄이 아니고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는 긍정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가족 형태 즉 장기동거 뒤의 결혼, 혼합가정(이복형제가정) 및 입양가정의 일반화, 저소득층의 결손가정화, 동성애 가정의 합법화, 성적 결합없는 공동거주 등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부가 행복해지려면 만고 불변의 가정원리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결혼이란 신분 상승, 경제 계약, 필요 충족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9절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필요없다고 갈라서서도 안되고 용도가 끝났다고 폐기 처분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혼을 허락한 경우는 간음한 경우(마5:32)와 믿지 않는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한 경우입니다(고전7:15). 이것 역시 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허용한 것입니다. 9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결혼도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셨습니다. 이혼은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결코 명령되거나 조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말3:15-16). 이혼은 두 가지 바탕 위에서 허용적이며 강제적인 것은 아닙니다. 첫째로, 만일 그의 배우자가 심각한 성적 부도덕성의 죄책이 있다면 결백한 쪽은 그 배우자와 이혼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둘째로, 만일 믿는 이가 한편 배우자로부터 함께 살기를 거절당할 경우에 그 남편 혹은 아내의 결정에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기관으로 가정을 만들어 그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인적(全人的)인 인격체를 만들기 위해 홀로 독처하는 것은 하나님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동반자적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배필로 만들엇습니다. 가정 안에서 건전하고 건강한 부부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였습니다.

부득이 하게 이혼하였다고 절망하며 인생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누가복음은 4:18-19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이사야 61장 1절 이하를 인용한 내용인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때로는 이혼의 아픔을 앉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간음의 아픔, 범죄의 아픔을 앉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님께 찾아 오는 그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예수님을 만나 참으로 치유받고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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