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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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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락 목사 |
참고 : | 2011.10.30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하나님 나라와 교회
(마가복음 1장 14-15; 마태복음 10장 1, 7-8)
2011년 10월 30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김창락 목사 (전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1.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열렬한 반 나치 투쟁가였던 독일인 역사가 Friedrich Meinecke(1862-1954)는 역사주의의 등장과 종교개혁을 근세 서양의 가장 큰 두 가지 정신적 혁명으로 꼽았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은 이른바 종교개혁 운동이 촉발된 날입니다. M. Luther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이의를 제기하는 95개 조의 항의문을 Wittenberg 성 교회당 정문에 내다붙였습니다.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는 1506년부터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 부채로 곤경에 처해 있는 Albert 대주교와 의논하여 면죄부를 판매하여 수입을 절반씩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습니다. 교황의 위탁을 받은 면죄부 판매원들이 각 마을을 다니면서 허황한 선전으로 면죄부 판매를 독려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Wittenberg에 판매원으로 온 Johann Tetzel이라는 도미니카 수도회의 수도승의 선전은 극도로 허황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연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죽은 가족을 위한 면죄부를 사는 경우에는 주화가 돈궤 바닥에 찰깍하고 떨어지는 순간에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당으로 철꺽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2. 그 당시 대학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Luther는 교황에게 과연 면죄권이 있는지, 사람이 돈으로 면죄부를 사서 면죄를 받는 것이 신학적으로 타당한지, 교회법이 죽은 사람의 영혼에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등등, 면죄부와 관련된 95개 조의 의문점 또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공개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이 95개조를 적은 편지를 그의 친지들, 신학자들, 주교들, 사제들에게 보내며 토론장에 초대했습니다. 토론장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서면으로 의견을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가 계획한 공개 토론은 불발에 그쳤습니다. 그 대신에 그의 이 95개조 선언문은 곧 인쇄되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유포되었고 여기에 동조하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점점 대중운동으로 커져 갔습니다.
3. 이른바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대문자 R로 써서 Reformation이라 일컫는데 16세기에 서구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에서 시작해서 여러 개신교회를 낳게 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일본인들이 이 낱말을 처음으로 번역할 때에 ‘종교개혁’이라고 했을 터인데 사실은 종교 일반의 개혁 운동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러 개신 교회가 생겨난 역사상의 운동을 가리킵니다. 사실 Luther 자신의 원래의 의도는 면죄부 판매라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려는 것일 뿐이었지 가톨릭교회를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더 더욱 ‘개신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창설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측이 그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파문했기 때문에 개신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 일컬어지는 16세기의 이 운동은 그 낱말의 본래적 의미 그대로 종교의 개혁을 수행했는가?” (이 경우에 ‘종교’라는 낱말은 특수하게 그리스도교 종교를 자칭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아무리 후한 점수를 매긴다 하더라도 이 물음에는 “절반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당시에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신학적으로 아무런 변함없이 계속해서 그대로 존속했는데 반해서 가톨릭교회의 주요 과오를 시정하려는 종교개혁 운동의 2대 중심 원리인 sola fide, sola Scriptura (by faith alone, Scripture alone)라는 기치 아래 몇몇 개신교회가 생겨났으나 그 교회들이 완벽하게 개혁된 본래적인 완전한 그리스도 교회로 태어났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5. 어떤 유명한 도학자가 수제자를 세상에 내보내면서 그에게 주는 최후, 최고의 교훈으로 사람 人자 다섯 개를 써서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이라야 사람이다”라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참된 교회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교회, 교회, 교회, 교회, 교회”라는 답변을 일단 내려봅니다. “교회가 다 교회가 아니고 교회가 교회라야 교회이다.” 여기에는 여전히 미결로 남아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허울만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운 노릇을 해야만 사람이라 할 수 있듯이 교회라는 간판만 내걸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다운 일을 해야 교회라 할 수 있는데 과연 교회다운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저는 참된 교회에 대한 개념 정의를 먼저 내려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교회는 이러저러 해야만 한다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 교회는 역사적으로 원래 어떻게 생기게 되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나쁜 방향으로 변질되어 간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 볼까 합니다.
6.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 운동을 벌이다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프랑스 신학자 A. Loisy (1857-1940)는 교회를 비판하는 논문에서 거의 빠짐없이 인용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다. 그런데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1902) 이 말은, Loisy가 본래 의도한 대로는, 한편으로 교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연루해서 생겨났다는 교회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승하여 완성하는 데서만 그 존재 목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교회의 당위론적 책무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가 이 책무를 망각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했다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또는 그리스도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은 “예수는 Yes! 그러나 교회는 No!”라는 이분법적 구호를 외치면서 교회는 예수 운동과는 불연속적인 부산물로서, 생겨나서는 안 될 별종이다 라는 의미로 이 말을 즐겨 이용했습니다.
7. 마가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전체 선포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보도했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막 1:15)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하는 것이 그의 선포활동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라는 표현이 모두 합해서 103번 사용되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세 공관복음서에서 85회, 사도행전에서 7회, 그 나머지 문서들에서 겨우 9회 사용되었습니다. 이 분포를 근거해서 판단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안은 예수의 선교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는데 처음 사도들의 활동에서 조금 반영되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시교회에서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서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 대신에 ‘하늘나라’ (문자적으로는 ‘하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에둘러 표현하기를 선호하는 유대인의 경건성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풀이하면 ‘하늘에 계신 분의 나라’를 뜻하지, ‘하늘에 있는 나라’를 뜻하거나 ‘하늘로부터 오는 나라’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는 완전한 동의어입니다.
8. ‘하나님의 나라’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신약성서의 ‘하나님의 나라’(basileia tou theou)라는 그리스어 어구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어구는 ‘말쿠트 야왜’ (malkuth yahweh), 즉 ‘여호와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 전체에서 신약성서가 의미하는 그러한 의미의 ‘여호와의 나라’라는 용어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역대기 상 28장 5절과 역대기 하 13장 8절에 ‘말쿠트 야왜’와 ‘맘레케트 야왜’가 각각 한 번씩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현존한 다윗 왕국을 지칭하는 것이지 신약성서가 말하는 종말론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북 왕조가 다 망한 후 포로 기간 중에, 또 포로기 이후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 내리신 징벌을 거두시고 곧 역사에 개입하셔서 평화의 새 세계를 이룩해 주신다는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예언을 일컬어 예언자적 종말론(prophetic eschatology)라 합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성취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현실은 시간이 흐를 수로 점점 더 각박해져 갔습니다. 특히 BC 2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극악한 역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극도의 위기 상황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종말론이 대두했습니다. 현 세대는 약의 세력이 지배하는 시대이지만 그 시대는 한정되었고 이제 곧 천재지변과 우주적 대파국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언을 일컬어 묵시문학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이라 하는데 이것은 BC 200년에서 AD 100년까지의 기간에 유대 사회에 성행했습니다. 예언자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종말이 실현되는 세세한 방식의 차이점을 뛰어넘어 예언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둘 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역사에 친히 개입하셔서 궁극적인 변혁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사건을 예언한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합니다.
9.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하는 예수의 선포는 종말적 구원 사건의 선포입니다. 여기에는 예언자적 종말론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이 혼합되어 담겨 있습니다. 처음 두 문장은 직설법 평서문(an indicative declarative sentence)이고 마지막 두 문장은 명령법 명령문(an imperative sentence[of the imperative mood])입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공포하는 행위를 일컬어서 ‘케리그마’라 하는데 주로 ‘선포’라고 번역합니다. 케리그마는 구원 사건을 공포하는 것, 구원 사건을 제시하는 것, 구원 사건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침밥을 다 지어놓고서 아직도 자고 있는 자녀를 깨울 때에 자애로운 어머니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밥 다 됐다.” 이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이 말 속에는 “일어나라. 밥 먹어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한 급 낮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빨리 일어나! 밥 다 됐어.” 밥이 다 되었을 때에, 또는 밥이 다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잠자는 자녀가 해야 할 마땅한 반응은 일어나는 것이고 그 밥을 먹는 것입니다. “밥 다 됐어!”라는 직설법 평서문 속에 “일어나!” 또는 “밥 먹어!”라는 명령이나 요청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종말론적 구원의 선포에 들어 있는 두 개의 명령문은 독자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앞에 나온 두 개의 직설법 평서문의 의미에 자동적으로 부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구에 들어 있는 ‘나라’라는 낱말은 왕이 다스리는 지역으로서의 통치 영역을 뜻하기도 하고 왕의 통치 행위 즉 왕의 다스림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의 의미는 똑 같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이 된다는 말이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말의 함의는 꼭 같기 때문입니다.
10.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외람되지만 그리스도교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이든, 동방 정교회이든, 개신교회이든 구별 없이 똑 같이 본래의 형상을 잃고 퇴화하게 된 원인을 규명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질의 첫 단초가 성서 속에 이미 제공되어 있다는 사실을 비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의 선포 속에 성서의 구원관이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종교는 구원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종교가 제공하는 구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종교를 분류하자면 그 한 부류는 구령(救靈)종교이고 다른 부류는 구세(救世)종교라 하겠습니다. 구령종교는 개인의 구원을 최고 목표로 삼습니다. 구원 받는 대상은 개인의 몸, 심령, 또는 영혼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얻는 방식은 이 세상을 초탈하거나 또는 이 세상이 운행되는 어떤 질서나 법칙에 순응함으로써 구원받거나 또는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날 때에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구세종교는 이 세상이 구원받는 것, 즉 이 세상에 속한 사회적, 제도적, 문화적, 정신적 관계의 총체적 삶의 현실이 올바로 바뀜으로써 이루어지는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이러한 구원을 일컬어 역사의 구원 또는 역사적 구원이라 하는데 이 구원은 인간과 그 삶의 환경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대상화 하며 인간을 개체로 분할하지 않고 총체적인 하나의 인류 집단으로 대상화 합니다.
11.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라는 종말적 구원의 현실에 청중을 초대했습니다. 이 초대는 구원을 제공된다는 것을 공포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라는 명령문은 이 초대에 응하기 위하여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도 아니고 초대의 관문을 통과할 때에 제시해야 할 구비 요건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초대에 응하는 자세 그 자체를 가리킬 따름입니다. 이 초대에 응하는 자세가 곧 회개하는 것을 가리키며 복음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고지자(告知者) 역할만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청중이 그의 이 선포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청중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분배받았다는 것 이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선교활동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전제 하에 병자를 고치시는 일,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어울려서 밥상 친교를 나누시는 일,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비행을 규탄하시는 일 등등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는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마 12:28) 하고 선언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이러한 봉사활동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현될 구원의 현실을 지금 여기에 앞당겨 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정보를 분배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가 일으키시는 이 구원의 현실에 동참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12. 예수의 선교활동이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활동과 다른 한편으로 치유, 귀신축출 등의 봉사활동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그 제자들을 선교에 파송하실 때에 주신 담화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능력으로 무장시키셨습니다. 마 10장 1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고,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다고 했고 7-8절에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고 씌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와 봉사활동은 예수의 선교활동에서 꼭 마찬가지로 두 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것은 제자의 파송 담화에서는 “회개하여라”라든가 “복음을 믿어라”라는 명령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본래의 역사적 사정이 그대로 잘 반영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마가복음 1장 15절에 보도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에는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라는 두 개의 명령문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두 가지 명령문의 의미는 앞에 나오는 직설법 평서문 속에 자동적으로 내포되는 것이지 독자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모든 해석자들은 여기에 독자적인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으며 그런데 그것도 왜곡된 의미로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3. ‘회개하다’라는 낱말의 등장과 그 오용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제1단계: 신약성서 전체에서 ‘회개하다’(metanoeō)라는 동사는 34번, ‘회개’(metanoia)라는 명사는 24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는 ‘회개하다’라는 동사는 꼭 3번만 (욥 42:6; 시 7:12; 겔 18:30) 사용되었고 놀랍게도 ‘회개’라는 명사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아니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선포에서는 ‘죄악에서 돌아서라’ 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이른바 회개의 촉구는 ‘돌아서다/돌아오다’를 뜻하는 shub이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표현했습니다. 이 동사는 신체의 가시적인 움직임을 서술하는 동작 동사입니다. 구약성서에는 ‘마음을 바꾸다/뜻을 바꾸다/생각을 바꾸다’ 또는 ‘뉘우치다/후회하다’를 뜻하는 의지 동사 또는 정서 동사가 있는데 그것은 ‘nacham'입니다. 이 nacham이라는 동사는 예언자들의 회개 선포에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유대 땅에서 행한 원사도들의 종말 선포에 ‘회개하다’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면 예언자들이 사용한 shub이라는 동사를 사용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현대 히브리어로 번역된 신약성서에 그리스어 metanoeō를 모두 shub이라는 낱말로 역번역해 놓았다는 데서 입증이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이방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약성서의 문서들이 그리스어로 저술되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히브리어 shub이라는 동사가 그리스어 metanoeō로 번역되었습니다. noeō는 ‘생각하다, 사유하다’라는 뜻이고 meta는 변경, 변화를 뜻하는 접두사입니다. 그러니까 metanoeō의 원래적 의미는 ‘생각이나 견해를 바꾸다’입니다. 여기에 ‘뉘우치다, 후회하다, 회개하다’라는 뜻이 후에 첨가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성서해석에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shub이 metanoeō로 번역된 까닭은 히브리인들의 실천적 문화가 그리스인들의 사변적 문화에 흡수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삶의 태도의 변화, 행동의 변화는 먼저 의식의 변화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shub을 metanoeō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의 원래의 의미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동사인 epistrephō로 표현한 것이 22회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다/후회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metamelomai인데 네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서에서만 3번(21:29,32; 27:3) 사용되었는데 가룟 유다가 예수의 유죄판결을 보고 ‘뉘우쳤다’고 하는 데서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마음/의도를 바꾸신다는 것을 nacham이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이 15회인데 LXX(그리스어번역 구약성서)는 이것들 중에 metanoeō로 8번, metamelomai로 4번, apostrephō로 3번 번역했습니다. 이 용법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LXX의 그리스어에서는 metanoeō는 물론이고 metamelomai도 meta라는 접두사의 의미 그대로 ‘마음/뜻/의도를 바꾸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지, ‘회개하다/통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사용된 metanoeō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유추됩니다.
제2단계: 원시교회에서 예수의 선포 (Jesus' proclamation)가 ‘예수에 대한 선포’(the proclamation of Jesus)로 바뀌는 과정에서 사도들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기독론으로 촛점이 옮겨졌고 기독론에서 다시 속죄론으로 중심이 이동되었습니다. 속죄론은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사람은 죄 씻음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입각한 총체적 구원을 선포하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개개인의 사죄를 통하여 구원을 약속해 주는 개인종교, 심령종교, 내세종교로 전락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제3단계: 속죄론을 주요 품목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교회는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에 대한 보도 속에서 직설법 평서문을 간과하고 ‘회개하여라’라는 명령문에만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마가복음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라는 두 문장의 순서를 바꾸어서 “회개하여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로 고쳐 놓은 데서 이러한 경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shub이라는 낱말의 본래적 의미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 청산, 즉 과거의 죄를 처리하는 데 역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180도 급회전하는, 바로 현재 수행하는 결단의 행동에 역점이 있습니다. shub이라는 동사는 여기서 일어나는 행동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며 metanoeō도 이러한 행동 변화의 전제가 되는 의식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표현하기 때문에 shub의 의미에서 멀리 빗나가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metanoeō를 영어로 ‘repent’, 우리말로 ‘회개하다’로 변역하고 나면, 이 두 낱말에는 ‘뉘우치다, 후회하다’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회개하여라’라는 명령은 과거의 죄를 청산하기 위하여 그 죄를 마음 아프게 뉘우쳐라’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shub이라는 행동동사가 metanoeō라는 의식동사로 번역되고 metanoeō가 다시 repent라든가 ‘회개하다’라는 감정동사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 본래적 의미가 한 단계씩 변질되어 갔습니다. metanoeō를 ‘죄나 잘못을 뉘우치다/통회하다/참회하다’라는 뜻으로 오역하기 시작한 1번 타자는 불가타 (the Vulgate) 역 라틴어 성서이고 2번 타자는 Luther의 독일어 성서라 하겠습니다. Luther는 이것을 büßen 또는 Buße tun (속죄하다/참회하다)로 잘못 번역했으나 몇몇 현대의 독일어 번역본은 umkehren (방향을 바꾸다, 전회하다) 또는 sich bekehren (전향하다)으로 번역하여 히브리어 동사 shub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적 의미를 잘 되살려 냈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을 상대로 죄와 관련된 품목을 상품화 할 때에 가장 성업을 이룰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문제는 시대와 계절, 지역과 장소, 인종과 남녀노소,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해당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죄인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죄용서를 받는 의식인 고백성사를 주요한 성사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을 촉발시킨 것도 교회의 면죄부 판매 행위였습니다. 개신교회는 이러한 과오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회는 현금 대신에 ‘믿음’이라는 싸구려 보증수표를 주면서 값싼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4단계: “하나님 나라가 온다”라든가 “세상의 종말이 온다”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선포의 바탕에는 신화적 언어가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신화적 사유 방식은 현대의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 종말론적 선포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으려 합니다. 급진주의자들은 이것을 구시대의 유물로 보고 완전히 용도폐기하려고 합니다. 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윤리적, 사회적 가치로 대체하여 간직하려고 합니다. 그 어느 것도 완전한 해결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이 문제를 논의할 시간은 없습니다. 다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교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결과물이며 이 운동을 계승하는 것이 그 존재 목적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올바로 전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참다운 교회가 되느냐 않느냐가 판가름 난다고 하겠습니다. 재건축 건물이 현존하는 건물과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현재의 불의한 역사의 종식을 전제합니다.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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