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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3404 추천 수 0 2010.11.19 08: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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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2:35-44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세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네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첫째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물주의자들입니다. 둘째는 보이지 않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광신주의 자들입니다. 셋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되 보이는 것을 더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과학적 실용주의자들입니다. 넷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인정하되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건전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얼마 전 SBS TV에서 ‘신의 길 인간의 길’을 4부 작으로 방영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기독교 관련단체들은 방송중단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방송을 보지 못했지만 언론 보도를 보면 우리가 믿고 있는 이미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이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라는 허구 소설류에 의존하여 과학적 접근을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공익방송으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그의 책을 아무런 설명이나 인용 제시어도 없이 무차별적 사용하여 자신들의 연구성과인 것 처럼 청취자들을 현혹시킨 것은 진실을 밝히는 행위가 아니라 양심을 속이는 표절행위이며 건강한 신앙인에 대한 모독이며 도전입니다. 기독교 6000년 역사를 BC 8세기에 이란 지역에 있었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방송이 나갈 때마다 대단한 것을 발견한 양 사람들을 현옥하고 그것으로 그것을 기획하는 사람들은 목적한 바 이익을 챙깁니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이용하고 싶은 현대인들의 상업성은 무엇이 돈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댄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가 작가 브라운 씨에게 1억4000만 파운드(약 2670억 원)의 수익을 안겨줬다고 합니다. 그는 그 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산 단순히 인간에 불과한데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오강남 교수도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님의 신성 등은 단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가진 신화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2001년 5월 30일 초판 제1쇄가 발행된 이 책은 동년 10월 10일 현재 13쇄가 발간 됐고 총 45000부 정도가 팔렸다고 합니다. 선풍적인 인기를 받은 것입니다. 수많은 증거와 역사가들이 예수님은 신화적 존재가 아니며 실존적 존재인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 이런 것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인간이 호기심이 강하고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인간이 부정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주 낡은 자료, 편협한 자료에 근거하여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 하나님 나라의 선포, 메시야 성, 병자와 약자의 치유, 십자가, 부활“ 등과 같은 중심적인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예수의 성생활', '예수는 동성애자인가?' 등과 같은 것을 부각시켜 사람들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곡해와 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세기에 셀수스라는 희랍 철학자는 예수의 처녀 탄생을 부정하고 예수는 로마 군인 판테라(Pantera)의 사생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18세기 서양에서 예수님은 탄생은 영웅 신화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역사적 예수 연구와 고고학적 성과로 다 정리된 사실들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 이후 동정녀 탄생은 성령의 잉태에 의한 것이며,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30년쯤 되어서 마가복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승천하신 후 50년도 못되어 마태와 누가에 의해 공개적인 공식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승천하신 후 24년만에 기록된 것입니다(고전 15장). 그 때 목격자들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13세기가 지난 다음에 기록한 것이 진짜이겠습니까? 30-50년이 못되어서 기록한 것이 진짜이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이와 유사한 논쟁은 예수님 당시부터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서기관들이 나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은 믿었습니다. 신화적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믿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야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계시를 바르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만 피상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1. 보이는 것으로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지만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성경의 계시를 깨달으면 예수님은 메시야 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하나님의 보좌와 나라를 세울 자, 다윗의 아들, 의로운 왕으로 선택된 자, 주의 메시야, 하나님의 종, 인자를 기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왕, 다윗의 후손, 정치적 해방과 정복을 감당할 왕을 기대했습니다. 시2, 72, 110편 속에 나오는 왕처럼 이스라엘 어느 왕도 달성할 수 없는 이상적인 왕, 막강한 정치적 힘을 가진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가 언젠가 나타나 모든 정치적 노예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날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해하고 기대한 메시야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밝혀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서기관들이 믿지 않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믿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자 한 것만 보았고 그들에게 보이는 것 믿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필사자들이고 성경 연구가로 성경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겉으로만 알고 있을 따름이지 내면 깊숙이 흐르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해한 메시야는 어떤 분입니까?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에 근거하여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까?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시편 110편 말씀을 통하여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빙상의 일각만 본 것입니다. 코끼리 다리만 만지며 코끼리 모양을 기둥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편이 단순이 다윗이 기록한 책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을 통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마22:43).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24: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시편 22편을 인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신 시편 110편 말씀을 보십시오.
1절 말씀의 내 주는 다윗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주”는 성부 하나님, “내”는 다윗, “주”는 열방의 심판자로 오실 메시아를 말씀합니다.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라는 말씀은 완전한 승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발등상은 왕이 의자에 앉을 때 발을 올려 놓는 발판입니다. 주께서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굴복시킬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마22:44).
히브리서 기자는 1절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였습니다.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히 1:13)”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그리고 성령을 보내시는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1절을 인용하였습니다(행2:34-35)
4절의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않는다는 구절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 되심을 가르치는데 인용되었습니다. ‘멜기 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은 히브리서에서 불완전한 레위 계통의 제사가 아닌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제사장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히5:5,6; 히7:17) 메시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어떻게 통치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2-3) 왕이 되시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왕국의 범위 범위를 보십시오(5,6). 모든 열방 중에 모든 열방 위에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정치적 왕이 아닙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성령의 감동은 받은 다윗이 영적으로 주라고 고백한 것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주라고 고백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예수님은 육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다윗 이전부터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3)”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예수님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밝혔습니다.
대제사장이 심문하여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막 14:61)”라고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라고 분명하게 예수님이 메시야 이신 것을 말씀했습니다.
빌라도가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질문할 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메시야이신 것을 믿습니까? 이것을 인간 이성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고 있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인간의 학습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누가 무어라고 말해도 우리는 예수님은 메시야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참 행복을 누리며 영적 권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이성으로 보이는 것만 보면 의심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비밀을 신앙으로 깨달으면 기뻐합니다.
서기관은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간되신 예수님만 보고 예수님을 자신들의 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침해하는 사람,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모독하는 사람, 자신들의 이익과 인기를 침해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단지 다윗의 후손으로 온 인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인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속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인간 예수로만 탐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결론을 냅니다. 예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근본적으로 무신론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전제하고 예수님을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예수님의 자료에 대하여 자신들이 필요한 자료만 보면서 예수님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시 14:1)” 어리석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시 59:8)” 하나님이 비웃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들이 "과학적 무신론, 심리학적 무신론(프로이드의 투사 이론), 사회적 무신론(마르크스 유물주의), 도덕적 무신론(니체 철학), 인간학적 무신론(실존주의))에 빠지게 됩니까? 이성만능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절대시하기 때문입니다. 니체처럼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는 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오만은 하나님의 간섭은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학문명이 오히려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더 신장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추방하고 우주의 주인이 인간이라고 부르짖는 인간들은 갈수록 더 비인간화되고 있습니다. 동물처럼 기계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역사적 기록을 조금만 주의 깊게 보아도 예수님은 참으로 메시야였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시카고 트리분 지의 신문기자였던 리 스토로벨(Lee Strobel)은 21개월 동안 13명의 각 분야의 최고의 학자를 직접 인터뷰하면서 [예수 사건]의 역사적 과학적 객관성을 포괄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사건](두란노, 2000)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실존적 존재로 메시야였습니다. 아주 최근의 예수 연구의 결정판인 타이센과 메르츠의 공저 [역사적 예수](다산글방, 2001)를 읽어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신빙성있는 성경의 증언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읽고 외우고 필사하면서 참 진리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구약 성경이 메시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서기관들은 삼하7:12-16에서 메시야적 예언을 해 놓았기에 그들은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강력한 정치적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번영과 평화를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 예언을 보면 첫째는 메시야는 다윗의 집안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 할 것이요(사11:1)”라고 했습니다. 메시야의 역사적 존재가 다윗 집안과 관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9장 7절에서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리라”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23:5)”라고 예언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마찬가입니다(시89:4,20,35 시135:1,11)
이미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1)” 그러나 그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메시야는 직분이 왕으로 임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9:6 “평강의 왕”으로, 예레미야 23:5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시2,72,89,132 “왕의 위신과 왕의 권위 행사”을 말씀합니다. 메시야 왕위의 영원성과 견고성에 대하여 “그 위는 해같이 내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에 확실한 증인 당 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다(시89:36-37)”라고 했습니다. 결코 정치적 메시야가 아닙니다. 영적인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셋째로 메시야는 왕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합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7) (사11:5; 예레미야 23:5; 시72:1,2,3,13,14.17)

넷째로 메시야는 구원을 행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시 18:50)” 사40-55에서 구체적으로 예언해 놓았습니다. 이사야서 53장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이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은 예표 모형입니다. 신약에서 성취되고 원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떻게 죄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류를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인가를 이미 창3:15절부터 원시복음으로 예표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사단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롬 16:20)”

가인과 아벨을 보십시오. 가인은 합당치 못한 예배를 드림으로 불신앙의 첫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벨의 흘린 피는 신앙을 통한 믿음의 계열의 처음이 되었습니다. 이미 아벨을 통하여 메시야적 예표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성령께서 히12:24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4)” 공동 번역에서는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가 게시고 아벨의 피보다도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의 피가 있습니다. (히 12:24)”
아벨의 피를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관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을 통하여 메시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벨을 통한 메시야 사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4)”

아벨의 죽음 이후에 셋을 통해 믿음의 계열은 노아에게로 이어집니다. 노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어떻게 보여 주고 있습니까? 다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족만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노아와 노아의 가족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까? 창6:8-9에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노아의 의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구원의 점진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증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 메시야의 구속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노아 이후에 아브라함에 이르러 구약의 메시야 사상은 더욱 분명해 집니다.
창12장과 15장 17장 22장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실 것과 그 씨를 통한 모든 족속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씨의 개념은 창세기 3:15절의 점진적인 발전이며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될 씨가 누구라는 말씀입니까?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아브라함은 실제적 메시야를 바라보고 대망하게 하는 역사적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7)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 8:58)“ 서기관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알 따름이지 이런 메시야적 언약을 성취하는 분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겉만 본 것입니다.

구약의 메시야 사상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좀 더 밝히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포로에서 이끌어 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예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통해 구원합니까?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른 집은 장자가 죽지 않습니다. 그 유월절 어린양은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을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히브리서 기자는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겉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월절 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 이후에 구약의 메시야 사상의 중심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선포를 통해 더욱 분명해졌고 구체화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예언해 주십니다(사9:2-7).
에덴 동산에서 약속된 위대한 구원사역(창3:15), 아브라함의 씨와 그에게서 나올 그 왕(창12:2; 21:1-3), 유다 후손으로 올 왕적 인물(창49:8-12), 출애굽기19:6에서 언급된 그 나라, 다윗의 언약(삼하7:12-16) 그리고 솔로몬이라는 인물과 그의 나라(왕상2-11장; 시72편) 이런 메시야적 예언이 이사야 선지자에 의한 한 데 모아져 하나의 간결한 구절으로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 9:2)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사 9:3)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 9:4)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사 9:5)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7)”

이 말씀은 메시야의 다섯 가지 특징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 메시야는 어린 아기로 탄생할 것입니다(6). 사무엘 하 7:9에서 임마누엘 약속을 해 주셨는데 처녀가 잉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사7:14).
둘째, 메시야는 하나님의 백성(미5:2)과 세계(슥14:9)를 다스릴 것입니다(7).
셋째, 메시야의 특징은 왕국의 놀라운 모사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평화를 가져오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넷째, 메시야는 다윗의 왕좌에 앉아서 영원한 평화와 정의의 통치를 하실 것입니다.
다섯째, 메시야 대한 예언 성취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의로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사실을 서기관들은 겉만 보고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다윗에게 예언해 주신 말씀의 비밀을 밝혀 주니까 즐겁워 하였습니다(37). 복음이란 복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승리의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죽음의 문제, 죄의 문제을 해결하셨습니다. 복음이 우리를 참 자유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이성이 과학문명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참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을 쫓아내고 인류는 어떻게 됩니까? 더욱 비인간화됩니다. 동물처럼되고 기계처럼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시된 진리를 깨닫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 보이는 것만 보며 사람에게 보이려는 위선적 삶을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며 중심을 보는 진실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조심하라(38,39)고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의 어떤 것을 조심하라는 말입니까?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에 늘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만 의식하면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보면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영웅주의입니다.
그들은 대단히 크게 보여 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긴옷을 입고 옷단이 발끝까지 내려오게 하고 다녔습니다. 군주나 재판관이나 귀인처럼 시장에 돌아다닌 것입니다. 그런 옷을 입고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 앞에서 특별 대우를 받기 원해서입니다. 존귀하게 대접받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명예심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기를 원했습니다. 기도할 때 길게 기도하였다고 말씀합니다(40). 그들은 마치 하나님과 친하고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처럼 행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원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시장에서 문안받고 잔치상에서는 상석에 앉았습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그것을 즐거워한 것입니다.
넷째,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도 부요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사기성에 대한 의심을 감추기 위해 동정의 가면을 썼습니다. 홀로된 사람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악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가장 선한 것처럼 행동을 하였지만 실제는 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의 받을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메시야 예수님을 추방한 무신론자들의 삶도 도일합니다. 참으로 고상하고 인간다운 삶을 사는체 하지만 크게 보이는 것에 목숨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잘 보이기 위대 맹목적 외모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존경받기 위해 위선을 떨고 있습니다. 부요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려고 합니다.
언젠가는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히 9:27)” 있습니다. 악인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갈 날이 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시는 예수님은 무엇을 봅니까?
41-44절을 보십시오. 연보 궤에 구제 헌금하는 사람을 봅니다. 무엇을 보는 것입니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느냐,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느냐, 사람보기에 드리느냐 하나님 보이기에 드리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많은 헌금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한 고르란트를 헌금하였습니다. 장정 일일 품삯의 1/128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헌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여인의 구제의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여 구제헌금을 정성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은 보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예수님은 보시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육신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들이 삶을 지탱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18)”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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