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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4:2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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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12.7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델라와 짐처럼
막4:26-29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막 4:26-27).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노력하는 것과 별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도 여러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으니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농부가 씨를 뿌려놓고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씨가 자라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얼마나 농사가 힘든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심은 다음에도 물과 퇴비를 주어야 하고 자라면 김을 매고 잡초도 뽑아 주어야 하는데, 그저 밤에 자고 낮에 깨는 동안에 씨가 자란다고 하는 말은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 같이 들립니다.
예수께서 농부의 그런 수고를 몰라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하지만 여기서 예수는 그런 수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아무리 농부가 수고를 한다 해도 농사는 농부의 그런 수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농부는 씨가 자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어도 그것을 자라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집 앞에 낙엽송 묘목을 나란히 심어놓고 매일 아침 그것이 자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볼 때마다 순이 파릇파릇 돋고 힘차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처음으로 자연의 힘이랄까 신비를 느꼈어요. 또 집 앞의 거름더미에서 호박, 옥수수, 무, 콩 같은 것들이 싹을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너무 귀엽고 예뻤습니다. 울타리를 따라서 심어놓은 가지 오이 같은 것들이 열매를 맺을 때는, 손가락같이 가는 것들이 하룻밤 자고 나면 쑥쑥 자라는 모습이 참 예쁘고 또 놀라웠습니다. 큰 것을 다 따먹은 것 같아도, 다음날 아침이면 또 그만한 것들이 여기 저기 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처음으로 기적적인 것이랄까 신비한 것의 느낌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는 이 생명의 신비를 말씀 하시는 거죠. 자라나는 것들의 위력 말입니다. 그래서 그 신비한 힘을 강조하다 보니, 그것에 비하면 농부가 한 일은 그저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꼭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했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고전 3:5-7).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무슨 파 무슨 파로 갈려서 대립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들이 누구를 지지하든 누구를 지도자로 세우든 간에 그들의 역할은 그저 심고 물주는 역할일 뿐이요,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울 사도 때부터 이렇게 어려움이 있었고 분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분열되었다면 교회는 아마 오늘날까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자라게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 비유는 예수의 비유와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것이 있어요. 바울은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못 박았지만,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알찬 낟알을 낸다.”(28절).
놀랍게도 예수는 ‘하나님’ 대신에 ‘땅’이 그렇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땅이 ‘저절로’(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절로’(automate)라는 말은 오늘날 영어 단어 automatic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단어는 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오토매틱이라고 하면 ‘자동’(自動), 곧 ‘스스로 움직인다’는 뜻이죠. 자동차는 자동으로 가는 차이고, 자동 변속기는 자동으로 변속이 되는 것이고, 자동문은 자동으로 여닫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자동이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동, 곧 스스로 움직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손으로 일일이 해야 할 것을, 미리 입력해 둔 프로그램에 따라서 전기나 기름의 동력으로 한다는 뜻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의 성서 구절에 나오는 automate라는 단어는,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옥중에 있는 베드로에게 천사가 나오라고 하였을 때, 베드로가 옥문 가까이 이르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되어 있는데(행 12:10), 바로 이 때 쓴 단어가 automate입니다. 그것은, 자동문의 작동 원리와는 달리, 무엇인가 신비한 존재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땅이 싹을 내고 이삭을 패게 하고 열매를 맺는 것은 땅이 갖고 있는 이런 신비한 힘 때문입니다. 땅은 스스로 이런 일을 합니다. 바로 이런 땅의 힘, 이 ‘땅 심’ 때문에 농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농부의 수고가 있어도 이런 땅 심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예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능력을 오직 하나님께 돌리는데, 예수는 땅의 본래적 능력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땅의 힘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는 거예요. 이 땅의 힘에 비하면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그저 밥 먹고 뒷간 가는 일정도,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정도 아닌가요? 그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신비한 힘에 비한다면 인간의 수고는 그 정도다 그 말이죠. 우리가 살아온 한 해를 돌아보세요. 우리의 수고로 살았나요? 아니면, 뭔가 우리의 수고를 엄청 뛰어넘는 ‘신비한 힘’때문으로 살았나요? 그 ‘신비한 힘’에 비하면 우리는 맨 날 자고 일어나고 또 자고 한 거 밖에 없는 거죠.
옛날에는 다들 농사를 지으며 살았기에 땅과 가까웠고 이런 땅 심을 믿는 마음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산업화되어 가면서 땅을 개발이나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 함부로 대하고 파괴하면서 땅은 황폐해지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오는데, 생태계의 위기 문제뿐 아니라,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이제는 우리가 땅에 대한 푸근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고 깨는 동안에 땅이 다 알아서 한다던 예수의 푸근한 믿음을 우리는 갖기가 어렵게 되었어요. 땅이 썩고 있고 파내면 쓰레기가 나오니까 불안한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자고 깨는 동안에 땅이 다 알아서 한다’ 이러지 못하는 거예요. 그게 불행인 거예요. 그러니까 무엇이든, 내가 해야 한다, 프로젝트를 세워야 한다고 걱정만 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그 사회의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 큰 부자도 유명한 사람도 권세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제자들이나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들이 노력한 것에 비해서 성과가 나타나지 않음을 보면서, 이래가지고서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에게, 농부가 씨를 심어놓고 땅을 믿고서 잠을 자고 깨듯이, 우리도 푸근한 마음으로 땅 심을 믿고 잘 자고 일어나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고 하루가 가고 한 해가 가는 것이 허송세월인 것 같아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나라는 자라고 있다고 적극적인 희망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계절이 오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다들 아는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다시 읽으면 평소에 별로 눈여겨보지 않은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소설의 끝부분에서 여주인공 델라가 남편 짐에게 하는 말이죠.
“짐, 제 머리칼은 무척 빨리 자라요.”
델라는 남편 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 주고 싶어서 몇 달 동안 돈을 모았지만 1 달러 87센트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대대로 물려받은 멋진 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시곗줄이 낡고 초라한 가죽이어서 그것을 차지 않고 품에 넣고 다니다가 시간 볼 때만 꺼내서 보곤 했습니다. 델라는 마침내 자기 금발머리를 잘라 팔아서 20달러 정도 하는 멋진 시곗줄을 선물로 샀습니다. 남편 짐도 아내를 위한 선물을 봐둔 게 있는데 보석이 박힌 멋진 빗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아내가 머리를 빗으면 참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돈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마침내 그 시계를 팔아서 빗을 샀습니다. 두 사람이 저녁시간이 되어 집에 와서 만났을 때, 짐은 델라의 머리 모양을 보고 놀랐고 충격을 받았지요. 델라의 그 아름답고 긴 머리가 짧아졌던 것입니다. 그가 사온 빗이 소용이 없게 될 줄 몰랐습니다. 델라는 짐을 위로하느라고 그 대신 멋진 시곗줄을 샀다고 자랑을 합니다. 짐은 자기가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내에게 그 시곗줄을 채울 시계를 팔았노라고 말을 해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 뜻밖의 일에 당황하기도 했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받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선물이기에 서로 포옹을 하면서 위로를 합니다. 그때 델라가 짐에게 하는 말이 이 말입니다.
“짐, 제 머리칼은 무척 빨리 자라요.”
전에는 오 헨리 작품의 마지막에 나오는 반전이 재미있었지만, 이번에는 델라의 그 말 한 마디가 귀에 남습니다. 그래요. 머리칼은 다시 자랍니다. 우리가 자고 깨고 하는 사이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랄 것입니다. 그것이 델라와 짐에게는 작은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나도 한 달에 한번쯤 이발을 하곤 하는데, 머리칼이 자라는 것을 불평한 적은 있어도 거기에 희망을 걸어 본 적은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 헨리는 델라의 머리칼이 자라는 데서 희망의 언어를 찾고 있지 않습니까? .
어쩌면 우리가 올 한해 수고하고 노력한 것은 델라와 짐의 선물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헛살았다, 혹은 인생의 허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절망감으로 한 해를 돌아 볼 수도 있습니다. 델라와 짐처럼 말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준비한 것이 황당하게도 쓸모없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잘못 준비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초에 세운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은 사람이 많고 실패하여 허탈한 심정이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가 사랑하려고 했고 뭔가 잘해 보려고 노력했다면 그것은 결과와 관계없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델라가 남편을 안으면서 “제 머리칼은 빨리 자라요”라고 말한 것같이, 우리도 그런 희망의 언어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12월에 우리가 해야 할 신앙의 중심일 겁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는 농부가 자고 깨고 하는 사이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난다’고 하시는 겁니다. 무슨 기적적이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했다는 예수의 이 희망의 언어가 우리를 위로 하고 축복하는 것이죠. 축복의 말씀으로 하시는 거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비록 그렇고 그런 한 해를 또 살았다고 해서, 열심히 살았지만 된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해서, 이젠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이 닥쳤다고 해서 주저앉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믿을 포기하지 말고, 이 땅을 바라보고, 농사가 되는 것을 생각하고 , 땅을 믿듯이 그런 푸근한 믿음으로 한 해의 삶을 감사하고, 평화롭고 기쁜 마음으로 또 다시 밤에 자고 낮에 깨라는 겁니다.
델라와 짐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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