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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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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두 가지 정신적 가치체계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가 자유 민주주의, 둘째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일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이 듭니다. 시대마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가치체계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를 이끌어가며 유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기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율법과 성전이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삶의 가치체계의 근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삶의 원리가 모두 율법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결혼을 시키든 밥을 먹든 농사를 짓든 율법에 근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먼 외국에 가 있어도 일년이면 한 차례 이상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요, 감사드리는 장소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요, 속죄 받는 장소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이었고, 성전 순례는 피할 수 없는 의무였습니다. 인간 예수님께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유월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당시 유월절 순례객이 약 125,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할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치며 환호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분,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야, 경제적 불평등으로부터 참된 공의를 실현해 주실 분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첫 번째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무엇을 합니까?
15절을 읽어 보십시오.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쫓은 것은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성전에 대 소란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당시 성전 뜰은 대략 300×470m 정도였고, 약 3,000마리 정도의 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있는 일반 유대인들은 아마 통쾌했을 것입니다. 10년 묵을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헤롯이 지은 성전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무너졌고 그 후 스룹바벨이 지는 성전도 훼손되었으면 예수님 당시 성전은 이두메 출신 헤롯이 지은 것입니다. 그는 합법적인 왕가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출신을 만회하기 위하여 아내인 이두메 여인 도리스(Doris)를 버리고, 하스모니안 왕조의 마리암메(Mariamme) 공주와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두개파 사제 45명을 비롯하여 무려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처형하였다고 합니다. 아주 잔인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하여 정략적으로 결혼했던 아내 마리암메를 처형하고 장모와 심지어 자식까지 죽였습니다. 그는 백성을 억압한 폭군이었으며 유대인의 전통을 무시하고, 로마에는 개처럼 충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임을 알리고, 조상들의 전통을 재건하여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공사에는 대략 10,000명의 인부와 1,000대의 마차 그리고 1,000명의 사제가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공사를 완공하고 수소 300여 마리를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성전은 밝은 백색 돌만 그대로 두고 거의 전체를 금으로 도금하여 맑은 날에는 눈으로 직시할 수 없을 만큼 빛이 났고 화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헤롯의 건축을 보지 못한 자는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한 자라는 말까지 유행했답니다. 성전의 경내는 145,000㎡(약48,000평)이었고, 흔히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서쪽 벽의 가장 무거운 돌의 무게는 백 톤이나 될 정도로 그 당시 성전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거룩성이 없었습니다. 헤롯은 헬라 문화의 전파자라고 불릴 만큼 헬라 문화에 집착하였습니다. 성전을 지을 때도 그는 로마의 상징인 황금 독수리를 성전 입구에 세웠습니다. 당시 성전은 비사독 계열인 하스몬가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로마의 총독에 의하여 임명되었는데, 그 기준은 로마에 대한 충성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는 로마의 총독 구레뇨(Quirinius)가 임명한 사람이었고, 그는 로마를 등에 업고 자신의 네 아들과 사위까지 대제사장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 위에는 제우스의 신전이 세워졌고, 매일 두 번씩 어린 양 두 마리와 한 마리의 소가 로마 황제와 로마 제국의 번영을 위한 희생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이렇게 부당하게 로마 권력에 결탁한 왕과 대제사장이 성전권력을 잡자 성전이 권력과 부를 축제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당시 성전은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었고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뜰은 장사꾼들과 화폐를 교환하는 환전상들로 인해 시장처럼 변해버렸습니다. 본래 제물을 매매할 수 있는 합법적인 시장은 감람산에 4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멀리서 오는 순례자에게(제물을 끌고 오기가 힘들어서) 제사용 제물 제공하였고, 제물이 부적격 판정을 받으면, 흠 없는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성전세가 성소의 세겔로 드려졌기 때문에, 당시에 사용되던 로마 화폐나 헬라 화폐를 유대 화폐(두로의 은화)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오는 순례자를 돕기 위해 만든 시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돈이 되는 것입니다. 막대한 이익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권을 노리고 이방인의 뜰에서 이 일을 대신 할 수 있도록 허용해 버린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일부러 순례객들이 가져 온 제물에 대해 불합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소와 양, 비둘기 제물을 사게 만들었습니다(요한복음 2:13-17, 25) 그리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게 합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의 제물(눅2: 24)인데 폭리를 취한 것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제물로 드려졌던 비둘기에 평상시 가격의 100배에 거래될 정도로 터무니없이 비쌌다고 합니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비싸도 제사장들이 감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파는 것을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20세 이상의 유대인들은 매년 반 세겔 이상의 성전세를 내야만 했는데(마 17: 24),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나라 황제의 초상화가 그려진 이방 화폐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성전세로 받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성전의 공식 화폐인 두로 화폐로 환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환전시에는 2.1-11%의 웃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 오셔서 그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어버리셨으니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그 다음 예수님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지 아니하였습니다. 16절의 ‘기구’(스퀴오스)는 일반적으로 “물건, 소유, 도구, 그릇, 단지, 접시”의 뜻을 갖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성전 제사를 위해 사용된 도구로 보입니다(막 11:16; 계 18:12; 눅 17:31; 마 12:29; 막 3:27; 히 9:21; 눅 8:16; 요 19:29; 롬 9:21; 행 9:15; 롬 9:22; 고후 4:7). 히브리서 9:21에는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전에서 사용되는 ‘그릇’은 16절의 ‘기구’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성전 제사를 위한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와 관계된 기구를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은 성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성전 제사를 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는 이유가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인데 이것을 금해 버린 것입니다. 혁명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셨고 조상들이 지켜온 성전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곧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유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민감한 문제를 건드린 것입니다. 율법과 성전의 문제를 건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로 사형 선고에 내 몰렸습니다. 고소자가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막 14:58)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전을 헌다고 헛소리 한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막 15:29)라고 예수님을 성전정결 사건과 연관을 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일이 얼마나 엄청난 파장을 가져 올 것인가를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죽음의 위험을 무릎 쓰고 이 일을 했을까요?
2. 왜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것으로 인하여 엄청난 고난이 다가올 것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막 8:31) 그런대도 왜 이렇게 격노하시며 성전을 정결하게 하였습니까?
어떤 사람은 당시 실제적으로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던 로마의 세력에 대항하여 정치적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그랬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브랜든(S. G. F. Brandon)은 예수의 행위는 정치적 성격을 띤 거사라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가 열혈당과 같이 제사장들의 기득권을 종결시키고, 나아가 로마의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기 위하여 이 같은 일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패한 성전 관리자들에 의하여 더렵혀지고 오염된 성전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에반스Evans, 무울 Moule, 하비 Harvey, 마살 Marshall) 예수님이 성전의 제사 제도를 직접 공격한 것이 아니고 사사로운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성전을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던 성전 관리자들에 대한 공격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왜 예수가 직접 성전 관리자들을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환전상과 짐승 파는 자들을 상대로 행동했는가? 하는데 대하여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드리는 기구를 가지고 다니지도 못하게 하였는지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행동은 임박한 성전의 파멸을 예언한 것이며, 나아가 성전의 제의 제도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는 주장합니다. (예레미야스 Jeremias, 쥬얼 Juel, 헹엘 Hengel, 크로산 Crossan)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성전 제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게 된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셨고(막 1: 40-45), 제단에 제물을 드릴 것과(마 5: 23-24 참고) 성전세도 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7: 24-27).
왜 예수님은 극히 위험한대도 불구하고 그 위험을 자처하면서 이렇게 성전에 매매하는 자를 쫓아내고 상과 의자를 엎고 제사 기구를 가지고 다니는 것 자체를 금해 버렸겠습니까?
과연 예수는 성전 숙정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하고, 무엇을 알리고,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 의도성을 가지고 이일을 하셨습니다. 그 전날 둘러 보시고(11) 그 다음날 가셔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왜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셨는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인용하신 구절은 이사야 56:7에 근거합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방인의 제자도 하나님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믿고, 이방인들의 예배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뜰을 이방인들이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이방인의 뜰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 7장 13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위선에 사로잡힌 예배자들을 향해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라고 책망하십니다. 그 앞 7절에서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요, 죄인들이 향하여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집이요, 죄인들이 용서받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곳이어야 했습니다(왕상 7-8장). 그런데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은 이방이들이 예배하는 장소를 매매의 장소로 바꾸어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처럼 성전을 부의 축척의 수단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이런 부정이야말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죄악시되는 죄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거룩(정결, 성결)입니다. 거룩은 정치적, 사회적, 민족적으로 거의 유일한 이데올로기일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거룩을 실현하기 위해 분리라는 매우 특별한 방식을 택했습니다. 거룩이라는 가치를 기준으로 시간, 공간, 사람, 사물 등을 분리하여 구분하였습니다. 그들은 공간에 대하여(미쉬나 Mishnah) “①이스라엘의 땅은 다른 이방인의 땅보다 거룩하다. ②성(예루살렘)을 가진 도시는 더 거룩하다. ③성안은 더 거룩하다. ④성전산은 더 거룩하다. ⑤담안은 더 거룩하다. ⑥여인의 뜰은 더 거룩하다. ⑦이스라엘인의 뜰은 더 거룩하다. ⑧현관과 계단사이는 더 거룩하다. ⑨성소는 더 거룩하다. ⑩지성소는 가장 거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거룩하다고 생각한 성전을 매매를 하는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도 ①제사장 ②레위인 ③완전한 이스라엘 사람(순수한 혈통을 지닌 사람) ④개종자 ⑤해방된 노예 등과 같은 순위로 거룩성을 말했고 이방인은 지옥의 땔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시간도 음식도 구분하였습니다. 음식에 대하여 무려 229개에 달하는 음식에 관한 정결법(kosher)을 만들어서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39개에 달하는 안식일 금지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을 강조하는 자들이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이 개인의 탐욕으로 인하여 더럽혀지고 부정한 장소 즉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가장 거룩해야할 제사장이 부정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사람과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이 탐욕으로 인하여 더럽혀지고 부정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잘못된 구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으로 인하여 이방인들은 예배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 예배하는 곳이 아니라 성전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산다고 부정한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출신 성분에 의하여 태어날 때부터 거룩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부정한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 냉대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거라사(5: 1-20), 두로(7:24-30) 그리고 벳새다(8: 22-26), 이방인의 땅에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하다고 생각하시는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혈루병 앓는 이, 나병환자에게도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병에 걸린 것, 피가 흐르는 것,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을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공동체에서 격리시키고 접촉을 금했지만(레 13장). 예수님은 나변환자를 손을 대어 고쳐 주셨습니다(마가복음1: 40-45)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관에 손을 대며 청년을 살려 주었습니다. 거라사인, 수로보니게인, 백부장의 신하, 여인들, 아이들 등 그 당시로서는 한결같이 자격이 없고,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섬기는 교회도 바로 만인이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계층화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들어와서 기도하고 하나님 만나고 은혜받고 위로받으며, 용서받고 치유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계급화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4만 4천만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해서는 안됩니다. 특권층이 무엇인가 이득을 누리는 강도의 굴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재미 쇼핑 시대입니다. 아니 재미 중독에 걸린 시대입니다. 재미에 따라 시청률도 판매수익도 결정되는 시대입니다. 재미가 없으면 인터넷도 들어가지 않고 영화도, 심지어 교회도 가지 않습니다. '재미없고 지루한 것들은 가라.'고 외쳐댑니다. 그래서 교회도 엔터테이먼트가 발달되고 예배가 진실성보다는 재미와 감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종교의 고급 문화를 누리는 교인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왜 저런 사람이 우리의 회원이 되느냐고 마음 속이 강도의 굴혈로 자신도 모르게 바뀌어 버립니다. 펀 마케팅이 인기가 있습니다. 예배자가 아니라 관람자나 관리자로 전락됩니다. 종교가 마케팅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교회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종교가 시장화 되어 버립니다. 섬기의 원리보다는 경영의 원리가 지배해 버립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누구나 교회에 와서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으로 모든 무거운 짐을 풀어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긍극적으로 말씀하시고 하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에 제압되어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죄의 권세가 있었고(막 2: 10), 치료의 행위를 통하여 그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2:11-12). 또한 예수님은 사탄 보다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었고, 귀신들을 쫓아냄으로써 이를 증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세도 주장하였고, 죽은 자를 살려냄으로써 이를 증명해 주었습니다(막 5: 21-43). 이러한 권세로 성전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권세를 몰랐습니다.
누가 이런 일 할 권세를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를 보며 그들은 두려워하며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과연 무슨 권세로 예수님이 이일을 했다는 것입니까?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말씀하시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을 계속 보면 그 권세의 출처를 말씀해 주십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갈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1차 성전 숙정 때 이미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라고 대답하였습니다(13: 1-2). 성전의 완전한 파멸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성전 숙정에 대한 예수의 결론적인 해답입니다. 무화과 나무 저주사건을 통하여 이미 교훈 한 것처럼 성전의 멸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큰 건물로 부르고 있습니다. 성전이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계신 곳이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지는 곳도 아니라 외형적인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겠습니까?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의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대적자의 입을 통해(마가복음 14: 58) 예수님은 옛 성전의 멸망과 손으로 짖지 않은 새 성전의 건설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지나가던 자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가복음 15: 29에 보십시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라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형될 때 성소의 휘장이 어떻게 됩니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서 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15: 38). 성전의 휘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지성소 앞에 쳐진 칸막이입니다(출 26: 33). 유대인 중에 오직 한 사람,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뿐인 대속죄일에 이 휘장을 지나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휘장은 대제사장이 아닌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분리를 상징하며, 이것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심으로 이방인들까지 모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 희생되시는 메시야라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고 이방인 백부장이 어떤 고백을 합니까?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막 15:39)” 바로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질문에 대한 받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그 일을 행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적 권세입니다.
마가복음의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마가복음을 받는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고통당하는 1세기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제산을 잃고, 무덤에서 숨어 지내야 하고,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 형을 당하고, 사자에게 찢겨야 하는 그런 때입니다. 그들에게 바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예수님은 바로 메시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이 때가 되면 팔레스타인은 물론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까지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때가 되면 메시야가 성전에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종말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메시가 오면 “① 현재 세상에서 오는 세상으로의 전환이 가까우면서 자연과 인간 세상에 무질서와 혼돈이 극심해 질 것이다(호 13: 3; 단 12: 1 등). ②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하여 메시야의 길을 개척하는 한 선구자가 나타날 것이다(마17: 19: 막 9: 11). ③ 메시야의 도래 ④ 메시야에 의하여 적대 세력인 사탄과 그 추종 세력(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 국가들)이 격파될 것이다(시 2편; 단11장). ⑤ 이방 세력과 불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오염되었던 성전이 새롭게 회복될 것이다(겔 40-48장, 사 54, 60장, 학 2: 7-9; 슥 2: 6-17) ⑥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 왕국에 참여하기 위하여 성지로 귀환할 것이다(스13: 39-47). ⑦ 메시야의 주도 아래 예루살렘 성지를 중심으로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것이다(사 2; 42: 1-6, 49: 6; 렘 3: 17; 12: 14 등).”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성전에 대하여 메시야가 오면 “① 예루살렘은 보석과 금속으로 다시 지어질 것이며, 성전도 마찬가지이다(토빗트 13: 16-18, 14: 5). ② 첫 번째 성전 보다 더 크고 고귀한 성전이 다시 지어질 것이다(제 1에녹서 90: 28-29). ③ 마지막 때에 모든 세대들을 위한 영원한 성전이 지어질 것이다(제 1에녹서 91: 13). ④ 하나님께서 성전을지으실 것이다(희년서 1: 17, 27). ⑤ 하나님의 성소가 시온 산에 만들어질 것이다(희년서 25: 21).”라고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유월절 기간에 메시야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소요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전 청결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이신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나타날 새 성전을 40-48장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와 스가랴도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주가 그 전에 임할 것이며, 그 전이 성결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말 3: 1-3, 슥 14: 21). 바로 그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다른 것입니다.(렘 4: 5-5:31; 7: 14; 19:10-11; 25: 1-38; 26: 1-24; 겔 4: 1-7: 27; 미 3: 9-12 등 참고). 예수의 예언은 구약 선지자의 예언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성전의 상업화를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정해진 성전을 직접 심판하고 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성전의 건설을 예언하시고 새 성전이란 바로 예수 자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까지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림으로서 죄를 용서함받고 거룩해진다고 믿었으나 예수는 이러한 성전의 제의 기능인 깨끗함과 용서, 거룩해짐을 십자가에 제물로 단번에 드림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성전 보다 큰 이가 인간의 역사에 들어왔고, 기존의 성전을 숙정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손으로 짖지 않은 새 성전을 건설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우리도 백부장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막 15:39)”
끊임없이 사탄은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의 권위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게 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도록 방해 합니다. 그러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죄의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와 회개하면 용서받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부여받고 살 수 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 보다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면 귀신에게 붙들려 살지 않습니다. 주님의 권세로 악한 세력들을 이기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질병을 치유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면 우리 주님은 위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마 7: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C . S 루이스 교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그의 일생을 두고 우리는 그를 위대한 도덕군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대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해야 한다. 적당한 도덕군자라는 말은 예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가 말한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반대로 미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을 그의 말씀대로 다 믿든지 아니면 전부 부정해야지 중간노선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단지 성인, 도덕군자, 기독교의 창시자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권위를 보면 우리가 진정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분임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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