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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1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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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11.21주일 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감사를 넘어서야 합니다.
막14:17-25
우리들의 삶에는 여러 가지 아픔이 있게 마련입니다. 육신의 아픔도 있고 심리적인 아픔도 있습니다. 심리적인 아픔에도 자기의 잘못으로 말미암는 아픔도 있고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는 아픔도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으로 말미암는 아픔이겠죠. 이런 아픔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데서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의 차원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당하신 아픔은 어떤 것이었으며, 예수님은 이럴 때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우리가 감사주일 아침에 '감사'를 말하지 않고 '아픔'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픔'이란 '감사'의 마이너스 상황을 뜻한다고 볼 때, '감사'한 상황에 반응하는 일보다는 '아픈'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감각의 플러스 지대인 감사의 단계를 넘어서는 성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어떻게 처신 했느냐를 보지 않고, 감사 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픔하면 누구나 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받으신 아픔을 생각할 것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십자가에 달릴 때" 하는 찬송이 이것을 잘 말해줍니다. 물론 십자가상에서 받으신 아픔이야말로 육체적으로 극심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아픔을 그냥 십자가의 아픔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아픔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정작 아파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빈곤에 처해있는 농민들, 떠돌이들과 더불어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이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죽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드릴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의 육체적인 삶을 잘 묘사해주는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온갖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육체적인 삶의 고통에 대해서 불평하셨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가시관을 쓰고 받은 수모나, 지친 몸으로 십자가 형틀을 짊어지고 골고다로 가는 장면이나,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피 흘리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아픔이나 괴로움은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확실히 육체적인 괴로움은 이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픔이라고 하면 첫째로 수탈과 천대를 받는 밑바닥 사람들의 아픔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을 낮으로 삼아 저들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신 것입니다. 그 때 하셨던 말씀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아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로 하여금 편하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감각적 플러스 영역인 감사의 경지를 넘어서는 존재방식이요,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양태인 것입니다. 그것은 형편의 수동적인 자기 이익 감정에 머물지 않고 상황을 가로지르는 적극성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아픔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나님나라 운동에 역행함으로 스스로 패망의 길로 달리는 종교지도자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아픔이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 껴안듯이 내가 너희들을 껴안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느냐" 하고 한탄하신 것에서 우리는 그의 아픔을 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아픔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질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은 이런 차원의 아픔, 자기신변의 안위를 넘어서는 고통과 고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유대 나라가 자기 죄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가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예레미야 8:20-28).
하고 외친 예레미야의 아픔이 바로 그런 것이지 않았습니까?
세 번째 아픔은 그가 삶과 말로 가르치고 깨우친 제자들까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아픔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상에서 세 번씩이나 그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도 서로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 것입니까?
어디 그뿐이겠어요.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원수들의 손에 팔아넘기려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다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잔치를 하시면서 "나와 같이 한 그릇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픔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이의 배신이나, 모함, 배반 같은 것들은 단순한 '감사'를 넘어서는 엄청난 아픔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원수들의 손에 잡히자 모두 뿔뿔이 도망을 가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하는 배반의 아픔보다는 자기가 나타내 보여주려는 가르침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걱정하는 이타적인 아픔이 더 컸습니다.
가까운 교회의 목사가 하는 간증 속에서,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돌보던 교우 가족이 다른 교회로 갔을 때의 고통에 대해서 자주 고백하는 것을 듣습니다. 저도 때때로 그동안 말하고 살아온 것들을 교우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제 멋대로 말하고 사는 것을 보면 아프고 슬픕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일이란 감사를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이란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시련에 어떻게 대응하나요? 우리는 육체적인 고난에 몹시도 민감합니다. 배고프거나 몸이 아플 때 큰 일이 나는 것처럼 불평합니다. 이런 경우 극단적으로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는 이들이 자주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치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배가 부르고 자기 몸의 아픔이 사라지면 감사 찬송을 올립니다. 이런 것을 흔히 쟁반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배가 고픈 것을 일차적인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배고프고 병든 것을 문제 삼습니다.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 가는데 혼자 먹고 흥청거리는 기득권자들을 보면서 분노하십니다. 그가 가시 면류관을 쓰고 조롱을 당해도 묵묵히 아무 말도 하시지 않습니다. 지친 몸으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 뒤를 따르면서 우는 여인들을 향해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를 못살게 굴던 사람들이 곁을 떠나면 시원섭섭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서 아파하십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탄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고 포도주를 나누신 것도 이와 같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단순한 감각의 플러스 지대에 놓인 감사를 뛰어넘는 극심한 마이너스의 경우인 '아픔'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배신에 대한 극복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픔이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 하는 것입니다.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들을 위해 찢는 내 몸이다",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나의 피다", "떡과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그의 심정의 표현이 아닙니까? 그는 자기를 팔아넘기려는 제자까지도 이 식탁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시면서 안타까워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병정을 향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저들이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행동하실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감사를 넘어서는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인류에게 삶의 길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으로 주고받는 것만이 참으로 사는 길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무리가 다시 살게 될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세계는 어떤가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감사차원은 무엇인가요? 자기의 아픔만을 알거나, 자기의 기쁨에만 도취되어, 그것으로만 모든 신앙의 고백과 행동 양식을 만들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남의 아픔은 알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아파하고 무엇에 분노합니까? 무엇에 감사하고 무엇에 절망합니까? 내 이권이 침해받았다고, 내 의견이 무시 됐다고, 내가 배신을 당했다고, 아니면 그 반대로 내게 유익이 일어났다고, 내 소득이 많아졌다고 감사합니까?
물론 우리가 그런 일상의 삶들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기독교의 최종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흔히 하는 방식의 차원으로서의 감사로서는 결코 이 땅에서 성취될 수 없습니다. 우리네들이 하고 있는 감사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감사의 삶이 있을 때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삶이었고, 그 삶은 우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감사의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의 아픔, 인류의 고민, 예수님의 아픔을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평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는 것을 믿음과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믿고 아픔을 품어 키워야 합니다.
감각의 플러스영역만을 취급하려는 '감사'의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같은 삶의 높은 이상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살 때에 일어나는 감각의 마이너스 형편들을 예수님처럼 대처해야 합니다. 그것이 살에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이 받으실 진정한 감사의 제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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