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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부족한 것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532 추천 수 0 2010.11.17 23: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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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17-22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어제 이 권사님 아드님 결혼식 주례를 서울에 있는 예식장에서 서고 오는데 교회까지 오기 위해 레비게이션에 목적지를 교회로 찍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잘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로 안내하여 그곳으로 가지 않고 서울 분당간 고속화 도로를 타고 왔습니다. 그런데 오면서 계속 우측으로 빠져 나가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미 들어선 고속화 도로를 타고 계속 오면 교회가 나오기 때문에 무시하고 달렸습니다. 어느 정도 가면 다시 교정하여 제대로 된 길로 안내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분당에 거의 다 들어섰는데도 계속해서 고속도록 쪽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남은 거리가 계속 올라가서 얼마 남지 않았는데 48km가 남았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야탑 역에 내리시는 분이 있어 야탑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대도 역시 고속도로 쪽으로 가라는 지시가 나왔습니다. 옆에 타고 있던 조 목사님이 ‘레비게이션을 껐다가 다시 켜면 제대로 나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어느때까지 그렇게 하는가 보자하고 재부팅하지 않고 계속 교회로 달려왔는데 교회에 들어 섰는데도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남은 거리 52KM가 나왔습니다. 레비게이션 고집이 대단했습니다.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교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미 설정된 길이 전부 인줄 알고 인도하는 레비게이션을 보면서 어쩌면 인생도 그렇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길에 관한 사람보다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인지 지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주어진 정보를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되면 오로지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1. 만족할 조건을 가진 청년
예수님이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 있었습니다. 죄로 죽어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라고 말씀하였듯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이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어떤 젊은이 입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부자 청년이었습니다(마19:22). 부자가 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그것도 30대의 젊은이인데 부자라는 것은 사람들의 대단한 부러움을 샀을 것입니다. 젊다는 것도 부러움의 대상인데 젊은데다 부자라는 것은 참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입니다. 부모가 부자이었든지 아니면 자수성가를 했든지 아니면 부정하게 돈을 벌든지 셋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자신 스스로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아 사기쳐서 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당시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젊은 날에 자수 성가할 만한 사회 구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부자여서 재산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부자가 되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권력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의 의지대로 지배하고 싶은 권력욕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에게는 적당한 권력도 있었습니다. 젊고 부자일 뿐 아니라 이 젊은이에게는 권력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관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눅18:18). 중앙에 있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는지 지방의 관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권력까지 주어진 것입니다.
만약 딸을 결혼시키려고 한다면 이 정도면 신랑감으로 어떻습니까? 아마 신랑감 1위 정도 될 것입니다. 4월 23일자 한국일보 신문을 보니까 요즈음 배우자 감 1위는 남성은 여성의 가정환경 따지지 않고 예쁘면 최고 있고 여성은 남성 외모 안따지고 돈 잘 벌면 최고라고 합니다. 젊음과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선호하겠습니까? 요즈음 청화대 들어간 수석들 얼마나 주변사람들이 부러워했겠습니까? 돈도 많고 젊음도 있고 권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언론에 도덕성으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조건이 다 있다고 할지라도 순식간에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비단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달랐습니다. 도덕적으로 거의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17절에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길거리에서 예수님 앞에 달려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 자신은 부자이지만 예수님은 초라한 가난뱅이입니다. 자신은 권력자로 힘이 있는 자이지만 예수님은 야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 나와 거리에서 그것도 공개적으로 무릎은 꿇는 것을 보면 대단히 겸손한 사람입니다. 20절에 보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을 어질 적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사위 삼을 만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자신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해 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만한 조건을 다 갖춘 젊은이처럼 보입니다. 젊습니다. 젊다는 것은 건강하자는 말입니다. 꿈이 있고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도덕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조건으로 참으로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인생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쾌락을 즐겨봐도 뒤돌아서면 무언가 모르지만 공허한 것이 있었습니다. 가수 송창식씨가 노래했지 않습니까?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 무엇을 할것이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윤영준 목사님이 쓴 [그 다음은 또 어떻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맨 첫 번째 나오는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16세기 성자라로 불리우는 필립 디 네리라는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당시 최고의 대학이었던 컨티넨탈 대학의 교정을 걷고 있었답니다. 그 때 어떤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에게 왜 이 학교에 왔느냐고 물어보니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드라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리는 청년에게 "대학 공부를 다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 했더니 청년은 "박사 학위를 얻겠습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리는 계속 질문을 하였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무엇을 하겠는가?" "아주 힘든 문제를 몇 개 맡아 웅변과 지식으로 멋지게 변호처리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명성을 얻겠습니다."
네리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그 후에는 많은 돈을 벌고 드디어 부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네리는 다시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명성과 재물을 소유한 중에 평안히 살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리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그 다음에는 내가 아마 늙어 죽게 되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네리 마지막 또 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그 다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한 인간은 이 땅에서 참으로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젊은 부자 청년은 이 문제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2. 한 가지 만족하지 못한 것

인간은 동물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자고 쾌락을 즐긴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를 애써 외면하려고 하지만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 조금만 가져도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사람이나 나름대로 그 문제로 종교적이게 됩니다. 동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영리한 동물도 돌을 쌓아 놓고 비는 동물 없습니다. 줄을 쳐 놓고 비는 동물 없습니다. 교회 지어놓고 사당 지어놓고 예배드리는 동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민족이나 나름대로 신을 찾고 갖가지 종교 행위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9)”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종교의 씨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이 마음 속에 계셔야 참 만족을 누릴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영적 공허함은 부나 권력이나 명예나 쾌락이다 도덕적 삶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주님께 와서 물어 보았습니다. 무엇을 물어 봅니까? 돈버는 방법이 아닙니다. 어떻게 정치를 할까를 물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영혼에 대한 문제입니다. 내세에 대한 문제입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이 문제를 잃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이 영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참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영원한 세계 내세와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 하나로 믿어 주고, 도와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어제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진 어느 장로님을 만나 이야기 하는데 대화를 나누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청년을 보시고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특했겠습니까? 당시 지식과 돈과 종교적 권력을 가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올무를 걸어 예수님을 죽일 것인가 궁리하며 접근합니다. 제자들은 특별히 불러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 기르고 있는데 여전히 세상 왕국에만 관심을 가지고 누가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더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인가를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력과 돈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 내세, 영생에 대한 관심을 보이니 얼마나 마음에 흡족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3. 영생에 이르는 길
이 청년는 죽음 후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무엇이라고 물어 봅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어 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 청년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는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의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수정해 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선생님이 정도에서 머무신 분이 아니십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일을 행하여야 하고 선한 일이라면 선한 선생이신 예수께 묻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청년은 예수님을 랍비 정도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즉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가 나를 인간으로 보았다면 인간은 그 누구도 선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선한 이는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유추하면 예수님은 바로 선한 선생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4대 성인, 본받아야 할 분, 위대한 교사, 위대한 리더 정도로 받아들이면 그곳에는 영생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을 구원할 구세주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7:3에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9)”
예수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이 누구로 받아들이느냐는 인생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2,3).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며” (요 6:38),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며” (요 8:58), 창세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계셨다” (요17:5).

그는 어떤 행위를 통해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청년에게 인간에 대한 계명을 말씀합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속여 취함, 부모 공경 이런 계명을 지켰느냐는 것입니다. 너가 알기로 선을 행하여야 구원을 받은다면 이런 계명을 잘 지켜 선한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때 이 청년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일반 유대인의 과정을 쫒아 6세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또 준수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모든 인간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인간은 형식과 겉모습 밖에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은 내부 동기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위선과 허위 형식주의가 통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선한 행위로는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인데 정말 선하다면 네 이웃을 사랑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너의 재물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기는 것과 같은데 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에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 한 자가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했습니다. 자기 의로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보 시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 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 에 있는 영생이니라"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 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무엇을 행하는데 (to do)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같이 되는데(to be)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나에게 한 가지는
그 말을 듣고 이 청년이 어떻게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22)”
그가 주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따르면 영생을 얻는 하나님 나라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 한 가지를 주님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 마음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그 청년의 마음을 지배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려면 우리 모두가 재물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따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다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동방의 부자 욥에게 모든 재물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에게 너의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요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이삭을 요구하였습니다. 모세에게는 애굽의 권세를 내어놓도록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내려놓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의 책상을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 자랑할 만한 것을 배설물로 내려 놓았습니다. 이 한 가지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쫓는데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진정 메시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보다 더 우선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보다 더 가까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어떤 것도 주님과 바꿀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배신하고 저주까지 하고 떠나버린 베드로를 찾아가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상보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이 부자 청년은 영원한 나라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잠시 살다 없어질 안개와 같은 목숨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더 사랑하기를 예수님은 원했습니다. 우선 순위 1번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쫓으면 됩니다.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 주님을 진정으로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삶으로 집요하게 나가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서울대(소비자학) 김난도교수가 쓴 숭배의 경지에 이른 상품 '컬트상품'의 조건이라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4가지 조건을 말했습니다. “Fun=재미있어야 한다, Identity=소비자의 정체성 표현, Narrative=이야기를 가져라, Elegance=우아해야 한다.”였습니다. 숭배의 경지에 이른 상품은 198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안겨준 워크맨처럼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의복은 권력의 가장 우아한 표현"이라는 말과 같이 BMW, 몽블랑 만년필, 혼마 골프채, 소비자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상품을 통해 정체성을 표현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년필 촉에 들어가는 공정만 100여 단계를 헤아린다는 몽블랑의 이야기, 좌절·암투병·재기(再起)로 이어지는 소설 같은 역정의 스티브 잡스(Jobs)를 가진 애플처럼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소비자가 구매하고자 하는 것은 상품의 기능이 아니라 그것이 약속하는 환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상품의 세계에서 여전히 미(美)는 진(眞)이자 선(善)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에 우아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것들의 첫 자를 따 “F.I.N.E.”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상품으로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재미도 없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초라하게 보이고 감동도 없으며, 우아함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구주이시고 우리 인생의 왕이십니다. 우리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재미없는 삶도 초라한 삶도, 감동이 없는 삶도, 우아함을 잃은 삶도 아닙니다. 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면 우리 주님을 우리를 어떻게 해 주십니까?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0절 보십시오.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30)”

이 청년은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님을 포기하고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좇는데 포기하게 하는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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