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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2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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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21절-28절: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누가 이 소리를 하는 거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하는 걸 보니 이 귀신들린 자가 ‘예수란 분이 어떤 분이다’ 하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까 이 귀신들린 자가 당시의 바리새교인들 율법사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보다도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학문이 얼마나 높은지? 그런데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죽였다. 그런데 이 더러운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을 참 잘 안다.
그러면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을 잘 안다면 그 예수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를 가지고 거룩한 사람으로 닮아야 할 텐데 그런데 그게 아니다. 왜 그러냐? 더러운 귀신이 들어서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 속에서 더러운 귀신이 주격으로 돼 있는 거다. 쉽게 말을 하면 거룩한 예수님을 닮아 가면 자기가 거룩하고 존귀해지는 것임에도 자기 성격 성질상 거룩한 것을 닮지 않으려는 이게 더러운 성격 성질이 들어서 그렇구나. 고집이 들었구나. 이건 성령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도 어떤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그냥 보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람도 절대 정확한 예수님의 것을 두고 봤을 때는 ‘이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 못 되는구나’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온전하신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자기가 거룩한 그 주님을 닮아가려는 게 옳은 정신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복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하면 ‘그 사람 불러올까요?’ 하면 ‘에이, 그 사람 못 쓴다. 불러오지 마라’ 그런 게 있고, ‘누가 안 보이네. 그 사람 데려올까요?’ 하면 ‘그래, 그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다. 데려와라’ 그런 사람이 있다. 인격의 세계에서는 그런 게 있다.
부지런하고 마음 씀씀이가 고우면 자기가 높임을 받을 텐데 시기질투를 하고 몹쓸 정신을 가지니 많은 사람이 싫어한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그런 사람도 예수님을 닮으면 되겠구나. 피할 길이 있고, 높이 올라갈 길이 있고, 유명해질 길이 있고, 영광스런 길이 준비돼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마지막 때는 노아홍수 때와 같고 소돔고모라 때와 같다 하셨고,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온다고도 하셨다. 그리고 바리새교인들의 누룩 즉, 가르침을 주의하라고도 했다. 그리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외식자들이라, 마귀의 자식들이라, 독사의 자식들이라 이렇게 지적을 하니 이들이 거룩한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예수님께서는 어디를 가시던 하늘나라 말씀의 도, 말씀의 이치를 전하셨다. 이게 천국복음이다. 천국복음을 전하고 천국복음을 듣게 되면 천국의 이치의 사람이 된다. ‘천국’ 하면 가장 높은 인격, 가장 높은 성품, 가장 고상하고 높은 차원이다. 이게 얼마나 좋으냐? 하나님께서 이런 자에게 뭐든지 주고 싶어서 사건을 동원시켜 높이려 하신다.
사람이 길을 가다가도 자기가 어느 돌에 걸려 넘어지면 마음씨가 좋은 사람은 다음 사람이 걸려 넘어질까 봐 그 돌을 치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돌에 걸려 넘어지면 제가 성질이 나서 그 돌을 발로 차버리니 그렇게 되면 누구의 발이 아프냐? 심통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 너희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셨다. 내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밥을 못 먹을 것 같으냐? 온 천지 모든 만물은 주님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쓰임이 되도록 들어가 있다. 창조의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길 학수고대 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해서 ‘주님을 닮는데 날 좀 써 주십시오’ 하고 있다. 그런데 못된 사람들이 만물을 못 쓰게 만들고, 먹고 나쁜 짓을 하니 만물이 통곡을 한다. 우리는 그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때 당시 성경 모세오경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고 세상 것, 불에 타질 것, 애굽사람들이 좋아하고 이방인들이 좋아하는 땅의 것을 구했고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서도 그런 가르침을 받고 그런 것을 구하고 있으니 이들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과 같이 있어도 표시가 안 난다. 생각 수준 소원 목적성이 똑같다. 가르침이 그렇고 수준이 이방인들과 똑같다.
오늘날 예수 믿는 교회가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공부를 많이 해서 학박사라고 해도 그 수준이 사고방식 이해타산이 이방인과 똑같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이거 다 때 미쳤다’ 하신다.
더러운 귀신이 뭐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구별이 되어야 할 자들이 더러운 성질, 더러운 사상, 더러운 정신,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더러운 귀신이 들린 것이다. 교인이 거룩하신 그 분 앞에서 이방인들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거 참 더러운 것이다. 질적으로 같고 수준적으로 같으니 더럽다.
아닌 말로 이방인들이 세상 소원 목적을 가지고 우리교회에 와서 앉았다면 기존 교인들이야 처음 온 사람이니까 인사는 하겠지만 그러나 처음 교회에 온 사람의 소원 목적과 이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의 소원 목적은 다른 것이다. 이미 믿고 있는 사람이 소원 목적은 천국으로 되어 있는 것이니 질이 다르다. 달라져야 한다. 믿는 자라면 하루 믿어 이틀 믿어 믿어가면서 수준이 달라야 한다. 올라가야 한다. 안 올라가고 있으면 어찌 되겠느냐?
학교 가서 하루하루 공부를 하면 실력이 달라야 한다. 그런데 나쁜 친구들과 놀기만 하면 학교에 들어오는 그 날과 졸업하는 날과 수준이 똑같다. 그건 미친 것이다. 아예 머리가 날 때부터 그런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공부는 안 하고 늘 나쁜 친구들과 돌아다니니 뭘 알겠느냐? 그러니 미쳤다. 어느 부모가 그 자식을 미쳤다고 안 하겠느냐?
그런 자식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람노릇을 하겠느냐? 이런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면 수십 년을 다녀도 교회일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겠느냐? 안 된다. 이거 하나님의 자녀로서 꼭 마귀자식 같구나.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보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들을 보면 참 마음이 넓은 사람도 있어서 웬만한 일은 ‘그까짓 거 뭘 그러냐’ 하고 그냥 흘려버리는데 그런데 꼬치꼬치 그걸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머리도 아프고 신경질도 나고 모든 게 원망거리다. 그리고 자기 같은 사람을 찾는다. 그래서 자기처럼 만들려고 한다. 그러면 사람 꼴이 어찌 되겠느냐? 비정상이다. 미쳤다.
계시록 거의 끝에 가서 보면 개들도 불속에 들어간다. 개의 특징이 뭐냐? 물어뜯는 거다. 그런데 개는 왜 사람의 신발을 잘 물어뜯느냐?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다. 사람을 잘 물고 씹는 사람이 있다. 그걸 성경에서 개라고 한다. 개들도 불속에 들어간다.
남의 말만 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살기가 편하고 배에 기름이 끼었나 보다. 그런 사람에게 환경을 바꾸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뭘 못하겠느냐? 이적기사를 일으키시는 그 하나님이 너를 순간적으로 돌려버릴 수도 있다. 없는 것도 만드셨는데 뭘 못하겠느냐? 그런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살아야 한다.
세상 것 불에 타질 것을 소원 목적해서 그것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하고 살고 있다면 더러운 귀신과 다른 게 뭐냐? 유대종교인들과 바리새교인들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과 같이 예배를 드렸지만 자신들 옆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더러운 귀신들린 자인 줄 어떻게 알겠느냐? 그들은 모른다. 수준이 같으니까, 보는 눈이 없으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딱 보니까 그게 나눠진다.
그러니까 더러운 귀신이 하는 말을 가만 들어보면 굉장히 유식한 사람이다. 예수를 잘 알고, 어떻게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보다 훨씬 더 믿음이 있다. 그런데 그의 성격 성질이 더럽구나. 예수님의 성품을 자기 자체화 안 하고 있으니 그렇다.
오늘날 잘못된 은사자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떠드는데, 성령은 진리와 동반적인 역사를 하신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진리생명의 교훈을 무시하고 받지를 않고 있다면 그 자가 아무리 예언 방언을 한다고 해도 그거는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보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들을 경험을 해 보면 성질 성격이 참 더럽다. 성령 받았다고 눈 뒤집고 하지만 그 성격 성질이 참 더럽다. 진리는 모른다. 일반적인 성격 성질도 더럽다. 욕심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다. 기독교 안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참 많다. 그러면서 자기는 깨끗한 척 한다.
그리고 예언 방언하는 사람들 대부분 보면 목소리가 별로 좋지 못하다.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라 사발 깨지는 소리가 난다. 기도원 같은데 가서 고함을 지르고 했기 때문에 창하는 사람들 목소리처럼 걸걸하다. 걸걸거리는 그 목소리를 가지고 자기 위엄을 나타내려 한다. 그리고 눈 뜨는 것도 위로 치켜뜬다. 꼭 남의 호주머니 터는 사람 같다.
성령을 받았다면 왜 구별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할까? 진리이치의 말씀을 싫어한다면 악령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거듭나지 못한 모난 성격과 성질에 귀신이 들기 딱 알맞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무시하는 자가 성령을 받았다고 자랑하면 악령일 것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24절-26절): 사람이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귀신이 나가니 그런 그 모습이 보기가 좋으냐? 보기가 흉하다. 말하자면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었던 그것이 그처럼 더러운 것들이었구나.
더러운 귀신이 들렸어도 사람들이 잘 모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모른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치의 말씀이, 양심을 찌르는 그 말씀이 오기 전에는 잘 모를 수가 있다.
성경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깨달아 나갈 때에 자기 마음이나 지식이나 이런 걸 잘 대조해서 하나님이 말씀이 옳다는 것이 깨달아지면 그걸 소원하고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또 하나님보고 고쳐달라고 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룩한 그 분의 의사성을 자기 자체화 시키지 않고 안다고 떠들고만 있다면 주님이 믿음이 있다고 인정치를 않는다. 고치지도 않고 회개치도 않고 떠들고만 있다는 것은 필경 그 속에 더러운 것이 들어있다. 그게 보이는 것이다.
좋고 나쁜 것을 알고 있고 말은 하는데 자기의 성격 성질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면 자기의 그 성격 성질에 의해서 자꾸 말을 하게 되고 남을 씹고 남을 낮추고 한다. 이게 귀신들린 자가 ‘나 잘났소’ 하고 있는 거다.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것이고,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거고, ‘나 잘났소’ 하는 상태다. 지금 조용하게 있으면 잘 모르지만 싸울 때 보면 ‘나 잘났다’ 하는 게 튀어나온다.
왜 싸움이 나는 것이냐? 다 ‘나 잘났다’ 하기 때문이다. 서로 잘났다고 주장을 하다 보니 싸움이 나는 거다. 그러니까 어느 누가 자기가 잘 났다고 하거들랑 ‘네가 왜 잘났느냐? 내가 더 날 났지’ 하지 말라. 그렇게 하게 되면 또 싸우게 되고, 그러면 둘 다 피해가 많고 상처가 생기게 되니까 그럴 때 지혜로운 것은 ‘그래, 네가 잘 났고 나는 못 났다’ 하고 피해버려라. 그러면서 자기가 옳게 바로 살면 그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지게 되는 거다. 성경에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진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제 잘난 맛으로 살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 보고 ‘나 잘났소’ 그게 아니고 겸손히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만 가라. 그러면 지식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도덕성도 올라가고 사람이 총명하고 현명하고 마음도 넓어지고 사랑도 많고 봉사심도 강하고. 그러니 이런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냐?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어도 그런 좋은 사람을 쓸 줄을 모른다면 너는 망한다. 사람을 써도 질 높은 사람을 써야 네가 흥하지 안 그러면 너는 망한다.
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구별 분별을 할 수 있어도 빛이 없으면 너는 어두움에 굴러 떨어지고 망한다. 그래서 우리교인들은 어디를 나가 빛 된 사람, 머리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고 이치가 자라야 한다. 그러면 모든 언행이 성품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자란다.
더러운 기운과 정신과 성질이 빠져나가야 사람이 조용해진다. 더러운 정신, 그리고 그 정신으로 쓰는 기운 성질 이게 빠져나가야 사람이 조용해진다.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진리로 규모 있게 자유가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다. 주님은 교훈을 가지고 사람을 당신처럼 참 사람으로 만드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만들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하는 것은 사람을 온전하게 만드는 걸 염두에 두고 말씀하는 거다.
사람이 안 만들어지는 말은 백 날 해봐야 소용이 없다. 사람이 만들어지는 말은 사람이 깨달아지고, 지식이 높아지고, 도덕성이 건전해지고, 어디를 가나 참 복된 사람이 된다. 들어가도 나가도 복이고, 앉아있어도 복이고 서서 있어도 복이고, 먹어도 복이고 안 먹어도 복이고. 자기 집의 복덩어리는 누가 돼야 하느냐? 자기가 돼야 한다. 하나님의 집에 복덩어리가 있다면 그런 사람을 욕심을 안 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말씀으로 정신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있으면 성령님의 감화 감동의 역사가 왜 안 일어나겠느냐? 그런데 생명과는 안 먹고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먹은 후로는 갖가지 더러운 성격이나 성질로 사는 상태를 세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인간들의 모든 삶이 정상적인 삶은 하나도 없다. 전부 미쳐버렸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사람이 규모 있게 잡혀 들어가는 것이다. 어지러운 사람이 아니고 질서 정연한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거다. 그게 교회다. 교회에 수십 년을 다녀도, 목사 장로라면서도 왜 사람이 규모가 없고 성격 성질이 그 모양이냐? 이거 잘못 믿었구나. 헛 믿었구나. 헛 살았구나. 헛 나이 먹었구나. 그 사람의 가치가 어디 있겠느냐? 그런 삶이 정상적인 삶이 되겠느냐? 그저 배만 부르면 놀고 먹고 돌아다니고 그것뿐이다.
권세 있는 교훈이란 서기관들처럼 ‘무엇을 지켜라. 유전을 지켜라. 하지 말라’ 그런 게 아니고 사람을 진리의 사람으로 깨닫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나 성품적으로 온전케 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문제다. 일은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다 있다. 일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다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세상에 속한 소원 목적이 천국을 향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면 가치판단 평가성이 천국 쪽으로 내리게 된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영적인 참 자기를 보지 못한 채 예수님께 능력을 달라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겠다고 하는 신앙은 마귀의 꾀임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렇다면 어떤 소문으로 퍼져나갔을까? 세상은 소문이 나가는 곳이다. 자기의 소문은 안 나가겠느냐? 자기의 소문도 다 나간다. 우리교회의 소문도 다 나간다. 자기 소문이 좋게 나가는 것 같으냐? 목사의 소문은 좋게 나가느냐?
예수님의 소문은 어떻게 나갔을까? 예수님의 소문도 나가는 거다. 첫째는 예수님은 귀신 쫓는 전문가다? 두 번째는 능력 있는 교훈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분이시다? 자기에게는 어떤 소문으로 들리느냐?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 귀에 어떤 분으로 소문이 들리느냐? 첫 번째냐, 두 번째냐? 그런데 첫째 소문으로 들리는 교인도 있다. 그렇게 들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세상을 돌아다니며 미친 사람 다 교회로 데리고 오게 된다.
예수님은 능력 있는 교훈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효력을 누가 봐야 하겠느냐? 우리 모두 각자가 봐야 한다. 그게 예수 믿는 효력이다. 예수 믿으면서 예수 믿는 효력을 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예수 믿는 거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이 15년 이상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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