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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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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옛날 제가 시골에 살 때 보면 남의 집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 반반씩 나누어 가지는 소작농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땅이 없으니까 부자집 땅을 빌려 일 년 동안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나라에 소작농이 있었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소수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도시에 사는 농장 주인이 소작인에게 맡겨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소작인은 자유농민이었습니다. 주인은 대부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위치한 곳에 산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소작인들과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습니다. 추수가 끝나면 곡물을 세로 받았는데 대략적으로 지주들은 소작인들에게 40%정도 세로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누구나 달 알 수 있는 풍습을 비유로 들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의 1/3은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씨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 “무화과 나무 비유” 등과 함께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독특한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 기록된 가장 긴 비유이며,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는 유일한 비유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구약을 인용하고 있는 유일한 비유입니다. 구약에 여러 차례 교훈의 소재로 사용된 포도원을 들어(사5:1-7; 렘2:21; 겔15:1-6) 영적 진리를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자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는 그들에게 비유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권세를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포도원 주인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1. 포도원 주인의 기대(1-2)
포도원 주인은 어떤 분이십니까? 일반적으로 대지주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착취하고 부당하게 불노소득을 취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이런 감정들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이 있습니다. 불의하고 불공정하시고, 독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포도원 주인은 부도덕하고 악한 포도원 주인이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포도원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일구는데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 노력에 대하여 산울 즉 울타리 쳤다고 했습니다. 포도원을 해치는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고 열매를 탈취하려는 침입자들로부터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포도즙 짜는 기구를 팠다고 했습니다. 수확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망대를 세웠다고 했습니다. 포도원에 침입자를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해서입니다. 포도원 조성을 위한 주인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풍성한 열매와 소득을 위해서입니다. 좋은 포도를 재배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이제 포도원 수확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2절 보십시오. “때가 이르매”입니다. 수확을 거둘 만한 시간을 주었습니다. 포도를 심었다고 바로 수확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포도를 수확은 보통 심은지 2,3년이 지난 9월에 수확을 한다고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율법과 관습에 따라 과일나무를 심으면 첫 3년은 부정한 것으로 먹지 않았습니다. 4년째 열매는 하나님께 감사 예물로 드렸고 5년째 되어야 먹었습니다(레위기19:23-25).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 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 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결국 포도원 주인은 4년 동안 기다리면서 소작인들의 생활비를 보조해 주어야 했고 포도원에 필요한 비용을 제공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5년째 되는 수확의 계절에 포도원 주인은 자기 몫의 포도소출을 받아 오라고 주인이 직접 가지 않고 종을 보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나오는 농부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알려진 표상입니다. 포도원은(시80:8,14,15)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 말씀도 이사야서 5장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5장 7절을 보십시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 5:7)”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사5:7) 소작인인 유대 지도자들에게 포도원인 당신의 백성을 맡기고 타국으로 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맡기고 기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은사와 달란트를 주시고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을 만들어 놓고서부터 기대를 표명했습니다. 아담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진 기대입니다.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동물의 종이 되고 실물을 섬기고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그것들을 통제하며 만물의 영장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2-3)”
이것이 아브라함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대를 가졌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하나님의 기대였습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 민족의 지도자로, 이사야를 부르실 때 백성을 회개시키는 선지자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울을 부르실 때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기대를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2. 농부의 태도(3-8)
농부들은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땅 주인에게 추수를 남겨 주어야 합니다. 2절에 보십시오. 많은 것을 원한 것도 아닙니다. 소출의 얼마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포도원 주인이 밭을 포도원 소출 보내기를 거부했습니다. 정당한 댓가를 요구하는 주인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첫 번 종을 잡아서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주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얼마든지 법적 조처를 취할 수 있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두 번째 종을 또 보냈습니다. 인내심과 관용을 가지고 기대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두 번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머리를 때리는 것은 명예를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명예는 목숨처럼 귀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였습니다. 주인의 명예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또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종을 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은 참고 참으며 다시 네 번째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여 버렸습니다. 종을 보낼수록 소작인들은 점점 더 완악해졌습니다. 완악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적인 기대를 가지시고 사랑과 인내로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할 것을 요구했던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선할수록 이스라엘은 더 완악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끝가지 공의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많은 선지자들 여러 번 보냈지만 유대백성들은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고 능욕하고 상처를 입히고 죽였습니다(렘25:4; 마23:34; 눅13:34). 구약의 이스라엘 선지자 핍박하고 핍박하였습니다(왕상19:4; 왕상22:24; 대하24:19-22; 렘20:1; 37:15; 암7:12; 마5:12).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요나, 호세아, 아모스, 미가 등의 선지자를 보내어 끝없이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최후로 보낸 것입니다. 주인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농부들이 내 아들을 존중해 줄 것으로 알고 보낸 것입니다. 공경해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농부들은 아들은 주인의 상속자이니까 그를 죽이고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라고 모의하고 악한 소작인 농부들은 아들을 잡아 죽인 후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주인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외 아들입니다(6). 소작인도 유일한 상속자인 줄 알고 죽였습니다. 왜 아들을 죽였습니까? 7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 유업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없이 벌어진 이스라엘의 비극입니다.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가나안 땅으로 정착하게 하였습니다. 애굽에서 포로 생활하던 민족 불러 가나안 땅에 제비 뽑아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청지기로 맡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끝없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다 바벨론에게 앗수르에게 다 빼앗겨 버리고 유랑하는 백성이 되어 버립니다. 신약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0)”
11절에 보면 청지기로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영원한 소유의식이 아니라 청지기 의식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주인의 뜻대로 주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맡은 사람입니다. 주인의 뜻에 맡게 일해야 할 사람입니다. 선한 청지기는 자신의 것처럼 일하지 않고 주인의 뜻에 거역하여 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청지기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청지기로 부름받은 사울을 보십시오. 그렇게 성령 충만하였고 준수한 용모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효성도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맡겨준 일을 충성스럽게 봉사하지 못하고 그렇게 인생을 비참하게 불안과 공포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세 아들은 전사하고 자신은 자살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없이 다윗을 시기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대상 29:10-15)”
내가 가진 재물, 달란트, 지위, 환경, 운명, 이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소출을 남겨야 합니다.
존 록펠러를 보십시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다 사기 당하고 빚 독촉에 시달려 자살을 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의 한 때문에 미국 석유 90%를 차지하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노동자를 심하게 착취하고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등으로 의사는 죽음을 준비할 것을 선언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 기도하는 중에 더 파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석유 부자가 되었고 질병에서 치유받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백만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중에 시카코대학은 지금까지 노벨상 52명을 배출한 명문대학입니다. 그가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드렸다고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 곳에도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돈이기 때문에 대학 교회 어디에도 내가 돈을 내어 지은 대학이나 교회라고 쓰지 말라고 당부하였답니다. 청지기 의식으로 살 때 삶은 행복합니다.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는 전재산에 해당하는 45억달러를 드려 3천개의 도서관을 설립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했습니다. 시어즈로벅 백화점의 소유주 줄리어스 로즌월드 일생동안 흑인교육을 위해 5,357개의 공립학교 설립을 지원했습니다.
3. 주인의 결행(9-11)
악한 농부들을 보고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9절을 읽어 보십시오.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 것이 될 줄 알았지만 주인은 농부들을 진멸합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진노의 결과 AD 70년 유대 나라는 멸망하고 그들은 나라를 잃고 세계 흩어져 유랑 1948년 독립했지만 아직도 흩어진 사람 더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 당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벧후3:9)에 "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주변의 열강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차례로 응징하셨습니다.(왕상14:15-28;왕하15:37) 사마리아가 함락(왕하17:6)되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 마저 바벨론에게 함락 당함으로써 국권을 이방 민족에게 빼았기는 굴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왕하25:8-12) 돌아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돌아 오지 않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입니다.
유대인 대신 이방인들이 포도원 농부가 되어 하나님의 선민이 되고 구원의 역사를 계승하게 된 것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눅20:16을 보면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들 뜻을 알고 다가올 심판 두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유대 지도자들도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시118:22-23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다윗이 성령으로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여기서 머릿돌이란 건물의 중심 기초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많은 돌이 필요한데 설계도에 의해 채석장에서 돌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커다란 돌 하나가 와 있는 것입니다. 건축가들은 이 돌의 용도를 알 수 없어 계속 성전을 지어가면서 밖으로 내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지으려고 하니 건물의 중심이 되는 기초석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버린 돌이 머리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져다가 모퉁이의 머릿돌을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속담의 성격을 지닌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머릿돌이 예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건축자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로 버린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풀어 주시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신약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귀를 나타내는데 인용된 말씀입니다.(행4:11 벧전2:7)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1) 바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그 예수님이 무엇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시편의 예언을 보십시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24)”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무시하고 거역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주인 예수를 살리셔서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고 교회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9:22)라고 이미 여러 차례 예언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증거하였습니다(엡2:20). 이사야 선지자는 “보라 내가 시온에 한 돌을 놓아(사28:6)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유대교의 예수 거부와 영적 무지 고발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대 민족주의적이며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로 말미 암아 된 것입니다. 멸시받고 버림받은 돌을 들어 하나님의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신 것은 인간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섭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돌에 관한 말씀이 빠지게 되면 이 비유는 주인의 아들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악한 포도원 농부가 아니라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십자가를 눈 앞에 두고 십자가의 고난과 함께 죽을 것과 삼일 만에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정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 우리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시편의 예언을 보십시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24)”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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