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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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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8.25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너, 이름이 뭐지?
막5:9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름이 가장 많이 불리는 사람이 있고, 겨우 겨우 불리는 사람이 있고, 이름은 있지만 한 번도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불리지 않는 이름도 있습니다. 결국 이름이 불리 우는가 혹은 불리 우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존재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척도입니다. 이름이 많이 불리 우는 존재는 그가 선한 영향이든 악한영향이든 사회에 끼치는 존재 가치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이름을 널리, 높이, 오래 알리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공은커녕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조차도 지워져 버린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거나, 이름이 있지만 거의 불리지 않거나,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리 웁니다. 이렇게 그가 사람임에도 이름이 없는 경우, 이름이 불리 우지 않는 경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있으나 없는 존재’와 같습니다. 한마디로 비천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스스로 이름을 내는 사람은 예수 없이도 잘 삽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름이 사라진 채로 인간이 아닌 것처럼 대우받는 사람들에겐 예수가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공동묘지에 살고 있습니다.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손발을 묶어 두어도 그것을 부수는 괴력이 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괴성을 지릅니다. 그리고는 자기 몸을 돌로 짓찧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에게 태어났을 때부터 이름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를 그저 ‘귀신들린 사람’또는 ‘위험한 사람’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게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위험한 사람’이라고 부를 때, 어떤 근거로 그를 ‘위험한 사람’이라고 한 걸까요? 소리를 질러서? 자해를 해서? 무덤에 살기 때문에? 이런 것들 때문에 위험하다고 했다면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고 사실적이지 않습니다. 앞의 근거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공동묘지는 주택가에 인접해 있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동묘지 가까이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당시의 공동묘지는 더군다나 시신을 파묻기 보다는 내다버리는 곳이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과 접촉하기 어려운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는 그가 뭘 한다고 한들 그게 어찌 사람들에게 ‘위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를 ‘위험한 존재’로 이름을 붙인 것은 그들의 편견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게 이름을 붙임으로 그를 거기에 붙들어 두어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심보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실상 이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얼굴은 본적이 있을까요? 이름은 알까요? 그의 출생에 관한 것들은 알까요? 그가 왜 그 처지가 되었는지 아는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도 마치 그를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그를 자기들의 편견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자신을 자해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성향이라기보다는 그가 만나는 사람이 무서울 때 상대방에게는 어떻게 할 수 없고 그래서 반대로 자기를 학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아무 짓도 안 했는데도 다짜고짜 그를 잡아다가 몰매를 때리고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워 가둬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가하는 폭력이 두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소리 지르고, 자해를 하며, 그를 묶어둔 쇠사슬을 끊었던 겁니다. 자신의 폭력성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의 폭력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 그에게 사람들은 두려움의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공동묘지로 그의 거처를 옮기게 된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요즘도 산 속 깊은 곳에 홀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거의 두려운 세상과 위험한 사람들을 피해서 그리로 간 것 아닙니까?
헌데 사람들은 그의 그런 사연을 알바 없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그의 광폭한 행태만을 주목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 동네에 그런 남자가 한 두 사람만 있어도 집값이 뚝뚝 떨어질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당장 동사무소에 신고해서 그를 잡아다가 격리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일평생 새로운 이름이 붙어서 살게 되겠지요. 간혹 그중에는 ‘정신병자’라는 이름도 만들어 질 거고, ‘위험한 존재’라는 딱지가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겁니다. 세상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그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으므로 그는 ‘있으나 없는 사람’, ‘존재는 하지만 부재한 사람’이 되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에게 그의 진짜 이름을 묻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를 사람으로 대접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가 예수와 마주쳤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와 마주쳤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당연히 마주친 겁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5:9은 바로 그 장면입니다. 설교의 제목이 바로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건넨 말씀입니다. 저는 이름을 묻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눈물이 납니다. 마치 그런 처지에 있는 나를 예수님이 “네 이름이 본래 태수지?”하고 불러 주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너무 평범한 질문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질문이야 말로 예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가장 위대한 질문입니다. 적어도 이 사람에겐, 귀신들려 위헌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그에게 이 예수님의 물음은 그야말로 복음이었습니다. 희망이 시작되는 입구와도 같았습니다. 그에게 이 질문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스스로도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는 관성을 따라 ‘군대귀신’이라고 대답합니다.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짐작도 하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레기온’이라는 군대 귀신이야기는 오늘 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연유에는 로마군대에 의해서 이런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예수는 그에게 달라붙었던 귀신을 돼지 떼 속으로 집어넣어 물에 빠뜨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 돼지고기는 예루살렘에 주둔하는 로마의 군단(레기온)에서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군납을 하는 돼지농장이 있었던 것이고, 돼지농장은 주택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마침 그게 공동묘지 근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괴성을 지르고 돌아다니는 통에 돼지농장에 이만저만 피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돼지농장주인은 로마의 권력에 기생하고 있었고, 이런 기득권 세력들이 이렇게 이름 없는 사람을 양산해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하필이면 귀신을 돼지 떼에게 집어넣어 몰살시킨 까닭을 짐작 하시겠습니까?
이게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입니다. 세상에서 밀려 이름 없이 살아야 하는 ‘부존재의 존재’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세상은 필요 없는 이름이지만 교회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멀쩡하게 이름가진 사람에게서 이름을 빼앗고 공동묘지로 몰아낸 후 ‘위험한 존재’라고 편견의 이름을 붙임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제도와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들을 물속으로 쳐 넣어야 합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는 심판이 되고, 누군가에게 예수는 구원입니다. 레기온과 그 귀신을 운용하는 사람이나 체제나 제도에게 예수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런 체제에 처형당하여 쫓겨난 이름 없는 그에게 예수는 구원입니다.
자, 이 사람이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처음에 한 대답은 ‘나는 군대 귀신이다’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영혼과 삶을 제어하는 구조를 파괴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소리 지르고 날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를 버린 세상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결과입니다. 누구에게나, 구조와 제도에 의해 어거지로 귀신들렸던 그에게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의 복음은 마지막 결론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파괴하고 인간을 비인간으로 소외시켜 공동묘지에 가두는 제도에 대해 눈을 뜨라는 것이고, 그런 악한 구조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며, 마침내 사람 하나하나의 제 이름을 불러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예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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