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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이 앞에 있으면(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908 추천 수 0 2011.03.15 23: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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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4:32-42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큰 일이 앞에 있으면(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막 14:32-42

오늘은 90돌을 맞이하는 3.1절 주일입니다. 이 날은 우리 민족에 있어서 참으로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세계 역사상 각 나라마다 혁명이나 민족 운동은 일어났으나 3.1운동처럼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궐기한 투쟁사는 일찍이 없었다고 합니다.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1천 5백여 회에 걸쳐 2백 만 명 이상이 전국 2백 18개 군중 2백 11개 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약 4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기념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기념일입니다. 당시 전국민의 1.2% 밖에 안 되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주축이 되어 기독교 정신으로 일으켰다는데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세는 당시 인구 2,000만에 35만명 신자 곧 1. 2%에 불과했습니다. 3.1절 민족항쟁으로 숨진 이는 7천 5백여 명,실종자 1만 5천여 명,부상자 1만 6천여 명,검거된 이는 4만 7천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희생자 중 많은 사람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 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인사였습니다. 그 당시 천도교 200만, 유교 불교는 300만을 넘어서는 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자가 기독교인이 2,039명, 천도교인 1,063명, 유교인 55명, 불교인 41명으로서 기독교인이 60%이상을 차지했던 것이 역사에 남은 기록입니다. 당시 조선 총독부가 남긴 비밀 문건 속에는 "이 민족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의 교회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그 어두운 시대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러므로 3.1 운동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47개의 예배당이 불태움을 당하였고 많은 신앙인들이 총검에 찔려 죽거나 체포되어 감옥에서 참기 힘든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심지어 수원 제암리에서는 교인들이 예배당에 갇혀 불태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끝까지 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하여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민족적인 큰 일을 앞에 놓고 총칼을 드는 것보다 기도하였습니다. 3.1만세 시위가 고조될 즈음에 서울에 뿌려진 [독립단 통고문] 은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투쟁 방법론을 ①일본인을 모욕하지 말 것. ②돌을 던지거나 주먹을 치는 등의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③매일 기도와 성경묵상 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매일 3시에 기도하고 주일은 금식하며 월요일 이사야 10장, 화요일 예레미야 12장, 수요일 신명기 28장, 목요일 야고보서 5장, 금요일 이사야 59장, 토요일 로마서 8장을 읽으라고 권면했다고 합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늘 기도하였습니다. 해방시키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던 사람들도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장로였고 김구 선생님도 기독교인이었고 건국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여운영 선생님도 신학을 공부한 전도사였고 건국 준비위원회 지방 위원들은 많은 사람이 목사나 장로가 할 정도였습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개회될 때 우리 나라 국회는 기도로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임시의장 이승만은 단상에 올라가 사회봉을 잡고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개회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일동 기립한 가운데 이윤영 목사가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誠心)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 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 만방에 정시(呈示)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 塗炭)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福樂)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역사의 첫 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아멘. "
제헌 국회 때 드린 이 목사님의 기도처럼 우리 민족은 참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경제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성장은 둔화되고, 주가는 가라앉고, 환율은 폭등하고, 소득은 줄어들고, 일자리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있습니다. 북한은 핵으로 위협하고 전쟁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는 대립이 심각하며 계층간 갈등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치열한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팽창적 외교 태도 취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경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미국은 새 정부가 들어서고 패권 유지를 위해 세계전략을 다시 짜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역사 전쟁과 영토 분쟁, 민족주의와 군비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 사회는 각종 사회 갈등이 폭발 직전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회·경제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빈부의 차이 확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심화, 수출산업과 내수산업의 불균형 확산 등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신이 부패해 지고 있습니다. 경제 제일주의, 쾌락 만능주의, 파괴적인 이기주의로 정신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신앙인이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90년 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총칼 앞에 무릎꿇고 기도고 맨몸으로 나아가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큰 일이 다가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기 때문에 큰일을 앞에 놓고 기도합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 기도합니다. 경제적 위기 앞에 기도합니다. 시험을 보기 전에 기도합니다. 군 입대를 앞에 놓고 기도합니다. 결혼을 앞에 놓고 기도합니다. 큰 수술을 앞에 놓고 기도합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기도합니다.

1. 우리는 큰 일을 앞에 놓고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32-35).
우리가 가장 본받아야할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앞에 놓고 무엇을 하십니까? 인류 구원이라는 최대의 일입니다. 로마의 압제 하에 있을 때 민족 해방이 아니라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죄와 죽음의 종노릇하는 인간을 해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입니다. 인간 예수님으로 볼 때는 죽음이라는 인생 최대의 일입니다. 몸이 찢어질 정도의 채찍을 맞아야 하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당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조롱하고 침 뱉음을 당해야 할입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야 할 일입니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써야하고 옆구리에 창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총 한 방 맞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땡볕에 십자가에 달려 피와 물을 다 쏟아야 할 일입니다. 더욱이 영적으로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단절되어야 할 일입니다. 인간이 당해야 할 지옥의 고통을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고통은 우리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질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입니다.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닙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징계를 받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며 슬퍼하고 고민하고 죽게 되었다고 좌절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는 그 큰 일 앞에 무엇을 하였습니까? 기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로부터 해당되길 원했던 제자들은 D-데이를 앞에 놓고 무엇을 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는 무엇을 합니까? 잠만 잡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큰 일을 앞에 놓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민족적으로, 사업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기도가 절실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1)습관에 따른 기도입니다.
일상화된 기도, 생활화된 기도입니다. 큰 일이 다가 올 때만 기도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님이 기도한 상황을 누가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눅 22:3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늘 기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눅6:12-13에 보면 12제자를 선택할 때도 철야 기도를 드렸습니다. 새벽에 한 적한 곳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눅9:28을 보면 변화산에서도 기도하십니다. 어느 날 문득 문제가 다가올 때 녹슨 기도의 칼을 커내어 쓰는 것이 아니라 늘 기도의 생활화가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되 평소에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잘 준비된 칼이 전쟁에서 유용하게 쓰여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도를 수단화하는 것보다는 늘 생활 가운데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방해 받지 않은 기도입니다.
하나님만 만나는 기도, 하나님께 몰입하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동안 8명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세 제자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더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돌 던질 만큼 떨어져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방해 받지 않은 곳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가 아닙니다. 기도하기에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인 시간과 장소를 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 계십니다. 조용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 장소면 됩니다.

3)겸손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바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엎드려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간절성과 겸손을 말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새뮤얼 차드위크는 "사탄의 한 가지 관심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악마는 기도 없는 성경공부, 기도 없는 봉사, 기도 없는 종교의식에 안심한다. 악마는 우리의 수고를 비웃고 우리의 지혜를 조소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떤다"고 말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바쁠 때일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심각한 일일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 사무엘은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 오는 민족적 위기를 당할 때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큰 우레라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여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앞에 패하고 말았습니다(삼상 7:10). 개혁가 죤 낙스(John Knox)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 안하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칼보다 펜보다 강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을 보십시오.(다니엘 6:10) 국무 총리로 직장을 잃어 버려야할 위기를 만났습니다.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만약 기도하면 죽인다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큰 일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그는 살아 났습니다. 직장을 잃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바뀌어도 그의 지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인정받았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 때 “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행 16:26)”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기도할 때 나라가 평안해 지고, 기업이 회복되며,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고, 불안이 평안으로 바꾸어지며,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왜 기도하셨습니까?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36)
1)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출발은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도의 요소는 우리의 필요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의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기도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보십시오. 36절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잔은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의 잔, 십자가에서 당하는 수치의 잔, 십자가의 죽음의 잔입니다. 누가 고난과 수치와 죽음을 좋아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인간적으로 볼 때 33세의 젊은 나이입니다. 인간 예수님의 필요는 그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기도는 여러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찬양과 감사 기도가 있습니다. 남을 위한 도고 기도가 있습니다. 복을 빌어 주는 축복기도가 있습니다. 죄 용서를 위한 참회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과 항변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를 채우기 위한 간구 기도를 드립니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가 필요한 한나가 아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지혜가 필요한 솔로몬이 지혜를 위해 기도합니다. 불치병에 걸려 치유가 필요한 히스기야가 치유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필요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질병 가운데 질병을 났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올 때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한나는 기도하여 사무엘을 기적적으로 얻었을 뿐 아니라 세아들과 두 딸을 더 낳았습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 지혜뿐 아니라 부귀 영화도 누렸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히스기야는 기도를 통하여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그러나 궁극적으로 기도는 우리의 뜻을 실현하거나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기도입니다. 간구의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계속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수치를 당하는 고통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수치를 당하겠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고통을 당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십자가에서 죽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실 기도하셨습니다. 무명의 여인 한나가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시험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 그 문제로 하나님 만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사무엘을 낳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도, 어떤 문제도, 어떤 위협도, 어떤 어려움도 그것이 시험의 도구가 아니라 기도의 도구로 사용하면 그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나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기도하라고 합니다. 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34).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잠을 자지 말고 깨어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고통을 당하면 누군가 같이 기도해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나고 위로가 됩니까? 기도해 주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그들을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잡니다. 예수님의 일은 자신들의 일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와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7,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움 당한 사람, 위기를 당한 사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 수술을 앞에 놓고 있는 사람, 다가오는 위협 앞에 불안해하는 사람과 기도로 함께 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교회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고통 앞에 있는 사람 앞에서 서로 모여 험담하며 함께 있고, 불평하며 함께 이고, 남의 약점 들추며 함께 있고, 비난하며 함께 있고, 흉보고 함께 있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자들은 그런 수준은 아니었지만 잠만 자며 함께 있었습니다. 결국 기도하지 않고 장담만 하다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 들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시험 들어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시험에 듭니다. 저주하는 시험에 듭니다. 모든 사명 망각하고 고향으로 도망가는 시험에 듭니다. 그러나 기도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큰일을 앞에 놓고는 시험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허락하실 때는 그 문제를 통해 시험 들어 도망가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 붙들고 하나님 만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시길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영적 무기입니다. 기도하지 않다 시험들었던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어느 정도 기도를 드렸습니까?
3. 우리는 힘을 다하여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1)우리는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적당히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바리새인적 기도가 아닙니다. 뜻도 의미도 없는 중언부언 기도가 아닙니다.
이 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누가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눅 22:44)”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기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적당한 기도가 아니라 생명을 건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소원을 올렸습니다"(히5:7)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간절이 최선을 다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적당히 지나간 말로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응답받은 한나의 기도를 보십시오. 마치 술취한 여인처럼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를 보십시오. 일천 번제를 드리며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십시오. 왕입니다. 절박함 앞에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낯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왕하 20:3) 3년 반동안 가물었던 나라에 비를 내리게 하는 엘리야의 기도를 보십시오. 일곱 번이나 엎드려 기도합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냉냉한 기도는 화살촉이 달려 있지 않은 화살, 칼날이 붙여져 있지 않은 칼, 날개 없는 새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과녁을 꿰뚫을 수도 없고, 조금도 벨 수 없으며, 또한 하늘에 닿을 수도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찰스 웨슬리는 매일 두 시간씩 기도했고, 죤 웨슬리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기도했으며 루터는 하루에 세시간씩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2) 우리는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여야 합니다.
39절, 41절을 보면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으로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내용이 동일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 번 기도하면 될 것이지 뭐 그리 반복하여 기도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반복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 긴 밤 시간에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면 두 가지로 응답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상황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질병을 없애줍니다. 부도의 상황을 반전시켜 주십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아픔을 제거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상황을 바꾸어 주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상황은 여전히 똑같습니다. 유다는 배신하려고 도망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로마 군병들을 예수님을 잡으려고 다가 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잠만 자고 있습니다. 로마는 멸망하지 않아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살기가 등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바뀌었습니다. 41절 42절을 보십시오. 근심과 걱정, 아픔과 괴로움은 사라졌습니다.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나아가십니다. 때가 임했음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일어나 함께 가자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48, 62, 15장 2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하십니까?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은 당당했던 마음이 비굴해져 도망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퍼하던 마음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두려움이 바뀌어 담대함으로 나아갑니다. 마음이 바뀌면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교할 수 있는 마음도 주십니다.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는 마음도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바꾸어 주시든지, 내 마음을 바꾸어 주시든지 둘 중의 하나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바꾸어 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울부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1:17)”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말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왕하 20:5)”다는 말씀을 들을 때까지 기도하였습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마음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1대왕 사울은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하여 첫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심각한 질병에 걸렸습니다. 다윗은 밤새도록 금식하며 엎드려 기도했습니다(삼하 12:16).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을 바꾸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7일동안 기도하였지만 아이는 7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 신하들이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 때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음식을 먹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바꿉니다. 신하들이 이상하여 어찌 이렇게 먹는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이 말합니다.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3)”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서 맡겨준 사명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능력의 사람,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 바울을 보십시오. 기도로 빌립보 감옥문을 연 사람입니다. 벨리데 섬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안수기도하여 났게 한 사람입니다(행 28:9)
그런데 바울이 병에 걸렸습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좇아내는 초자연적 능력을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육체의 가시 즉 고질적인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질병을 떠나게 해 달라고 여러번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응답하셨습니다. 그 후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응답 받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신의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상황을 바꾸어주든지 마음을 바꾸어 주든지 기도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3.1절 90주년을 맞이한 주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경제적 위기와 북한의 전쟁 협박, 물신 주의에 침몰된 도덕적 타락, 또 다른 도전 앞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 5:16)”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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