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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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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섭시다.
마가복음16:1-13
오늘은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오늘 모든 불신과 슬픔, 아픔과 절망을 깨뜨리고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1.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 신앙으로 죽음을 정복하고 소망으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여인들은 슬퍼하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10).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돌무덤 속에 갇혀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주일 새벽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제자들은 집에 모여 슬퍼했습니다. 여인들이 찾아간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시체가 없었습니다. 시체를 찾는 여인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가두어 놓을 수 없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죽음을 정복했습니다. 죽음의 노예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죄의 값으로 찾아온 죽음을 십자가에서 다 지불하심으로 우리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삯인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입니다. 누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우리도 부활 신앙을 가지면 죽음을 정복하고 소망으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를 없애줍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예수님이 부활하였으니 우리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이면 얼마나 우리가 불쌍한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죽음에 종노릇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처음 받은 로마 시대의 신앙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로마 시대 때 기독교인들은 10번에 걸쳐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박해를 한 황제는 네로 황제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불태워 황제의 정원을 밝혔다고 할 정도로 잔인하게 신앙인을 처형하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부활을 믿는 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로 경기장에 밀어 넣었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데 뭉쳐 찬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쇠문이 열리면서 여러 마리의 굶주린 사자들이 뛰쳐나와 사냥감을 발견하고 공격합니다. 밤에는 화형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경기장 안에 횃불을 밝혀 놓고 곳곳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그 아래 장작을 쌓아 놓았습니다. 형리들은 그리스도인들 수십 명을 십자가에 묶은 뒤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로마인들은 조롱합니다.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냐? 더 빛나게 해주랴?" 그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집을 빼앗기고 가족과 이별하고 유리하다가 붙들려 이렇게 화형을 당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며 말했습니다."두려워 맙시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이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믿고 증거하다가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짐승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고전15:16-1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 죽음의 종말,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죽음을 정복하고 소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우리도 죽지 않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주님 만난 사람들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살아났습니다. 주님이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장례하는 행렬에 나타나서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누가복음 7:14)고 말씀하시니 청년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섞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라"(요한복음 11:43)고 부르시니 수족을 동인체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 걱정을 몰아내시고 평강을 주십니다(요한복음 20:19). 슬픔과 눈물로 냉냉한 가슴에 불을 붙여 주십니다(누가복음 24:32). 낙심과 좌절로 방황하는 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요한복음 21:15-17).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죽음을 극복하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납니다. 이 시간 예배드리면서 무덤을 찾지 마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소망 가운데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 신앙으로 불신을 정복하고 믿음으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까? 죽은 시체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11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13절에 보십시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증거해 주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었습니다.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교만하고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 여인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7절 보십시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라는 것입니까?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대로 부활하였으니 말씀을 믿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슬퍼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 만날 소망을 가지고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 26:3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예수님은 여러 차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 8:31)"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활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첫째는 신화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법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성과 경험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기절설). 마리아가 어두운 새벽길에 잘 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빈무덤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도난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환상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신화설).
둘째는 신앙 고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일어난 일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지금도 사람이 부활하여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으니 성경에 기록된 부활 기사는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진정 부활을 믿지 않을까요? 증거가 부족하고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이라 그럴까요? 예수님 말씀합니다. 14절을 다시 보세요.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려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믿음으로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믿고 마가 다락방에 모여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부활은 과학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음의 영역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역시 역사 속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기록을 진실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증거가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기절한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 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해 돋을 때에 무덤으로 다시 베드로가 갔습니다(막16:2). 제자들이 시체들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부활 사건 이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믿고 증거하다가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짐승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거짓을 위해 그렇게 죽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거짓을 위해 순교를 당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고전15:16-1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류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하는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 부활의 사실을 확실이 믿고 불신과 불신으로 오는 걱정과 근심을 떨쳐 버리고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더디 믿는 믿음(11, 12절. 눅 24:25-26)에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파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딤전 1:19-20). 넘어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막 4:17). 연약한 믿음으로(롬14:1-3)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은 믿음으로 늘 염려와 두려움, 의심과 회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마6:24-34, 8:23-28. 14:30) 말씀으로만 얼마든지 믿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하는 백부장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마 8:10).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축복하신 이방 여인과 같이 전적으로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마15:28). 청교도 신학자 Thomas Watson이 말하듯이,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도 믿음은 헤엄쳐갈 수 있습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 신앙으로 두려움을 정복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번째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무덤에 찾아간 사람들도 여인들입니다. 그렇게 장담하던 제자들도 다 떠나 버렸습니다. 당시 여인들은 사람 숫자를 셀 때도 넣지 않을 정도로 천대 받았습니다. 성전에 뜰도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구분해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렸답니다.첫 째는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둘째는 종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셋 째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여인들이 귀중하게 쓰임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 때 민족의 암흑기에 한나는 기도하여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이 풍전등화의 어려움에 있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각오로 민족을 사렸습니다. 드보라는 한 시대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이끈 여인으로 쓰임받았습니다. 요즈음도 결정적인 순간에 교회에서 여인들이 귀하게 쓰임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무엇을 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가서 슬퍼하고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일곱귀신들렸다가 낳은 여인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여인의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증인으로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마리아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부활을 믿지도 않았고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 남자 두 사람이 고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2 사람 남자의 증거는 완벽한데 그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면 예수님께서 권능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부활신앙은 불완전한 믿음을 온전케 합니다. 부활신앙은 사단의 권세를 물리칩니다. 부활신앙은 신비로운 역사를 체험하게 합니다. 부활신앙은 실패자에게 소망을 줍니다. 제자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인생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2)"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가 수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네로 황제 때에는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식인종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성찬식에 대한 오해입니다. 부도덕한 무리라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아가페 사랑을 나누니까 성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했습니다. 상업을 방해한다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가족 파괴주의자들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노예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고 해서 노예 도둑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황제 숭배를 반대한다고 해서 반정부주의자 무정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목적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를 왜 예수님이 세웠습니까?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4-15)”라고 했습니다. 세가지입니다.
첫째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가 전도하게 위해서입니다. 셋째가 영적권세를 가지고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능히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만드실 수 있으실 정도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같이 못나고, 무능하며, 답답한 사람을 택하셔서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을 볼 때 속좁고 소심하고 성급하고, 부족한 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길 원했습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그 교회에 전도하는 교인이 없는 것입니다. 무장 해제를 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을 무장 해제하는 것은 전도 관심 제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의도를 보십시오.
제자를 부르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막 1:38)"
그리고 오늘 공식적으로 12 제자를 임명하면서 전도하게 하기 위해 임명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3:14)
그리고 훈련을 시킵니다. 그들을 파송합니다.(막6:7)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막16:15)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남긴 유언은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그래서 그 전도의 명령을 12제자가 순종하여 이루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1)삼천-행2:41 (2)남자 오천-행4:4 (3)심히 많음-행6:7 (4)남녀 세례-행8:12 (5)수가 많아짐-행9:31 (6)수다한 사람들-행11:21 (7)수만-행21:20이 돌아 왔습니다.
데이빗 왓슨 제자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매년 매일 밤에 1천명씩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면 전세계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데 몇 년의 세월이 필요하겠습니까? 인구 폭발을 고려하지 않아도 대략 1만년이 더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 년에 한 사람씩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 그들이 계속 인도한다면 몇 년 걸리겠습니까? 32년이면 된다고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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