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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0:4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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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사람이 다 다른 만큼 세상에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인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 두 사람의 인생 실화를 소개할텐데 무엇이 다른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꿈은 전원에 ‘하얀집’을 짓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런 집을 지으려고 대학 전공도 건축과를 택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건축 공사장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목재를 나르다 뒷머리를 다쳐 머리 뒤쪽 시신경이 상해 시력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절망이었습니다. 온갖 비방을 동원했지만 사라진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몰래 모아둔 신경안정제를 수십알 먹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몇 해를 끝없는 방황 속에서 헤매다가 산으로 가 넥타이로 목을 맸습니다. 그러나 넥타이가 끊어져 실패했습니다. 열심히 살겠다고 결심하고 3년 과정의 맹인학교를 다니며 안마를 배웠습니다. 인체의 600여 경혈을 모두 외웠습니다. 침술도 함께 배워 안마원을 차렸습니다. 허리가 불편해 안마치료를 받으러 온 처녀를 치료하면서 사랑이 싹터 그녀와 결혼도 해 아들 딸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안마원 주변에 ‘스포츠 마사지’ ‘휴게텔’과 같은 멀쩡한 사람이 안마를 하는 퇴폐성 업소들이 생기면서 손님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2만원 하던 안마비를 1만원으로 깎아 주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헌법재판소는 ‘맹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증을 주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한강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빚 갚을 일도 막막하고, 가족을 부양할 방법도 사라졌습니다. 세번째 자살 시도했습니다. “제발 이 죽음이 헛되지 않게 도와달라”말하고 몸을 날렸습니다(김용화씨 이야기 40)
이번에는 비슷한 한 시각 장애인의 실화입니다.
그녀(김기현 33)는 수학능력시험 전국 석차 1% 안에 드는 수재였습니다. 1994년 연세대에 특차로 입학한 후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해 6월 턱 부정교합 수술을 받으면서 구강내 과다출혈로 기도가 막혀 약 3분간 질식 상태에 빠지는 의료사고를 당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온몸을 끈으로 묶어놓은 듯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눈앞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했습니다. 가족들의 정성어린 보살핌과 그녀의 눈물겨운 재활의지로 운동신경이 회복됐습니다. 그러나 시력은 영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1995년 2월. 8개월 만에 퇴원했습니다. 머릿속엔 '어떻게 죽을까?'란 생각만 맴돌았습니다. '살아서 무얼하나?' 비관적인 생각에 15층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15층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아찔했습니다. 23년밖에 살지 못했는데 자신이 불쌍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줄기 생각이 있었습니다. '정말 지옥이 있을까?'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절망스러운 세상을 떠나지만 지옥에 가서 고통받을 생각을 하니 더 없이 괴롭고 분했습니다. 그녀는 자살을 포기하고 1급 시각장애인 등록을 하고 중도실명자를 위한 기초재활훈련을 받았습니다. 김정주 교수를 만나 예수님과 복음을 소개받았습니다.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세례도 받았습니다. 실명으로 어둠 속에 있던 그녀가 빛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 영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믿음 좋은 청년을 만나 결혼도 하였습니다. 시아버지는 장애인학교 인천 혜광학교 교감선생님이셨고 어머니도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장학금을 받고 보스턴대학교 재활상담학 석사과정을 입학 전과목 A를 맞았습니다. 졸업 후 아시아지역 장애인들을 위해 일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돕기 위한 비전을 향해 하나님이 주신 힘과 지혜로 하루하루 걸음마를 떼고 있습니다.
대학을 다니다 똑 같이 실명을 하였였습니다.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릅니까? 한 분은 장애를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만났고 한 분은 삶의 의지는 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각양 각색의 삶을 살고 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 사는 인생과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지 못한 인생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수많은 장애를 만나게 됩니다. 실제로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장애를 만날 수 있고 삶의 과정에서 어떤 일을 이루는데 갖가지 형태를 가진 수많은 장애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장애나 장애물이 거침돌이 되어 절망하며 포기하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을 그 장애와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고 일어서 가치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장애와 장애물을 극복하며 참으로 가치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장애와 장애물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는 것입니다(47,52).
오늘 성경에 보면 바디매오라는 거지가 나옵니다. 이름도 없는 사람입니다.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시각 장애인입니다. 취업할 길이 없습니다. 구걸하는 것이 직업입니다. 하루 하루 목구멍을 채워야 하는 가난뱅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자신 뿐 아니라 형제 부모들이 얼마나 힘이듭니까? 육체적인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평생 갑니다. 정신 지체 (지능지수 69 이하), 시각장애, 청각 장애, 지체장애, 정서장애(행동 장애, 부적응 행동, 미숙아), 언어 장애,특정 학습 장애, 복합 장애, 자폐증 등 장애가 오면 손상으로 생각하게 되고, 불능, 불리로 받아들여져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합니까?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사람을 기피합니다. 죄의식을 가집니다.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버립니다. 바디매오처럼 거지가 되어 사람들의 동정에 의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스로 설 수가 없습니다. 도와야할 가족에게 큰 부담으로 느끼게 됩니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고대에는 장애인들을 공동체의 유지, 존속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추방하거나 유기하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특히 스파르타 사람들은 리쿠르구스 법전(Lycurgus,B.C 800년경)에서는 장애인과 노약자를 산중에 유기할 것을 명시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장애인을 강물에 던져 익사시키거나 투기장의 주인공으로 삼았으며, 또한 뚜렷한 장애를 보인 아동들은 광장에 목매달아 죽였고 후천적으로 장애를 입게 된 아동들도 살해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환영받고 소용되어야 할 가족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단란한 가정의 칩입자나 파괴자의 취급을 받습니다. 특히 선천적 장애인의 경우, 집중적 보호를 받아야 할 신생아 시절에 장애아 탄생의 충격에 빠져 있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장애 자체에 대한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됩니다. 장애 아동의 부모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인은 가족 구성원 끼리의 관계를 통해 인생을 배우는 기회에서도 소외되어 버립니다. 장애인은 이 세상의 출생 또는 장애 발생 시기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인생은 비참하게 끝나버릴 인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자신의 옆에 나사렛 예수가 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유월절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 곁에 지나가는 기회를 포착하였습니다. 자신의 이 천형같은 소통을 벗어 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뿔쌍히 여기소서.” 그는 그의 장애 때문에 예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장애가 없었다면 예수님께 그렇게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1)그는 자신을 불쌍한 존재인 것을 인정했습니다(46).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신이라고, 하나님은 필요없다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앎이란 얼마나 극히 작은 것에 불과합니까? 월요일 사랑 마을 교회에서 나물 소풍을 갔습니다. 저도 따라갔는데 산에서 나물을 깨는데 집사님들은 잘 깨었습니다. 저는 쑥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알지 못하니까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적 세계도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소경은 육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장애를 통하여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듣기는 나사렛 예수라고 들었습니다. 나사렛이란 천하게 쓰임받는 이름입니다. 인간 예수님을 비하하여 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자연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소경은 대조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사야 35장 5절에 보시면 메시야가 오시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시면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이 열리고 귀머리가가 듣고 있다”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메시야적 기적 사역의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말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우리는 쟁애를 인정하고 내 인생의 장애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사실을 믿고 장애물 때문에 오히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 가지고 나오면 우리는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의 장애를 치유시키셨습니다.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이 치유를 받습니다(요9:1-41). 간질에 걸린 아이가 치유를 받습니다. 중풍으로 누워 있는 자가 치유를 받습니다. 선천적 지체장애인의 치유(행3:1-4:22)를 받습니다. 18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던 여인(눅13:10-17)이 치유를 받습니다.
장애를 장애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발전하면 차이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장애 역시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은혜, 선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장애는 때로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바디메오가 시각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 까요? 아마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장애로 인하여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기적을 체험받았습니다. 장애가 아니었다면 그는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성경에 기록되어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 9장 1절을 보십시오. 선천적인 시각장애자입니다.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누구죄로 이렇게 저주를 받았냐는 것입니다. 자기 죄입니까? 부모죄입니까?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애를 무조건 죄(자범죄)의 결과로 생각하는 그릇된 사회의 인식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 장애인이 되게 하셨다고 천명하셨습니다.(요9:1-3). 디모데 전저 4장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우리가 장애도 기쁨으로 받으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고 행복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고, 불편한 것도 아니고 저주받은 것도 아니고 숨겨야 할 것도 아닙니다.
한 때 시각 장애를 가지 바울의 자세를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7)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8)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신체가 손상되고, 정신이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개개인이 갖고 있는 능력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며, 사회에 진출하여 저마다의 존엄을 누려야 합니다. 비록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중증의 장애인도 그들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비장애인들과 부딪기며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애가 있던지 없던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며,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실명, 이는 매우 끔직한 일이기도 하고,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실명을 한 직후, 아니 실명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직 후 어느 기간 정도는 심각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에게는 육의 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눈,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의 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고 이 눈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인생을 180도 바뀌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다 준 최대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2. 주님께 나아가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예수님께 나아가 문제를 해결받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1)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보여야 군중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머물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바디매오는 어떻게 합니까? 소리를 지릅니다. 금요일 성도님들과 함께 산기도를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절박하면 부르짖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불이 났는데 소근거릴 수 있습니까? 체면이 우리를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가는데 방해할 수 있습니다.
2)사람들의 편견입니다.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48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꾸짖었습니다. 장애인 주제에 왜 소리를 지르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장애인은 죄인 취급했고 같이 어울려 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너 같은 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냐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소극적이고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잘 갖추어진 사람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장애아가 어떻게 교회에 나가냐고 생각해 버립니다. 자꾸 숨기고 은폐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는 눈은 없지만 부르짖을 수 있는 입이 있었습니다. 48절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경이 수식하고 있는 단어를 주의 깊게 보십시오. 더욱 심히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 주십니까?
4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머물렀습니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나와 부르짖는다해도 우리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고” 우리는 사람들의 편견의 장애 앞에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①장애인은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②장애인은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③장애인은 사회에 유익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④장애인은 늘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차별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력 장애인 이삭을 축복의 전달자로 사용하였고, 시력 장애를 가진 바울을 세계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고, 지체 장애인 야곱에게 축복의 증거를 보여 주었으며, 언어 장애인 모세를 사용하였습니다. 오른손 지체 장애자 에후를 사용하였습니다. 범죄하고 시각장애자가 된 삼손의 기도를 응답해 주었습니다. 메시야의 작곡자 헨델을 아실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발사 겸 의사였습니다. 그는 아들을 법률 공부를 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헨델을 음악을 공부하였고 25세에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737년 파산한 뒤에 헨델은 중풍과 건강의 악화로 고통을 당하였고 56세가 되었을 때,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23일간 기도하면서 때로는 음식을 전폐하면서 작곡에 몰두하여 "할렐루야"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는 68세 때 완전히 실명하였지만 좌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며 위대한 음악을 남기고, 장애에도 불구하고 음악 연주회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는 루터교 목사님의 딸인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중풍과 허약한 육체, 시각 장애를 격으면서도 "내가 나서 자라난 신앙 안에서 살다가 죽겠노라"고 말하며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열적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실낙원의 저자 밀톤을 아실 것입니다. 밀톤은 1652년 실명하였습니다. 어려움은 계속 닥쳐왔습니다. 아내는 떠나고, 아들은 죽었습니다. 자신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실명한 상태에서 서사시를 쓰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딸로 하여금 한구절 한구절 받아쓰게 하여 "실락원(Paradise Lost)"을 1667년에 완성하였고, 이어서1671년 복락원(Paradise Regained)과 투기사 삼손(Samson Agonistes)을 합본으로 완성했습니다.
3. 옛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좇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무러 서서 소경을 부르시니까 제자들이 안신하고 일어서라고 합니다. 그 때 소명은 어떻게 합니까? 50절을 보십시오.
1) 겉옷을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납니다.
겉옷는 그의 전 재산입니다. 소경으로 사는데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기온차가 심하기 때문에 밤에는 그것을 덮고 자야 합니다. 조금 더 유추해서 해석한다면 모든 가식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미래의 창조적 삶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것 다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선 순위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얼마전 돈 많은 부자는 이것을 벗어 버리지 못하여 다시 제 갈길로 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은 소원을 가지고 있어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오직 한 가지에 집중합니다.
2)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고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물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늘 구걸하는 입술이 변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의 정직한 고백을 듣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구걸하던 입술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예수님은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예수님 말씀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4) 저가 보게 되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경은 어떻게 했습니까?
보게 되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부자는 돈 때문에 근심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이제 과거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삶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난 과거의 종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할 수 있습니다. "과거 너 소경이었지?“ 우리가 주님을 좇는 삶에서 그런 과거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너 창녀였지“ ” 거렁 뱅이였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변했습니다. 얼마나 그가 예수님께 충성하며 제 2의 인생을 살았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하였는데 적당히 살았겠습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했을 것입니다. 이제 시각 장애인이 아닙니다. 거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으며 주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찬송가를 보면 화니 제인 크로스비라는 이름을 자주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23편이 실려 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 보다 귀하다” 패니 크로스비는 생후 6주부터 맹인이 되었습니다.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 치료를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이 맹인이 된 사실을 알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돌팔이 의사를 찾아가 그를 처벌하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마을을 떠나 버렸습니다. 가난한 집안입니다. 한 살 되었을 때 그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1살 되었을 패니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했던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이가 30세가 되었을 때, 어느 날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여 찬송가를 들으며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가사가 이 여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주님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영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눈에는 눈물이 흐렀다고 합니다. 그의 어두운 과거를 씻어 버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 가사처럼 “이 몸밖에 바칠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답니다. 내가 무엇으로 드릴 것인가? 자신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는 일어나자 마자 찬송을 작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가 처음 작사했던 것이 “자비 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였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95세까지 살면서 무려 9000곡 이상의 찬송가를 작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부흥 집회에 참석해서 간증을 많이 하곤 했는데 어느 부흥 집회에서 어느 목사님이 패니 크로스비를 동정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렇게도 많은 선물들을 주셨는데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선물로 주시지 않은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패니는 즉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었다면 저는 맹인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왜 그렇습니까?” 라고 패니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이 제일 먼저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얼굴이 나의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92회 생일을 맞았을 때 그의 생일을 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데려오세요. 그 사람과 악수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볼 때는 불행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 안에서 참으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시력을 앗아 가셨을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 그 대신 끝없는 에너지와 열정을 부어주셨습니다. 60세가 넘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려고 했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더 많은 찬송시를 썼고 새로운 일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패니가 살았던 브리지포트의 작은 마을에서 열린 장례식은 브리지포트 역사 이래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에워 쌓고 옛 친구와 동역자들이 마지막 사랑과 존경을 표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애도의 편지가 원근 각지에서 쇄도했습니다.
장례식에서 주례자는 디모데후서 4:7-8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의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주실 것이니.”
패니는 지금 하늘에서 처음으로 눈을 뜨고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던 그녀의 구속주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조건들이 다 다르지만 누구나 다 장애와 장애물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시간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시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그것을 주신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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