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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4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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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9.9.27 (김 영봉 목사)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By All Means)
--마가복음 9:42-48
1.
오늘 읽은 본문은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에 정해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본문을 읽었을 때, 젊었을 때 겪었던 트라우마가 생각이 났습니다. 벌써 30년도 넘은 일이지만, 그 때, 이 말씀 앞에서 벌벌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이야기를 잠시 드릴텐데, 제 자랑은 아니니 양해하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학에 입학한 다음, 저는 작은 교회에서 중고등부 교사로 섬겼습니다. 교회가 작아서 교육 전도사를 둘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학생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에 처음에는 중고등부 다 합해서 열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제가 교사로 섬길 즈음에 의기투합할 친구들이 두어명 더 있었습니다. 비록 경험이 부족한 평신도 교사들이었지만, 학생들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열심히 지도했습니다. 그 결과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의기투합했던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지금은 다 목사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참, 신나게 봉사를 하는데, 그만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고등부 여학생 중 아주 당돌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제게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틈틈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신호를 보내 오는데,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모르는 척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학생이 답답했던지, 어느 시점부터는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제게 꽃다발을 안기기도 하고, 선물을 전하기도 합니다. 모든 학생들을 차별 없이 보살펴야 하는 교사로서는 허용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굳게 마음을 먹고, 그 여학생을 따로 불러 단호하고도 따끔하게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다음 주일부터 그 여학생이 교회에 나오질 않는 겁니다. 아마도, 제가 너무 단호하게 말한 까닭에 상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학생의 자존심에 대해서도 배려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일로 심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여학생이 영영 하나님을 떠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아주 심했습니다. 그런던 중, 어느 날, 말씀을 읽는 가운데 오늘의 본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막 9:42)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마치 제가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할 장본인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로 인해 그 여학생이 하나님을 영영 떠나 버리면, 그 책임을 제가 어떻게 감당할지를 생각하며, 저는 심하게 떨었습니다.
이 본문에서 ‘죄짓게 하는’이라는 번역은 의역입니다. 직역하자면 ‘넘어지게 하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번역에서는 ‘실족하게 하는’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굳이 구체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넘어져서 믿음을 잃게 만드는 모든 행동을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충분히 배려하지 못해서 그 여학생이 믿음을 잃어 버렸다면, 그 책임이 크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로 오랫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그 여학생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었습니다. 교회는 떠나더라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기를, 나는 미워하더라도 하나님은 사랑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2.
지금도 제게 가장 두려운 일은 누군가가 저로 인해서 믿음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중에 제가 가장 마음 졸이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잘 하다가 발길을 끊으면 저는 가장 먼저 자문합니다. “나 때문은 아닐까?”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거나 떠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뭐니 뭐니 해도 담임목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가끔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분들에게 제가 가장 먼저 여쭙는 질문도 이것입니다. “혹시 제가 뭔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제가 목회하는 모습이 대범하고 담대해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실은, 제 마음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살얼음판을 걸어 보셨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저수지에서 썰매를 타면서 살얼음판을 자주 걸어 보았습니다. 어느 곳이 디딜만한 곳이며 어느 곳이 깨어질 곳인지를, 눈으로 보아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긴장감을 잠시만 놓으면 차가운 물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갑니다. 목회에 임하는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제가 교우들의 사정을 100%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럴 수도 없지만, 그러나 제 마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자리잡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하던 사람에게 부정적인 변화가 보이면 제 근심은 깊어집니다. 꼭 그 탓이 제게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 많은 교인들 가운데 나 하나가 넘어진들 그것이 목사에게 무슨 근심 거리가 될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목자에게 양이 일백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양떼를 떠나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때 목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 나에게는 아직도 아흔 아홉마리의 양이 있으니, 그 한 마리 양은 포기하지, 뭐! 그것 하나쯤은 없어도 되지!”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목자는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고,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이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려는 마음이 예수님에게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영영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제 심정도 그렇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뵐 때, 한 분 한 분을 보려 하지, 천명을 한꺼번에 보지 않습니다. 제게는 한 분 한 분의 믿음이 소중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잘 되고 많은 사람이 모여도, 저로 인해 한 사람이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저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제가 믿음 생활에 실족한 것은 목사님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는 분은 아직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그렇게 짐작되는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의를 차리느라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저로 인해 실족한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고민이요, 근심이며, 한숨이며, 또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생활에서의 넘어짐은 곧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말씀 드립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로 인해 실족하신 분이 계시다면, 저의 부족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회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인한 책임을 물으신다면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만 이것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이유로도 희생시키기에는 너무나도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끓는 심정으로 말씀 드립니다. 그 어떤 이유로든지 하나님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등 돌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오늘 읽은 본문 중에 43절부터 47절을 보면 끔찍한 말씀이 나옵니다. 손이나 발이 죄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리고, 눈이 죄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듣는 이들의 마음에 graphic하게, 자극적으로, 각인시켜 줍니다. 여기서도 역시 ‘죄 짓게 하거든’이라는 말을 ‘넘어지게 하거든’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과정에 심각한 방해가 되는 문제가 있다면, 주저말고 그것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두 손 다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손 없이 천국에 가는 것이 더 낫고, 두 발 다 가지고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것보다 발 없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더 나으며, 두 눈 다 가지고 살다가 하나님을 잃는 것보다 두 눈을 잃고라도 하나님을 얻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장애가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욕심,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마음들은 큰 장애 요인입니다. 여러 가지의 중독도 역시 영적 생활에 장애가 됩니다. 마약 중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포르노 중독 같은 것들은 영적인 생명을 질식시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중독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이나 드라마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도 영적 생활에 장애가 됩니다. 나의 관심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들은 모두 장애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 진보하려면 이런 것들을 잘 살펴야 합니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을 때는 적절하게 치료하도록 노력하되, 상태가 심각할 때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43절부터 47절의 말씀이 왕왕 문제를 만들어 내곤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잘라라”, “다리를 잘라라”, “눈을 뽑아라”는 말씀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절대 잊혀지지 않도록 각인시리켜는 비유였습니다. 그런데 말귀를 못 알아듣고 실제로 손을 자르거나 다리를 자르거나 눈을 뽑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도박을 청산하기 위해 오른손 손목을 자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중에 왼손으로 다시 도박에 손을 대게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 포르노에 중독되어 고민하던 어떤 청년이 하루는 컴퓨터 모니터를 던져 깨뜨려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됩니까? 문제의 뿌리는 여전히 그 청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자해 소동을 벌이라는 뜻이 아니라 죄의 뿌리를 뽑아 내라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손에 있습니까? 발에 있습니까? 눈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혹시나 마음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헛된 욕망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우상숭배의 욕망은 없는지, 허영심은 없는지, 미움은 없는지, 진지하게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게 만들 부정한 욕망은 없는지, 더러운 쾌락에의 욕망은 없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 다독거리고 돌보아 길들일 수 있는지, 아니면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은 아닌지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는 것에 대해 그 무슨 핑게도 허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목사가 문제입니다. 때론 교회 중직들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들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위협하는 것은 무슬림도 아니요 무신론자도 아닙니다. 바로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잘 믿는다’고 떠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로 인해 실족하고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코, 결코, 그것이 핑게가 되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충분한 사유가 되지 못합니다.
4.
동시에, 교회로 모여 믿음 생활을 해 나가는 동안 우리가 다른 사람의 넘어짐의 동기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하십시다. 교회에 다니다가 사람 때문에 낙심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아니, 사람 보고 교회 다니면 어떡해? 하나님 보고 다녀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핑게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행동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면 안 될 것입니다.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믿음 생활에 있어서 진보하도록 돕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로 모이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를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마 10:14).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는 행동은 ‘이제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나는 더 이상 책임이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는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2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마지막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설교 중에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하게 증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행 20:26-27). 이렇게 말하고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32절).
여기서 우리는 교회 밖에서 전도하고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우리는 교회 밖에서 전도하고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다’라는 말에는 ‘열심’도 포함되고 ‘지혜’도 포함됩니다. 무조건 열심을 다한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누군가로부터 받는 지나친 열심이 부담스러워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생깁니다. 때로는 전도하는 사람들의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서 아예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가운데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살피면서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그 사람이 영적으로 자라도록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한 다음에 우리는 비로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릴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는 것은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한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다하면서도 그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 뿐입니다. 도구로써 사용되는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 다음, 하나님께 맡기고 물러설 때도 있습니다.
5.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즉,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막 9:42).
지금 읽어도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의 문제는 한 사람의 영원과 관계 되는 일입니다. 목숨을 다루는 의사가 판단을 잘 못 하면 몇 십년과 관계되지만, 영혼을 다루는 사람이 잘 못하면 영원과 관계됩니다.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걸린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가 전도하는 일이,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이 일에 소홀히 임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일입니까?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목사로, 교사로, 속장으로, 전도자로, 선교사로 나선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험한 벼랑으로 밀고 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위험을 생각한다면, 당장 하던 일을 중지하고, 나 혼자만 생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 듣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그분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영혼을 다루는 일이 그만큼 위험하니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 그토록 중대한 허물이라면, 다른 사람이 믿음의 길에 들어서게 하고 그 길에서 진보하도록 돕는 일은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내가 도구가 되어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바뀐다고 한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값지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하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깨닫고, 그 일에 마음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저의 부족함과 허물을 알면서도, 마가복음 9장 42절같은 공포스러운 말씀을 알면서도, 여전히 한 교회의 중심에 서서 목회의 길을 계속 걷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을 구하고 변화시키는 이 일처럼 보람되고 값진 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처럼 아름답고 의미있고 감동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이 놀라운 일에 사용하신다면, 이처럼 큰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이 일에 실패했을 때의 위험이 큰만큼, 이 일에 성공했을 때의 보람도 큽니다.
저는 또한, 한 영혼을 얻고 회복시키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만일 그 일을 제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벌써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 고귀하고 엄청난 일에 제 자격이 심히 부족하지만,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정성을 다하다 보면, 그분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제 자신으로 말하자면, 실은 제 자신의 영혼 하나도 책임질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의 영혼을 돌본다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제 앞에서, 저를 통해서 그리고 제 뒤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지 못한다면 그 부담감 때문에 오래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에게도 이 일에 참여하도록 호소합니다. 이미 이 일에 참여하고 계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새 학기에 교사로서 어린 영혼들을 위해 혹은 어른들을 위해 섬기시는 교우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속장으로서 교우들을 섬기는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수고가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하고 또한 그 영혼이 성장하는 일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고 있음을 아시고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일의 고귀함을 알아 더욱 정성으로 임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로써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간접적으로 섬기는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고 성장하도록 돕는 데 필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구석 구석에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사귀고 섬기는 일에 헌신하시는 교우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요즈음 센터빌 캠퍼스에 가 보셨나요? 새로운 장소로 옮겨 새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교우들이 서로 팔을 걷어부치고 섬기는 모습이 얼마나 감동스러운지요! 여러분의 그 헌신이 디딤돌이 되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한다면, 그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하다가 상처받거나 지친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치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땅히 겪어야 할 일입니다. 여전히 열심히 섬기는 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은 그런 상처를 받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섬기는 줄 아십니까? 그런 상처와 아픔들을 견디고 강해져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은총을 받아 강해지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 6:9).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사귀고 섬기는 일에 주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 앞 가림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 그래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는 것은 곧 영적 퇴보를 의미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개인주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는다면 이웃과 통해야 하고, 믿음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면 서로 사귀고 섬기는 일에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내 자신의 믿음도 자라고 다른 사람도 함께 자랄 수 있습니다.
6.
바울 사도가 각고의 헌신과 눈물과 희생 끝에 얻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하며 쓴 글을 기억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살전 2:19-20)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학식도 아니며, 재산도 아니고, 명성도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기도와 눈물과 섬김을 통해서 얻은 영혼들입니다. 실은,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영적으로 성장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로인데,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 공로를 모두 우리의 것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초라한 사람들이겠습니까? 나 혼자만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친 인생이라면 주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 없는 믿음이라면 그보다 더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영적 생활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처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장애물들을 헤치고 나아가 영적으로 무럭 무럭 성장하기를 힘쓰십시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날 동안, 교회 밖에서 전도하고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에 더욱 힘쓰십시다. 다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영혼을 보는 눈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하고 섬기십시다. 내 인생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한 영혼이라도 구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사십시다.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 섬기십시다. 그 일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거룩한 기쁨이 들어찰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우리는 감사와 기쁨으로 가슴 벅찰 것입니다.
이같은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교회 설립 58주년을 두 주일 앞 둔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서로를 세우는 교회, 진정한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로 성숙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까지도 찾아내기를 원하시는 주님,
저희에게 그 마음을 주소서.
주님을 떠나 방황하며 살아가는 영혼들을 보게 하시고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하소서.
저희 각자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거듭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주님,
교회로 모인 저희가 서로 사귀고 섬김으로
그 뜻이 저희 모두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도록
저희를 붙드시고 인도하소서.
아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By All Means)
--마가복음 9:42-48
1.
오늘 읽은 본문은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에 정해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본문을 읽었을 때, 젊었을 때 겪었던 트라우마가 생각이 났습니다. 벌써 30년도 넘은 일이지만, 그 때, 이 말씀 앞에서 벌벌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이야기를 잠시 드릴텐데, 제 자랑은 아니니 양해하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학에 입학한 다음, 저는 작은 교회에서 중고등부 교사로 섬겼습니다. 교회가 작아서 교육 전도사를 둘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학생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에 처음에는 중고등부 다 합해서 열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제가 교사로 섬길 즈음에 의기투합할 친구들이 두어명 더 있었습니다. 비록 경험이 부족한 평신도 교사들이었지만, 학생들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열심히 지도했습니다. 그 결과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의기투합했던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지금은 다 목사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참, 신나게 봉사를 하는데, 그만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고등부 여학생 중 아주 당돌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제게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틈틈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신호를 보내 오는데,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모르는 척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학생이 답답했던지, 어느 시점부터는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제게 꽃다발을 안기기도 하고, 선물을 전하기도 합니다. 모든 학생들을 차별 없이 보살펴야 하는 교사로서는 허용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굳게 마음을 먹고, 그 여학생을 따로 불러 단호하고도 따끔하게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다음 주일부터 그 여학생이 교회에 나오질 않는 겁니다. 아마도, 제가 너무 단호하게 말한 까닭에 상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학생의 자존심에 대해서도 배려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일로 심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여학생이 영영 하나님을 떠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아주 심했습니다. 그런던 중, 어느 날, 말씀을 읽는 가운데 오늘의 본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막 9:42)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마치 제가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할 장본인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로 인해 그 여학생이 하나님을 영영 떠나 버리면, 그 책임을 제가 어떻게 감당할지를 생각하며, 저는 심하게 떨었습니다.
이 본문에서 ‘죄짓게 하는’이라는 번역은 의역입니다. 직역하자면 ‘넘어지게 하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번역에서는 ‘실족하게 하는’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굳이 구체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넘어져서 믿음을 잃게 만드는 모든 행동을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충분히 배려하지 못해서 그 여학생이 믿음을 잃어 버렸다면, 그 책임이 크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로 오랫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그 여학생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었습니다. 교회는 떠나더라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기를, 나는 미워하더라도 하나님은 사랑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2.
지금도 제게 가장 두려운 일은 누군가가 저로 인해서 믿음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중에 제가 가장 마음 졸이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잘 하다가 발길을 끊으면 저는 가장 먼저 자문합니다. “나 때문은 아닐까?”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거나 떠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뭐니 뭐니 해도 담임목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가끔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분들에게 제가 가장 먼저 여쭙는 질문도 이것입니다. “혹시 제가 뭔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제가 목회하는 모습이 대범하고 담대해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실은, 제 마음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살얼음판을 걸어 보셨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저수지에서 썰매를 타면서 살얼음판을 자주 걸어 보았습니다. 어느 곳이 디딜만한 곳이며 어느 곳이 깨어질 곳인지를, 눈으로 보아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긴장감을 잠시만 놓으면 차가운 물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갑니다. 목회에 임하는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제가 교우들의 사정을 100%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럴 수도 없지만, 그러나 제 마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자리잡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하던 사람에게 부정적인 변화가 보이면 제 근심은 깊어집니다. 꼭 그 탓이 제게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 많은 교인들 가운데 나 하나가 넘어진들 그것이 목사에게 무슨 근심 거리가 될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목자에게 양이 일백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양떼를 떠나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때 목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 나에게는 아직도 아흔 아홉마리의 양이 있으니, 그 한 마리 양은 포기하지, 뭐! 그것 하나쯤은 없어도 되지!”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목자는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고,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이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려는 마음이 예수님에게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영영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제 심정도 그렇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뵐 때, 한 분 한 분을 보려 하지, 천명을 한꺼번에 보지 않습니다. 제게는 한 분 한 분의 믿음이 소중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잘 되고 많은 사람이 모여도, 저로 인해 한 사람이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저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제가 믿음 생활에 실족한 것은 목사님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는 분은 아직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그렇게 짐작되는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의를 차리느라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저로 인해 실족한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고민이요, 근심이며, 한숨이며, 또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생활에서의 넘어짐은 곧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말씀 드립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로 인해 실족하신 분이 계시다면, 저의 부족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회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인한 책임을 물으신다면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만 이것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이유로도 희생시키기에는 너무나도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끓는 심정으로 말씀 드립니다. 그 어떤 이유로든지 하나님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등 돌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오늘 읽은 본문 중에 43절부터 47절을 보면 끔찍한 말씀이 나옵니다. 손이나 발이 죄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리고, 눈이 죄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듣는 이들의 마음에 graphic하게, 자극적으로, 각인시켜 줍니다. 여기서도 역시 ‘죄 짓게 하거든’이라는 말을 ‘넘어지게 하거든’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과정에 심각한 방해가 되는 문제가 있다면, 주저말고 그것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두 손 다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손 없이 천국에 가는 것이 더 낫고, 두 발 다 가지고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것보다 발 없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더 나으며, 두 눈 다 가지고 살다가 하나님을 잃는 것보다 두 눈을 잃고라도 하나님을 얻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장애가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욕심,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마음들은 큰 장애 요인입니다. 여러 가지의 중독도 역시 영적 생활에 장애가 됩니다. 마약 중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포르노 중독 같은 것들은 영적인 생명을 질식시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중독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이나 드라마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도 영적 생활에 장애가 됩니다. 나의 관심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들은 모두 장애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 진보하려면 이런 것들을 잘 살펴야 합니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을 때는 적절하게 치료하도록 노력하되, 상태가 심각할 때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43절부터 47절의 말씀이 왕왕 문제를 만들어 내곤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잘라라”, “다리를 잘라라”, “눈을 뽑아라”는 말씀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절대 잊혀지지 않도록 각인시리켜는 비유였습니다. 그런데 말귀를 못 알아듣고 실제로 손을 자르거나 다리를 자르거나 눈을 뽑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도박을 청산하기 위해 오른손 손목을 자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중에 왼손으로 다시 도박에 손을 대게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 포르노에 중독되어 고민하던 어떤 청년이 하루는 컴퓨터 모니터를 던져 깨뜨려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됩니까? 문제의 뿌리는 여전히 그 청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자해 소동을 벌이라는 뜻이 아니라 죄의 뿌리를 뽑아 내라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손에 있습니까? 발에 있습니까? 눈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혹시나 마음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헛된 욕망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우상숭배의 욕망은 없는지, 허영심은 없는지, 미움은 없는지, 진지하게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게 만들 부정한 욕망은 없는지, 더러운 쾌락에의 욕망은 없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 다독거리고 돌보아 길들일 수 있는지, 아니면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은 아닌지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는 것에 대해 그 무슨 핑게도 허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목사가 문제입니다. 때론 교회 중직들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들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위협하는 것은 무슬림도 아니요 무신론자도 아닙니다. 바로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잘 믿는다’고 떠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로 인해 실족하고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코, 결코, 그것이 핑게가 되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충분한 사유가 되지 못합니다.
4.
동시에, 교회로 모여 믿음 생활을 해 나가는 동안 우리가 다른 사람의 넘어짐의 동기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하십시다. 교회에 다니다가 사람 때문에 낙심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아니, 사람 보고 교회 다니면 어떡해? 하나님 보고 다녀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핑게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행동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면 안 될 것입니다.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믿음 생활에 있어서 진보하도록 돕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로 모이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를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마 10:14).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는 행동은 ‘이제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나는 더 이상 책임이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는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2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마지막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설교 중에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하게 증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행 20:26-27). 이렇게 말하고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32절).
여기서 우리는 교회 밖에서 전도하고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우리는 교회 밖에서 전도하고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다’라는 말에는 ‘열심’도 포함되고 ‘지혜’도 포함됩니다. 무조건 열심을 다한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누군가로부터 받는 지나친 열심이 부담스러워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생깁니다. 때로는 전도하는 사람들의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서 아예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가운데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살피면서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그 사람이 영적으로 자라도록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한 다음에 우리는 비로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릴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는 것은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한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다하면서도 그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 뿐입니다. 도구로써 사용되는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 다음, 하나님께 맡기고 물러설 때도 있습니다.
5.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즉,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막 9:42).
지금 읽어도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의 문제는 한 사람의 영원과 관계 되는 일입니다. 목숨을 다루는 의사가 판단을 잘 못 하면 몇 십년과 관계되지만, 영혼을 다루는 사람이 잘 못하면 영원과 관계됩니다.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걸린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가 전도하는 일이,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이 일에 소홀히 임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일입니까?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목사로, 교사로, 속장으로, 전도자로, 선교사로 나선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험한 벼랑으로 밀고 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위험을 생각한다면, 당장 하던 일을 중지하고, 나 혼자만 생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 듣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그분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영혼을 다루는 일이 그만큼 위험하니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 그토록 중대한 허물이라면, 다른 사람이 믿음의 길에 들어서게 하고 그 길에서 진보하도록 돕는 일은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내가 도구가 되어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바뀐다고 한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값지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하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깨닫고, 그 일에 마음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저의 부족함과 허물을 알면서도, 마가복음 9장 42절같은 공포스러운 말씀을 알면서도, 여전히 한 교회의 중심에 서서 목회의 길을 계속 걷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을 구하고 변화시키는 이 일처럼 보람되고 값진 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처럼 아름답고 의미있고 감동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이 놀라운 일에 사용하신다면, 이처럼 큰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이 일에 실패했을 때의 위험이 큰만큼, 이 일에 성공했을 때의 보람도 큽니다.
저는 또한, 한 영혼을 얻고 회복시키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만일 그 일을 제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벌써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 고귀하고 엄청난 일에 제 자격이 심히 부족하지만,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정성을 다하다 보면, 그분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제 자신으로 말하자면, 실은 제 자신의 영혼 하나도 책임질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의 영혼을 돌본다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제 앞에서, 저를 통해서 그리고 제 뒤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지 못한다면 그 부담감 때문에 오래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에게도 이 일에 참여하도록 호소합니다. 이미 이 일에 참여하고 계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새 학기에 교사로서 어린 영혼들을 위해 혹은 어른들을 위해 섬기시는 교우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속장으로서 교우들을 섬기는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수고가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하고 또한 그 영혼이 성장하는 일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고 있음을 아시고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일의 고귀함을 알아 더욱 정성으로 임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로써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간접적으로 섬기는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고 성장하도록 돕는 데 필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구석 구석에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사귀고 섬기는 일에 헌신하시는 교우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요즈음 센터빌 캠퍼스에 가 보셨나요? 새로운 장소로 옮겨 새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교우들이 서로 팔을 걷어부치고 섬기는 모습이 얼마나 감동스러운지요! 여러분의 그 헌신이 디딤돌이 되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한다면, 그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하다가 상처받거나 지친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치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땅히 겪어야 할 일입니다. 여전히 열심히 섬기는 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은 그런 상처를 받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섬기는 줄 아십니까? 그런 상처와 아픔들을 견디고 강해져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은총을 받아 강해지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 6:9).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사귀고 섬기는 일에 주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 앞 가림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 그래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는 것은 곧 영적 퇴보를 의미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개인주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는다면 이웃과 통해야 하고, 믿음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면 서로 사귀고 섬기는 일에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내 자신의 믿음도 자라고 다른 사람도 함께 자랄 수 있습니다.
6.
바울 사도가 각고의 헌신과 눈물과 희생 끝에 얻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하며 쓴 글을 기억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살전 2:19-20)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학식도 아니며, 재산도 아니고, 명성도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기도와 눈물과 섬김을 통해서 얻은 영혼들입니다. 실은,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영적으로 성장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로인데,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 공로를 모두 우리의 것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초라한 사람들이겠습니까? 나 혼자만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친 인생이라면 주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 없는 믿음이라면 그보다 더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영적 생활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처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장애물들을 헤치고 나아가 영적으로 무럭 무럭 성장하기를 힘쓰십시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날 동안, 교회 밖에서 전도하고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에 더욱 힘쓰십시다. 다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영혼을 보는 눈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하고 섬기십시다. 내 인생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한 영혼이라도 구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사십시다.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 섬기십시다. 그 일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거룩한 기쁨이 들어찰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우리는 감사와 기쁨으로 가슴 벅찰 것입니다.
이같은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교회 설립 58주년을 두 주일 앞 둔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서로를 세우는 교회, 진정한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로 성숙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까지도 찾아내기를 원하시는 주님,
저희에게 그 마음을 주소서.
주님을 떠나 방황하며 살아가는 영혼들을 보게 하시고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하소서.
저희 각자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거듭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주님,
교회로 모인 저희가 서로 사귀고 섬김으로
그 뜻이 저희 모두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도록
저희를 붙드시고 인도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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