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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3:2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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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이런 죄는 짓지 마세요
막 3:20-30
*월요일 아침입니다.
오후에 태국을 다녀오게 되면 토요일 오후이므로 2008년 7월6일 주일 2부 설교준비가
조급하게 됩니다. 해서 일찍, 지난 밤새워 설교문을 작성했습니다.
한 주간의 흐름이 다시 어떤 방향성을 갖게될지 모릅니다만, 생명을 위한 삶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을 듯 합니다.
말에나 행동에나 '성령을 거스르지 않는 나날'이 이 번 주 성서적 삶입니다.
모든 교우들도 나와 같이 그 길을 가게 되길 소원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무한하셔서 회개하고 돌아서는 사람은 다 용서하신다고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악령을 추방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생명이 용솟음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 나라는 날로 확산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학자들이 갈릴리에 내려와서 예수의 일들을 조사하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국회 조사단과도 같은 것이죠. 와서 봤더니 갈릴리의 한 청년이 놀라운 힘으로 병든 사람을 고치고 악령을 추방하며 시름시름하던 사람들과 사회를 희망이 넘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리 그 세력이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사태가 간단하지 않음을 깨달은 저들은 도대체 이 예수라는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예수라는 청년은 자신들이 절대시하는 율법을 헌신짝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이 운동을 하나님의 법에 역행하는 반역자들의 운동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청년은 악령의 두목 바알세블의 힘에 붙들려 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을 모두에게 알리면서 그를 따르지 말라고 선전을 했습니다.
이 선전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이 말을 듣고 놀라서 예수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한 것을 보아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내어 쫓을 수가 있겠느냐. 한 나라나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나라, 그 가정은 망하고 만다. 사탄의 나라도 내분이 되면 망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을 털어 가려면 먼저 그 집의 힘센 사람을 묶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신 말씀이 “어떤 사람이 어떤 죄를 짓든지 혹은 어떤 말을 하던지 다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였습니다.
이 말을 정리한다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자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구원하려면 먼저 그 세력의 중심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을 파견한 예루살렘 성전에 앉은 무리들을 공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것을 결심하십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수동적인 자세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의 전환입니다. 사탄의 세력이란 생명을 해치려는 악당들의 조직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엉킨 무리들을 사탄의 세력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는 일을 악령이 하는 일이라고 선전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하는 일과 악령이 하는 일은 어떻게 다릅니까? 성령이 하는 일이란 천하보다도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혀서 죽음의 길로 가는 자들을 해방시켜서 서로 위하고 아끼는 생명공동체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창조 설화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의 기운이 생명을 창조시지 않았습니까? 출애급 사건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입김이 홍해를 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의 삶을 통해서 확산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운이 하늘나라의 잔치를 차려 모두에게 기쁨에 찬 삶을 살게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 선생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다” 라고 했습니다. 모두 생명 공동체를 창조하기에 필요한 영적인 성품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것을 악령의 두목의 힘으로 한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얼토당토 하지 않는 말입니까? 저들이 이렇게 진리를 왜곡하는 까닭이란 그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함입니다.
악령이 하는 일이란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게 하여 생명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이런 악한 영을 가진 자들이 한데 엉켜서 제도화되면 그것이야말로 사탄의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데 엉킨 무리들이야말로 그런 무리들입니다. 그들이 그런 악행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어서 많은 무리들은 저들의 정체를 그릇 알고 이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폭파하시려고 결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흉악한 의도로 한데 엉켜서 힘을 그릇 행사하는 사탄의 세력들은 용서받을 수가 없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용서함을 받을 수가 없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소중한 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눈은 멀었고 저들의 마음은 돌처럼 굳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물질입니다. 명예입니다. 권력입니다. 모든 것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입니다. 이 힘에 도취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힘으로 자기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생명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이런 악령을 가진 자들이 한데 엉켜서 악한 제도를 만들면 더욱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개인이라면 돌아서기 쉽지만 악한 자들이 한데 엉키면 돌아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모여든 무리들은 그런 무리들입니다. 그 들도 돌아서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힘에 도취하여 한데 엉킨 자들은 돌아서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테는 그의 장시 [신곡]에서 지옥을 그리면서 제일 밑 층에 교황이 갇혀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교회 권력이나 집단이 얼마나 사악해 질 수 있는가를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필시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가들이나 목사들만이 빠지는 유혹은 아닙니다. 사람이란 다 힘의 철학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무엇이고 힘을 쥐면 그것을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쓰려고 합니다. 자기 힘만으로 되지 않으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 힘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점점 더 무감각해 집니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이 되면 쉽게 그것을 정당화해 주게 됩니다. 교회 반석이라고 알려진 베드로의 예를 들어봅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교회들엔 예수님과 동행한 사도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도 베드로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권위 때문에 베드로가 범한 무서운 과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되었기에 오늘 날 까지 그 과오를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예루살렘 교회들은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사도들에게 맡기고 서로 나누어 쓰는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그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도 집을 팔아서 다른 사람들처럼 베드로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의 일부를 감추고 남았지만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베드로에게 바친 것입니다. 이것을 안 베드로가 그를 꾸중하자 그는 즉석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청년들은 그의 시체를 메어다가 장사를 치렀습니다. 그랬는데 이것을 알지 못한 그의 아내 삽비라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바친 것이 집을 판 것의 전부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삽비라도 그것이 전부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노발대발하면서 “어찌 당신들 부부가 짜고서 성령을 시험하는 것이요. 당신의 남편을 묻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문 앞에 도착했으니 그들이 당신의 시체도 메고 나갈 것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도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도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생명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휠 씬 더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쓴 누가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권위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인 지를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늦기 전에 이런 권세욕에서 해방이 되어야 합니다. 힘의 철학에서 해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가진 능력을 생명을 살리는데 쓰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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