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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에 엘레이송!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967 추천 수 0 2012.11.04 2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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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46-5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10.28 주일설교 http://dabia.net/xe/619620/869 

jys.jpg 정용섭 목사

 

퀴리에 엘레이송!

마가복음 10:46-52, 창조절 아홉째(종교개혁) 주일, 2012년 10월28일

 

‘퀴리에 엘레이송’이라는 라틴어 문장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뜻입니다. 고대와 중세기 때부터 교회는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요즘은 떼제 공동체처럼 수도원 영성을 추구하는 모임에서 자주 부릅니다. 이것과 연관해서 가장 전통적인 기독교 음악은 <레퀴엠>입니다. 모차르트와 같은 많은 서양 작곡가들이 레퀴엠을 작곡했습니다. 저는 베르디의 레퀴엠을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거기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노래가 바로 ‘퀴리에 엘레이송’입니다. 한국 교회가 함께 사용하는 찬송가 632장도 이 노랫말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린 사죄기도에도 그 내용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도와 찬송에서 퀴리에 엘레이송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몇 가지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엘레이송’ 영성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자책감과 죄의식을 강화해서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도덕주의 영성이라고 합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그와 비슷합니다. 죄의식과 죄책감으로 늘 불안해합니다. 그들의 영혼에 원죄의식이 팽배합니다. 프로이트의 용어로 바꾸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입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차지했다는 헬라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무의식이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 그리고 동생 아벨을 살해한 카인 사건 등과 연결돼서 원초적인 죄의식으로 작동될 때가 많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죄의식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자책을 하는 겁니다. 더 나가서 기독교인이 인격의 이중성을 보입니다. 세상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부도덕하게 살면서도 십자가의 보혈로 모두 용서받았다는 확신으로 도덕적인 불안과 역사적 책임의식을 피해갑니다. 이런 태도는 결코 건강한 영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우리는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 제3독서인 막 10:46-52에 나오는 말씀을 읽으려고 합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들린 마을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은 7시 방향으로 대략 2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상을 했을 겁니다. 여리고에서 일을 마치시고 예수님이 여리고를 빠져 나오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시각장애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 사람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는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입니다. 아버지 이름까지 거론하는 걸 보면 장애인 아들을 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그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이 묘사하는 장면이 어떤지는 그림처럼 생생해보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시각장애인의 삶은 여러 가지 점에서 완전히 버려진 것과 같았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스스로, 또는 가족들이 신세타령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살 길도 막막합니다. 요즘처럼 복지제도도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독립해서 살기는 힘듭니다. 따지고 보면 요즘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며칠 전 뇌병변 1급 장애인인 삼십대 초반의 김주영이라는 여자 분이 질식사를 당했습니다. 작은 화재로 인한 연기를 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바디매오 같은 장이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걸입니다. 바디매오는 오늘도 늘 그렇듯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앉아서 자비심이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태양이 빛났을까요? 바람은 불지 않았을까요? 새소리도 들렸을까요? 2천 년 전 여리고 성 밖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시각장애인 바디매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보지는 못하고 그런 소리만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 주변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타일렀습니다. 바디매오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못들은 채 할 수 없었습니다. 바디매오를 오게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께 달려왔습니다. 바디매오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자 그는 곧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통해서 기적적으로 장애를 고쳤다는 사실입니다. 이 대답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장애를 고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기적으로 치유를 받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요즘도 어떤 이들은 믿음만 있으면 바디매오처럼 장애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전문적으로 그런 치유사역을 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막다른 처지에 빠진 이들이 지푸라기를 잡겠다는 심정으로 거기에 몰려듭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치유 사건들과 비교해보십시오. 다른 사건들에는 치유의 제스처가 따라다닙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손을 잡는다거나 눈에 침을 바른다거나, 또는 예수님 모르게 물리적인 접촉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나 장애인을 위해서 구체적인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런 것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행동도 없고, 기도도 없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강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디매오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가 실제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구원자로 믿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겠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바디매오의 대화를 다시 주목해보십시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바디매오는 예수님에게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보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실체일까요? 병과 장애를 고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믿음일까요?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이것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없습니다. 병과 장애만이 아니라 가난, 실업문제, 그리고 고독, 불안 등등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더 나가서는 늙음과 죽음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은 바로 이런 열망을 기초로 합니다. 오죽 했으면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노학자가 자기의 영혼을 팔아 젊음을 샀다고 했겠습니까. 보기를 원한다는 바디매오의 이런 열망이 솔직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무엇을 보고 믿음 운운하신 것일까요? 그것을 알아야 우리도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퀴리에 엘레이송

 

바디매오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20:29-34)에는 이름 없이 ‘맹인 두 사람’으로 나옵니다. 마가복음과는 달리 예수님이 두 맹인의 눈을 만지셨다고 합니다. 누가복음(18:35-43)에는 이름 없이 ‘한 맹인’으로 나옵니다. 똑같은 이야기인데 공관복음이 각각 약간씩 다르게 보도합니다. 그런데 세 텍스트가 똑같이 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퀴리에 엘레이송! 복음서 기자들은 바로 이 진술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퀴리에 엘레이송에 담긴 영적 태도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성을 파괴하는 심리적 자학일까요? 그래서 얄팍한 도덕주의라는 성채로 숨어버리는 퇴행적 영성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선 인간이 자신의 영적 실존을 정확하게 성찰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인식이자 고백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근원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 멀게 느껴지신다면 참된 안식으로 바꿔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안식이 없습니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레퀴엠 에테르남’이라는 노랫말로 시작됩니다. ‘영원한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안식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참된 안식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많은 것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그것으로는 죽었다 깨도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실존 앞에서 엘레이송이라는 고백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땅바닥까지 낮추는 영적 태도입니다. 신앙의 세계를 아는 사람은 모두 이런 태도로 살아갑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 경험하고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치열하지만 지루한 논쟁 끝에 ‘땅의 기초’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티끌과 재의 영성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결국 티끌과 재로 돌아간다는 엄정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아직 살아있는 가운데서도 티끌과 재의 자리에 서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자리입니다. 그럴 때만 참된 자유와 해방이 가능합니다. 참된 안식이 가능합니다. 모든 다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왜 중요한지 아시겠지요?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당신의 말은 완전히 도사 같은 이야기래서 실제 삶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전투구와 비슷합니다. 약간만 한눈을 팔아도 버텨내기가 힘듭니다. 뉴스 보도는 온통 그런 싸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옳은지도 판단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식으로 살다가는 왕따 되기 맞춤합니다. 세상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자기를 내세우라고, 긍정의 힘을 가지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를 티끌과 재처럼 불쌍히 여겨달라는 식으로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생각은 퀴리에 엘레이송 영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런 고백을 누구에게 하느냐를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권력과 돈에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 세속적인 힘 앞에서 비굴하게 살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과는 싸워야 합니다. 선하게 싸워야 합니다. 마틴 루터도 불굴의 의지로 악한 세력과 투쟁했습니다. 퀴리에 엘레이송이라는 고백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바디매오도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했습니다. 이걸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이걸 거꾸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힘에는 철저하게 굴복하고 아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뻔뻔합니다. 사람의 눈치는 지나칠 정도로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주 둔감합니다.

 

바디매오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이제 구원받았으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제 보게 되었습니다.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는 생명을 발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바디매오 이야기를 통해서 마가가 전하려는 제자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세상의 삶을 포기하고 교회에만 매달려서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속의 삶은 중요합니다. 각자의 역할도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제자로 살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지요? 제자의 길은 퀴리에 엘레이송의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제자로 살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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