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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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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40절-45절: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40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뜻을 모르면 ‘이 말씀은 문둥병에 걸린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 나는 문둥병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하게 된다. 그런데 성경으로 기록해서 나에게 주실 때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 문둥병자처럼 흉측한 우리의 속사람을 염두에 두고 주시는 것이다.
이 문둥병자는 자기가 문둥병이 든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고쳐달라고 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겉으로 된 이 문둥병자를 우리 안으로 끌어당겨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아, 내 속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렇게 보기가 흉하구나.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 봐도 성격이 좋나, 성질이 좋나, 욕심도 많고, 이해심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한 번 못된 것을 생각하면 용서할 줄도 모르고 그걸 꼬장꼬장 갖고 있으니 내가 문둥병자였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음식 보기 싫은 건 놔뒀다가 먹을 수 있으나 사람 보기 싫은 건 정말 같이 못 산다. 불과 사람은 지지면 못 산다. 사람을 자꾸 쥐어뜯고 애를 태우고 꼬집어 뜯고 하면 이거 못 산다. 불도 자꾸 건드리면 꺼진다. 불이 안 붙는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이런 것이 사람 되는 면에 밑거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깨달음이 많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고생하는 걸 지옥살이로 아는데 아니다. 못 사는 게 지옥살이가 아니라 사람이 못 돼 놓으면 그게 지옥살이다. 사람이 좋으면 아무리 큰 사건을 만나도 재미있게 이겨나갈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 행복을 느끼고 그런다.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주님의 원하심은 문둥병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깨끗케 되는 걸 원하신다. 주님도 깨끗케 되길 원하고, 문둥병자 자신도 깨끗케 되길 원하니 매칭이 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주님과 매칭 안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의 정신 성격 성질 더러운 걸 그대로 내버려두고 예수님보고 자꾸 돈 달라, 집 달라, 밥 달라, 자동차 달라, 편하게 해 달라고 하니 이게 안 맞는다. 그러니 사람이 안 만들어진다.
사람이 안 만들어진 상태에서 부자로 살면 그 사람 더 못쓰게 된다. 그런 사람이 돈이 있으면 그 사람은 버린다. 돈을 줘도 사람 된 자에게 줘야 잘 쓰지 사람 안 된 자에게 돈을 주면 그 사람 버려버린다. 그래서 돈으로만 산 사람과, 가정과 사회에서 고생스럽게 자란 사람과는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다. 본인들이 실질적으로 생활하면서 그걸 보는 거다.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걸 왜 못 보느냐? 성경에서 인간 보는 이치를 못 보니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의 교훈이나 부모의 성격 성질을 보면 ‘아, 저 집이 자녀로 인해 애를 먹겠구나’ 이게 나오는 거다.
그러면 가정에서 자녀가 사람이 되어 돌아가려면 부모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건 이치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서 자녀는 그걸 보고 ‘저게 내 모습이구나’ 하고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한다. 그런데 부모가 자신의 못된 것을 보는 것도 힘이 드는데 자녀마저도 부모 자기를 본받아 못된 짓을 하고 있다면 이게 부모로서 얼마나 큰 책임인가?
부모가 이걸 못 보면 그 다음 대(代)에, 또 그 다음 대(代)에 어떤 게 나올지 모른다. 도둑이 나올 런지 강도가 나올 런지 모른다. 부모는 그걸 미리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행여나 깨닫는 면에서 부모의 잘못된 언행심사가 자식들에게 내려갈까 봐 옳은 길로 인도해 달라고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고 자기가 바로 고쳐나가야 한다. 이런 부모라면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에 와서 ‘깨끗케 해 주십시오’ 했듯이 ‘부모 자기의 성격 성질도 깨끗케 해 주십시오’ 그게 들어간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를 개같이 취급했는데도 그 지혜로운 어머니는 그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다.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놓으니 그 성격 성질이 어떻겠구나’ 하는 이게 나오는 거다. 어머니가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나에게 뭐 해 준 게 있어. 시집갈 때 아무 것도 안 해 주고’ 한다. 그게 성령의 성질이냐? 흉악하구나.
늘 말씀드리지만 사람의 성격 성질을 바로 못 고치면 귀신이 그냥 타버린다. 그 흉악한 성격 성질에다 사건까지 몰아붙이면 미쳐버린다. 집 나가고 막 그런다. 그러면 부모는 그걸 보고 깨달아야 하겠는데 ‘나갈 테면 나가라’ 한다. 이건 막가파다. 집안에서부터 막가파가 나오는 거다.
이런 부모나 자식들일지라도 ‘우리 집 평안하고 천국처럼 됐으면’ 왜 안 그랬겠느냐? 그럼에도 막가파 집안이 된 것은 뭘 안 먹어서? 뭘 못 먹어서? 생명과를 안 먹어서 그렇다. 생명과를 먹으면 사람이 바로 된다. 사람이 바로 되게 하는 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을 먹는 거다. 이게 생명과를 먹는 거다.
안 믿는 남편이 있으면 믿는 아내가 생명과를 먹으면서 남편이 그 감화 감동을 받도록 아내 쪽에서 언행도 바로 들어가야 하고 살림도 잘 살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고 살림 살 줄도 모르고 백화점이나 돌아다니고 한다면 어떻게 살아.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41절): 예수님께서 손을 대신다는 게 무슨 의미냐? 예수님의 손은 어떤 손이냐? 예수님의 손은 능력의 손이라고만 알지 말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그 정신 사상이 그 속성이 건너가게 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 굳이 손을 안 대도 치료가 되는 거지만 굳이 손을 댄다는 것은 ‘나의 것이 너에게 건너가기를 원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교훈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들어가 들어있다면 예수님의 것이 자기에게로 흘러내려 가는 거다. 만일 이걸 막는 자가 있다면 남이 아닌 자기가 막는 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갈 때에 그 교훈을 통해서 너에게 성령님의 역사가, 주님의 역사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소원성이 들어있다. 참 종의 마음속에는 그런 소원이 들어있다. 내가 그걸 무시하면 주님의 것을 못 받는다. ‘목사가 설교를 잘 한다, 못한다’ 하는 것은 주님의 것을 이어받도록 연결시켜주는 이게 잘하는 거다.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42절): 예수님이 안수하시니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갔다. 그러면 그 문둥병이 어디로 갔을까? 문둥병이 걸린 사람 입장에서 보면 자기에게 있던 문둥병이 없어진 건데 왜 떠나갔다는 표현을 할까? 즉 다른 사람에게 이 문둥병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문둥병이 들리면 좋겠느냐? 고약한 마음이 들어가면 좋겠느냐? 성격 성질이 더러우면 좋겠느냐? 자기의 성격 성질이 더러우면 딴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문둥병이 들어온다.
자기가 성질을 부리면 뭐가 터지느냐? 자기 머리꼭대기에서 피가 터진다. 그래서 성격이 급한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듣기 싫다고 자기 속에서 부글부글하고 있으면 간 나빠지지, 눈 나빠지지, 그 다음에 얼굴 나빠지지, 그 다음에 화산이 터지려고 달아오른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어디서 나오느냐? 다 사람 속에서 나오는 거다.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43절, 44절): 자기의 추함을 인식하느냐? 성격이나 성질이나 모든 사고방식이 하나님 앞에 추함을 인식한다면 자기 스스로는 이걸 고칠 수 없음을 자인하고 주님께 고쳐달라고 해야 한다. 자기 성격 성질을 스스로는 못 고친다. 주님이라야 고친다.
자기가 문둥병자인 줄 안다면 낫기를 소원하는 것이 병자 된 사람의 마음이다. 자기가 병이 들면 낫고자 하는 게 병자들이 마음이다. 이 문둥병자는 자기의 고쳐짐을 예수님의 결정에 맡겼다.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니까 ‘원치 않다면 문둥병자 그대로 두시고,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문둥병자 자기도 깨끗케 되길 바라는 거지만 주님께 결정을 맡겼다. 예수님의 소원성도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기를 바라심이다. 여기서 ‘구원을 얻기를 바라심’은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구원을 얻는 거다. ‘지옥에서 천국’ 하는 건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주님처럼 온전케 되어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게 곧 구원이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한데 일반적인 성격 성질도 못 고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병든 것도 모른 채 자꾸 ‘먹을 것 달라, 돈 달라’ 하니 이게 병이고 죄다. 하나님 앞에 네가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하나님 앞에 너는 죄다. 그 성격 성질도 깨끗케 돼야 죄가 아닌데 꼬부라지고 갈고리처럼 돼 있으니 다른 사람도 해코자 하는 죄를 짓는 거는 당연히 나오는 거다. 죄를 짓는 것은 행동 이전에 마음 정신에서부터 벌써 나가는 거다.
생명과를 안 먹으면 그건 죄다. 죄를 남 욕하고 두들겨 패고 도둑질하고 사기 쳐 먹고 그렇게만 보지 말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네 마음으로 모르고 있는 게 죄다. 사람을 모르고 있는 게 죄다. 하나님 앞에 네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게 죄다. 이런 것이 죄인 줄을 모르면 하나님 앞에 ‘나 잘났소’ 하며 막 남을 판단한다.
‘헤아림이 바르게 된 사람은 받고, 헤아림이 없는 사람은 있는 것도 다 빼앗긴다.’ 그래서 우리가 ‘빼앗기느냐, 안 빼앗기느냐, 낫느냐 못 낫느냐’ 하는 것은 지금 이 시간에도 ‘문둥병이 뭐다’ 하고 하나님 앞에 헤아림이 바로 돼야 한다. 헤아림의 기준이 바로 돼야 한다. 생각하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없이 자기감정대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것은 ‘내가 너의 기준이다’ 그 말이다. 예수님이 네가 사람 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는 것이다. 기준 된 나(예수님)를 따라 오라는 것이다.
‘네가 살고자 하느냐?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하는 것은 ‘생명과를 먹어라. 예수님의 그 정신과 활동을 먹어라. 하늘의 것으로 먹어라. 그래야 네가 산다’ 하는 것이다.
다른 교회에서도 들어봤겠지만 우리교회에서 예수 믿는 거는 차원이 다른 거다. 이걸 바로 듣고 깨닫는다면 정말 총명한 사람이 된다.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참 슬기로운 사람이 된다.
문둥병자가 안수해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도 본문을 보고 주님의 마음 알 수 있는 거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길 원하는지 알 수 있는 거다.
어쨌든 문둥병자의 그 부르짖음에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손을 내밀어 그 몸에 대셨다. 문둥병자는 감각이 없고 힘줄이 오그라져 들어가고 고름이 막 나오고 진물이 철철 나고 뼈가 녹아 들어가고 괴물 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손을 댈까?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이 깨끗을 일반사람들의 병 낫고 깨끗한 그 생각만 갖지 말고, 그리고 사람 앞에 깨끗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깨끗함이다. 다시 새로 지음을 받는 깨끗함이다. 영적 면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눈에 합격되는 깨끗함이다. 정신이 거듭나고 마음이 거듭나고. 이렇게 되면 사람이 바로 된다.
‘깨끗함을 받으라’: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의 그 구원역사에, 하나님의 그 역사에 문둥병이 나았다. 하나님의 역사는 구원역사다. 그러면 뭘로 구원역사를 하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가지고 하신다. 사람이 온전케 되는 그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요 성령님의 역사다. 그 역사에 문둥병이 나았다. 자기 속의 성질적으로 문둥병, 감각적으로 문둥병이 그 역사로 낫게 되는 것이다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43절, 44절): 엄히 경계하는 것은 곧, 꾸짖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을 만큼 잘못된 것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그에게 단단히 경계시킨 것을 보면 그 때 문둥병자에게만이 아니라 나도 그 문둥병과 관계된 것이 아닐까 한다.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그러니까 네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의해 바로 하는 것부터 하라는 가르침이다. 즉, 네가 성격 성질 성분적으로 문둥병처럼 돼 있느냐? 그리고 그게 예수님으로 인해 나았느냐? 이제 고쳐졌느냐?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말씀에 의해 바로 하는 것부터 먼저 하라 그 말이다.
이걸 예를 들어 말하면 네가 교회 다니면서 병이 나았느냐? 그렇다면 네가 하나님 앞에 바로 순종하는 것부터 먼저 배워라. 그런데 요즘 보면 그러냐? 병이 나았다고 이 교회 저 교회에 돌아다니면서 간증을 한다. 얼마나 잘못 됐는지.
문둥병 유무의 진단은 제사장이 한다. 이게 깊은 뜻이 들어있는 건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그게 진단이 내려가는 거다. 말씀기준으로 내려가는 거다. 영적 면에서의 문둥병은 오직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진단하고 온전케 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온전과 완전의 기준이시다. 말씀의 이치가 ‘너는 문둥병이다. 아니다’ 하는 걸 진단하는 거다. 말씀의 이치가 ‘네가 바로 됐다. 비뚤어졌다’ 하는 거다.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하면 자기감정이 들어가고 기준이 자기가 된다.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를 고치실 때에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을 건강한 자라고 염두에 두면서 고쳐주시는 거냐? 쉽게 말하면 육체가 건강한 것을 보고 ‘너는 건강하다’ 하는 거냐?
병원의 의사가 병을 고쳐주고서 ‘이제 당신은 건강하게 됐다’ 하는 건 영적인 속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신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속사람을 보는 거다.
사람의 성격이나 성질, 또는 몸이 아픈 건 누구나 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영 중심으로 영적 면에서 이룰구원이 잘 돼가고 있다면 ‘참 잘 자라는구나’ 하는 거고, 그게 안 되고 있다면 비록 그 자가 육신은 건강하다 할지라도 ‘이게 병들었구나’ 하는 거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문둥병의 유무를 가리는 것을 들어서 인간의 영적인 병이 예수님의 기준에 의해 판단되고 구별되고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그림자다. 그러니까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당신 앞에 사람을 세우고 고치신 것은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행한 그 의식을 통해 그림자로 미리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이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든다면 그런 눈을 가져야 한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목사 자기가 못 고치더라도 병원으로 인도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목사 자기가 고친다고 하느냐? 뭘 어떻게 고칠 거냐? 영적 면에 병든 사람, 성격 성질이 더러운 사람에게 안수를 한다고 해서 그게 고쳐지는 거냐? 아니다. 그럴 것 같으면 무슨 성경이 필요하냐? 육신의 병을 안수해서 몇 명이나 고치는지 모르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육신의 병을 고쳤다면 고쳐진 그 사람이 성격 성질도 고쳐지느냐? 아니다. 영적 면은 따로 있다.
화가 나면 길을 가다가 발로 돌을 차고, 사람이 미우면 미운 사람의 정강이도 차고 하다가 발이 부러지거나 고장이 났다면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앞으로 발을 더 많이 써야 되겠다’ 그래야 하겠느냐, ‘앞으로 발 조심을 해야 되겠다’ 해야 하겠느냐? ‘발 조심을 해야 되겠다’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신 것은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인간을 치료하시는 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자이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거다. 너를 고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밖에 없다. 그 분의 교훈대로 순종하면 네가 고쳐진다. 그 분의 지식을 네가 받아들이고, 그 분의 도덕성을 속성을 네가 받아들이면 네가 고쳐진다. 사람 앞에 바로 하려면 예수님의 도덕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 앞에 잘못하는 것은 네 속에 주님의 도덕성이 없다는 증거다.
일반적으로도 타락된 세상이지만 자기에게 도덕성이 풍부하면 다른 사람에게 대함이 참 좋다. 연관관계성이 참 좋다. 그런데 믿는 우리는 먼저 자기가 하나님의 도덕성을 가진 후에 이 하나님 것을 가지고 인간에게 연관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에게 ‘종과 횡으로 행하라. 네 발이 닿는 곳은 전부 너에게 주마’ 한 그 축복이 너에게 있다. 그게 정복자의 축복이다.
사람을 정복하려면 지혜지식이 있어야 하고, 신적인 도덕성이 있어야 하고, 신적인 옳음이 들어있으면 사람이 정복이 된다. 대포나 총칼이 없이도 할 수 있다. 이게 살리는 정복이다. 멋있는 전쟁이다. 그래서 내 욕심은 우리교인 전부가 그런 정복자가 돼서 온 세계로 흩어졌으면 좋겠다.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은 많아도 그런 게 없다.
젊었을 때는 밥을 고봉밥으로 먹지만 나이가 들고 늘 책상 앞에 앉아있고 하니까 조금만 먹어도 배가 벙벙하다. 그러면 ‘아, 내가 요걸 먹으려고 세상에 태어났나?’ 그런 느낌이 자꾸 든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야, 먹고 사는 게 별 아니구나’ 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람이 만들어지는 건 참 어렵구나. ‘그냥 믿는다’ 그게 아니고 예수처럼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사람을 낚을 줄 아는 기술자라면 기술자, 그 업이란 다면 그 업, 그 전문. 지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없다.
만약에 인간들도 고칠 수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인간들처럼 똑같이 고치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는 게 특별한 건 아니다. 지금 소록도에 가면 인간들이 약을 가지고 문둥병을 정지시키게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침은 온전하게 고쳤다.
문둥병이 든 것을 고치는데 있어서 지금 의학적으로 새 살이 나오고 코가 생기고 하는 치료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수님 당신처럼 속사람을 속성적으로 최고의 고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건 주님밖에 없다. 참 멋있다.
성경말씀이 참말이냐? 그대로 되느냐? 믿어지느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저주 받고 타락된 인간들이 절대 할 수 없는 것을 이루려고 하늘로부터 오셨다. 이 일은 인간으로서는 안 된다. 하늘로부터 오신 당신이라야 되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이 15년 이상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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