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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2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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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21절-38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회당장의 어린 딸아이는 앞으로 살 날이 가까우냐, 죽을 날이 가까우냐? 살 날이 많으냐, 죽을 날이 많으냐? 앞길이 창창하다. 그러니까 죽으면 안 된다. 앞길이 창창하다는 이 말 속에는 희망 소망 행복 기쁨 즐거움 부요 등 좋은 것을 생각하면서 그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 죽으면 그게 다 죽는다. 살면 그거 다 가질 수가 있다.
열두 해를 앓는 혈루증 여자는 그동안 많은 의원을 찾아가서 유명하다 좋다 하는 약을 썼는데 다 허비가 돼버렸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손을 대니 낫게 되었다.
혈루증을 앓는 이 여자는 그 병이 낫기 전까지는 열두 해 동안 소비가 엄청났다. 먹고 마시고 돈 버는 걸 그냥 다 쏟아버렸다. 그러나 아무 효력이 없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사망계로 다 내려가 버렸다.
이 여자가 그대로 산다면 백 년을 천 년을 살아도 사는 것은 없고 다 죽어간다. 또한 어린아이도 예수님으로부터 살리움을 받지 못한다면 모든 소망과 행복은 다 죽는 거다. 그런데 여자는 사망으로 달아나던 모든 것이 예수님을 만짐으로 고침을 받아 앞으로 밥을 먹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건설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예수님으로부터 살리움을 받아서 미래적으로 창창한 그게 되어나가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에게는 희망 소망이 다 들어있는 건데 이걸 살려나갈 수 있는 것이고, 여자에게는 사망으로 나가던 것이 이제는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니 그 차이점이 조금 다르다.
여자가 12년 동안 쓴 게 얼마나 아까우냐? 누구를 못 만나서? 예수님을 못 만나서. 신앙사상적으로 표현을 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못 만나니 그 삶이 전부는 사망으로 나가는구나. 그리고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이 아이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알게 해 주었으면 믿게 해 주었으면 안 죽었을 텐데, 다시 말하면 앞으로 있는 희망이 죽지 않았을 텐데 아이 집에 예수가 없으니 그 아이의 그게 다 죽어버렸구나.
하지만 여자의 경우는 현재적으로 예수만 만났다면 과거가 안 죽을 것이고, 아이의 경우는 현재적으로 예수만 만나면 아이의 미래가 죽지 않는다. 그런 게 그 안에 들어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당시 예수님의 나이가 30대인데 ‘딸아’ 했으니 이 여자가 몇 살이나 됐을까? 일반적인 생각으로 몇 살을 더 먹었어야 ‘딸아’ 할 수 있느냐?
그런데 혈루증 든 여자가 예수님 못지않게 나이를 먹은 듯하다. 그럼에도 ‘딸아’ 하시는 것이 마치 아버지가 딸을 사랑스럽게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왜? ‘네가 참 좋은 믿음을 가졌구나’ 하신 점에서이다.
그러면 이 여자가 어떤 믿음을 가졌느냐? 예수님의 옷 가라도 만지면 살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옷 가에 능력이 있다가 아니라 그 여자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 이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선언을 해 주신다.
그러면 그의 그 믿음이 어떻게 생겨진 것이냐?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한다. 여자가 예수님께 병을 고치기 전에 이미 믿음을 가졌었다. 맹탕 불신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의 이룰구원 면에서 이치를 따져야 한다.
그러면 ‘네 믿음이’ 한 이 믿음이 신령한 내용성이 없는 땅의 것으로만 구하는 게 ‘너의 믿음’이냐? 아니다. 그런 믿음은 예수님이 선언을 안 해 주신다. 선언을 안 해 주시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는 채 자기 세상을 이루어 달라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거는 믿음이 아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느니 차라리 자기가 부지런한 게 더 솔직한 거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그 이전부터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듣고 천국에 관한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신령한 영적인 사람으로 살기를 원해서 영생의 생명운동을 하는 예수님과 애타게 교제하고 싶은 그 생명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예수님의 마음에 접촉이 되니 영적 사망계로 빠져나가는 그 사망성이 그쳐진 것이다.
여자가 병이 나은 것을 자꾸 육신의 병만을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충성봉사를 하면서 문제는 육의 생각을 가지고 하면 그의 모든 수고와 공력은 사망계로 심판계로 다 들어간다. 이룰구원에 생명적으로 올라올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혈루증은 병원에 가면 웬만하면 낫게 할 수 있다. 성경은 그걸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최첨단 병원에 가도 못 낫는 거, 즉 영적인 면에 관한 병은 인간병원에서 안 되는 거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원형이신 우리 주님이 오셔서 당신처럼 고쳐놓아야 만이 되는 것이다. 병원의 의사라도 건강한 사람의 원형을 모르면 이 병은 못 고친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은 ‘절대’라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수로 많이 나으니까 그걸 알아주는 거지 사람마다 육신의 모든 재질이 육질이 차이가 있고, 피 맛도 다 차이가 있고, 피 붉은 색이라도 다 차이가 있고, 피부의 감각도 다 차이가 있다. 인간은 아무리 능통해도 이걸 다 통달할 수는 없는 거다.
그리고 사람이 마음 때문에 육신에 병이 생겼다고 하면 그 육신의 병을 고칠 수는 있어도 그 마음을 낫게 할 수 있느냐? 안 된다. 마음은 못 고친다. 기껏 하는 소리는 ‘좋은 마음을 가져라’ 그 말을 할뿐이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여자는 사망적으로 되어 들어가던 길이 이제는 영원한 생명의 삶의 길이, 앞으로 가는 길이, 이룰구원으로 가는 길이 평안히 가는 길이 됐다.
그런데 만일 이 여자가 잘못 찾아가서, 잘못 믿어서 만일 바리새교인들에게 찾아갔더라면 그들이 그걸 고쳐주겠느냐? 율법이 고쳐주겠느냐? 그건 안 되는 거다. 지적은 해 줄 수 있어도 고치지는 못한다. 고치시는 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이 성령님의 역사로 고치신다. 즉 예수님과 의사적으로 대립이나 마찰이나 충돌이 없는 의사단일성이 곧 하나님과 화평이요 평화요 화목이요 축복된 삶이 되는 거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너는 평안히 가라.’ 그러니까 이렇게 되려면 표현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첫째로 진리를 붙잡는 거. 그리고 붙잡고 가만있지 말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즉 자기를 진리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 주님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이렇게 만들면 자기 속의 성격 성질 등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모든 것이 다 잡힌다. 고쳐진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경험자들은 알 것이다. 손뼉이나 치고 북치고 장구 치고 꽥꽥거리는 그런 데 가면 뭐가 있는 것 같아도 사람이 그런 분위기 속에 살게 되면 항상 그 모양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면 어디 가서도 지긋이 앉아있지도 못한다.
진리의 자리는 그곳에서 처음 말씀을 들을 때는 만고 싱겁고 귀에 안 들어오지만 계속 듣다보면 서서히 진리정신에 젖어들면서 사람이 차분해지고 안정되게 놓여진다. 모든 정신 사상 소원 목적 이해타산 평가성이 마치 깊은 물과 같아서 차분히 안정이 된다.
강이 깊으면 물이 흐르는 걸 잘 모른다. 그러나 얕은 물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고 빨리 흐르는 것으로 보인다. 얕은 물은 모래도 끌고 흘러가지 못한다. 그러나 큰 강물은 물이 깊고 압력이 세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서서히 흐르는 것 같지만 속에서는 큰 돌을 굴려서 흘러간다. 이런 물에 사람이 들어가면 막 떠내려간다. 이치가 그렇다. 진리를 많이 듣다보면 사람이 차분히 놓여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그런 면에서 고쳐진다는 말이다.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는 것은 이제는 사망계로 빠져나가는 것은 없고 영적 생명적 영인성장 면에서, 믿음생활 면에서 건강하게 되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병을 볼 때 육신의 병만 보지 말라. 사람의 정신 사상 면의 병도 있고 영적 면의 병도 있다. 우리는 영적 면의 병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육신적으로 아무리 건강해도 정신 사상에 병이 들면 육신의 병은 시간문제다.
우리가 자기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려는 것도 영적 면에서 은혜를 받기 위함이고, 또한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뜻을 행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영생의 주님을 믿으면서 자기의 삶 중에 사망계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이느냐? 느낄 수 있겠느냐? 하루든 일 년 열두 달이던 사망계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이느냐? 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그걸 느낄 수 있겠느냐?
병이 나은 이 여자를 그냥 육신의 눈으로만 보면 육신의 병을 고치러 주님께 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자가 자기의 혈루증을 영적으로 돌려놓고 보면서 자기의 모든 삶이 사망계로 빠져나가는 이것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이 여자의 육신의 병은 보면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거다. 영적으로는 몰라도 그 육신의 병은 아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현재 예수 믿는 나에게 그 육신의 병을 갖고 와서 내가 성도로서 먹고 마시고 활동하고 모든 노력과 충성봉사와 모든 투자성이 사망계로 빠져나가는 게 없는 건지? 한 마디로 자기가 수 년 동안 예수를 믿었으면서 예수님으로 성품화 된 게 없다면 이건 사망계로 빠져나간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만일 생명계로 영생계로 됐다면 예수님의 성품이 자기 것이 되는 거고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돼 나오는 건데 그게 없다면 이게 뭐냐? 예수 믿는 건 수입이 있어야 한다. 예수 믿는 효력이 나와야 한다. 예수 믿는 자기는 그걸 보고 가야 한다.
일반적으로도 수입 없는 노력은 안 된다. 왜 안 되는 거냐? 구원 얻은 나의 이 몸이 누구의 몸이냐? 내 삶이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거냐? 영생적으로 소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할 나의 몸인데 일반적으로도 아무 소득도 없고, 내 것을 갖다가 맨날 남에게 퍼주기만 하면 이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상대가 하나님 앞에 더 악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좋은 사람이다’ 할런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삶을 가르쳐 주기 못했기 때문에 그런 방편을 쓰면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에서 사람들이 더 악화가 된다.
예수님은 네가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참 사람으로 사는 것을 원하신다. 그래서 너의 삶 전부가 영생으로 들어가길 원하신다. 부활의 능력으로 실력자로 나올 수 있는 그 삶을 예수님은 원하신다.
우리 모두는 자기가 자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 사망계로 다 흘러가 버렸구나’ 한다면 예수 믿고서 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다. 학교에 돈을 갖다 주고 공부를 했다면 남는 것은 공부해서 아는 게 남아야 한다. 그게 없다면 왜 돈을 갖다 주고 왜 시간을 보내고 그러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을 생명적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소원한다면 예수님께서 ‘그것이 바른 믿음이다’ 하고 인정해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네가 그런 믿음을 가졌느냐? 그 다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예수를 만나서 고쳐졌으니 네가 네 믿음으로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게 있어야 너의 앞으로의 전 생애가 구원함을 받게 된다. 그게 있어야 너의 앞으로의 전 삶의 생애가 예수님으로 차여진다. 사망계로 안 빠져나가고 생명적으로 차여서 올라간다. 너의 전 생애가 구원으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곡식이라고 할 때는 자라나면서 익어지는 것까지 다 포함이 돼야 진정한 의미의 곡식이지 자라나다가 열매가 완전히 여물지 않고 있다면 곡식은 곡식인데 진정한 의미에서 곡식의 값어치가 없는 것과 같다.
생명권과 사망권을 대조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생명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면 자기의 영생이 되고 생명이 된다. 그러나 선악과인 자기 주관성을 가지고 세상기준 물질기준을 먹으면 이거는 사망이요 자기의 슬픔이요 고통이다. ‘아니라’ 하는 그건 없는 거다. 선악과를 먹으면 안 죽는 사람은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우리 인간을 당신처럼 안 죽는 생명을 가지고 신령천국에서 영원히 살 자로 만들었다. 그러니 우리는 생명과를 먹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곡식처럼 잘 여물어지고 자기 것으로 된다는 이 구원은 모른 채 ‘예수 믿어 충성봉사 하면 천국에 가서 큰 상을 받는다’라고만 알고 있으면 그 사고방식이 자기의 현재를 다 놓쳐버리게 된다. 그 사고방식이 사망계로 다 흘려 내어버리는 사고방식이다.
진리본질의 교훈을 먹으면 영생이요 생명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세상 소원 목적을 가르치면 이건 하나님의 진노요 형벌이요 멸망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가지면 그 사람은 구원을 잘 이룬 사람이고, 세상에 속한 것을 잔뜩 이뤄놓고 그 자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불속에서 타버릴 사람이다. 불타질 것을 많이 장만해 놓고 그것을 자랑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탈 때 그 사람도 같이 타는 거다. 탄다고 하는 이 말이 지옥 간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적인 신앙은 종교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은 천국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인데, 이런 신앙사상은, 그 가르침에는 이룰구원이 없으니 이거는 저주의 복음이다.
35절: 예수님께서 고침을 받은 혈루증 들었던 여인과 말을 할 때 회당장의 집에서 온 소식이 아이가 죽었다고 했는데 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 소식이 까무러칠 정도로 얼마나 실망스런 말이었겠느냐?
아이가 죽었다고 그랬을 때에 아이의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누가 미울까? 혈루증 든 여인이 미울까, 예수님이 미울까? 다 미울까? 그러면 여자가 병이 나으려고 빨리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할 때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예수님께 손을 댈 수가 없었는데 그 때 이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미울까?
어쨌든 예수님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맥이 빠져 주저앉아 있는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신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할 때 회당장이 예수님의 그 말이 믿어졌을까? 만일 ‘이미 죽었다고 하는데’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반신반의한다면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내실까? 그래도 예수님이 살려내실까?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는 다 끝났다’ 하고 포기상태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가만히 보니까 회당장이 안 믿는 것 같아서 예수님이 속으로 ‘내 말을 믿지도 않을 텐데 내가 왜 살려주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실까?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 아신다. 그래서 회당장의 마음을 아시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신 것이다.
집에서 소식을 들고 온 사람이 ‘아이가 죽었으니 선생을 더 괴롭게 마옵소서’ 라고 한 것은 예수님을 생각해서 한 말이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이 된 셈이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해서 무시한다는 그 말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를 보고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했는데 집에서 온 사람의 말이 ‘아이가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라고 했으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자시요 죽은 사람도 살리는 분이시니 그 말을 한 사람은 예수님을 무시한 말이 돼버린 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사실대로의 말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보시는 눈은 그런 것이 아니다. 죽음 저 너머의 결과를 놓고 일을 하는 분이시다. 누가 이것을 알까?
아이가 죽었다고 하고,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보고 믿기만 하라고 하고. 사람들은 누구의 말을 받아들일까? 누구의 말을 더 믿을까?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 왜 다른 제자들은 물리치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갔을까? 우리들도 어디를 갈 때에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고 데리고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실까?
사람이 여럿이 모이면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다. 다른 사람 말도 들어보고 생각도 해보고 조언이 들어가야 하는 건데 다른 사람의 말을 막고 제 말만 계속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으냐? 예수님께서도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도 있고 안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눈에 보이게 육신으로 오셔서 ‘너 나 따라갈래?’ 하면 가겠다고 하겠느냐, 안 가겠다고 하겠느냐? ‘난 안 갑니다’ 하면 예수님은 ‘그래, 그럼 나 혼자 갔다 오마’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자고 하시는 곳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인데 예수님께서 안 데리고 가면 ‘아, 왜 안 데리고 가십니까’ 할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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