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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2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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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인 목사 |
참고 :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3설교집 <하늘농사꾼/모퉁이돌> 에서 |
예수께 손을 댄 자 (마가복음 5: 25-34)
마가복음 5장 25장에서 34절까지 있는 말씀 가지고 "예수께 손을 댄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30절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열 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께 손을 가만히 대었더니 능력이 곧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병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손을 대었다'하는 말은 '예수님과 연결이 되었다, 혹은 예수님과 인연을 맺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이 되고 예수님과 인연을 맺었다고 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공자와 인연을 맺고 연결이 되었다 하면 유교인이 되었었기 때문입니다. 상투 틀고 공자와 맹자왈 했을 뻔했는데, 우리가 유교인이 안 된 것을 감사할 일입니다. 그들을 생각하게 되면 불쌍한 생각이 끝이 없습니다. 또 석가모니와 연결이 되고 석가모니와 인연을 맺었다면 불교인이 되어서, 머리 깎고 가정을 저버리고 절에 들어앉아, 하루에 나무아미타불을 백번 천번 외면서, 그것으로 인생 구원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하는 불쌍한 반열에 설 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인연을 맺고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손을 댄 자, 예수님과 연결이 된 자'의 기쁨을 간직한 복을 받은 것입니다.
I. 만남의 신자(25-28절)
1. 불행 중에 만남(25-26절)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첫째로 '만남의 신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만남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친구 사이지만 자주 만나야 더 다정한 친구가 됩니다. 정이 두터워지고, 서로 신임하는 바가 깊어지고, 서로 깊이 알게 되고 그래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심지어 부부지간에도 자꾸 만나야 합니다. 오래 떨어져 있어 보십시오. 형제지간에도 자주 만나야하고, 오래 떨어져 있으면 상당히 멀고 서먹서먹해 집니다. 그렇게 때문에 만남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만나고, 모레도 만나고 계속 예수님과 이 만남의 체험이 있을 때에 주님과 정이 두터워 집니다. 믿음이 깊어지고, 주님을 싶이 알게 되고, 주님 없으면 못 살겠다 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자가 얼마나 불행했나 하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불행이 인연이 되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혈루증이라는 것은 여자가 아래로 자꾸 피를 쏟는 병입니다. 피를 쏟을 뿐만 아니라 냄새가 나고, 더럽고 그래서 유대 나라 풍속과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들은 부정한 자로 규정이 됩니다. 자신이 부정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만약에 그런 여자가 집 안에 있어 부지중에 그에게 손을 댔다던가 접촉이 되는 사람도 하루 종일 부정을 타서 옷을 빨아야 되고, 목욕을 해야 되고, 저녁까지 부정하기 때문에 안식일이라 해도 회당에 못 가고 옆집에 놀러도 못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얼마나 불행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집안에 그런 여자가 하나 생긴다고 하는 것은 우환도 보통 우환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여자들이 남자에게 소박을 맞습니다. 쫓겨나는 것입니다. 본문의 여자를 보니 십이년을 혈루증을 앓으면서, 많은 병원을 찾아다니며 의사에게 치료받느라 온갖 고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있던 돈도 다 허비하였고, 그리고도 좀 나았으면 좋은데 낫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증세가 더 중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돈이면 고칠 줄 알았으나 이제는 돈도 믿을 바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기술 즉 의술도 좀 믿어 보았더니 의술도 과학도 믿을 바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찾아가도, 어디를 찾아가도, 또 무슨 일을 해도 이제는 전혀 해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집안에서 쫓겨나고, 재산은 다 허비해 버리고, 그리고도 살 길이 없었던 불행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여자가 이런 불행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여자에게는 그 불행이, 십이년 동안 견딜 수 없는 고통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때때로 고통과 불행과 어려움이 올 때는 주님을 한번 더 만나보고 좀 깊이 사귀어 보라는 기회인 줄로 믿고, 오히려 불행을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소문을 듣고 만남(27상반절)
다음에는 소문을 듣고 만났다는 것입니다. 소문이라고 하는 것이 이 혈루증 않는 여인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고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이 소문을 듣자하니 아무개도 몹쓸 병에 걸렸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고침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누구누구도 죽을병에 걸렸는데 어느 병원 찾아가서 약을 써 봐도 도무지 안 되던 것을, 예수님을 찾아갔더니 예수님이 고쳐 주어서, 말하자면 예수님에 의해서 건강을 얻었다는 바로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 사람의 예수라면 나의 예수님이요, 저 사람을 고친 예수님은 나도 고쳐줄 것'이라고 그 여인은 소문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소문이 그로 하여금 예수를 찾게 했고 만나게 했습니다. 소문을 못 들었다면 예수를 알지도 못했고 찾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았다는 일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소문 듣고 믿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믿지를 못했습니다. 지금은 한권으로 된 신구약을 다 가지고 마음대로 읽고 상고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개인이 성경을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양의 가죽에 성경을 손수 써야 되거나 70인역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쓴다는 것, 개인이 가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소문으로 듣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만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에 관한 것을 전부 또 정확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소문이 인연이 되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또 만나야 한다는 뜻으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열심히 배워야 하고, 열심히 읽어야 하고, 열심히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말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에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꼭 만나고 또 계속 만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확신을 갖고 만남(27하반절)
그리고 그 다음에는 확신을 갖고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열 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불행한 여자가 마음속에 확신을 가졌습니다. 즉 내가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즉 병고침 받으리라는 확신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 백 번 나가 봐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면, 예수님을 찾을 이유가 없고 예수님을 만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는 분명히 병고침 받는다'는 확신을 갖고 온 것입니다. 바로 이 확신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 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자가 소문으로 들었던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손을 대면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대었더니 믿는 대로 되었습니다. 이런 확신이 바로 믿는 대로 되는 것이요, 이런 확신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불행할 때에 만났고, 소문을 듣고 만났고, 확신을 갖고 만났습니다.
II. 증거하는 신자(20-33절)
1. 깨닫고 증거(29절)
다음은 '증거하는 신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았으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29절부터 33절까지인데 첫째로는 깨닫고 증거했습니다. 사탕 맛을 평생 보지 못한 사람에게 사탕 맛이 달다고 설명해 봐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누가 와서 "이 사람아 사탕 맛이 어디 다냐"고 하면 또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탕을 먹어 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또 자신이 분명하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증거를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만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는 이런 분이다. 혹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과 사랑은 이렇다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 축복을 한번 체험해 보십시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때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체험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눈물겹도록 받아 본 여자는 남편이 죽은 후에 이십년 삼십년이 지난 후에도 남편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면서 감격해 합니다. 남편 이야기 들으면 들을수록 더 좋고 감격스러운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남편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수에 남편의 사랑을 전혀 받아 보지 못한 사람, 결혼하자마자 구박을 먼저 맞은 여자에게 남편 이야기가 감격스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능력과 축복을 내 몸으로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 이름만 들어도 그저 감격스러워 예수님을 증거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워서가 아니라, 듣고서가 아니라, 몸으로 예수님을 깨닫고 어디 가서나 예수님을 높이고 증거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알고서 증거(30-33상반절)
다음에는 알고서 증거했습니다. '몸에 깨달으니라'하는 말씀과 '알고'하는 말씀은, 말은 비슷해도 내용은 다릅니다. 깨달았다는 말은 분명히 피가 쏟아지고 냄새나고 더럽던 혈루 근원이 즉시로 다 끊어 졌다는 뜻입니다. 냄새도 가셔 버리고 더러운 것도 없어지고 피도 멎은 것을 완전히 그 몸에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의 알았다는 말은 내가 이병이 어째서 나왔는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약을 먹고 또는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예수님에 의해서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어디 가서 나 이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자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저 사람이 내 문제 해결했다고 하면 저 사람을 말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 예수님을 말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고 하면 나 자신을 자랑할 일이지 예수 증거하고 예수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던 것을 주님께서 능력을 베풀어서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증거하였습니다.
사람이 해결 못하는 문제는 주님만이 해결합니다.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이 있고, 고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 고칠 수 있는 병은 병원에 가서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는 병은 주님께 속한 병이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이 아니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 여인은 '병원에서 못 고친 병 주님이 고치셨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문제도 주님이 모두 해결한다. 능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담대히 주님을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내가 해결 못하고 사람이 해결 못하는 것을 주님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엎드려 증거(33하반절)
그 다음에는 엎드려 증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이렇게 사람들이 에워싸 미는데 누가 주님께 손을 댔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내게 손 댄 사람이 있다 밝혔습니다. 그리고 나서 돌아다보실 때 여자가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모든 사실 - 자기가 불행해졌던 일, 병원 찾아다니던 일, 재산 다 허비한 일, 가정에서 소박 맞고 쫓겨난 일 그리고 예수님의 옷에 손대서 자기가 병 고침 받은 일 - 전부를 증거하고 간증하였습니다. 모든 둘러선 사람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높이고 자기는 낮아져서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낮아지고 예수님을 높이는 증거라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 간증을 통해서 예수님이 높아져야지 내가 높아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간증하는 사람 자신이 높아지기가 쉽습니다. 모든 영광을 간증하는 사람이 받기가 쉽습니다. 극히 조심해야 될 일입니다. 간증할 때에는 예수님만 계속 높여야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하여 자기는 낮아지고 예수님을 높이는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이 여자는 자기는 엎드려 낮아지고, 예수님을 높이는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의 체험, 우리의 간증, 우리의 증거는 반드시 예수님을 높이는 엎드려 증거하는 증거가 되어야만 합니다.
III. 축복 받는 신자(34절)
1. 자녀 되는 축복(34상반절)
마지막으로 '축복 받는 신자'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딸이라는 말씀을 거의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는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 된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축복입니다. 가령 저 집에 세상 것 엄청나게 좋은 것을 다 갖추고 살아도, 내가 그 집의 아들 딸 이 되지 못하면 갖춰 놓은 그 좋은 것들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집의 아들 딸만 됐다 하면 아무 공로 없이 다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그 영광스러운 것 다 갖춰 놓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아들 딸 되지 못하면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딸 만 되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과 똑같이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가져도 좋고 못 가져도 좋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 되면 그 자체가 최고의 복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은 못 되고 세상 것을 전부 가지고 살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의 기본적인 축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짐이요 하나님의 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이 자녀 된 축복이 가장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2. 믿음의 축복(34중반절)
다음에는 '믿음의 축복'입니다. 사람에게는 건강이라는 것이 상당히 큰복입니다. 제 경우도 병이 경치고 너무 너무 약해지다 보니 기도도 못하겠고 예배드릴 때 찬송도 부르기 싫고, 성경 찾기도 싫고, 손끝 하나 움직이기가 싫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성경은 다 아는 것이니 들으면 되고, 찬송이야 다 아는 것이므로 따라 부르면 되지 하는 마음에서 성경 찬송 들고 오기조차도 싫었습니다. 건강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에게 건강만 복인가요? 재산이란 것도 복입니다. 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다만 재산이 복의 전부인 줄 알 때에 기복신앙이라고 하여 나쁘다는 것입니다. 재산도 우리에게 엄청나고 귀한 복입니다. 그리고 내 가정에 주시는 자녀도 복입니다. 다 하나님의 아들 딸 이지만 우리가 낳는 재미, 키우는 재미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도 가정이라는 것도 얼마나 큰복입니까? 평생 남자가 혼자 살고 여자가 혼자 산다고 해 보십시오.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그런데 짝을 이루어 재미있게 살게 되니 큰복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믿음이라는 것이 이 여자에게는 큰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 여자가 가정이 없었어요? 십이년 전에는 건강하지 않았나요? 아들 딸이 없었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여자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믿음이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귀한 복입니다.
3. 평안의 축복(34하반절)
마지막으로는 평안의 축복입니다. 복의 첫째로는 자녀 된 복이요, 둘째로는 믿음의 복이요, 셋째로는 평안의 복인데, 여기 우리말 성경에는 '평안히 가라'이제는 건강해졌으니 갈 데로 가라는 뜻으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원문이 헬라어 성경을 보게 되면 반드시 그 앞에는 에이스라는 전치사를 씁니다. 그 에이스라는 말은 영어로 into입니다. '평안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까지는 평안 밖에서 맴돌았고, 남의 평안을 보기만 했고, 네게는 평안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헬라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 할 때 우리는 그저 예수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에이스'입니다. 반드시 '안으로'라는 전치사가 들어갑니다. 예수 밖에서 방황하지 말고 예수를 안으로 믿어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번역할 때 '예수 믿으라' 그렇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영어에도 예수 믿는다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 할 적에는 반드시 in이라는 전치사가 들어갑니다.
영어 하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Believe in God'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뜻도 평안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평안 밖에서 맴도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정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육신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생활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그렇다고 마음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예수 만나기 전에 심령의 평안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평안이 예비 된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허락 하에, 주님의 명령 하에, 주님의 축복 하에, 평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건강도 얻었고, 생활의 보장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온전한 평안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결론을 지으면 예수님을 만났고, 은혜 받아 증거하고 결과는 축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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