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8:27-38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9.16 주일 http://dabia.net/xe/611460 |
정용섭 목사
사탄의 유혹
마가복음 8:27-38, 창조절 셋째 주일, 2012년 9월16일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오늘 설교 제목인 ‘사탄의 유혹’이라는 표현은 자극적으로 보입니다. 사탄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유혹이라는 단어도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사탄이 싸우는 전쟁터라는 느낌도 듭니다. 자신이 이 사탄의 지배에 놓인 건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탄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한 군데 씩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욥기에는 사탄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자 사탄은 그 말을 비판합니다. 욥이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사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주장입니다. 사탄은 욥을 시험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나님께로 받고 욥의 삶을 파괴합니다. 여기서 사탄은 사람의 운명을 불행에 빠뜨리고 시험하고 유혹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시험을 유혹이기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분명하다면 ...를 시도해보라.’는 투였습니다. 예수님을 그 유혹을 거부하셨습니다.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사탄은 무엇, 혹은 누구일까요? 사탄이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에 불과한 것일까요? 오늘의 제3독서인 마가복음 8:33절에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 8:27)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예수님의 운명에 전환점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전환점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결국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시중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도 하고, 또는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을 비판하다가 죽었습니다. 이게 선지자의 일반적인 운명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많이 행한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불 수레를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도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에 의해서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 베드로는 늘 그렇듯이 앞에 나서서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선지자라는 말과 완전히 다릅니다. 선지자는 혁명가이지만 그리스도는 구원자입니다. 선지자는 역사를 변혁하지만 그리스도는 역사를 완성합니다. 선지자는 의를 위해서 고난 받지만 그리스도는 강력한 능력으로 의를 실현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선지자로 본 게 아니라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게 좀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가능한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입단속을 시키셨을까요. 요즘 어떤 정치인처럼 신비주의 전략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학자들은 이 사실을 가리켜 ‘메시아 비밀’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의 메시아(그리스도)성은 은폐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메시아성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 최고의 종교 엘리트들인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도 바로 이 메시아 비밀에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 운운은 사실 자기도 잘 모르고 한 이야기입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과 부활 예고 막 8:31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인자는 종말에 세상에 와서 전권으로 심판할 자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 인자를 예수와 일치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항변했다고 합니다. 그게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부활까지 거부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게 아닙니다. 당시는 부활이라는 말을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일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이신 당신이 고난받고 죽는다는 사실에 포 커스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세례 요한이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고난과 죽음이 당연하지만 그리스도시라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발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베드로의 항변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 모였던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그 책망은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될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구성원들도 포함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설교 앞부분에서 사탄이 누구, 또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했습니다. 여기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어떤 세력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은 무조건 나쁜 게 아닙니다. 그걸 우리는 상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의 상식으로 항변했을 뿐입니다. 메시아는 고난과 죽음이 아니라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상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세상이 요구하는 메시아니즘입니다. 일종의 승리주의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이 척박한 세상 속에서 누구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앞서기를 원합니다. 그걸 부정하고는 이 세상에서 버텨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입니다. 그런 생각에 묶여 있게 하는 이념이나 체제가 곧 사탄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사탄의 유혹과 그 지배를 받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 사탄의 목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이런 말씀이 지나치다거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먹고 살아야 하고, 자식도 키워야 하고, 가능하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게 좋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예수쟁이들은 늘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는 비장한 태도로 살아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몇몇 선지자 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삶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 세속의 악한 힘과 투쟁하면서 살아야 할 평신도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니냐고 말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선지자도 아니고 메시아도 아닙니다.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도 없고, 메시아의 일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당신에 대한 것입니다. 메시아 비밀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지적했듯이 십자가의 죽음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의 대상이었고, 이방인에게도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십자가 처형은 일종의 반역자에 대한 징벌이었습니다. 만천하에 공개해서 일벌백계의 교훈을 주기 위한 정치 군사적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이를 목도한 제자들과 그에 포함된 이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워 했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이것은 예수 스스로도 감당하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인류 역사에서 예수님에게만 해당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제자들은 초기에 깨닫지 못했다가 훗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 천하와 생명 구원 ‘사탄아’라는 말씀은 더 나가서 구원을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치적으로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정치적인 죽음인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구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오히려 실패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에게서 이게 구원의 의미가 새로워졌습니다. 그걸 제자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정치는 온 천하를 얻는 것입니다. 앞으로 12월에 있을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도 온 천하를 얻으려는 싸움입니다. 선한 정치도 있고, 악한 정치도 있으니 모든 정치인들을 싸잡아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어떤 정치든지 천하를 얻는 노력입니다. 그런 노력은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필요합니다. 경제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룰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실제로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파이를 무조건 키워야 한다는 주장과 파이를 나누는 일을 겸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지 온 천하를 얻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복지제도가 가장 앞섰다는 북유럽을 보십시오. 상대적으로 행복할 겁니다. 그러나 완전한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대한민국은 상황이 더 어렵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지만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온 천하를 얻는 길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온 천하를 얻는 방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목숨을, 즉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답은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서를 비롯해서 신약성서 전체가 증언하고 있는 대답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거나 실감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잘 들으십시오.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사실은 여전히 비밀입니다. 그 비밀 안으로 들어가는 게 기독교 신앙이고 영성입니다. 이런 신앙은 광신, 맹신, 미신이 아닙니다. 주술도 아니고 자기 확신도 아닙니다. 세상을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뚫어본 이들의 의지이며, 결단이며, 선택이고, 믿음이며, 신뢰이고, 더 나가서 모험입니다.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선택했고, 지금 우리도 그런 기독교 신앙의 역사에서 살아갑니다. 사탄의 유혹이 무엇인지 전달이 됐지요?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신비와 그 놀라운 섭리를 외면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유혹에 빠진 사람은 자기 스스로 목숨을 구하려고, 즉 온 천하를 얻으려고 평생 애를 씁니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세련되게 매달립니다. 그런 일에 점점 더 예속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더 집중하십시오. 그것을 종교적 정보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의 능력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게 억지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사탄의 유혹이 일상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을 어떻게 대적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직접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도 힘이 부치는 일입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진솔한 기도가 최선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