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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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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7.17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10년 후, 성암교회를 준비하는 사람들
막1:1-8
여러분! 10년 후 성암교회는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까요? 10년 후에는 누구누구가 살아서 여기 앉아 있겠으며, 누가 장로가 되어 있겠으며, 누가 담임목사가 되어 있을까요? 10년 후 성암교회 예배당은, 교육관은, 사회관은 또는 선교관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금보다 신실하게 예수를 믿는 이들의 수가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여기 앉아 있는 우리가 10년 후에 살아 있을지 없을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상황들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0년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하게 있을 10년 뒤를 생각해 보거나, 자기 삶에 연결시켜 보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 기대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 때를 기다리고 삽니까?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2-3절).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은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주님께 기도했고 주님이 그들을 출애굽시켜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해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도 주님이 해방해 주시기를 기다렸고, 주님은 오묘한 방법으로 그들을 해방해주셨습니다. 지금은 로마황제와 헤롯왕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면서 거기서 풀려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마가 기자는 그의 복음서의 맨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바로 이 [기다림]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0년 후든, 100년 후든 언젠가는 틀림없이 도래할 그 날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사람이 장차 도래할 그 ‘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이 시대가 가고 주님이 통치하시는 저 시대가 곧 온다고 믿는 가운데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와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 그리스도가 곧 오시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를 “오실 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마 11:3).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오지 않아서 애가 타거나, 누군가의 편지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려 본 사람은 기다림이야말로 가장 힘들고 피곤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특히 무엇이든지 즉석에서 해결하는 인스턴트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뭘 기다린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음식점에 가서도 5분 내에 나와야 하고, 커피 자동판매기 에서도 종이컵에 커피가 고이는 그 몇 분을 참지 못해서 손을 데기도 합니다.
기다림은 희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기를 때 엄마가 어디 갔으면 아이는 계속해서 엄마 어디 갔느냐고 묻습니다. 아빠는 어디 갔는데 몇 시쯤 올 거라고 말해줍니다. 아이는 자기 일을 하면서도 엄마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지루해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연속극에 나오는 거지만, 실제로는 엄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이에게 차마 말을 못하고 미국에 갔다고, 몇 밤 자면 온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지요. 아이는 왜 빨리 안 오느냐고 보채고, 그 아이를 달래는 아버지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겠죠. 누군가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행복한 것입니다. 그게 사람이 아니라도,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행복해 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그런 단순한 일상의 기다림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의미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허함과 의미 없는 지껄임을 탁월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이 지겨워서 그 기다림을 그만 두려고 하면 한 사람이 늘 고도가 내일 온다고 했다고 말을 전해 줍니다. 하지만 몇 년을 기다려도 결국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도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너무나도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끝내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고도는 God와 이름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어쩌면 그 연극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신을 그렇게 묘사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오지 않는 신 앞에서 느끼는 적나라한 권태와 삶의 무의미성에서 드러나는 실존을 묘사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가까운 어느 교회에서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그만 다닐 랍니다.” 놀라서 목사님이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장로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 전에 제 아들놈이 교통사고를 내서 2천 만 원이나 되는 돈을 물어 줬어요. 그동안 신실하게 교회 생활을 잘 했는데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뭘 기다리겠어요.” 그 장로는 마침 교회의 재정을 맡고 있었는데, 우편으로 교회 통 장이며 장부를 다 보내고 그만 교회를 멈췄다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리던 순진한 성도들은 이제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일이 잘 안 되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하느냐고 하면서 하나님께 항의를 하고, 회의를 품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는 것이 오늘의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분명 기다림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다림이 사라진 자리에 대신 들어온 것은 무엇입니까? 고도가 더 이상 오지 않는 것을 안 그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시간 죽이기’(킬링 타임)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게임기와 오락기 그리고 화 투장 앞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습니까? 나이든 이들은 그들대로,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그저 시간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삶의 허무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자살인 것입니다. 지난 해 우리나라에서 16,000명이 자살을 했습니다. 하루에 40명이 자살합니다. 이것은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많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나날을 살아가는 허무주의 때문입니다.
전에는 아이가 자전거를 사 달라고 조르면 농부인 아버지는 나락 베면 사주마, 송아지 낳아서 팔면 사주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시절에 신식 스케이트가 갖고 싶어서, 3사관학교를 졸업하는 동네 형의 스케이트를 미리 받아다 숨겨 놓고 온갖 방법으로 부모님을 설득하다가 그만 포기 한 적이 있습니다. 여하튼, 부모들이 기다리라고 하면 아이는 희망을 가지고 논을 바라보고 소꼴을 뜯어다가 열심히 소를 먹입니다. 몇 달이 지나서 그렇게 원하던 자전거가 생기면 그것은 쇳덩어리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 됩니다. 송아지의 추억,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그 자신의 땀과 기다림이 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어떻습니까? 부모의 결심만 문제입니다. 허락이 떨어지면 카드를 갖고 가서 한번 그으면 끝납니다. 기다릴 것도 없고, 그것은 쇳덩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고장 나거나 싫증나면 버리면 그만입니다. 자전거보관소에는 버린 자전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고 하죠.
성서는 성도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은 온통 기다림의 노래입니다(시 33:20; 42:5, 11; 43:5; 130:6).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한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성서는 그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묘사했습니다(막 15:43; 눅 23:51).
또 예수께 정결례를 베푼 예루살렘의 시므온에 대해서 성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평생을 기다려온 사람입니다. 그가 아기 예수를 자기 팔에 안았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눅 2:29-30).
이것이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그의 서신 곳곳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롬 8:19, 25; 고전 1:7; 갈 5:5; 빌 3:20).
이런 정성어린 마음들, 간절한 기다림의 마음의 끝에 메시아가 오시고 복음이 오는 겁니다. 교회가 변화되고, 새로운 일이 일어나, 의미 있는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청장년들이 이걸 알았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복음의 시작은 기다림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실현하는 교회도 당연히 기다리는 곳이고,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해야 하고, 기다림을 성취하는 기쁨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복음이라는 말의 의미가 간절히 승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날아든 승전보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면 복음이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암교회의 10년 후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면 성암교회도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시작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다리느냐? 멍하니, 세월만 죽이고 있으면 되느냐? 되는대로 교회 다니고 있으면 장로들 돌아가시고, 노인들 사라지면 나도 뭔가 되겠지? 그렇습니까? 세상에 이런 복음이, 이런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이게 복음이 약동하는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동네 청년들의 계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서서 오실 그분을 위해서 길을 닦고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4-5절). 그것은 그저 종교운동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갱신 또는 개혁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자신을 내 놓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역사가는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서 헤롯이 그를 위험분자로 여겨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기다림은 이런 기개 있음이기도 합니다. 목숨보다, 돈보다, 삶의 안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존재 전부를 거는 것이 기개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기다림 아니었습니까?
세례요한은 그 인기를 볼 때, 편하고자 했으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 오실 그이를 위해 길을 닦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알았습니다. 그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갇혔고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가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께 “당신이 오실 그분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가 그분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도 억울하고 헛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오실 그이가 맞다면, 그를 위해 길을 예비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담당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가 오실 그이임을 안 후에 어쩌면 그는 기다리던 분을 마침내 만난 사실에 감옥에서 죽임 당하면서도 기뻤을 것입니다. 이런 기개가 10년 후 성암교회를 책임질 청장년들에게 있습니까?
크리스천은 오실 그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기대하고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숨까지도 내 놓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가운데 현재의 삶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일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삶의 목표는 현재 여기서 소유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소유와 시간과 존재를 통해서, 주님이 이루시려고 하는 사명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7-8절).
크리스천의 현재는 오실 그이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오늘 청장년의 존재는 10년 후 여러분 자신이 세울 하나님의 일과, 성암교회에 대한 꿈과 기다림으로 규정됩니다. 만 약 그것이 없다면,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보다 더 불행한 이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예수께서“오신다”(erchetai)고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막연한 미래를 말하거나 추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10년 후에는 틀림없이 오늘 여러분이 성암교회의 주축이 되듯이 말입니다. 예수께서 오시는 것은 그 당시로는 미래의 일이지만 가장 확실한 사실인 것입니다. 오실 그이를 기다리는 데서 크리스천의 현재는 의미로 충만해집니다. 그러면 10년 후의 성암교회를 기다리는 것 또한 청장년 성도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오실 그이를 위해 준비하는 혁신적인 삶이었듯이, 기다리고 준비해서 장차 10년 뒤에 성암교회를 맞는 청장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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