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4:35-41 |
---|---|
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8월 5일
"풍랑 속에서 잠 자는 법"
(How To Sleep In the Midst of Storm)
마가복음(Mark) 4:35-41
1.
저는 지난 3개월 동안 교회에서 허락해 주신 연구 휴가를 잘 지내고 오늘부터 두 번째의 안식년 싸이클을 시작합니다. 일년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하시는 교우들을 생각하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습니다. 또한 척박한 목회 현장에서 일하면서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민 교회의 다른 목회자들을 생각하면 심히 주저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믿고 용기를 냈습니다.
일을 중단하고 쉬면서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것은 목사에게 주어진 멍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유익한 쉼과 회복과 재충전의 기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교우님들의 기도와 사랑 덕분이었다고 믿습니다. 교우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안식년의 두 번째 싸이클을 시작하면서 더 낮은 자세로, 더욱 신실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이 와싱톤한인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광채를 더욱 선명하게 발산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풍랑 속에서 잠 자는 법을 아십니까? 저는 교육열이 특별했던 아버님 덕에 어릴 때 제 고향 당진에서 인천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육로 교통이 비싸고 불편했던 때였기에 방학 때마다 배를 타고 당진과 인천을 오갔습니다. 초기에는 일곱 시간 정도 걸렸고, 나중에는 네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청년이 되기 전까지 저는 배를 탈 때마다 어김없이 멀미를 했습니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풍랑이 심할 때는 더욱 그랬고, 바람이 잔잔할 때도 야릇한 미식거림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험으로 압니다. 풍랑 속에서는 잠을 잘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풍랑 속에서 잠을 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때는, 예수님과 그 일행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갈 때의 일입니다. 호수 중간 즈음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왔고 배는 심한 풍랑에 휩싸이게 됩니다.
갈릴리 호수는 북쪽으로 깍아지른 산골짜기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 예고도 없이 돌풍이 불어치곤 했습니다. 경험많은 어부라 해도 풍랑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때는 밤이었습니다. 한 밤 중에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적어도 네 명은 어부 출신입니다. 그들은 풍랑 속에서 배를 다루는 법에 대해 꽤 도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추측건대, 그들의 인도를 따라 제자들은 풍랑을 헤집고 목적지로 나가기 위해 힘써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풍랑은 어찌할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센 바람은 금방이라도 배를 뒤집어 놓을 듯했고, 일렁이는 파도는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싸웠는지 모릅니다. 모든 노력이 허사였습니다. 어느 덧 그들은 하나 둘씩 포기하고 나자빠집니다. 뱃멀미로 인해 몸을 가눌 수조차 없습니다. 배 갑판의 이곳 저곳에 널부러져 '이러다가는 물귀신이 되고 말겠구나!'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죽음이라는 현실이 고개를 쑥 내밀 때, 그 앞에서 질리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자기보다 강한 누군가의 옆에 가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기진한 제자들은 그제서야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비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행하신 많은 이적들과 놀라운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그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안에 있었음에 틀림 없었습니다. 그분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겠지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어딘가에서 배를 바로잡기 위해서 힘쓰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갑판 위를 아무리 둘러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발견한 곳은 배 뒷편의 구석진 자리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분은 그곳에서 잠을 자고 계십니다.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것이 아닙니다. 뱃멀미에 지쳐 쓰러진 것도 아닙니다. 쿠션이 될만한 것을 베개로 삼아 제대로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도대체 어떤 체질을 가졌기에 이같은 풍랑에도 저렇게 깊이 잠을 잘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놀라기도 했겠지만, 다른 사람은 어찌되든 내 몰라라 하고 깊은 잠을 자는 모습에 화가 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한 말에 화가 담겨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으십니까?"(38절)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마치 그런 일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처럼, 바람을 향해 그리고 풍랑을 향해 호령하십니다. "고요하라! 잠잠하라!"
그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금세라도 뒤집힐듯한 작은 배 위에서 사납게 일렁이는 풍랑과 거센 바람을 향해 호통을 치고 있는 이 사람은 과연 제정신입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분이 호통을 치고 나자 바람이 힘을 잃고 풍랑이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바다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잔잔한 바다가 성난 바다로 변하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의 일이며, 무섭게 일렁이던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이 또한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인지 말입니다. 순식간에 호수는 거짓말처럼 잔잔해집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죽음의 현실 앞에서 두려워 떨던 제자들은 한 순간에 그 두려움을 잊고 또 다른,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오늘 본문의 41절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이 사건을 목격하기 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예언자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고 또한 다른 종교 지도자들보다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에게서 인간 그 이상의 차원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풍랑을 향해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주의 지배자의 위용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짧은 순간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호수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3.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가장 큰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만, 죽음의 문턱 앞에 서는 순간 그 만용이 힘 없이 허물어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어떤 방법으로든 극복한 사람이지, 처음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존재합니다. 때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어떤 소녀가 이렇게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 산다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마주치고 부딪치고 어울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의 벽들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짠한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울증에 빠지거나 삶의 심각한 고비를 만날 때면, 차라리 사는 것이 더 두려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당면한 고비만 넘으면 되는데, 그 고비가 너무 커보여 그렇게 느끼는 것이고 그렇게 불행한 선택을 합니다.
더 이상 그러한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니다. 더 이상 감정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라 할 수 있습니다. 부디, 그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생의 기회를 스스로 반납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모두 주변을 돌아 보아,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두렵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없는지 살피고,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상황을 변화시키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것과는 다른,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의 원인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두려움입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풍랑을 꾸짖어 잠잠하게 만드는 예수님을 보고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까맣게 잊고 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살고 죽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것을 초월하는 존재와 그것을 초월하는 세상이 있음을 깨닫고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있는 외계인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계시며, 하나님 나라가 죽고 나서 가는 곳이 아니라 내가 선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자각하자 큰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압도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온 우주를 품고 계신 그분 앞에 설 때, 한 터럭 먼지와도 같은 우리는 숨도 쉴 수 없습니다. 절대 거룩의 하나님 앞에 설 때, 죄에 물든 우리는 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마주할 때, 우리는 검불처럼 태워질 존재임을 깨닫고 두려움에 떱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사랑에 실패자인 우리 모두는 심판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두려움에 비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 제자들이 정작 두려워할 것은 풍랑에 휩쓸려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와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을 넘어 존재하는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진정으로 두려워할 일입니다. 문득 문득 이 세상에 뚫고 들어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를 '모르고' 혹은 그것을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두려워할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활동하고 계시며 마음의 눈을 뜨면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데,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 전부인양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풍랑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하나님 나라를 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살고 죽는 것을 넘어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분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제자들에게는 죽음이 제일 두려웠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한, 풍랑 속에서 절대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4.
인간은 생의 첫 걸음을 찢어질듯한 울음으로 시작합니다. 일찌기 세익스피어는 "바보들만 사는 덩그런 무대에 타의에 의해 끌려나온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의학자들은 이 말에 코웃음을 치며, 그것은 태아가 폐에 찬 양수를 토해내기 위한 생리적 반응이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울음에는 확실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인생이라는 패키지에 들어 있는 고난과 아픔을 예감하는 몸짓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는 패키지에 고난과 풍파가 담겨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낙원을 상실한 다음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받은 인간들이 얼키고 설켜 살고 있으니, 고난과 풍파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믿음 안에 든든히 자리를 잡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고 살다 보면, 상당히 많은 고난과 풍파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겪는 고난과 풍파 중에 우리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지나친 욕심이 만들어 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마음에 변화를 받고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지나친 욕심을 부려 쓸 데 없는 화를 자초하지 않을 것이고, 과도한 스트레쓰에 짓눌리지도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과 불화하는 일도 줄어들 것입니다. 믿음에 깊이 뿌리를 내릴수록 자연히 사라지는 고난과 풍파가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좋다고 하여 인생의 항해를 끝날 때까지 그 어떤 풍파도 거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인생에게도 풍파가 덮칠 수 있습니다. 질병의 풍파가 올 수도 있고, 관계에서 풍파가 생길 수도 있으며, 사회 생활에서 파도가 일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해고를 시킬 때, 하나님께서 나만은 제외시켜 주셨으면 좋겠지만, 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리는 것을 두고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왜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두고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그토록 민첩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 지어지고 여러 가지 은사가 충만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피할 수 없는 고난과 당해야만 할 풍파를 만날 때, 믿음은 그것을 헤쳐나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풍랑을 만나 혼비백산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풍랑을 만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은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모든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제대로 보지도, 제대로 듣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바른 판단을 가로막고, 팔과 다리의 힘을 앗아갑니다. 두려움의 감정에 빠지면 우리는 한 순간에 무력해집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두려워하면 싸우기도 전에 이미 진 것입니다. 왜 두려움이 생기는가를 곰곰이 따져 보면, 결국은 죽음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 즉 하나님 앞에 서는 두려움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차원을 넘어서는 영원한 나라에 눈 뜨고 그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나라의 현실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너져 "오, 주님, 저를 떠나가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절규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묻은 손으로 우리의 어깨를 감싸 안으시면서 그 나라 안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감히 그 앞에 설 자격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그리고 감히 입을 열어 '아빠'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창조자이시며 심판자이신 성부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가장 큰 두려움을 해결한 사람입니다. 가장 큰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모든 것을 마비시킬 정도로 큰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절벽 끝에 서는 것과 같지만, 하나님과 그 나라를 아는 사람에게는 내려다 보면 아찔해 보이지만 침착하게 건너 뛰면 건널 수 있는 절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현실을 당하여 잠시 흔들리지만 곧 두려움을 벗어나 침착하게 도약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풍랑 속에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이미 살고 죽는 차원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풍랑이 일어날 때 그 앞에 서서 이렇게 호령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흉한 모습으로 일어나 나를 질리게 하려느냐? 나를 속이지 말라. 네가 어찌한다 해도 나를 어쩔 수는 없다. 나는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다. 네가 나의 몸을 해할 수는 있지만, 나를 어쩔 수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정원에 심긴 나무다. 그러니 고요하고, 잠잠하라. 내 앞 길에서 물러서라."
5.
얼마 전, 40대의 한창 나이에 죽음의 문턱에 선 것 같은, 헤어나오기 어려운 깊은 수렁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 있는 교우를 만났습니다. 너무다도 갑자기 닥쳐온 거대한 풍랑으로 인해 그 가족 전체가 심한 멀미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 삶의 풍파가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 오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 교우와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그 교우를 만났을 때, 애써 죽음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마치 겨울비를 맞고 있는 참새처럼 작아져서 몸을 움츠리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0대의 한창 나이에 죽음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싸음에서 이기려면 그 얼굴을 대면해야 합니다.
저는 아픈 환자의 몸에 메스를 들이대는 외과의사의 심정으로 그 교우에게 죽음의 얼굴을 대면하라고 권했습니다. 믿음으로 그 얼굴을 대면하지 않는 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고,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않는 한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고 죽는 것을 넘어 계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믿는다면, 비로소 그가 마주한 삶의 풍파를 향해 호령할 수 있는 믿음의 담력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풍랑을 향해 이렇게 호령할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게 호령할 때, 두려움의 파고가 잦아들고 마음에 일던 풍랑이 잔잔해진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게 든든한 믿음이 차오르면, 그 믿음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조차도 당당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즈음 여러분의 삶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혹시나 풍랑 만난 배처럼 언제 뒤집혀질지 모를만큼 불안하게 살고 있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소연하고 계십니까? 아니, 너무도 힘겹고 지쳐서 기도할 힘도 없으십니까?
문제는 풍랑이 아니라 두려움이요,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므로 잠시 풍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십시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십시다. 마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십시다. 우리가 이미 그 나라의 시민인 것을 기억하십시다. 죽음이 우리를 어쩔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다. 그러면 풍랑을 맞설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 풍랑을 향해 호령할 담력이 생깁니다. 그 믿음의 담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요즈음 여러분의 삶은 순풍에 돛단 배와 같습니까? 겸손해 지시고, 또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여러분의 능력이 뛰어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착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만 있으면 걱정 없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한 순간이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될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 하나로 평온했던 삶이 갑자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순항을 하고 있다면 몸을 더욱 낮추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평온할 때, 믿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막상 풍랑에 휩싸여 죽음의 공포에 짓눌리면,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을 해결하고 나면, 죽음의 공포가 마음을 짓누른다 해도 그것을 향해 호령하며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분의 진노에 타 죽을 것 같아도 그분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그분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은혜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매일 그분과 사귀어 그분의 정원에 깊이 뿌리 내리도록 하십시오. 그 믿음이 인생의 곤고한 날, 풍랑이 심하게 일어나는 날, "꼼짝 없이 죽게 되었다"고 탄식할 날, 여러분을 지켜 줄 것입니다. 그 믿음이 풍랑 중에서도 베개를 베고 제대로 잘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이 없습니다.
풍랑을 헤쳐갈 믿음도,
풍랑을 다스릴 믿음도
저희에겐 없습니다.
작은 풍랑 앞에서도
두려워 떨며 움츠러듭니다.
오, 주님
저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희로 주님 안에서
참된 믿음을 가지게 하소서.
그 믿음으로
삶의 모든 풍파를 헤쳐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마침내
주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