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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7: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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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에배 |
7장 5절-16절: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5절: 장로들의 유전이란 인간들이 교회에서 기준을 만들어 전승되어 오는 것인데 이런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기준은 아니다. 교회 단체들이 모여서 아무리 그런 것을 정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은 될 수가 없다.
인간들의 유전이 기준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은 뒷전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라면 세상 끝까지 가는 거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은 상황 따라 바뀌는 것이니 바뀌는 이걸 절대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
그런데 교회에서 다 같이 신앙의 유익, 이룰구원에 유익이 된다면 그걸 같이 따르는 게 좋은데 하지만 그게 그만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룰구원을 위해 다 같이 시간을 지키고 다 같이 행동을 할 때는 은혜를 받는 거다.
6절-9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말로는 뭘 못하겠느냐? 말만 하고 속은 딴 데 있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간사성이다. 입술로는 성경을 말하고 마음과 정신은 세상 인간의 것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간사성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왜 모르느냐? 성경을 들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들고 말을 한다면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기준을 따르게 되고 나오게 되는 건데 성경을 보고 세상 것에 대한 것을 자꾸 자랑하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간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마귀가 이 말을 바꿔서 인간에게 집어넣는 것과 같다. 아주 간사한 마귀적이다.
지금도 목사가 세상 인간의 것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니 교인들이 그게 신앙인 줄만 알지 마귀의 수법인 줄을 모르고 있다. 서울에서 크다고 하는 교회가 거의가 그러고 있다. 그걸 교인들이 모른다.
교회가 규모적으로 크고 유형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고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본질에 입각해서 진리이치를 알고 확장이 된 거냐, 아니면 그게 없이 확장이 된 거냐? 하나님의 본질로 된 것이 아니라면 질이 달라져 버린다. 하나님의 뜻은 내버리고 성경을 갖다가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 이루게 하니 세상성적 신앙이 가득 차게 된다. 그러면 교회가 마귀 집이 된다. 그러면 그런 교인들이 진리이치를 아느냐? 전혀 모른다.
세상에 속한 것에다가 성경구절을 쓰게 되면 종교적인 행위와 종교적인 활동이 나오게 된다. 이 위주와 목적으로 나가는 것이 외식이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그 지식은 선악과 먹은 지식이니 이는 지식이 안 바뀐 것이다. 그러니 외식이 돼버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사람이 안 바뀌면 외식신앙이 된다. 그러면 뭐가 외식이냐? 속이 바꿔지지 않고 집사 장로 목사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입장에서 너는 자칭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아이고, 집사님 장로님 목사님’ 한다. 이건 속이 바꿔졌는지 안 바꿔졌는지 전혀 모르는 거다,
속이 바뀌고 안 바뀌고는 어떻게 아느냐? 그거는 본인들이 입을 열어서 기도로 설교로 표명을 하게 된다. 세상과 세상의 것을 구하는 그 위주로 그 기준으로 무게중심을 놓고 말하는 것은 바꾸어지지 사람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신앙인 것처럼 자꾸 말을 하니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간사한 자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것을 바꿔치는 건 아주 간사한 사람이다. 이런 자들은 교인들의 마음과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좋도록만 하는 거다. 이게 전부는 영적인 면에서 사기꾼이요 강도요, 양의 문으로 온 게 아니라 담 넘어 온 도둑들이다.
임시의 것을 주장하고 임시의 것을 주면 자동적으로 ‘열심 충성봉사 하면 하나님 앞에 상급을 많이 받는다’ 하게 된다. 이치가 그렇게 돌아간다. 아니다가 아니다.
이려면 결국은 외식이 되는데 왜 이렇게 될까? 이는 성경 문자 속에 들어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이룰구원의 은밀한 계시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것도 저주다. 훼방은 중상모략이요, 악하게 하는 말이고, 거역하고 대드는 말이요, 악담하는 말이다. 부모를 원망이나 무시하게 되면 부모를 훼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를 죽이기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축복이 된 말씀이 그 가정의 부모로부터 계대적으로 내려가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신 말씀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이방 불신세상의 도덕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정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육신의 부모는 자식을 출생케 해 주시고 양육케 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식들에게 전할 수 있는 수종자들이다. 이런 부모를 자식이 공경할 줄을 모른다면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런데 만일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인간적인 생각대로만 키운다면 그 자녀는 세상의 노예요 세상의 제물이 되게 된다. 제물이란 우상 앞에 놓여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세상 보기에 세상이 좋아하는 그 면에 바쳐진 제물이란 말이다. 이게 우상 앞에 놓여진 제물이다. 사상이 그렇다.
이 말은 세상일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소원과 목적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공부하고 다 하는 거지만 자기의 사는 궁극목적을 구원에 두고 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일생이 먹고 마시고 투자하고 활동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인 구원을 위해서 들어가야 한다. 이건 하나님 앞에 제물이다.
제물이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놓여지는 것은 깨끗하고 거룩한 것이 놓여지는 것이니 앞에서 말한 바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사는 삶인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늘 자기를 돌아보고 그렇게 산다면 그건 하나님 앞에 제물이다.
이렇게 된 제물은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한 것으로 들어가 있다. 그런데 세상 것으로 제물이 들어가면 그건 제 멋대로 사는 사람이니 이렇게 사는 사람은 전부가 세상의 제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건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세상에 절여져 있기 때문에 혹시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인간 자기를 만들었느냐?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 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면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야 한다. 세상이 교회를 만들었느냐? 아니다. 주님이 만들었다. 그러면 주님에 의해서 교회가 살아야 한다.
주님이 나를 진리와 성령의 감화로 태어나게 하셨고, 그런 나를 영적 면에서 교훈하는 양육자가 있다. 이건 영적 면에서의 부모이다. 이들은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수종자들이요 영적 말씀의 스승들이다. 이 영적 양육자를 여러 가지 말이나 행동으로 무시하고 훼방을 했다면 하나님의 형벌이나 저주를 받게 된다.
모든 좋은 은혜는 위로부터 온다. 가정으로 말하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또 그 자녀가 부모가 되면 받은 것으로 또 내려가고. 교훈도 그렇게 내려간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못 주거나 안 주거나 하면 하나님 앞에 저주의 가정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건 자동적이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세상교육을 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놓여지는 인간창조의 궁극적 목적의 교육이 들어가야 하는데 예수를 믿는 부모인데도 위의 부모로부터 이 교육을 못 받아서 모르니 자식들에게 최소한 먹이고 입히고 학교나 보내는 그 정도다. 그러니 이런 교육으로는 인격적 실상적인 면에서 사람이 안 된다. 맨 세상적이다.
자라는 아이들도 여기저기서 세상의 이것저것을 많이 배워서 그것이 지식화 되니 이게 사람이냐? 그렇게 자란 자식이 또 어른이 되면 자식을 또 그렇게 키울 테니 이건 저주를 받아서 저주가 아니라 그게 바로 저주의 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노아를 볼 때 이 노아가 영적 부모이면서 육적인 부모이기도 한데,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가르침이 내려갔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육적인 부모는 시간이 지나면 그 존재는 없어지지만 그러나 살아생전에 부모가 말씀으로 자녀들을 잘 가르쳐 놓으면 부모가 죽어도 그 말씀이 살아서 역사되어서 복된 가정이 된다.
10절-13절: 고르반 사상이 무엇이냐? 부모에게 드리면 부모에게 유익이 되는 건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부모에게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사상이다.
땅에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그런데 실천 없는 부모공경, 실천 없는 자식사랑은 창조의 목적에 맞는 구원의 교육의 흐름이 끊어져 있는 것이다. 영적 면에서의 정신 사상이 내려가지 않는 교육이라면 구원의 교육은 끊어진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예수를 믿어도 구원이 없는 가정이 있다. 구원의 계대가 끊어진 가정이 많다. 내가 볼 때 더욱 고약하게 느껴지는 게 어느 목사님이 뒤늦게 이 진리를 알았는데, 그러면 자녀들로 하여금 정신 사상이 복된 약속이 있는 신앙의 길로 내려가게 해야 하는데 자녀들은 딴 교회에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룰구원이 없는 세상에 속한 교회, 다른 말로는 거짓교회 마귀적인 교회, 그 교회를 이단이라고 손가락질은 안 하나 그 신앙의 성질이 이단성의 교회로 나가고 있다.
그 목사님이 이 진리를 받으면 그게 다 판단이 되고 분간이 될 텐데 그걸 그대로 두고 있다. 이건 끊어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식을 세상에 팔고, 종교적 세상에 제물로 드린 것이다.
그런 곳에서 충성봉사 하는 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곳에서 충성봉사 하는 건,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정신 사상을 가지고 넓은 길 세상 길 멸망의 길로 예수를 믿는 거기서 충성봉사를 하는 건 하나님의 심판은 빤한 거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식들이 부모공경을 잘 하느냐? 그것도 아니더라. 물질 이해타산이 많이 걸려있다. 그건 잘못된 것이다.
이 진리 따르면서 딴 교회에 다니며 충성봉사 하는 목사님이라면 나는 아주 싫다.
어느 교회에 다니던 생명 길 좁은 길은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성이다. 그게 좁은 길이다. 이걸 왜 좁은 길이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그 길로만 가기 때문에 좁은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런 교회도 많지 않다. 거의가 보면 세상 종교적이다.
예수를 믿어도 각자 자기 소원 목적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은 없기 때문에 그건 신앙사상 면에서 넓은 길이다. 창조의 목적에서 보면 그건 구원교육의 흐름이 끊어져 있는 거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존재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인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게 없이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출생과 존재의 목적이 없이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구약 때도 보면 그게 없이 사는 자들에게 선지자가 하나님의 재앙을 말하는 거다. 그게 재앙의 길이다. 그런데 그걸 모른다. 그게 실감이 안 난다.
13절: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말씀을 폐하는 일들이 많다.’ 선악과 먹고 나온 인간들의 유전에서 나온 것은, 첫째는 제사나 추도식, 풍습 습관, 결혼식 때 신혼여행, 결혼 때 폐백 하는 것, 장례식 등 유전되어 나온 게 참 많다. 그런데 그 유전성을 보면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데서 나온 그런 정신이 들어있는 게 많다. 고쳐야 한다.
오늘날 보면 정치인들이 단초롭게 어디서 결혼한 걸 자랑스럽게 떠드는데 그게 좁은 길이냐? 아니다. 기독교인들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결혼을 하면 믿음으로 잘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부부가 되는 거기서부터 새로운 인생의 출발인데 내가 보면 인생출발의 사고방식부터가 잘못된 경우가 많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서부터 그 정신 사상이 하나님 앞에 놓여져야 하는 건데 교회 안에서 검소하게 결혼식을 하면서도 그 사람들의 속은 세상에서 먹고 누리려는 정신이 들어서 결혼을 하는 것인데도 그게 그만 세상인 줄을 모른다.
어른들부터 잘못 교육이 돼서 잘못 내려가고 있는 것을 느껴야 할 텐데 그런 걸 크게 못 느끼고 있다. 먹고 마시고 사니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의식을 못한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식순이 왜 그리 많으냐? 식순이 진리냐? 예배의 식순은 그 때 그 때마다 상황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는 것이다. 그것도 또 교회마다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못을 박아놓고 자기들처럼 하지 않는 교회를 이단시하는 것은 잘못된 기준들이다.
14절-16절: 예수님의 말씀은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내용과는 그 뜻이 근본적으로 전혀 다르다. 세상 사람들의 말은 전부는 임시성적인 말이요, 시간 따라 변하는 말이요, 사람도 바뀌고 사건도 자니가고 상황도 바뀌는 전부는 생활적인 말이요 전부는 남의 말이다.
이런 모든 것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내가 그런 것들과 관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고, 일부러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안 가질 수도 있는 것인데 이런 것을 내가 갖건 못 갖건 전부는 다 지나간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전부는 인간창조의 목적에 맞는, 영원 궁극적 구원도리에 맞는 말씀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했다면 그 사람은 지나갔어도 지나가는 그 사람에게 영원 궁극적 구원이 들어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인간 대부분을 보면 지나가는 일상생활에 맞는 말뿐이지 영원 궁극적 목적에 맞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15절-16절: 본문은 단순이 음식을 먹고 뒷간으로 나가는 것이 더럽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신적 도덕성이 아닌 비 신적 도덕성을 말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고 뒤로 나오는 것은 육신의 건강에 관한 신체 생리적 신진대사적 현상이다. 예수님도 신체를 가졌으니 음식을 잡수신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은 선악과 먹고 나온 것이라서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하도록 사람을 불결하게 더럽게 속되게 만드는 것이다.
선악과 먹고 나온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에게 교훈을 하는 것은 다 임시성에 속한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먹고 영원 궁극적 구원을 염두에 두고 방편을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임시적인 것에 목적이 돼서 그게 안 되면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원수를 삼는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의 속성은 전부는 거룩하다. 사랑도 거룩하고 선도 거룩하고 모두는 다 신령한 것이고 거룩하다. 인간이 그 성품을 입으면 그 사람은 구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된다고 하는 건 구원이 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깊은 뜻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니 이 거룩한 것을 듣고 배우고 깨닫고 내 것으로 만들어 가야 구원이다. 교회에서 그러지를 않고 여전히 이방인들이 구하고 있는 것을 가르치고 구하고 있다면 이는 교인들을 세상과 똑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니 더럽고 속된 것이 된다.
세상에서 예의범절이 좋고 도덕성이 좋고 고상하고 해도 그거는 선악과 먹고 죽은 것에서 나온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속되고 더러운 것이다. 사람이 이걸 기준으로 하면 힘들어서 못 산다. 그래서 그 짐을 덜어주려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이다. 예수를 믿고 부요든 가난이던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깨닫고 자기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으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이다. 이게 얼마나 좋으냐?
선악과를 먹은 자는 저주받고 타락되었음으로 더러운 것 속된 것으로 잔뜩 들어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박이 겉은 멀쩡한데 속이 썩은 호박이 있는 것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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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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